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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7-01)


고난을 통해 드러나는 신앙

욥기 27장 1-23절


성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는 사람이나 별 생각 없이 교회에만 출석하는 사람이나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차이가 나타나는 시간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 시간은 바로, 고난의 시간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성도가 평소에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았는지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 욥의 발언이 계속됩니다. 27장의 대부분을 소발에게 할당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소발의 말이 7절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8절이나 혹은 13절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견해들도 있습니다. 이런 재구성들은 27장의 내용에 대한 학자들 각자의 개인적 견해에 따라 다릅니다. 최종 형태를 고수한다면, 27장이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와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관건입니다.

 

욥의 무죄 주장(1-10)

27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앞부분과 악인이 당하는 운명을 논하는 뒷부분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전반부를 1-6절까지로 볼 수도 있고, 1-7절까지로, 혹은 1-12절까지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1-10절을 하나의 단위로 볼 것입니다. 그 이유는 11절부터 상대를 지칭할 때 단수(‘너’)에서 복수(‘너희’)로 바뀌며, “하나님의 솜씨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운행 법칙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7-10절 혹은 8-10절은 악인에 대한 일반론이 아니라, 욥 자신의 무죄 주장의 연속으로서, 욥 자신은 “악인”이나 “불의한 자”, “불경건한 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1욥이 또 풍자하여 이르되 2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3(나의 호흡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에 있느니라) 4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리라 5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6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 7나의 원수는 악인 같이 되고 일어나 나를 치는 자는 불의한 자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8불경건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거두실 때에는 무슨 희망이 있으랴 9환난이 그에게 닥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10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부르짖겠느냐(1-10)

 

27장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새로운 도입구로 시작합니다. ‘마샬’을 개역개정처럼 “풍자”로 이해하면 친구들의 말에 대한 반박과 역공이라는 해석 틀로 27장을 이해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 단어가 ‘잠언’으로 번역되는 점에 주목한다면, 마샬이라는 표현은 27장이 왜 규범적 지혜의 언어를 구사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합니다. 특히 8-10절과 13-23절은 친구들의 말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규범적 지혜에 속한 어휘와 신학적 주제가 표현됩니다. 이 구절들을 욥에게 할당하는 정경의 전승을 존중할 때, 이 구절이 친구들의 말을 빌려서 친구들을 공격하는 “풍자”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동일한 어휘나 유사한 주제라 할지라도 어떤 문맥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변함없이 고수합니다. 무죄를 주장하는 표현들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불의한 거짓을 말한 적이 없으며 사실이 아닌 것을 입 밖에 낸 적이 없습니다(4). 4절의 개역개정이 “말하지 아니하리라”라는 번역으로 미래의 의지라는 뉘앙스로 번역했으나, 반드시 미래에 한정해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난날들과 지금 현재, 앞으로의 날들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봐야 하는 이유는 첫째, 문법적으로 설명하면, 히브리어 동사에는 시제(tense) 개념이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완료와 미완료로 양분되는 히브리어의 동사 시스템은 완료동사와 미완료동사 모두 과거, 현재, 미래에 다 사용됩니다. 참고로,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 사람의 사고 속에 시제 개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동사를 통해 시제를 표현하지 않을 뿐, 부사나 전치사구, 접속사 등을 비롯한 다른 품사나 표현들로 시제 개념을 나타냅니다. 둘째, ‘맹세와 서약 구문’(2)이 꼭 미래의 약속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이’로 시작하는 ‘맹세와 서약 구문’은 그 이름 때문에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됩니다. 그러나 이 구문은 다음에 이어질 것이 확실한 사실임을 서약하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왔다는 것도 또한 확실한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욥은 자신을 정죄하는 친구들의 주장을 죽을 때까지 인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결코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따라 살아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마음이 없고, 지금과 같은 깊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온전함”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5).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부정하고 정죄하는 친구들이 오히려 “악인”이며 “불의한 자”이고(7),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불경건한 자”)라고 “풍자”합니다. 친구들이 즐겨 사용하는 규범적 지혜의 언어로 친구들을 공격하는 수사법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친구들이 말한 ‘악인의 결말’을 그대로 친구들에게 되돌려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들은 욥처럼 죽을 만큼의 고통이 찾아와도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8). 왜냐하면 그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9). 이 구절은 엘리바스(욥15:34), 빌닷(8:13), 소발(20:5)의 말과 궤를 같이 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기뻐하겠느냐”)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10). 이러한 악인에 대한 규범적 지혜의 정의는 욥 자신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욥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달라고 외치며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소망하는데(13:3,22; 14:15; 16:20,21; 23:3-6), 악인이라면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호소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께 호소하는 욥 자신은 악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친구들의 말과 유사한 규범적 지혜의 언어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함과 동시에 자신을 정죄하는 친구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친구들의 말은 한 번도 하나님을 향한 적이 없습니다.

 

악인의 결말(11-23)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고난과 심판의 시간에 하나님을 더욱 알아 가려고 애쓰고, 주님 안에서 교제하는 이들과 함께 그분의 영광을 사모했으면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안다는 것은 단지 지식의 차이가 아닌 삶과 죽음의 차이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11하나님의 솜씨를 내가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요 전능자에게 있는 것을 내가 숨기지 아니하리라 12너희가 다 이것을 보았거늘 어찌하여 그토록 무익한 사람이 되었는고 13악인이 하나님께 얻을 분깃, 포악자가 전능자에게서 받을 산업은 이것이라 14그의 자손은 번성하여도 칼을 위함이요 그의 후손은 음식물로 배부르지 못할 것이며 15그 남은 자들은 죽음의 병이 돌 때에 묻히리니 그들의 과부들이 울지 못할 것이며 16그가 비록 은을 티끌 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 같이 준비할지라도 17그가 준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의 은은 죄 없는 자가 차지할 것이며 18그가 지은 집은 좀의 집 같고 파수꾼의 초막 같을 것이며 19부자로 누우려니와 다시는 그렇지 못할 것이요 눈을 뜬즉 아무것도 없으리라 20두려움이 물 같이 그에게 닥칠 것이요 폭풍이 밤에 그를 앗아갈 것이며 21동풍이 그를 들어올리리니 그는 사라질 것이며 그의 처소에서 그를 몰아내리라 22하나님은 그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던져 버릴 것이니 그의 손에서 도망치려고 힘쓰리라 23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며 손뼉치고 그의 처소에서 그를 비웃으리라(11-23)

 

이제 욥은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운행 법칙(“하나님의 솜씨”)을 숨김없이 가르치고자 합니다(11). 앞으로 펼쳐질 내용은 친구들이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다 알고 경험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경험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이해하지 못합니다(12). “어찌하여 그토록 무익한 사람이 되었는고”에는 안개나 입김, 수증기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들을 의미하는 ‘헤벨’이 동사와 동족목적어로 나타납니다. 직역하면 ‘너희들은 왜 이것을 안개/수증기로 여기는가?’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욥이 정의하는 악인의 운명은 이것입니다: 우선 “악인”의 평행어는 ‘아리찜’, 즉 ‘폭력을 행사하는 자’입니다(13). 이 단어는 마음(내면)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상호 간에 실제 폭력을 행사하는 자를 일컫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언어 폭력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폭력적인 인간들과 그들의 후손이 하나님께 받을 것은 죽음과 배고픔입니다(14). 그들 중 일부가 죽음(“칼”)에서 용케 살아남았다 해도 병들어 죽게 될 것이며, 장례식에서 그들의 아내는 죽은 남편을 위해 울지 않을 것입니다(15). 악인이 비록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입을 옷들을 겹겹이 늘어놓아도(16), 그의 의복은 의로운 자들이 입게 될 것이고 죄 없는 자가 그의 재물을 나눠 가질 것입니다(17). 악인이 지은 집은 마치 새집이나 거미줄로 된 집처럼 임시로 지은 막사나 움막에 불과합니다(18). 부유한 채로 잠자리에 들지만 자고 일어나면 그는 더 이상 부자가 아닙니다. 그의 재물은 하룻밤 사이에도 없어질 수 있습니다(19).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재물을 잃을 두려움이 매일 밤 악인을 홍수처럼 덮칠 것이며(20), 한줄기 바람에도 그의 집과 그 자신마저 날아가 사라질 것입니다(21). 22절과 23절의 3인칭 남성 단수 주어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21절의 동풍일 수도 있고, 비인칭주어로서 불특정한 다수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22절의 주어는 “하나님”으로 보고, 23절의 (동일한 3인칭 단수) 주어는 “사람들”로 해석했습니다. 그보다는 22절과 23절의 주어를 둘 다 ‘하나님’으로 일치시키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아낌없이 “동풍” 혹은 “화살을 쏘아 보내시면 악인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도망쳐야 합니다(22). 그래 봤자 하나님 손바닥 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처소인 하늘에서 도망치려는 악인을 보고 박장대소하십니다(23). 이러한 악인의 결말은 친구들의 설명과 유사합니다(15:28-35; 20:4-29 등). 그러나 세밀한 차이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손의 많음(14)은 규범적 지혜에서 의인/지혜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욥은 악인에게도 자손이 많을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둘째, ‘칼에서 살아남는 것’도 의인/지혜자의 ‘분깃’입니다. 그러나 욥은 악인이 칼에서 살아남을 가능성도 염두에 둡니다. 셋째, 재물 역시 의인에게 할당된 복입니다. 그러나 욥은 악인이 재물이 많을 수 있다고 합니다. 돈이 산더미처럼 많고 입을 옷이 즐비한 부자를 악인과 연결시키는 것은 반성적 지혜에 속해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믿음의 선진들은 큰 어려움이나 가난, 고통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며 당당한 모습을 유지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십자가라는 가장 비참한 자리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신앙 훈련을 이어 나간다면 당당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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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5-01)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욥기 25장 1절-26장 14절


 

하나님께서 창조 이후에는 세상에 간섭하지 않으시고, 세상은 자연의 이치대로 움직인다는 이신론 사상이 있습니다. 이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관념에 갇혀 있는 추상적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만물의 주권자임을 말합니다.

 

  • 25장과 26장을 비교해서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얼핏 보기에 하나의 이야기 (26:1-5을 제외하고)로 묶는 것도 가능할 만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25장을 빌닷의 말로, 26장을 욥의 말로 구분합니다.

 

빌닷의 지혜: 하나님의 크심과 인간의 작음(1-6)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의 수고와 공로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 주셨기에, 우리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한량없는 은혜에 응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1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3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4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5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6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25:1-6)

 

빌닷의 마지막 발언은 짧고 주제도 단순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개념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곳”에 계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분께는 ‘공포’와 ‘평화’가 공존합니다(2). “위엄”으로 번역된 ‘파하드’는 주로 두려움과 무서움, 놀람이나 공포를 뜻합니다(욥 3:25;4:14;13:11;15:21;21:9;22:10;23:15;25:2;31:23; 39:16,22). 개역개정이 (긍정적 의미의) “위엄”으로 번역한 경우는 이 구절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로서 공포로 다스리기도 하시고 평화로 다스리기도 하십니다. 그의 다스림(“광명”)을 받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3b). 위대한 창조주 앞에서 모든 피조물은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3)라는 표현은 수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욥의 “누가 능히 헤아리라”(26:14)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달”과 “별”은 일종의 천상적 존재로 여겨지는데, 이런 피조물 중 최고의 것들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감히 자신의 빛을 뽐내지 못합니다(5). 하물며 하찮은 벌레 같은 인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4,6). 참고로, 인간 전체를 표현하는 말로서 빌닷은 ‘여자에게서 난 자’(4)와 ‘사람의 아들’(인자, 6)을 사용합니다. 인간은 제아무리 의롭고 깨끗하다 해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합니다(4).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진술과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표현하는 주제는 욥과 친구들의 입을 통해 반복되었습니다(4:17;9:2;15,20;10:15;15:14;22:3).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의롭고 깨끗할 수 없는데 빌닷은 왜 욥에게 의롭고 깨끗하기를 요구합니까?(8:6) 만약 욥의 고난이 의롭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 것에 대한 대가로 지불하는 ‘까닭 있는’ 고난이라면, 세 친구를 비롯한 모든 인류도 욥과 동일한 정도의 ‘징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왜 인과응보의 원리가 선별적으로 작용합니까?

