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24-01)
악인 심판을 갈망하는 욥
욥기 24장 1-25절
미국 시카고에서는 휘튼칼리지라고 하는 명문 대학이 있습니다. 그 대학에는 플랭카드 홀이라는 건물 2층에는 그 학교가 배출한 선교사들의 명단과 사진이 붙어있습니다. 몇 사람의 사진에는 십자가가 붙어있는데, 그 의미는 선교사의 삶을 살다가 순교하였다는 표시라고 합니다. 그 학교 출신 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짐 엘리엇’이라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 24장은 엘리바스의 규범적 지혜에 반박하는 점에서는 23장과 연속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반성적 지혜이 독특한 대안적인 선악 개념이 표현되는 점에서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장입니다. 이 장에서는 규범적 지혜의 어휘와 개념들(부자와 가난한 자, 빛과 어둠 등)을 욥이 어떤 방식으로 뒤틀어서 반성적 지혜를 설명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규범적 지혜자들에 대한 반론(1)
당연하게 믿고 있는 진리가 현실 속에서 실현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그 진리에 대한 의문과 회의를 갖게 됩니다. 특별히 악에 대한 심판이 지연되는 현실을 발견하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욥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세게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불평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1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1)
1절 상반절의 원문은 이해하기 까다롭습니다. ‘니쯔페누’는 ‘감추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왜 시간들이 전능자로부터/에게서 감추어지지 않는가?’입니다. 동사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대입했을 때 의미가 명확해지지 않기에 많은 번역들은 다양한 의미로 이해합니다: 정해지다, 알려지다 등. 의문사와 부정어가 혼합된 문장이라 수사의문문으로서 본래의 전체의미가 긍정문(시기가 감추어졌다)인지 부정문(시기가 감추어지지 않았다)인지도 혼동됩니다. 따라서 상반절의 의미는 하반절을 통해 유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반절은 ‘왜 그분을 아는 자들이 그의 날들을 보지 못하는가?’입니다. ‘그분을 아는 자들’이란 엘리바스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안다고 믿는) 규범적 지혜자들을 일컫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패턴을 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예를 들어 자신이 언제 죽을 지 왜 그들은 알지 못하는지를 반문하는 표현입니다. 만약 상반절이 ‘시기들이 감추어졌다’라는 의미라면, 1절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이 정하신 시기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규범을 안다고 하는 자들마저 그 시기를 알지 못한다'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반면, ‘시기들이 감추어지지 않았다’라는 의미라면,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하신 시기(규범/패턴)를 알려 주신다는데, 왜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날도 미리 예측하지 못하는가’ 정도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상반절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이든 간에, 욥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패턴을 안다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패턴을 알려주신다고 믿는 규범적 지혜자들조차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항상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악하고 불의한 현실(2-17)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악한 일들에 사람들의 마음이 상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생활 방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라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을 사는 올바른 처세술이며 성공으로 이끄는 삶의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악인이 큰소리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 합니까?
2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 3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4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서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5그들은 거친 광야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빈 들이 그들의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음식을 내는구나 6밭에서 남의 꼴을 베며 악인이 남겨 둔 포도를 따며 7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워도 덮을 것이 없으며 8산중에서 만난 소나기에 젖으며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9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10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리고 11그 사람들의 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 하면서 술 틀을 밟느니라 12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13○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그 도리를 알지 못하며 그 길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14사람을 죽이는 자는 밝을 때에 일어나서 학대 받는 자나 가난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둑 같이 되며 15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가리며 16어둠을 틈타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잠그고 있으므로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17그들은 아침을 죽음의 그늘 같이 여기니 죽음의 그늘의 두려움을 앎이니라(2-17)
2절부터 24절까지 욥은 악인들과 그들의 결말, 하나님의 개입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것은 친구들의 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제들이었습니다. 욥이 이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악인들과 그들의 부당한 행위들을 고발하면서도 ‘악’이나 ‘무지(지혜없음)’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욥은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서술 방식을 채택합니다. 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어떤 사람들인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악한 행위들을 하게 만들었는지, 그런 악인들의 결말은 어떠한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욥의 친구들만큼의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욥이 목도한 불의한 현실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땅의 경계선을 자기 마음대로 바꿔서 남의 땅을 빼앗기도 하고, 경계를 변경하여 그 땅 안에 있던 양떼를 자기 소유로 착복하기도 합니다(2). “고아”와 “과부”로 상징되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소유조차 빼앗는 사람들이 있습니다(3). 가난한 자들은 학대를 당해서 길거리에서 쫓겨납니다(4).