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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8-01)

 


빌닷의 두 번째 발언

욥기 18장 1-21절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이해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해 탄식할 수 있지만, 그 고난에서 구원해 주실 분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로 찬양으로 예배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문제 해결에 참된 경험을 하게 됩니다.

 

  • 빌닷은 두 번째로 엘리바스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원색적으로 욥을 공격합니다. 빌닷의 두 번째 발언의 특징 중 하나는 앞선 발언의 “내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와 같은 미래의 소망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빌닷의 두 번째 발언의 핵심은 고통을 겪는 것이 곧 죄가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으로, 악인이 맞이하게 될 운명 혹은 귀결에만 집중합니다. 규범적 지혜의 일반론을 통해서 욥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욥에 대한 공격(1-4)

악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소망 없이 멸망을 당합니다. 죄인들은 죽음에 에워싸일 때 의지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속자도, 중재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닷은 욥이 이런 결말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1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3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4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1-4)

 

빌닷의 두 번째 변론입니다. 엘리바스와 빌닷의 논변에 물러서지 않고 더 많은 말로 두 친구를 반박하고 저항하는 욥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을 포함한 다른 논객들(“우리가")이 지혜를 말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시작합니다. 빌닷은 짜증스럽게 반응합니다. 왜 욥이 자신을 포함한 친구들의 논변을 부정한 짐승처럼 대하느냐고 힐문합니다. 그런데 개역개정의 3절은 주어가 욥인 듯이 번역했는데, 원문은 “우리”로 되어 있습니다. 직역하면 “왜 우리가 짐승처럼 간주되느냐? 너희 눈에는 우리가 더러워 보이느냐?”입니다. 그는 욥을 “울분을 터트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면서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고 묻습니다. 피조세계의 변화를 초래할 만큼 욥 네가 대단한 사람이 나는 힐문입니다. 빌닷이 욥의 문제점으로 여기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깨달으라”(2)

 

먼저 지혜를 갖춰야 규범적 지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지혜자가 되어야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는 어불성설로, 빌닷 자신의 설득이 실패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셈입니다.

 

(2)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3)

 

‘너희는 왜 우리를 동물로 취급하느냐’라고 하는데, 규범적 지혜는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지혜가 허락되었고 동물은 지혜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여깁니다. 여기 부정한 짐승 취급한다는 말은 지혜가 없는 아둔한 자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욥의 지혜는 규범적 지혜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이분법을 제기하는 것에 반론을 제기합니다(전 3:18-21).

 

(3) “부정하게 보느냐”(3)

 

정결과 부정의 이분법(정결한 것은 선한 것이고 부정한 것은 나쁜 것이다)도 규범적 지혜에 속합니다. 부정하게 여긴다는 것은 짐승으로 취급한다는 말과 동일하게 무지한 자와 악한 자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빌닷의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언설(38-41장)과 좋은 대비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언급하시는 수많은 동물들(사자, 까마귀, 들나귀, 타조, 말, 매, 독수리, 그리고 베헤못과 리워야단)은 ‘부정한 짐승’에 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반성적 지혜는 이러한 짐승들을 정결/부정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 구절을 “부정하게”가 아니라 '어리석게'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4)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4)

 

빌닷은 욥을 분노(화) 때문에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규범적 지혜는 화내는 사람을 지혜자로 여기지 않습니다(“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잠 22:24). 빌닷의 말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1) 욥은 지혜자가 아닙니다; (2) 욥의 고난은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도 욥이 분노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시겠습니까? (5)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4): 땅이 저절로 없어지거나 바위가 스스로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런 현상에 변화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정해진 규범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른 악인의 운명(5-21)

악인이 번성하기도, 의인이 고난 당하기도 합니다. 의인이 세상에서 형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온전한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견지하는 것이 참된 성공임을, 빌밧은 알지 못했습니다.

 

5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6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7그의 활기찬 걸음이 피곤하여지고 그가 마련한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8이는 그의 발이 그물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려들며 9그의 발 뒤꿈치는 덫에 치이고 그의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10그를 잡을 덫이 땅에 숨겨져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목에 있으며 11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라게 하고 그 뒤를 쫓아갈 것이며 12그의 힘은 기근으로 말미암아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 13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 14그가 의지하던 것들이 장막에서 뽑히며 그는 공포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15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의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의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16밑으로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로는 그의 가지가 시들 것이며 17그를 기념함이 땅에서 사라지고 거리에서는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18그는 광명으로부터 흑암으로 쫓겨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 19그는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 그가 거하던 곳에는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 20그의 운명에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 오는 자가 깜짝 놀라리라 21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5-21)

 