 

빌닷의 지혜에 대한 반박(26:1-5)

하나님 앞에서 어느 인생도 깨끗할 수 없습니다. 이는 분명히 옳은 말이지만 상대방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 없다면 상대를 공격하고 죽이는 칼이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대로 행하지 않으면 신앙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빌닷은 하나님 앞에 비천한 존재이므로 욥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3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 4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5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26:1-5)

 

빌닷의 ‘모두가 죄인’이라는 일반론은 사실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신학적 개념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욥을 정죄하기 위한 논리입니다. 그 일반론 안에서 빌닷 자신은 비켜서 있다는 사실을 욥의 반론은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빌닷의 짧은 발언에 대한 욥의 반박은 ‘의로움’에 대한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일반론에 맞서 ‘너는 의로운가’라는 질문은 사실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욥의 반론은 빌닷의 주장대로 모두가 죄인이라면 빌닷 역시 마찬가지고 욥을 향한 손가락질은 마찬가지로 빌닷 자신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의로움에 대한 욥의 정의입니다. 힘없는 자를 도와주는 것(2)과 지혜 없는 자에게 조언을 해주고 깨달음을 주는 것(3)은 친구들이 욥을 정죄하면서 사용하던 표현이었습니다(“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4:3-4). 욥은 자신이 이런 의를 행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이라는 빌닷의 논리 (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를 빌닷에게 되돌려줍니다: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4a). 그 말이 돌아가야 할 곳은 빌닷 자신이다. 또한 욥은 빌닷의 지혜의 출처를 묻습니다. 4b절을 직역하면 ‘누구의 호흡(“정신”)이네게서 나왔느냐’입니다. 빌닷은 자신의 지혜가 조상들의 축적된 지혜임을 강조했습니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8:8). 욥은 이 지혜가 ‘죽은 지혜’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옛 시대 사람”과 “조상들”은 “죽은 자의 영들”(5)이며 그들은 물 밑 저 아래에서 두려워 떨며 머물고 있다고 말합니다(5). 죽은 자의 눈으로 현실을 보지 말고 직접 자신의 눈으로 이 창조 세계를 바라보라는 것은 전형적인 반성적 지혜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한계(26:6-14)

우리는 피조물의 연약함에 사로잡혀 죄인의 태도를 고수할 것이 아닙니다. 더욱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신뢰함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여겨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6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7그는 북쪽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 8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 9그는 보름달을 가리시고 자기의 구름을 그 위에 펴시며 10수면에 경계를 그으시니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이니라 11그가 꾸짖으신즉 하늘 기둥이 흔들리며 놀라느니라 12그는 능력으로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깨뜨리시며 13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14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26:6-14)

 

5절은 일종의 회전축(pivot)입니다. 4절 하반절과 연결하여 빌닷의 지혜가 죽은 자들의 지혜임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논의의 시야를 하나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공간으로 옮겨갑니다. 그 첫째가 죽음의 공간(스올과 아바돈)입니다. 죽음의 공간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며, 그곳조차 하나님께는 감출 것이 없이 모두 선명히 드러납니다. 둘째는 하늘이라는 공간입니다. 욥은 구름이 물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왜 항상 비가 내리지 않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자기처럼 구름으로 물을 잘 싸매서 구름 안의 물이 지상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창을 중간에 두어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로 나누고(창 1:6-7), 그 사이에 창문들이 있어서 때때로 비가 내린다(창 7:11; 8:2)는 창세기의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과 뭍 사이에 경계를 만드신 분도 빛과 어둠의 경계를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10). 하나님께서 천둥과 번개로 소리치시면 온 땅과 하늘이 두려워 떱니다(11).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면(즉, 바람이 불면) 구름이 사라져서 하늘이 맑아지고, 그분의 손(번개?)으로 도망가는 뱀을 꿰뚫으실 수도 있습니다(13).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 번째 공간은 바다입니다. 바다가 흉흉할 때(라합이 격동할 때) 그 바다를 잠잠케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12).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설명하면서 욥은 죽음의 세계와 하늘과 바다를 그 예로 듭니다. 이 공간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인간이 갈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활공간과 활동 영역을 벗어나는 곳마저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은 실제로 그 공간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를 설명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모르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 함입니다. 욥은 14절에서 이린 예를 든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극히 작은 부분(“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음성으로 알려주시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나, 그 음성이 그분의 모든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그분께서 어떤 일을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하시지는 우리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

 

25장과 26장의 비교

25장과 26장(5-14절)이 모두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에 많은 학자들이 둘 모두 빌닷의 말로 이해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주제는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 양측 모두에서 주장합니다. 어느 지혜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규범적 지혜는 인간의 활동 영역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집중하기 때문에, 각 인간이 그분의 뜻에 맞게 사느냐 그렇지 않느나 라는 ‘의’와 규범의 문제를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반성적 지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세계조차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세계는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주제가 바로 하나님의 언설(38-41장)의 핵심 내용입니다.


빌닷의 마지막 답변은 그들의 지식으로는 욥의 고난에 대해 명케하게 답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저 체념하고 고난을 받아들이라는 결론밖에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종교이든지 그저 고난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죄와 사망 권세 아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정한 해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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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4-01)


악인 심판을 갈망하는 욥

욥기 24장 1-25절


 

미국 시카고에서는 휘튼칼리지라고 하는 명문 대학이 있습니다. 그 대학에는 플랭카드 홀이라는 건물 2층에는 그 학교가 배출한 선교사들의 명단과 사진이 붙어있습니다. 몇 사람의 사진에는 십자가가 붙어있는데, 그 의미는 선교사의 삶을 살다가 순교하였다는 표시라고 합니다. 그 학교 출신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짐 엘리엇’이라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 24장은 엘리바스의 규범적 지혜에 반박하는 점에서는 23장과 연속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반성적 지혜이 독특한 대안적인 선악 개념이 표현되는 점에서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장입니다. 이 장에서는 규범적 지혜의 어휘와 개념들(부자와 가난한 자, 빛과 어둠 등)을 욥이 어떤 방식으로 뒤틀어서 반성적 지혜를 설명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규범적 지혜자들에 대한 반론(1)

당연하게 믿고 있는 진리가 현실 속에서 실현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그 진리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갖게 됩니다. 특별히 악에 대한 심판이 지연되는 현실을 발견하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욥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세게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불평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1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1)

 

1절 상반절의 원문은 이해하기 까다롭습니다. ‘니쯔페누’는 ‘감추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왜 시간들이 전능자로부터/에게서 감추어지지 않는가?’입니다. 동사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대입했을 때 의미가 명확해지지 않기에 많은 번역들은 다양한 의미로 이해합니다: 정해지다, 알려지다 등. 의문사와 부정어가 혼합된 문장이라 수사의문문으로서 본래의 전체의미가 긍정문(시기가 감추어졌다)인지 부정문(시기가 감추어지지 않았다)인지도 혼동됩니다. 따라서 상반절의 의미는 하반절을 통해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반절은 ‘왜 그분을 아는 자들이 그의 날들을 보지 못하는가?’입니다. ‘그분을 아는 자들’이란 엘리바스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안다고 믿는) 규범적 지혜자들을 일컫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패턴을 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예를 들어 자신이 언제 죽을 지 왜 그들은 알지 못하는지를 반문하는 표현입니다. 만약 상반절이 ‘시기들이 감추어졌다’라는 의미라면, 1절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이 정하신 시기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규범을 안다고 하는 자들마저 그 시기를 알지 못한다'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반면, ‘시기들이 감추어지지 않았다’라는 의미라면,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하신 시기(규범/패턴)를 알려 주신다는데, 왜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날도 미리 예측하지 못하는가’ 정도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상반절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이든 간에, 욥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패턴을 안다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패턴을 알려주신다고 믿는 규범적 지혜자들조차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항상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악하고 불의한 현실(2-17)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악한 일들에 사람들의 마음이 상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생활 방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라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을 사는 올바른 처세술이며 성공으로 이끄는 삶의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악인이 큰소리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합니까?

 

2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 3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4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서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5그들은 거친 광야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빈 들이 그들의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음식을 내는구나 6밭에서 남의 꼴을 베며 악인이 남겨 둔 포도를 따며 7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워도 덮을 것이 없으며 8산중에서 만난 소나기에 젖으며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9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10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리고 11그 사람들의 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 하면서 술 틀을 밟느니라 12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13○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그 도리를 알지 못하며 그 길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14사람을 죽이는 자는 밝을 때에 일어나서 학대 받는 자나 가난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둑 같이 되며 15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가리며 16어둠을 틈타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잠그고 있으므로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17그들은 아침을 죽음의 그늘 같이 여기니 죽음의 그늘의 두려움을 앎이니라(2-17)

 

2절부터 24절까지 욥은 악인들과 그들의 결말, 하나님의 개입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것은 친구들의 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제들이었습니다. 욥이 이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악인들과 그들의 부당한 행위들을 고발하면서도 ‘악’이나 ‘무지(지혜없음)’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서술 방식을 채택합니다.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어떤 사람들인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악한 행위들을 하게 만들었는지, 그런 악인들의 결말은 어떠한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욥의 친구들만큼의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욥이 목도한 불의한 현실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땅의 경계선을 자기 마음대로 바꿔서 남의 땅을 빼앗기도 하고, 경계를 변경하여 그 땅 안에 있던 양떼를 자기 소유로 착복하기도 합니다(2). “고아”와 “과부”로 상징되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소유조차 빼앗는 사람들이 있습니다(3). 가난한 자들은 학대를 당해서 길거리에서 쫓겨납니다(4).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라는 개역개정의 번역은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홉베우’는 푸알형으로 수동의 의미가 강합니다. 스스로 숨는 것이 아니라 빼앗고 학대하는 자들에 의해서 ‘거리에서 사라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거리에서 쫓겨난 이들은 “거친 광야”와 “빈 들”, 즉,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워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에서 먹거리를 구해야만 하는 처지에 이릅니다(5). 이 가난한 자들은 ‘남의 것’ 혹은 동물이나 먹는 사료를 훔쳐먹거나, 땅에 떨어져 상태가 나쁜 포도를 주워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6). 이들은 추운 밤에도 입을 옷 하나없이 벌거벗은 채로 잠을 자야 합니다(7). 비가 오면 겨우 바위틈에서나 비를 피하려 하지만 그들의 몸은 흠뻑 젖고 맙니다(8). 사람들은 아이를 어머니 품에서 빼앗아 고아로 만들거나 혹은 고아를 비롯한 가난한 자의 것마저 폭력으로 착취합니다(9). 이렇게 하나 남은 것마저 빼앗긴 사람들은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닙니다(10절 상반절). 그들은 밭과 포도원을 소유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가 됩니다. 그들이 운반할 곡식은 풍성 하나 그들이 그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10절 하반절). 그들이 짜내는 기름과 포도주를 그들이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11). 먹거리가 없어서 먹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배고프고 목마릅니다.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에서 고통에 허덕이는 자들이 아무리 도와 달라고 외쳐도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시지 않습니다, 혹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다(12). 빛을 싫어하고 밝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13). 욥은 이 말을 할 때 ‘빛’은 좋은 것이고 ‘어둠’은 나쁜 것이라는 가치판단을 개입시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빛이 있는 낮에도 악을 저지르고 빛이 없는 밤에도 악을 저지릅니다. 살인자들은 ‘빛에(“밝을 때에”)’ 사람을 죽입니다. 그것도 가난하고 학대받는 불쌍한 사람들을 말입니다(14절 상반절). 어두워지면 도둑질을 하거나(14절 하반절) 간음을 저지릅니다(15). 도둑질을 하느라 밤에 활동하는 자들은 낮에는 집에 틀어박혀 잠을 잡니다. 그들에게는 ‘낮’이 곧 ‘밤’이고, 빛이 곧 어둠입니다(16-17).