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라는 개역개정의 번역은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홉베우’는 푸알형으로 수동의 의미가 강합니다. 스스로 숨는 것이 아니라 빼앗고 학대하는 자들에 의해서 ‘거리에서 사라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거리에서 쫓겨난 이들은 “거친 광야”와 “빈 들”, 즉,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워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에서 먹거리를 구해야만 하는 처지에 이릅니다(5). 이 가난한 자들은 ‘남의 것’ 혹은 동물이나 먹는 사료를 훔쳐먹거나, 땅에 떨어져 상태가 나쁜 포도를 주워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6). 이들은 추운 밤에도 입을 옷 하나없이 벌거벗은 채로 잠을 자야 합니다(7). 비가 오면 겨우 바위틈에서나 비를 피하려 하지만 그들의 몸은 흠뻑 젖고 맙니다(8). 사람들은 아이를 어머니 품에서 빼앗아 고아로 만들거나 혹은 고아를 비롯한 가난한 자의 것마저 폭력으로 착취합니다(9). 이렇게 하나 남은 것마저 빼앗긴 사람들은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닙니다(10절 상반절). 그들은 밭과 포도원을 소유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가 됩니다. 그들이 운반할 곡식은 풍성 하나 그들이 그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10절 하반절). 그들이 짜내는 기름과 포도주를 그들이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11). 먹거리가 없어서 먹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배고프고 목마릅니다.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에서 고통에 허덕이는 자들이 아무리 도와 달라고 외쳐도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시지 않습니다, 혹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다(12). 빛을 싫어하고 밝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13). 욥은 이 말을 할 때 ‘빛’은 좋은 것이고 ‘어둠’은 나쁜 것이라는 가치판단을 개입시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빛이 있는 낮에도 악을 저지르고 빛이 없는 밤에도 악을 저지릅니다. 살인자들은 ‘빛에(“밝을 때에”)’ 사람을 죽입니다. 그것도 가난하고 학대받는 불쌍한 사람들을 말입니다(14절 상반절). 어두워지면 도둑질을 하거나(14절 하반절) 간음을 저지릅니다(15). 도둑질을 하느라 밤에 활동하는 자들은 낮에는 집에 틀어박혀 잠을 잡니다. 그들에게는 ‘낮’이 곧 ‘밤’이고, 빛이 곧 어둠입니다(16-17).
악인의 결말(18-24)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부조리 연속입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도 성공을 얻지 못합니다. 불법과 부정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좌시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때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참고 견뎌야 합니다.
18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라 19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빼앗나니 스올이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20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21그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를 박대하며 과부를 선대하지 아니하는도다 22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 23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24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18-24)
18절부터 24절은 악인들이 처하게 될 운명에 대해 말합니다. 악인의 결말을 설명하는 욥의 언어는 친구들의 것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그들의 삶은 “빠르게 지나가고” 그들의 소유도 “저주를” 받습니다(18).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며(19) ‘잊혀짐’이 그들의 운명입니다(20). 저주와 죽음과 잊혀짐은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가 규정하는 악인의 결말과 동일합니다. 또한 그들이 높아져 잠시 잘 나가는 때가 있으나 곧 낮아지고 추수 때의 이삭처럼 잘려 나갈 것이라는 말(24)은 앞선 소발의 주장과 유사합니다(“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20:5). 그런데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이런 “강포한 자들”을 인도하시는 분도(22), 그들에게 평안을 주시며 그들에게 의지가 되시는 분도(23)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23절의 개역개정은 상반절과 하반절을 반의적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이 번역은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를 ‘악에 대한 심판’이라고 보는 번역자의 해석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규범적 지혜의 시각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는 것인데, 18-24절의 전반적인 표현이 규범적 지혜의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이런 해석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해석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평안을 주시고 그들의 삶을 지탱하시고 그들을 보호하신다’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 중 어떤 해석이든, 이 구절이 모든 것을 관할하시고 모든 일이 그분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패턴의 불확실성(25)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악한 방식으로 이웃을 이용하거나 억압해 부와 명성을 쌓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가르칩니다(롬 12:1). 성도들은 세상에서 말하는 세속적 성공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영원한 상급에 삶의 목적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25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고 지적하거나 내 말을 헛되게 만들 자 누구랴(25)
악인의 결말을 규범적 지혜와 거의 유사하게 표현하고 있는 욥의 주장의 결말은, 그러나 친구들의 것과 다릅니다. 규범적 지혜는 반드시 그 규범대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욥은 악인의 운명이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주목합니다.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가 욥의 주장의 핵심입니다. 악인들의 결말이 이럴 수 있지만, 혹은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꼭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규범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하는 기계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패턴에 따라 현실이 흘러가지 않아도 그 현실이 잘못되었다거나(“거짓”) 현실이 허상이라고(“헛되게”) 말할 수 없습니다(25절 하반절). 현실은 현실입니다. 자연세계와 인간의 삶에 규범이나 패턴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규범과 패턴에는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공의로운 분이라는 사실이 변함없는 진리인 이상 악인의 형통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로 인해 이 세상에서 평안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우리는 장차 이루어질 악인들의 멸망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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