빌닷은 욥의 무지를 비난한 다음에 이제 자신의 지혜를 밝힙니다. 그 지혜는 15:17-35의 엘리바스의 지혜와 다르지 않습니다. 빌닷의 지혜는 잠언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1) 빛과 어둠의 이분법(5-6)

 

“빛”, “불꽃”, “등불”은 선한 것이고 어둠은 나쁜 것입니다. 밝은 것은 의인과 지혜자에게 속해 있고 어둠은 악인과 무지자의 영역입니다. 설사 악인에게 빛이 있고 그가 사는 곳이 잠시나마 밝을지라도 그 빛은 어두워지고 등불은 꺼지고 맙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악인에게는 어둠이 찾아온다는 주제는 잠언에 흔하게 나타납니다(잠 4:18-19; 13:9; 20:20; 24:20).

 

(2) 재앙은 ‘덫’과 같은 것입니다(7-10)

 

7절의 “활기”와 “피곤”의 이분법도 익숙한 비유입니다(사 40:30-31). 악인이 스스로의 꾀에 빠진다는 표현도 잘 알려진 표현입니다(시 5:10; 10:2; 64:8; 잠 1:31;14:17;26:27;28:10). “그물”과 “올가미,” “덫”과 “함정”은 평행어로서 야생동물을 잡기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위험을 깨닫는 지혜가 없어서 동물들은 스스로 미끼를 뭅니다. 자신의 무지로 인해 ‘스스로 재앙을 선택한다’는 주제는 규범적 지혜에서 흔히 사용됩니다(욥 5:5;22:10; 시 9:16;10:9;11:6;69:22; 잠 1:17;7:23;22:5;29:5). 7절의 “꾀”는 선(의인, 지혜자)의 영역에도 속하고 악(악인, 무지자)의 영역에도 속하는 어휘입니다. 의인과 지혜자에게는 “교훈”(잠 1:25, 30; 8:14)이나 “권고”(잠 12:15;19:20; 27:9)가 되지만, 악인의 ‘지혜’는 곧 자기가 빠질 함정이 됩니다.

 

(3) 공포와 재앙과 질병은 악인/무지자의 운명입니다(11-13)

 

무서움과 놀람(11)은 악인/무지자의 특질입니다(삼상 16:14-15; 욥 18:14; 시 73:19). “기근”과 “재앙”(12), “질병”과 “사망”(13)도 그의 몫입니다. 공포가 악인을 둘러싸고 어디를 가나 따라다니며, 그의 주위에는 재앙이 도사리고 있습니다(11-12). 아픈 것은, 특별히 죽을 정도로 아픈 것(“사망의 장자”)은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악인이기 때문입니다(13). 질병을 죄 때문이라는 여기는 생각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에피소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요 9:1-12).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은 이 규범적 지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4) 악인이 거하는 곳은 없어지거나 타인에게 빼앗깁니다(14-15)

 

“장막”과 “처소”는 생존의 필수 요소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이분법은 잠언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홍하리라”(잠 14:11),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가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잠 24:15). 악인은 기본적인 생존권을 위협받습니다. “유황”(14절의 “공포의 왕”)이 그가 거하는 집에 뿌려집니다(시 11:6 참조). 이 구절은 욥의 자녀들이 큰 바람으로 집이 무너져 죽게 된 것을 연상시킵니다(욥 2:19) 빌닷이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8:4)라고 판단한 근거가 됩니다.

 

(5) 악인은 기억되지 않고 잊힙니다(16-20)

 

악인이 죽으면(‘메마르고 시들면’ 혹은 ‘잘려지면’, 16) 그에 대한 기억은 사라질 것입니다. 과거와 조상을 “기억”하는 것은 지혜를 배우는 중요한 학습법입니다. 반면에 잊음과 잊힘은 악인의 운명입니다: ‘의인을 기억하는 것은 복이고 악인의 이름은 썩는다’(잠 10:7). 흥미로운 점은 “이름”과 “기억”이 평행어로 쓰이는 점인데, 히브리어에서 “이름”은 자손 번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창 12:2), “그(압살롬)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삼하 18:18),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사 48:19). 그래서 빌닷의 말은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로 이어집니다(19). 악인의 패망은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는 오는 자”가 놀라게 하는데, 이 표현은 천지사방에 있는 많은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후손과 선조를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20). 이렇게 악인의 운명을 정리한 빌닷은 자신의 말이 확실하다는 점을 강조하며(“참으로”) 말을 마칩니다(21).


많은 사람이 인과응보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인이 고난 당하고 의인이 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우리의 생각과 어긋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결코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는 날까지 인내와 믿음으로 그분이 인정하시는 의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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