 

악인의 결말(18-24)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부조리 연속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도 성공을 얻지 못합니다. 불법과 부정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좌시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때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참고 견뎌야 합니다.

 

18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라 19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빼앗나니 스올이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20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21그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를 박대하며 과부를 선대하지 아니하는도다 22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 23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24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18-24)

 

18절부터 24절은 악인들이 처하게 될 운명에 대해 말합니다. 악인의 결말을 설명하는 욥의 언어는 친구들의 것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그들의 삶은 “빠르게 지나가고” 그들의 소유도 “저주를” 받습니다(18).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며(19) ‘잊혀짐’이 그들의 운명입니다(20). 저주와 죽음과 잊혀짐은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가 규정하는 악인의 결말과 동일합니다. 또한 그들이 높아져 잠시 잘 나가는 때가 있으나 곧 낮아지고 추수 때의 이삭처럼 잘려 나갈 것이라는 말(24)은 앞선 소발의 주장과 유사합니다(“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20:5). 그런데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이런 “강포한 자들”을 인도하시는 분도(22), 그들에게 평안을 주시며 그들에게 의지가 되시는 분도(23)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23절의 개역개정은 상반절과 하반절을 반의적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이 번역은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를 ‘악에 대한 심판’이라고 보는 번역자의 해석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규범적 지혜의 시각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는 것인데, 18-24절의 전반적인 표현이 규범적 지혜의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이런 해석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해석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평안을 주시고 그들의 삶을 지탱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신다’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 중 어떤 해석이든, 이 구절이 모든 것을 관할하시고 모든 일이 그분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패턴의 불확실성(25)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악한 방식으로 이웃을 이용하거나 억압해 부와 명성을 쌓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가르칩니다(롬 12:1). 성도들은 세상에서 말하는 세속적 성공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영원한 상급에 삶의 목적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25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고 지적하거나 내 말을 헛되게 만들 자 누구랴(25)

 

악인의 결말을 규범적 지혜와 거의 유사하게 표현하고 있는 욥의 주장의 결말은, 그러나 친구들의 것과 다릅니다. 규범적 지혜는 반드시 그 규범대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욥은 악인의 운명이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주목합니다.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가 욥의 주장의 핵심입니다. 악인들의 결말이 이럴 수 있지만, 혹은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꼭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규범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하는 기계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패턴에 따라 현실이 흘러가지 않아도 그 현실이 잘못되었다거나(“거짓”) 현실이 허상이라고(“헛되게”) 말할 수 없습니다(25절 하반절). 현실은 현실입니다. 자연세계와 인간의 삶에 규범이나 패턴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규범과 패턴에는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공의로운 분이라는 사실이 변함없는 진리인 이상 악인의 형통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로 인해 이 세상에서 평안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우리는 장차 이루어질 악인들의 멸망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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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3-01)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욥기 23장 1-17절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고 침묵하시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음성을 생생하게 들려주시며 각종 은사를 주시던 친절하고 따뜻한 주님이 느껴지지 않게 되게 철저하게 홀로 남겨진 것과 같은 소외감과 불안 속에서 고독을 맛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심한 고난까지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욥도, 엘리야도, 모세도 그랬습니다.

 

  • 욥은 이제 하나님을 발견하여 그가 계신 곳에서 정의로운 심판을 받고 싶습니다. 따라서 변론할 말을 준비하여 하나님을 찾아 사방을 헤매었지만,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고 만날 수 없어 탄식합니다. 그럼에도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 살았음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결정하고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를 경외하는 마음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재판을 원하는 욥(1-7)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확인할 수 있어야 탄식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랑을 도무지 확인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되인 되었을 때 자기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확인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 안에 원망과 탄식이 끝납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3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4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6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1-7)

 

욥은 엘리바스의 권면에 대해 다비합니다. 먼저 자신의 혹독한 고통에 대해 한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가 당하고 있는 재앙이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1) 엘리바스의 발언에 대답하는 욥(1)

 

엘리바스의 혹독한 정죄와 회개에 대한 권면을 들은 욥은 엘리바스와 친구들에게 대답하기보다는 마치 독백을 하듯이 말을 이어갑니다. 욥기 23-24장까지 계속되는 욥의 발언에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갈망과 찾을 수 없는 하나님(23:2-9), 하나님에 대한 신뢰(23:11-17), 하나님의 때를 알고자 하는 갈망(24:1), 악행자의 심판의 때(24:2-25) 등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23장은 하나님의 장소(하나님이 어디 계실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24장은 하나님의 때(하나님이 언제 심판을 하실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2) 하나님 앞에서 재판을 원하는 욥(2-7)

 

욥은 너무 답답하고 억울하여 하나님을 만나 뵙기를 갈망합니다. 공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재판을 받기 원합니다. 그의 친구들은 첫 대화 때부터 줄곧 선입견과 치우친 논리와 억측으로 자신들의 발언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제 엘리바스는 단도직입적으로 욥이 큰 죄인이라고 친구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하였고, 욥에게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복을 받으라고 권고하였습니다(21장).

엘리바스의 발언에 오늘도 욥의 마음에는 반항과 불평이 저절로 끓어오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내린 재앙보다 친구들이 주는 상처로 인해 욥의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탄식이 더 견디기 버거울 지경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엘리바스의 주장과 권고를 완전히 무시합니다. 욥이 짓지도 않은 죄를 추론하여 늘어놓는 것을 들으며 억울한 마음이 불끈 솟구치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며 힘써 지켜왔음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지는 않습니다(10-12). 또한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종용하는 엘리바스의 조언을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어 정직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이라는 의지를 불태웁니다(7).

“어디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욥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변론할 말을 잘 준비하여 그분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나서 왜 자기가 이와 같은 무고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공정한 재판을 열어 알려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공정한 재판정에서 욥은 하나님께 억울한 사정을 아뢸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다 들으시고 무죄를 선포하실 것임을 고대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재판장으로서 그의 큰 능력을 행사하셔서 욥을 거세게 논박하지는 않으실까 두려운 생각이 들어 잠깐 주춤합니다(6). 또한 앞서 9장에서 하나님 앞에서 재판을 받는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하였습니다(9:14-16).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변론을 들으실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결백을 선언 받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욥이 자신의 정직함(7.10)에 대해 확고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작정하신 일을 이루실 것(13-14)에 대해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욥을 위선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욥에 대한 평가 기준은 명백한 증거가 아니라 자기들의 주관적인 해석과 치우친 논리였습니다. 욥은 자신이 결백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처벌을 완전히 그리고 확실하게 면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부재와 욥의 신앙(8-12)

 

감당하기 힘든 삶의 시련과 재난을 만날 때 우리는 그 해결책이 수학 공싲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은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깊은 고통 가운데 빠져들어 갑니다. 욥의 상황이이와 같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갈망과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긴 탄식을 쏟아 냅니다.

 

8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8-12)

 

욥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현실에 또다시 탄식합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a=뵐 수 없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서 멀리 떠나신 것이 아니라 그를 지켜보시며 그의 기도와 탄식을 다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느껴지지 않는다고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1) 하나님의 부재(8-9)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재판을 받아 억울함을 풀고자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욥이 전후좌우와 동서남북 어디를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탄식이 깊어진다. 무소부재한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이 계셨던 흔적은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욥에게는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의 길로 행한 욥(10-12)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욥은 “그가 나의 가는 길을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과 무능에 좌절을 느끼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삶을 다 알고 계심을 확신하며 선포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정직한 자이며 하나님 말씀을 토대로 살아온 것을 아실 것이라는 데에 추호도 의심이 없습니다(10). 또한 이러한 욥의 확신 있는 진술은 앞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행하라고 경고한 것(22:22)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욥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그가 택했다는 길은 대체 어떤 길입니까?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즉, 그가 택했고 그가 살아온 길은 바로 ‘하나님의 길’이었습니다. 그가 따라갔던 발걸음이 바로 ‘하나님의 발걸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에 머물러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그의 길만을 똑바로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발걸음은 하나님의 입술에서 직접 나오는 명령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에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와 뜻이 다 담겨있습니다. 욥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먹어야 하는 음식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하루에 정한 음식이 몸을 건강하게 지켜 생명을 연장시키듯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건강과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욥은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자신의 영적 생명에 영양을 보충해주고 영적으로 더 풍성한 생명을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살아왔기 때문에, 욥은 현재의 고난을 하나님으로부터의 형벌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용광로에서 불순물을 다 녹이는 연단을 받고 정금이 되어 나오는 과정이라고 여깁니다. 욥은 이 시련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이 더 굳건해질 것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함(13-17)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이러한 거룩한 두려움을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만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하며 그분을 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오히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죄를 멀리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가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13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15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16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며 전능자가 나를 두렵게 하셨나니 17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 때문이나 흑암이 내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로다(13-17)

 

욥은 믿음을 갖게 된 근거로 과거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귀히 여기며 지켰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죄를 아시면서도 자신을 고난 가운데 몰아넣기로 작정하셨고, 그러한 하나님의 작정을 막을 수 없다는 두려움입니다.

 

(1) 작정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13-14)

 

욥은 하나님께서 유일한 절대 주권자이시므로 본인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신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결정하는 일에 자유로우시며 성취하시는 일이 많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에 자신에 대해 작정하신 일이 있다고 믿습니다. 욥에게 주신 재앙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며 앞으로의 계획도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욥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욥의 미래에 어떤 것을 작정하셨는지 알 수도 없으나, 계획하신 것을 분명히 이루실 것임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욥이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생각을 신뢰하며 의지하는 데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자기의 계획과 뜻과는 비교되지 않는다는 것을 욥이 인정한 데서 나옵니다.

 

(2)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함(15-17)

 

욥이 떳떳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경외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무엇이든 원하시는 대로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압니다. 반면, 욥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힘도 지혜도 없으므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두려워 떱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욥은 그에 대한 경외감에 사로잡힙니다. 엘리바스는 재앙과 고난으로 인해 두려움이 욥에게 임했다고 주장했습니다(22:10–11). 그러나 욥은 자기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에게 닥친 흑암과 같은 재앙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로 인해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욥은 매사에 말로나 행동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우매한 자와 같이 행동하기를 거부했습니다(1:5,22;2:10).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조차도 욥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1:8;2:3) 라고 평가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 경외감을 갖습니다. 그리고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세상도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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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2-01)

 


엘리바스의 불가능한 축복

욥기 22장 1-30절


 

욥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항변하고 있음에도 엘리바스는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욥을 죄인으로 규정하면서 그 죄가 끝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맹렬히 공격합니다. 엘리바스가 아무리 옳은 말을 했다고 해도 이런 태도로는 상대방에게 결코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 욥과 친구들 사이의 세 번째 논쟁이 시작되었고, 이번에도 엘리바스가 포문을 엽니다. 이것이 엘리바스의 마지막 발언입니다. 이번 발언의 특징은 규범적 지혜의 일반적인 진술에 그치지 않고 욥의 죄를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물론 엘리바스가 언급하는 욥의 죄는 직접 목격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과응보의 원리에서 추론해낸 것입니다.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불만(1-11)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께 아무 이득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겸손과 자기 비하는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큰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그 무엇보다 우리 인간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십니다.

 

1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3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4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5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6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7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8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9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10그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갑자기 너를 엄습하며 11어둠이 너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고 홍수가 너를 덮느니라(1-11)

 

엘리바스는 욥의 경건과 지혜를 조롱합니다. 심지어 인강 자체가 하나님께 별 의미 없는 존재인 것처럼 함부로 말합니다.

 

(1) 징벌은 죄의 증거(1-5)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엘리바스의 발언은 신앙의 ‘유익’에 대한 것으로 시작합니다. 15:3에서 욥의 반성적 지혜가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했던 엘리바스의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유익’이라는 단어 ‘사칸’은 엘리바스와 그리고 후에 엘리후의 발언에서만 등장합니다(15:3; 22:2; 22:21; 34:9; 35:3). 욥과 욥기의 반성적 지혜는 신앙을 ‘유익’과 ‘이익’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악인들의 생각이고(21:15) 사탄의 생각입니다(1:9-11;2:4-5).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올바르게 살아가는 의(=지혜)가 인간에게 유익을 준다고 믿습니다. 이 규범적인 지혜의 패턴을 아는 것을 통해 재앙(넘어짐과 끊어짐, 패함)을 피할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신학은 한발 더 나아갑니다. 의와 지혜는 인간에게 유익이 되지만 그것이 곧 높으신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꼐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인간에게 지혜를 알려주시는 것이 아니며, 오직 인간에게 도움이 되게 하려고 알려주십니다. 엘리바스는 이 진술을 욥의 무죄 주장을 타파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욥이 아무리 의로움과 온전함을 주장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3). 그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는 겨우 욥 하나를 바로 잡기 위해 욥을 꾸짖고 심판하실 필요가 없습니다(4).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만드는 것, 욥을 가르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3). 하나님마저도 ‘이익’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시므로(뿌린 대로 거두시는 분이므로), 욥에게 재앙이 임한 것은 욥을 교육하고 지혜롭게 만드시기 위함이 아니라, 단순히 욥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5). 기계적인 법칙인 인과응보의 규범이 작동한 것뿐입니다.

 

(2) 욥이 지은 죄와 그로 인한 결과(6-11)

 

엘리바스는 욥이 지은, 정확히는 욥이 지었음에 분명한 죄악을 나열합니다. 첫째, 그는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았습니다(6a). “볼모로 잡으며”로 번역된 동사는 ‘하발’인데, 이것은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욥기의 핵심 단어 중 하나인 “까닭 없이(힌남)”가 사용되는데, 이 문맥에서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란 뜻입니다. 즉, 욥은 사람들을 부당하게 갈취한 것입니다. 상반절만으로는 어떤 것을 갈취했는지 목적어가 나와 있지 않지만, 하반절의 평행구가 그 빈 자리를 채워줍니다. 소위 ‘계단식 평행법(staircase parallelism)’으로 불리는 것인데, 평행하는 구와 절이 의미를 보충해 주거나 선명하게 좁혀 주는 역할을 합니다. 상반절의 “형제”는 “헐벗은 자”와 평행어로서, 둘이 합해 ‘헐벗은 형제’라는 표현이 완성되고, “볼모로 잡으며”와 “의복을 벗기며”가 합해져 ‘의복을 담보로 잡다’라는 상황이 선명해집니다. 가난한 자의 옷을 담보로 잡는 것은 율법 규정에 어긋납니다(신 24:17). 또한 담보를 맡기고 잡는 일에 속임이나 도둑질과 같은 착취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레 6:2). 둘째, 욥은 부유하면서도 가난한 자를 돕지 않았습니다(7-9). 목마른 자와 주린 자에게 물과 음식을 주지 않았습니다(7).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의 율법에 이와 완전히 동일한 표현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약자를 보호하는 규정은 많이 있습니다(출 22:25; 23:11; 19:10; 23:22; 15:4-5,7,11 등). 잠언은 더 나아가, 원수에게까지 물과 음식을 제공하라고 가르칩니다(잠 25:21). 욥은 ‘얼굴이 들린 자’로서 땅을 소유하고 있는 힘 있는 자였습니다. ‘얼굴을 들다’라는 숙어는 ‘편애’를 의미합니다(창 19:21; 32:21;민 6:26; 신 28:50; 삼상 25:35 등등). ‘얼굴이 들린 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사회적으로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많은 존경을 받는 자를 뜻합니다(왕하 5:1; 사 3:3; 9:14). 이런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당연히 해야 할 규범을 지키지 못하고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 것은 악이며 죄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성경에서 사회적 약자(통칭 “가난한 자”)를 대표하는 상징어입니다. 이들을 보호하라는 명령과 이들을 도와주지 않거나 억압하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는 경우는 매우 많습니다(출 22:22; 10:18; 14:29; 24:17, 19-21; 26:12-13;27:19; 1:17,23; 10:2;7:6; 22:3; 22:7,25; 슥 7:10, 말 3:5 등). 엘리바스에 의하면 욥이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위에서 열거한 욥의 죄악 때문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악을 저지른 죄에게 “올무”와 “두려움”이 되는 것입니다(10). 악인은 자신이 파놓은 함정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라는 주제가 여기서도 반복됩니다. 고난은 “어둠”과 “홍수”라는 단어로 비유됩니다(11). 하나님께서 주신 재앙을 어둠으로 표현하는 것은 엘리바스의 말에서 자주 등장합니다(5:14; 15:22,23,30). 욥이 처한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엘리바스의 진단은 한 마디로, ‘까닭 없는 고난은 없다’입니다. 사탄의 ‘까닭 없는 신앙은 없다’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잘못된 생각(12-20)

우리는 다른사람에게 조언해야할 필요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바로잡아주려는 마음은 좋은 것이지만 그에합당한 태도를 갖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조언이 사실과 진리에 근거해야합니다. 또한상대방의 반응과상관없이 온유함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태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도록 신중히 처신해야 합니다.

 

12○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우두머리 별이 얼마나 높은가 13그러나 네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아시며 흑암 중에서 어찌 심판하실 수 있으랴 14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린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둥근 하늘을 거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15네가 악인이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16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끊겨 버렸고 그들의 터는 강물로 말미암아 함몰되었느니라 17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18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들의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머니라 19의인은 보고 기뻐하고 죄 없는 자는 그들을 비웃기를 20우리의 원수가 망하였고 그들의 남은 것을 불이 삼켰느니라 하리라(12-20)

 

악인이자 죄인인 욥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잘못되었습니다. 옛적부터 악인들이 걸어온 전형적인 길을 욥도 걷고 있습니다(15). 저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12) 악인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구름 뒤에 계셔서 보이지 않으며 단지 하늘의 궁도를 걸어 다니실 뿐이라고 생각합니다(14). 그런 하나님께서 구름 건너 이 땅에서 일어나는 세세한 일들을 알 리가 없고 따라서 하찮은 일들을 일일이 심판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 악인의 생각입니다(13). 악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기를 바라고(17a), 하나님이 인간 삶에 개입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합니다(17b). 엘리바스는 이 말을 욥이 했다고 말합니다(13).

물론 욥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은 없습니다. 욥은 오히려 그와 반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7:19-20; 10:4-6; 13:27;14:3,6; 16:9). 욥을 비롯한 악인들은 이러한 잘못과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생각 때문에 자신의 수명을 다살지 못하고 죽고(“때가 이르기 전에 끊겨 버렸고”) 그들의 집은 없어져 버리는 운명을 맞이합니다(16). 엘리바스 자신은 이러한 악인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18b). 이 표현은 욥의 표현을 그대로 모방한 것입니다(21:6). 욥은 이 표현을 재앙이 임하지 않는 악인들의 경우를 묘사하며 사용했는데, 엘리바스는 전혀 다른 문맥에서 같은 표현을 적용합니다. 죄로 인해 징벌을 받는 악인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합니다.

 

회개로의 요청과 의인에게 임하는 복(21-30)

사람들은 자신보다 지위가 낮거나 힘없는 사람이 자기 앞에서 겸손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면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소위 ‘갑질’이라는 형태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자세는 자신을 하나님처럼 이기는 교만함의 극치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욥이 자신들 앞에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21○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22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23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24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25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26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27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 28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치리라 29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30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21-30)

 

엘리바스의 마지막 조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하라는 것입니다(21). 흥미로운 것은 개역개정이 “화목하고”로 번역한 단어는 ‘유익이 되다’라는 뜻의 ‘사칸’입니다. 히필형으로는 ‘익숙해지다’(민 22:30)나 ‘친해지다’(시 139:3)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하나님과 유익한 사귐의 관계로 들어가라는 조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에는 ‘유익’이 있고 유익한 결과가 주어집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직접 귀한 “보화”와 “고귀한 은”이 되시며(25); 기도하고 말하는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7-28). 여기에는 조건(까닭/이유)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 속에 새기고(22), 악을 멀리하고(23), 자신의 소중한 것을 버리고(25), 하나님을 바라봐야 하고(26), 겸손해야 하며(29), 손을 깨끗이 하고 죄 없는 상태가 됩니다(30). 이로써 엘리바스는 모든 말을 마칩니다. 엘리바스의 정죄는 곧 욥에게 반박을 당하고(23:10-12; 29:12-17; 31:7-40),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도 ‘우매’라는 판정을 받게 됩니다(42:7-8).


모든 성도에게 회개라는 단어는 너무나 익숙합니다. 그러나 참된 회개는 감정을 넘어 진정한 삶의 변화를 이끕니다.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시는 죄에 머물면서 회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덧입어 참된 변화를 이루고 선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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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1-02)


모순된 주장을 비판하는 욥

욥기 21장 17-34절


 

우리는 믿음대로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복 받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을 근본부터 흔드는 때가 찾아옵니다. 그때가 이유 모르는 고난의 시기입니다. 고난 중에는 신학적 물음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 부재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 아직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 세상에 뿌리내리지 못했으므로 현실에서는 다양한 삶의 양상이 나타납니다. 악인들이라도 기력이 넘쳐 기세등등하고 건강하며 안전과 번영을 누리기도 합니다. 그들이 죽을 때조차 사람들의 지지를 받기도 합니다. 친구들의 말은 한결같이 ‘의인은 흥하고 악인은 망한다’는 법칙을 강조하지만, 이 법칙이 세상에서 그대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심판받는 악인이 드문 현실(17-22)

지금도 악인은 좀처럼 심판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악인의 형통함을 좇아 악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느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누리는 형통함은 하나님 백성이 영원히 누릴 영과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17○악인의 등불이 꺼짐과 재앙이 그들에게 닥침과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하게 하심이 몇 번인가 18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 같이, 폭풍에 날려가는 겨 같이 되었도다 19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그의 자손들을 위하여 쌓아 두시며 그에게 갚으실 것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0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할 것이니라 21그의 달 수가 다하면 자기 집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17-21)

 

욥은 악인이 형통을 누리는 엄연한 현실과 악인의 교만한 내면을 지적함으로 친구들이 주장하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얼마나 모순되는지 앞서 지적했습니다. 욥은 나아가 그들의 주장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강조합니다.

 

(1) 심판 받는 악인이 드문 현실(17-18)

 

욥은 7절부터 계속해서 현실에서 풍요를 누리는 악인의 삶에 대해 언급하며 세 친구의 ‘악인은 멸망한다’는 논증에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악인의 빛과 등불이 꺼지고 자신의 꾀에 빠져 재앙을 당한다”(18:5-12)는 빌닷의 주장에 “얼마나 자주 악인들의 등불이 꺼지고(갑자기 죽고), 그들에게 재앙이 닥치며,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재앙을 할당받느냐?”고 반문합니다. 또 “얼마나 자주 악인이 바람과 폭풍과 같은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을 받아 이리저리 날려가는 지푸라기나 겨(시 1:4)와 같은 처지에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친구들의 주장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악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재앙에 처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욥의 반론입니다.

 

(2) 악인의 징벌과 후손(19-21)

 

덧붙여, 욥은 “악인의 징벌이 후손에게 미친다”는 친구들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18-19절에서 언급된 것처럼 그의 생애에 일어나지 않고 연기된다면 욥의 친구들은 십중팔구 “하나님이 악인에 대한 처벌을 자손에게 내리시려고 쌓아 두신다”(5:4에서 엘리바스의 주장; 20:10에서 소발의 주장)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자녀가 아니라 죄를 지은 바로 그 장본인에게 갚으셔서 그가 직접 깨닫도록 하셔야 할 것이라고 욥은 주장합니다. 악인이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한 자신의 멸망을 직접 목격하여 전능자의 진노를 마셔야 하지, 만약 악인이 수명이 다해 죽거나 중간에 죽으면 죽고 난 후에 자기 자손이나 자기 집이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말하며 친구들의 주장을 일축합니다.

이와 같은 욥의 주장은 선지자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말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납니다. 선지자들은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이 이가 시리다”라는 속담을 예로 들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죄에 대한 심판이 자기들이 아닌 후손에게 임할 것이므로 자기들은 상관없다며 죄를 계속 저지르는 것을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그런 속담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신포도를 먹는 그 자가 이가 시림같이 각기 죄악으로 죽을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선포하였습니다(렘 31:29-30; 겔 18:2-4).

 

두 사람의 죽음(22-26)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고 겸손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뜻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삶의 지식과 경험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가르치고 전하는 일은 욥의 친구들이 전한 헛된 위로이며 거짓된 가르침과 같을 뿐입니다.

 

 22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23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안전하며 평안하고 24그의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의 골수는 윤택하고 25어떤 사람은 마음에 고통을 품고 죽으므로 행복을 맛보지 못하는도다 26이 둘이 매 한 가지로 흙 속에 눕고 그들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23-26)

 

욥은 악인의 멸망을 주장하는 친구들의 변론이 결국 자신을 정죄하기 위한 속셈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집과 장막을 무너뜨리신다는 거들의 주장을 반박하여, 여전히 악인의 장막이 세상에 존재하며 악인의 운명이 항상 파멸로 끝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1) 지혜로운 심판자 하나님(22)

 

욥은 친구들의 자만과 주제 넘은 행동을 빗대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높은 자들을 심판하는 심판주이신데 누가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려 드느냐고 책망합니다. 이와 같은 욥의 물음은 이사야 선지자가 장래에 실현될 여호와의 통치를 예언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조언자도 스승도 없지만 그의 지혜와 비교할 자가 없는 창조주이며 전능자라고 언급한 것(사 40:13-14)을 상기시킵니다. 친구들은 전통과 유전을 통해 배운 제한적인 지식과 경험을 너무 의존한 나머지 욥이나 이사야가 지적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헤아릴 수 없는 권능을 미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교훈하시는 스승이심(욥35:11; 36:22)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해 치우치게 주장하였습니다. 욥은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2) 서로 다른 두 삶의 같은 운명(23-26)

 

친구들이 주장하는 ‘의인은 번성하고 악인은 멸망한다’는 공식이 현실에서는 잘 들어맞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욥은 이제 “서로 다른 두 삶을 사는 사람에게 같은 운명이 임한다”고 설명합니다. 어떤 이는 기력이 넘치고 신체도 튼튼하여 안전하고 평안히 죽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슬픔과 고통을 품고 행복을 맛보지 못한 채 죽습니다. 여기서 전자를 악인으로 후자를 의인으로 볼 수도 있고 악인이나 의인으로 나누지 않고 이해해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욥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마다 어떠한 다른 삶을 살든 죽으면 결국 흙에 눕고 썩는 것은 누구에게나 매한가지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인생은 결코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으며 삶이 어떤 정해진 형식에 따라 흘러가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친구들의 헛된 위로를 거부(27-34)

우리는 이 진리를 기억하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사로 위로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의 자리에서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주님을 의지하도록 서로 도와야 합니다. 구주 예수님이 친히 고난 당하셨기 때문에 고난 당하는 우리를 넉넉히 도와주십니다. 이 진리로 서로를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27○내가 너희의 생각을 알고 너희가 나를 해하려는 속셈도 아노라 28너희의 말이 귀인의 집이 어디 있으며 악인이 살던 장막이 어디 있느냐 하는구나 29너희가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묻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의 증거를 알지 못하느냐 30악인은 재난의 날을 위하여 남겨둔 바 되었고 진노의 날을 향하여 끌려가느니라 31누가 능히 그의 면전에서 그의 길을 알려 주며 누가 그의 소행을 보응하랴 32그를 무덤으로 메어 가고 사람이 그 무덤을 지키리라 33그는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기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앞서 갔으며 모든 사람이 그의 뒤에 줄지었느니라 34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헛되이 위로하려느냐 너희 대답은 거짓일 뿐이니라(27-34)

 

욥은 악인들도 번영을 누리며 살다가 영광스럽게 죽어 간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의인들이 불행한 일을 겪는 현실의 모순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세의 삶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1) 친구들의 헛된 위로를 책망함(27-28)

 

욥은 친구들이 욥을 도와주려는 의도는 없이 오히려 해하려는 속셈이 있음을 다 안다며 친구들에 대한 원망을 표현합니다. 친구들이 그러한 의도가 있지 않다면 어찌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욥에게 계속해서 ‘인과응보’의 공식만을 주장하겠습니까?

 

(2) 악인을 둘러싼 현실(29-33)

 

욥은 이제 악인의 추악한 삶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천하에 명백히 드러날 것이라는 친구들의 말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빌닷은 악인이 망하여 그의 후손이나 그가 거하던 곳이 다 없어질 것이며 동서남북 사방에서 오는 여행자조차도 악인의 최후 소식을 듣고 경악할 것(18:17-21)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악인이 어디를 가든 재앙과 사망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18:7-13). 이와 유사하게 엘리바스도 악인에게 평생 고통이 있고 형통할 때에도 재앙이 찾아온다고 주장하였습니다(15:20-25). 소발도 악인이 재물을 착취하여 삼킨다 해도 형통함과 즐거움이 그에게 없고 하나님의 진노가 비처럼 다고 하였습니다(20:12-29).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에게 마땅한 진노를 내리시면 차라리 낫겠는데, 악인들은 유유히 재난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악인에게 그의 가는 길이 재난의 길이라 책망하며 누가 그의 사악한 소행을 갚아주겠느냐?”고 욥은 묻습니다.

 

욥은 마지막으로 악인의 죽음이 임박하고 죽은 후에다 잊힐 것이라는 친구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악인이 누리는 영화가 그가 죽어 매장될 때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악인의 발자취가 완전히 끊어지고 사람들에게 잊힐 것이라고 빌닷은 주장했지만(18:17-21), 현실에서는 악인이 죽으면 그를 추종하고 옹호하던 많은 자들이 무리를 지어 무덤에까지 그와 동행해주며 그의 덤을 지켜주기까지 한다고 욥은 반발합니다. 악인이 죽어서까지 이런 대접을 받으므로 그가 묻힐 골짜기의 흙덩이를 달게 여길 정도라고 말합니다.

 

(3) 친구들의 헛된 위로를 거절함(34)

 

욥에게 있어 친구들의 위로는 ‘조롱’을 넘어서서(21:3) ‘헛된 위로’이며 친구들의 말은 거짓입니다! 앞서 2절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처지를 이해해주는 것이 욥이 친구들로부터 원하는 ‘진정한 위로’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욥의 처지에서 이해하려 들기보다 욥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욥을 조롱하며 회개를 강요하여 욥에게 ‘헛된’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헛된’으로 번역된 ‘헤벨’은 전도서 저자가 인생의 ‘허무함’을 토로할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또한 ‘우상’의 뜻도 있어 여기서는 친구들의 말이 욥에게 허무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틀에 박힌 사고만을 주장한다면 거짓된 것이나 우상을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한 가지 방법으로 악인과 의인을 대하지 않으심이 명백한데 친구들이 계속해서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욥에게 그 사상을 주입하려 하는 것은 분명 욥을 위로하거나 도우려는 의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친구들의 매정하고 혹독한 말과 태도에 욥의 속은 더 타들어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그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날이 더디게 온다고 잠들어서는 안 됩니다. 깨어 사시기 바랍니다. 바른 진리로 서로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심판을 향해 내달리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주님이 이 땅에 임하셔서 악인을 벌하시고 의인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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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1-01)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순들

욥기 21장 1-16절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을 누립니다. 그들이 실제로 세속적인 부를 얻고 때로 의인들보다 더 많은 복을 누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이와는 반대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욥은 그들의 말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답답함을 호소합니다.

 

  • 소발의 마지막 발언이 끝나고 욥이 대답합니다. 소발 한 사람이 아니라 세 친구 모두를 겨냥하지만, 발언의 요지는 앞선 소발의 ‘악인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라는 주제를 반박하는 것입니다. 소발은 자신의 주장을 인류가 생긴 이래 변함없는 진리라고 말했지만, 욥은 악인이 잠깐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대대로 잘 먹고 잘사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반박합니다. 신앙의 렌즈로 현실을 왜곡하지 말라는 반성적 지혜의 가르침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친구들을 향한 요청: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1-6)

이 세상에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통과 억울함 속에서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잠히 고통을 감내하신 이유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모든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우리는 복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3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너희가 조롱할지니라 4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 마음이 어찌 조급하지 아니하겠느냐 5너희가 나를 보면 놀라리라 손으로 입을 가리리라 6내가 기억하기만 하여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1-6)

 

욥과 친구들은 서로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요청하며 평행선을 달립니다. 이번에 욥은 특별히 더 힘을 주어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심우 사모아’는 ‘부정사 절대형의 강조용법’이라는 문법이 적용되는 형태로, 개역개정은 “자세히”라는 부사를 첨가함으로써 강조의 의미를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는 여러 해석이 가능한 문장입니다. 문맥적으로 가장 가능성 있는 해석을 두 개만 제안하자면, (1) ‘(너희의 어쭙잖은 조언이 아니라) 내 말을 자세히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너희가 줄 수 있는 진정한 위로다’라는 해석과, (2)‘나의 말이 너희의 생각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해석이 그것입니다. (1)의 의미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지만, (2)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의 하소연을 진지하게 경청해준다면, 자신이 당한 곤경이 하나님의 악인 심판 현장이 아님을 알고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니다. 친구들이 욥 자신을 조롱하려면 자기 말을 다 듣고 조롱하라고 합니다(3).

욥은 이어지는 7-13절에서 인과응보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현실을 근거로 규범적 지혜에 고착된 친구들의 생각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말이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야말로 마음이 조급한 상황이라고 합니다(4). ‘시아흐’는 “원망”보다는 중립적인 의미의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욥 자신의 고난은, 악인이 자기가 놓은 덫에 스스로 걸리듯 인간의 행위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일입니다. 만약 욥 자신을 비롯한 사람이 문제의 원인이었다면 욥은 지금처럼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4절의 “조급”은 호흡이 가빠지고 숨을 못 쉴 정도가 아니라 더 깊은 괴로움과 마음의 번민을 나타냅니다(유사한 표현이 등장하는 민 21:4와 삿 16:16 참조). 욥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까닭 없는”, 즉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기 때문에 괴로움이 가중됩니다.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이나 이유를 알면 그에 대한 해결책도 생기는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하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욥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욥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봐달라고 부탁합니다(5).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달라는 부탁입니다. “너희가 나를 보면”으로 번역된 구절을 직역하면 ‘너희는 나에게 몸을 돌려라/향해라’가 됩니다. 욥이 처한 상황과는 관계없는 규범적 지혜의 일반론만 얘기하지 말고, 친구인 욥이 어떠한 상태인지 어떠한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친구들의 몸을 자신을 향해 돌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자신의 말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이후에 나오는 ‘현실을 직시하라’라는 요청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5절과 6절은 놀람과 두려움이 언급되는데, 좁게는 욥 자신이 처한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토로하는 말이면서, 좀더 넓게는 규범적 지혜의 인과응보 원리가 무너진 현실(7-13)에 대한 놀람과 공포를 지칭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욥이 부당하게 폭행당하여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면 친구들도 경악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반성적 지혜의 근거로서의 현실(7-16)

악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침묵은 그들을 하나님의 최후 심판 아래 두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우리의 잘못이 드러나고 교만이 꺾이며 거룩한 삶을 향한 교정이 일어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자녀로 삼아 주셨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평안은 주님이 오시는 날에 산산이 때어지고 부서질 것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7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8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9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10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11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12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13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14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15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16그러나 그들의 행복이 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멀구나(7-16)

 

친구들이 말하는 규범적 지혜의 작동 원리에 대한 욥의 반문은 이것입니다. 7절의 의문문은 다음의 세 질문으로 나뉩니다: (1) 다 죽고 없어져 눈앞에서 사라져야할 악인들이 지금도 저렇게 많이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2) 악인들이 잠시 강성할 수는 있지만 그들은 제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그들은 가까스로 생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천수를 누리며 살고 있는가? (3) 그냥 오래 사는 것 정도가 아니라 왜 악인들은 힘이 세고 또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힘이 강해지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대로라면 악인들은 후손이 없거나(18:19) 있어도 가난한 자에게까지 구걸하며 빌어먹는 비참한 신세로 살아감이 마땅한데(20:10),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들 옆에는 후손들이 튼튼히 버티고 서 있고, 그들은 장수해서 자손들을 직접 눈으로 봅니다(8).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가 악인들에게 임하는 것이 당연한 ‘원리’인데, 그들의 처소는 아무 걱정 없이 평안합니다. 왜 그들의 집은 ‘피우지도 않은 불이 그것을 삼킬 것이고 그의 거처에 남은 것들 모두 타버릴 것이다’(20:26)라는 소발의 말대로 되지 않습니까? 욥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매’(9:34)가 오히려 저들에게는 임하지 않습니다. 욥의 재물과 자식들이 끔찍한 재앙을 맞이한 것과는 정반대로 악인들은 그의 소유물과 자손들까지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수소는 씨를 퍼뜨리는 데 실패가 없고 암소들은 새끼를 낳는 데 실패가 없습니다(10). 개역개정의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라는 번역은 수컷마저 잉태한다는 의미로 오해될 소지가 있는 번역입니다. 악인의 후손들은 춤추며 뛰놀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행복해합니다(12).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고(수명을 다 살고)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13). 악인들은 곧 지혜가 없는 무지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감히 하나님께 ‘당신의 법도를 아는 것에 우리는 관심이 없소’라고 할 정도로 교만한 무지자입니다(14). 인간이 마땅히 섬겨야 할 전능자가 과연 있기나 하느냐고 묻고, 그분을 만나는(“기도한들”) 일이 대체 자신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냐고 묻습니다(15). 여기서 “유익”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의 효용성을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까닭 없는 신앙이 가능한가’라는 사탄의 질문과 연결됩니다. 욥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자 지혜자로 살아가는 이유는 그만한 대가를 하나님으로부터 지불받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좋은 것을 얻기 위한 투자로서 ‘유익’이 있기 때문에 신앙이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의 대가를 빼앗으면, 즉 투자의 효용가치가 사라지면, 욥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릴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지금 욥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악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은 동시에 욥의 반성적 지혜가 “무익한 말”, 즉 아무 효용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엘리바스의 말을 겨냥하기도 합니다(15:3). 선과 악의 구분이 분명하고, 의인과 지혜자에게는 복이 임하고 악인과 무지자에게는 벌이 임하는 선명한 이분법이 소위 ‘종교 장사’에는 훨씬 유리합니다.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에 풍성한 열매가 맺히고 외양간이 소떼와 양떼로 넘쳐난다고 가르쳐야 장사가 됩니다. 하박국과 욥의 신앙은 ‘무익’합니다. 이렇듯 욥이 서술하는 악인들의 ‘현실’은 친구들의 ‘이론’과 전혀 다릅니다. 현실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자손손 이어지는 악인들의 행복과 번영은 그들의 손으로 직접 일군 것이 아닙니다(“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16). 16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그들의 번영(복)은 그들의 손에 있지 않다. 악인들의 도모가 나로부터 멀어지기를!” 뿌린 대로 거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욥 자신은 이러한 악인들의 패거리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아짜트 레샤임’은 “악인의 계획”일 수도 있고 ‘악인들의 무리’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라면, 악인들의 도모에 자신이 혹하지 않기를 스스로에게 타이르는 문맥입니다. 악인들의 견실하게 보이는 행복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도모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기를 바란 것입니다. 후자라면, 욥이 ‘악인들의 무리’에 속해 있지 않다는 의미는 중의적입니다. 첫째, 악한 자들에게 벌어지는 일이 욥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악인에게조차 행복과 번영이 주어지는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온 자신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탄식일 수 있습니다. 둘째, 신앙을 효용가치로 평가하는 무리 속에 가담하는 것을 거부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2장에서 고백한 욥의 신앙은 이미 대가를 초월한 신앙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악한 자들이 번성하며 의로운 자들이 고난에 처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 부조리한 일들을 보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이 땅을 감찰하시며 고난 중에서도 의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상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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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0-01)


하나님을 잘 아는 적하는 사람들

욥기 20장 1-29절


 

전쟁터에서 지휘관이 적군의 동향을 잘못 판단하게 되면 자기 군사를 모조리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한순간의 판단은 전쟁의 승패를 떠나 수많은 군사의 생명을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하는 것입니다. 비단 그런 중대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상 생활에서의 크고 작은 판단 하나는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를 반드시 가져다 주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판단이 흥망의 기로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삶과 죽음의 기로가 되기도 합니다.

 

  • 소발의 두 번째 발언이자 마지막 발언입니다. 4절부터 길게 이어지는 소발의 규범적 지혜는 ‘악인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로 요약될 수 있는데, 욥이 처한 상황과는 무관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 앞선 욥의 탄식에 전혀 무감각한 반응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랑도 잠시오”, “즐거움도 잠깐이니라”라는 지혜’의 말을 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일입니까?

 

창조 때부터 이어온 오래된 지혜(1-3)

우리 자신이 악에 대해 경각심을 갖되 다른 사람의 고난을 이러한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악에서 지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악인들이 맞이한 비참한 결말을 마음에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깨어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의로운 삶을 선택하도록 지혜를 주시고,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1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2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3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1-3)

 

소발의 마지막 발언의 시작은 세 친구의 전형적인 도입부의 형식을 따릅니다. 욥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발언을 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합니다(4:2; 8:2; 11:3; 15:2-6; 18:2-4). 왜냐하면 욥의 말은 지혜의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욥의 주장이 세 친구의 말이 지혜의 말이 아니라고 반박하기 때문입니다.

15장의 엘리바스처럼 소발 역시도 욥과의 대화를 ‘지혜의 대결’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빌닷이 욥의 말을 자신들을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18:3)라고 이해한 것처럼, 소발 역시도 욥의 말을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책망”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욥은 단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을 뿐이고,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지 말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탁했을 뿐입니다. 소발은 자신의 지혜가 오래된 지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4). 전통적인 규범적 지혜가 천지 창조 때부터 정해진 규범을 아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바스와 빌닷이 조상들로부터 지혜를 물려받았음을 강조하며(8:8; 15:18-19), 욥에게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고 질책하는 것(15:7)과 일맥상통합니다. 욥은 자신의 지혜가 오래된 지혜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38:4)라는 질책은 욥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인과응보의 원리가 불변의 진리라고 주장하는 친구들이 하나님의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소발의 지혜(1): 악인의 승리는 잠깐이다(4-11)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악행을 기억하시고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준비하십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잠시 평안하고 강성해 보인다할지라도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서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이 되어야합니다. 영원한 가치에 헌신자들에게 영원한 상급이 있습니다.

 

4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5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6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7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8그는 꿈 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는 환상처럼 사라지리라 9그를 본 눈이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 10그의 아들들은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11그의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4-11)

 

소발이 말하는 지혜의 첫 번째 핵심은 ‘악인의 승리는 잠깐이다’라는 규범적 지혜의 익숙한 표현입니다. 시편의 탄원시에 주로 등장하는 주제이기도 하고(시 37, 73편), 엘리바스와 빌닷도 동일한 주제를 말했습니다(8:11-13; 15:29-33). 악인, 즉 하나님을 모르는 자(“경건하지 못한 자”)의 승리와 기쁨의 함성은 그 소리가 공간적으로 멀리 가지 못하며(미까로브), 그의 행복은 시간적으로도 잠깐일 뿐입니다(5). 잠시나마 그의 ‘키’(개역개정의 “존귀함”)가 하늘에 닿아서 구름을 만질 수 있다 해도 그는 “똥”이나 “꿈”, “환상”처럼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7-8). 기세등등하던 악인들이 사라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는 소발의 말(7,9)은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한탄하는 욥의 말(19:7, 13-15)과 좋은 대비를 이룹니다. 악인은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욥의 주위에 사람이 없는 이유는 그가 악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욥을 떠나거나 멀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눈에서 욥이 안 보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악인의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개역개정의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9)는 ‘메꼬모’를 주어로 해석한 것인데, ‘마꼼’은 남성명사로서 이 문장의 여성 단수 동사 ‘테슈렌누’와 성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어는 여성명사인 상반절의 ‘아인’으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메꼬모’는 부사적으로 덧붙여진 말로 보입니다. 이렇게 9b절을 다시 해석하면, ‘(그를 쳐다보던 눈은) 그가 원래 있던 곳에서 더 이상 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가 됩니다. 악인이 당하는 재앙은 악인 한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그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악인의 자녀들은 가난한 자의 비위를 맞춰가며 그들에게 구걸을 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로 번역된 ‘달림’은 구체적으로는 ‘얇고 가느다란’ 비쩍 마른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여기서 파생된 의미로 ‘낮은’, ‘가난한’, ‘힘없는’, ‘하찮은’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먹을 것이 없어 비쩍 마른 사람에게까지 음식을 구걸해야 하는 처참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1절의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나”는 악인이 한때 잘나가던 시절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5절의 승리의 함성과 6절의 키(머리)가 하늘에 닿을 정도라는 구절, 그리고 10절의 “얻은 재물”과 동일한 의미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11절의 “기세”는 번역자의 첨가입니다. 주어는 상반절의 ‘그의 뼈들’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젊음이 가득했던 악인의 뼈들도 머지않아 무덤에 묻히게 됩니다.

 

 

소발의 지혜(2): 악인은 독을 스스로 삼킨다(12-22)

 

사람의 분노는 결코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인과응보의 법칙을 진리라고 믿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도는 항상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순종해 나가야 합니다.

 

12○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13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을지라도 14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15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18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 돌려 주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삼지 못하리니 19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20○그는 마음에 평안을 알지 못하니 그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겠고 21남기는 것이 없이 모두 먹으니 그런즉 그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22풍족할 때에도 괴로움이 이르리니 모든 재난을 주는 자의 손이 그에게 임하리라(12-22)

 

18장에서 빌닷은 악인이 자신의 꾀에 스스로 넘어가는 것을 “그물”과 “올가미”(8), “덫”과 “올무”(9), “덫”과 “합정”(10)의 비유로 표현했습니다. 동일한 내용을 소발은 음식과 먹는 것에 비유한다. 악인은 악을 달게 여깁니다. 악을 달게 여긴다는 표현은 잠언 9:17(“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에도 나옵니다. 그 악이 너무 달콤해서 악인은 입 속에 넣고 천천히 아껴 먹습니다(13). 그러나 식도를 타고 넘어간 악은 뱃속에서 뱀의 독이 됩니다(14). 악을 입 속에 넣고 천천히 먹는 것은 악인이 부유해서 재물을 가진 것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뱃속에서 그가 삼킨 재물을 토해내게 만드십니다(15). 15절 마지막의 ‘요리쉔누’는 개역개정처럼 “도로 나오게 하심”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반절의 ‘토하다’라는 말과 동의적 평행어가 됩니다. 그러나 동사 야라쉬)는 ‘상속받다’라는 뜻으로, 히필형(사역형)은 ‘(다른 이에게 넘겨주다’, ‘(다른 이에게 주기 위해) 빼앗다’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참조. 삿 1:19;11:24). 만약 이 경우라면, 악인이 입에 넣었던 재물을 토해내면 하나님께서 그 재물을 다른 이에게 주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5:5의 엘리바스의 말(“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과 유사한 진술입니다.

18-19절의 빌닷이 악을 설명하는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는 일견 인과응보의 원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수고한 열매를 자신이 누려야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수고하여 얻은 것”을 빼앗기는 것은 악인 스스로 남의 것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19).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집을 빼앗은 사람의 재물을 악인이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인과응보의 원리가 정확히 적용되는 것입니다. 20-22절에서 계속해서 악인이 잠시 풍족할 수 있고 잠시 재물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그 행복이 오래가지 못하고 곧 재앙이 임할 것이라는 주제를 반복합니다.

 

 

소발의 지혜(3): 악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23-29)

 

많은 성도들이 소발과 같은 잘못을 범합니다. 자기주장을 인정받으려고 하나님의 권위에 기대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잘 모를 때 나타나는 교만과 어리석음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여 남에게 쉽게 충고하기를 주의하고, 조용히 혼자 기도하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3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음식을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 같이 쏟으시리라 24그가 철 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화살을 쏘아 꿰뚫을 것이요 25몸에서 그의 화살을 빼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의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닥치느니라 26큰 어둠이 그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해치리라 27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28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29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23-29)

 

소발의 음식 비유의 결말은 이렇습니다: 악인이 자신의 음식을 먹으려 해도 하나님의 재앙이 그에게 임하는데 마치 그의 밥그릇에 비가 쏟아지는 것과 같습니다(23). 그가 혹시나 하나님의 재앙을 한 번 피할 수 있을지라도 또 다른 재앙이 그를 맞이할 것입니다(24). 철제 무기와 구리 화살 중 어느 것이 더 치명적인지 우열을 가릴 수 없습니다. 레위기 26:19과 신명기 28:23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악인들에게 철과 놋의 재앙이 임합니다. 악인이 혹시 자신의 몸을 꿰뚫은 놋화살을 빼내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 독으로 인한 끔찍한 고통이 그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25). 하나님의 화살을 맞아 고통스럽다고 탄식한 욥의 외침(욥 6:4; 16:13)에 대한 ‘친구’ 소발의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인에게 지정되고 악인이 받아야 할 몫과 유산(29)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꽁꽁 숨겨둔 것(쩨푸나브)에까지 온통 어둠이 임할 것이며, 아무도 피우지 않은 불, 즉 하나님의 불이 그가 감추어둔 것과 그의 거처를 모두 불태워(26) 그가 가진 것은 모두 휩쓸려 떠내려갈 것입니다(28). 누군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하늘과 땅이 그의 악을 세상에 폭로할 것입니다(28). 악인은 결국 자신이 뿌린 악을 스스로 삼키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복잡다단하여 한 가지 이론이나 주장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삶은 신비입니다. 평소에는 은혜롭게 들리던 설교나 말들이 갑자기 이해 불가 또는 언어도단이 됩니다. 따라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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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9-01)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욥기 19장 1-29절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사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보면서 ‘이렇다’라고 생각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반대로 평가 되었을 때면, 과연 사람을 제대로 보는 눈이 있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기적입니다. 인간관계 역시 순수하기 쉽지 않습니다. 비교적 사이가 좋은 관계였음에도 재력, 능력, 명예, 매력 등이 떨어지면 사람들은 멀리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욥과 가깝게 여기고 살던 사람들이 그를 귀찮게 여기고 불편해 합니다.

 

  • 욥기 19장, 욥기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25절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제3부 “내 주는 살아계시니(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라는 아리아의 가사로 쓰일 정도로 유명하면서, 동시에 욥기의 구절을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주제와 연결하는 탈 문맥적 해석의 대표적인 예 중 하나입니다(발닷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와 마찬가지로). 오히려 19장의 중요성은 욥의 마지막 발언인 42:2-6과 길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친구들에 대한 비판 : 너희의 지혜는 폭력이다(1-5)

우리는 인간의 현실을 알고 인간을 사랑하며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실망은 필연입니다. 우리가 신뢰해야 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사람은 의지나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결국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물론 이기심이 자신에게도 깊이 지잡고 있음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3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4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느냐 5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하려니와(1-5)

 

욥을 비참하게 만든 것은 사랑하는 가족과 종들과 어린 아이까지 그를 멸시하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이제 욥의 대답의 시작은 빌닷의 즐겨 사용하는 어투를 흉내 냅니다. “어느 때까지”라는 표현은 8:2과 18:2에서 빌닷이 입을 떼는 상용 어구였습니다. 상대의 말을 빌리는 논쟁 기법은 첫째, 상대가 해준 말을 상대에게 되돌려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만약 악인의 운명이 빌닷이 묘사한 그대로라면, 그 운명을 맞이할 사람은 바로 빌닷입니다. 둘째, 상대방이 한 말의 기표(시니피앙)를 사용하면서도 그 의미(시니피에)를 전혀 다르게 함으로써 상대의 말을 약하게 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익숙한 전통적인 이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욥은 빌닷의 표현을 빌려 시작하지만, 이번에도 욥의 대답은 앞선 빌닷의 말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2-3절은 2인칭 복수 동사를 사용하여 욥의 영혼을 말살하는 폭력적인 말을 한 것이 빌닷만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욥은 친구들의 ‘지혜’가 고통 받는 자의 영혼을 괴롭히고 짓부수는 짓이라고 고발합니다(2). 바른 길을 가르치려는 친구들의 ‘위로’는 욥에게 있어 “모욕”과 “학대”에 다름 아닙니다(3).

4절은 개역개정이 의문문으로 번역했지만 원문은 평서문입니다. ‘옴남’은 ‘확실히’, ‘진실로’라는 의미의 부사인데, 욥은 이 부사를 비꼬는 투나 반어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12:2의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라는 문장도 표면적 의미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4절을 뉘앙스를 살려 번역하면, ‘그래, 정말 내가 잘못했다고, 잘못이 내게 있다고 치자’ 정도가 됩니다. 허물이 있다고 가정할 뿐 자신의 허물 때문에 심판받는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옴남’으로 시작하는 5절에도 반어법이 사용되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5절을 직역하면 ‘너희는 나보다 더 커서 나의 잘못을 가르쳐준다’입니다. 가정법 상황을 전제합니다.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내게 자만하는구나.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을 입증할 증거를 갖고 증언해 다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의 한탄(1): 고난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달라(6-12)!

아무리 단단한 강철도 한여름의 열기에는 휩니다. 기반이 단단한 사람도 시련의 무게가 크면 금세 무너질 것 같은 한계점에 이릅니다. 욥의 상태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세 친구에게 정죄를 받았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은 가혹한 시련을 맞아 하나님을 원망하고 한탄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6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7내가 폭행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도움을 간구하였으나 정의가 없구나 8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9나의 영광을 거두어가시며 나의 관모를 머리에서 벗기시고 10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희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11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12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돋우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을 쳤구나(7-12)

 

욥의 진심은 6절부터 표현됩니다. 여기서도 욥은 빌닷의 논거에 반박합니다. 빌닷이 재앙이란 악인이 스스로 쳐놓은 그물과 올가미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라 할 때(18:8-10), 욥은 이를 부인하면서 그 그물은 하나님께서 내게 둘러치신 것이라고 항변합니다(6). 자신이 누군가를 해치려는 악한 마음으로 함정을 파놓은 것이 아니라는 무죄 주장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지금껏 줄곧 해오던 진술의 연장입니다. 욥의 앞길이 막힌 것도(8), 그의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9) 그의 희망이 뿌리까지 뽑혀버려 이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10)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자신을 공격하시며(11), 한 번의 재앙도 아니고 연속적으로 한꺼번에 재앙들이 몰려오게 하신 것도 하나님입니다(12). 자신의 행악이 불러온 재앙이 아니라는 증언입니다. 욥의 진술은 1장에서 연속된 재앙에 대한 진술(1:13-19)과 일치합니다. 하늘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는 인간에게 이렇게 “까닭 없이” 주어지는 고난은 ‘폭력’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7). “까닭”을 알면 고통을 견딜 힘이 더 생길 수 있습니다. 원인을 제공한 이를 원망하거나 아니면 잘못된일을 바꾸거나 고치거나, 혹은 후회를 통해서도 고통의 시간을 견뎌낼 힘이 조금은 더 생깁니다. 그러나 욥은 그 “까닭”을 모르고 어떠한 논리(인과응보 같은)로 자신의 고난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욥의 인내’입니다. 그는 단지 고통을 호소합니다. 아무리 도와달라고 간청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아무도 사태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음을 아파합니다(7).

 

욥의 한탄(2): 내게는 아무도 없다(13-20)

자신이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낫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폄하 하는 것만큼 교만한 모습은 없습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십니다. 성경은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는 이들을 꾸짖고 있습니다(약 4:12).

 

13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낯선 사람이 되었구나 14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15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16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간청하여야 하겠구나 17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하며 내 허리의 자식들도 나를 가련하게 여기는구나 18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19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20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13-20)

 

욥에게 임한 고난은 첫째로 재산과 가족을 잃는 것이었고, 둘째로 극심한 육체적 고통이었습니다. 이 고난은 또 다른 고통을 초래합니다. 욥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세 친구)은 욥을 정죄하기에 급급하고, 그 외의 친척과 지인들은 욥에게서 멀어졌습니다(13). “형제들”과 ‘지인들’의 반의어가 바로 “낯선 사람”(이방인)입니다. 욥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반대로 뒤집어졌다는 것이 반의어들의 짝으로 표현됩니다. ‘가까운 것’이 ‘멀어졌고’(14a), ‘알던 것’이 ‘잊혔다’(14b). 욥의 집에 얹혀살던 ‘난민’과 ‘여종’이 욥을 ‘낯선 사람’이자 ‘외국인’으로 취급합니다(15). 종이 주인에게 은혜를 구하는 것이 뒤집혀서 오히려 주인이 종에게 은혜를 입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16).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인 아내와 가족, 형제들이 욥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18). 욥의 아내에 대한 진술은 여기 외에 2:9-10과 31:10에 나옵니다. 176절의 ‘내 배의 자식들’은 그 자체로는 욥의 후손(자녀와 손주들)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욥의 자녀들이 모두 사망했다는 앞선 진술에 비추어 ‘배’를 어머니의 자궁(모태)으로 해석함으로써 모순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즉, ‘나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자식들’은 곧 형제자매를 지칭한다고 해석하면, 17b절은 13절의 “나의 형제들이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와 무리 없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욥의 아내가 여전히 현재 욥과 함께 있는가 아닌가, “내 허리의 자식들”이 욥의 자녀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형제를 지칭하는지, 혹은 어딘가 배 다른 자녀들이 또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욥이 말하자 한 것은 가장 가까이 있었고 가까이 있어야할 사람들이 멀어졌고(19a), 욥의 사랑과 보호를 받아온 사람들이 욥에게 사랑과 보호를 되돌려 주지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19b).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용되는 원리라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친구들을 향한 탄원: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21-22)

성도는 죽음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들에게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성도는 지금 욥이 친구들에게 말하는 경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인 우리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21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22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21-22)

 

욥은 친구들에게 통 사정합니다: ‘나의 친구들아, 너희는 제발 좀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눈물 어린 호소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하는 방식으로 욥은 자신의 간절함을 표현합니다. 다시 한 번, ‘불쌍히 여겨달라’는 동사 ‘하난’은 “까닭 없이”의 ‘힌남’과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입니다. 제발 욥 자신에게서 고난의 까닭을 찾으려 하지 말아 달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기” 때문입니다(21b). 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만으로도 충분히 괴롭습니다. 친구들의 ‘위로의 말’과 ‘지혜의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고난만큼이나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탄원: 내 눈으로 하나님을 뵐 것이다(23-29)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원수를 갚아 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오해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마음에 원망과 분노를 품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화살로 원수들을 흩으시고 번개를 번쩍이셔서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셨다고 말할 날이 우리에게도 찾아올 것입니다. 모든 것을 공평하고 정의롭게 판단하실 하나님께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맡기고,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범죄의 자리에서 돌이키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3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28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29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23-29)

 

23절은 ‘미-이텐’으로 시작하며 ‘불가능한 가정이나 소망’을 의미하는데, 자신의 말이 기록되어 책에 쓰이기를 바라는 욥의 소원은 결국 성취되어 우리가 그의 외침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기의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극심한 고난에 처한 이가 회복의 희망을 계속 품고 있기란 힘듭니다. 그런데 욥은 계속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분(고알리)이 살아계심을 확고히 믿고 있습니다(‘나는 안다’). 자신의 온 살가죽이 다 벗겨지더라도 맨살로라도 그분을 뵐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27절의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른 것 아닌 바로 내 눈으로 그분을 볼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이 낫습니다(27). 우리는 그의 소원이 실현되는 장엄한 장면을 함께 목도하게 됩니다.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믿음의 사람들을 떠올라야 합니다. 그들은 온갖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자이시며 최종 심판자라는 사실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향한 이 믿음을 본받아 승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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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8-01)

 


빌닷의 두 번째 발언

욥기 18장 1-21절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이해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해 탄식할 수 있지만, 그 고난에서 구원해 주실 분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로 찬양으로 예배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문제 해결에 참된 경험을 하게 됩니다.

 

  • 빌닷은 두 번째로 엘리바스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원색적으로 욥을 공격합니다. 빌닷의 두 번째 발언의 특징 중 하나는 앞선 발언의 “내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와 같은 미래의 소망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빌닷의 두 번째 발언의 핵심은 고통을 겪는 것이 곧 죄가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으로, 악인이 맞이하게 될 운명 혹은 귀결에만 집중합니다. 규범적 지혜의 일반론을 통해서 욥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욥에 대한 공격(1-4)

악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소망 없이 멸망을 당합니다. 죄인들은 죽음에 에워싸일 때 의지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속자도, 중재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닷은 욥이 이런 결말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1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3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4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1-4)

 

빌닷의 두 번째 변론입니다. 엘리바스와 빌닷의 논변에 물러서지 않고 더 많은 말로 두 친구를 반박하고 저항하는 욥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을 포함한 다른 논객들(“우리가")이 지혜를 말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시작합니다. 빌닷은 짜증스럽게 반응합니다. 왜 욥이 자신을 포함한 친구들의 논변을 부정한 짐승처럼 대하느냐고 힐문합니다. 그런데 개역개정의 3절은 주어가 욥인 듯이 번역했는데, 원문은 “우리”로 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왜 우리가 짐승처럼 간주되느냐? 너희 눈에는 우리가 더러워 보이느냐?”입니다. 그는 욥을 “울분을 터트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면서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고 묻습니다. 피조세계의 변화를 초래할 만큼 욥 네가 대단한 사람이 나는 힐문입니다. 빌닷이 욥의 문제점으로 여기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깨달으라”(2)

 

먼저 지혜를 갖춰야 규범적 지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지혜자가 되어야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는 어불성설로, 빌닷 자신의 설득이 실패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셈입니다.

 

(2)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3)

 

‘너희는 왜 우리를 동물로 취급하느냐’라고 하는데, 규범적 지혜는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지혜가 허락되었고 동물은 지혜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여깁니다. 여기 부정한 짐승 취급한다는 말은 지혜가 없는 아둔한 자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욥의 지혜는 규범적 지혜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이분법을 제기하는 것에 반론을 제기합니다(전 3:18-21).

 

(3) “부정하게 보느냐”(3)

 

정결과 부정의 이분법(정결한 것은 선한 것이고 부정한 것은 나쁜 것이다)도 규범적 지혜에 속합니다. 부정하게 여긴다는 것은 짐승으로 취급한다는 말과 동일하게 무지한 자와 악한 자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빌닷의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언설(38-41장)과 좋은 대비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언급하시는 수많은 동물들(사자, 까마귀, 들나귀, 타조, 말, 매, 독수리, 그리고 베헤못과 리워야단)은 ‘부정한 짐승’에 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반성적 지혜는 이러한 짐승들을 정결/부정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 구절을 “부정하게”가 아니라 '어리석게'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4)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4)

 

빌닷은 욥을 분노(화) 때문에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규범적 지혜는 화내는 사람을 지혜자로 여기지 않습니다(“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잠 22:24). 빌닷의 말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1) 욥은 지혜자가 아닙니다; (2) 욥의 고난은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도 욥이 분노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시겠습니까? (5)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4): 땅이 저절로 없어지거나 바위가 스스로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런 현상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정해진 규범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른 악인의 운명(5-21)

악인이 번성하기도, 의인이 고난 당하기도 합니다. 의인이 세상에서 형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온전한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견지하는 것이 참된 성공임을, 빌밧은 알지 못했습니다.

 

5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6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7그의 활기찬 걸음이 피곤하여지고 그가 마련한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8이는 그의 발이 그물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려들며 9그의 발 뒤꿈치는 덫에 치이고 그의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10그를 잡을 덫이 땅에 숨겨져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목에 있으며 11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라게 하고 그 뒤를 쫓아갈 것이며 12그의 힘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 13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 14그가 의지하던 것들이 장막에서 뽑히며 그는 공포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15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의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의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16밑으로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로는 그의 가지가 시들 것이며 17그를 기념함이 땅에서 사라지고 거리에서는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18그는 광명으로부터 흑암으로 쫓겨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 19그는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 그가 거하던 곳에는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 20그의 운명에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 오는 자가 깜짝 놀라리라 21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5-21)

 

빌닷은 욥의 무지를 비난한 다음에 이제 자신의 지혜를 밝힙니다. 그 지혜는 15:17-35의 엘리바스의 지혜와 다르지 않습니다. 빌닷의 지혜는 잠언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1) 빛과 어둠의 이분법(5-6)

 

“빛”, “불꽃”, “등불”은 선한 것이고 어둠은 나쁜 것입니다. 밝은 것은 의인과 지혜자에게 속해 있고 어둠은 악인과 무지자의 영역입니다. 설사 악인에게 빛이 있고 그가 사는 곳이 잠시나마 밝을지라도 그 빛은 어두워지고 등불은 꺼지고 맙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악인에게는 어둠이 찾아온다는 주제는 잠언에 흔하게 나타납니다(잠 4:18-19; 13:9; 20:20; 24:20).

 

(2) 재앙은 ‘덫’과 같은 것입니다(7-10)

 

7절의 “활기”와 “피곤”의 이분법도 익숙한 비유입니다(사 40:30-31). 악인이 스스로의 꾀에 빠진다는 표현도 잘 알려진 표현입니다(시 5:10; 10:2; 64:8; 잠 1:31;14:17;26:27;28:10). “그물”과 “올가미,” “덫”과 “함정”은 평행어로서 야생동물을 잡기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위험을 깨닫는 지혜가 없어서 동물들은 스스로 미끼를 뭅니다. 자신의 무지로 인해 ‘스스로 재앙을 선택한다’는 주제는 규범적 지혜에서 흔히 사용됩니다(욥 5:5;22:10; 시 9:16;10:9;11:6;69:22; 잠 1:17;7:23;22:5;29:5). 7절의 “꾀”는 선(의인, 지혜자)의 영역에도 속하고 악(악인, 무지자)의 영역에도 속하는 어휘입니다. 의인과 지혜자에게는 “교훈”(잠 1:25, 30; 8:14)이나 “권고”(잠 12:15;19:20; 27:9)가 되지만, 악인의 ‘지혜’는 곧 자기가 빠질 함정이 됩니다.

 

(3) 공포와 재앙과 질병은 악인/무지자의 운명입니다(11-13)

 

무서움과 놀람(11)은 악인/무지자의 특질입니다(삼상 16:14-15; 욥 18:14; 시 73:19). “기근”과 “재앙”(12), “질병”과 “사망”(13)도 그의 몫입니다. 공포가 악인을 둘러싸고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며, 그의 주위에는 재앙이 도사리고 있습니다(11-12). 아픈 것은, 특별히 죽을 정도로 아픈 것(“사망의 장자”)은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악인이기 때문입니다(13). 질병을 죄 때문이라는 여기는 생각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에피소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요 9:1-12).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은 이 규범적 지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4) 악인이 거하는 곳은 없어지거나 타인에게 빼앗깁니다(14-15)

 

“장막”과 “처소”는 생존의 필수 요소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이분법은 잠언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홍하리라”(잠 14:11),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가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잠 24:15). 악인은 기본적인 생존권을 위협받습니다. “유황”(14절의 “공포의 왕”)이 그가 거하는 집에 뿌려집니다(시 11:6 참조). 이 구절은 욥의 자녀들이 큰 바람으로 집이 무너져 죽게 된 것을 연상시킵니다(욥 2:19) 빌닷이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8:4)라고 판단한 근거가 됩니다.

 

(5) 악인은 기억되지 않고 잊힙니다(16-20)

 

악인이 죽으면(‘메마르고 시들면’ 혹은 ‘잘려지면’, 16) 그에 대한 기억은 사라질 것입니다. 과거와 조상을 “기억”하는 것은 지혜를 배우는 중요한 학습법입니다. 반면에 잊음과 잊힘은 악인의 운명입니다: ‘의인을 기억하는 것은 복이고 악인의 이름은 썩는다’(잠 10:7). 흥미로운 점은 “이름”과 “기억”이 평행어로 쓰이는 점인데, 히브리어에서 “이름”은 자손 번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창 12:2), “그(압살롬)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삼하 18:18),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사 48:19). 그래서 빌닷의 말은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로 이어집니다(19). 악인의 패망은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는 오는 자”가 놀라게 하는데, 이 표현은 천지사방에 있는 많은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후손과 선조를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20). 이렇게 악인의 운명을 정리한 빌닷은 자신의 말이 확실하다는 점을 강조하며(“참으로”) 말을 마칩니다(21).


많은 사람이 인과응보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인이 고난 당하고 의인이 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우리의 생각과 어긋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결코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 날까지 인내와 믿음으로 그분이 인정하시는 의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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