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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5-02)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2)

욥기 15장 17-35절


 

세상에는 소위 ‘목소리 큰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들과 협의하고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주장만 늘어놓는 사람입니다. 서로가 잘 모르는 상태일 때는 이런 사람이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에서 이런 사람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엘리바스는 고난 당하는 자와의 대화를 ‘누가 더 지혜로운가’의 대결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1-16절에서 욥의 지혜를 깎아내린 후 이제 엘리바스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지혜를 뽐냅니다. 그 지혜는 엘리바스가 가담한 지혜의 서클에서 배타적으로 전수된 특별하고 신비로운 지혜입니다. 지혜자들 안에서는 온전히 전술되어 왔지만 외부인들에게는 누설된 적이 없는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의 내용도 그만큼이나 특별하고 신비로우겠습니까?

 

엘리바스가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특별한 지혜(17-19)

종종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면서 일장 훈계를 놓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식의 지식은 곧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 지식이 교만으로 이어지고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합니다(마 15:14). 항상 어떤 마음으로 다른 이들 앞에 서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17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18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9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느니라(17-19)

 

이제는 엘리바스의 지혜를 풀어낼 시간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본 것을 말하겠다고 합니다(17). 이것은 4장에서 “내가 보건대”(4:8)로 표현된 엘리바스가 직접 경험한 지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혜는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4:8)라는 누구나 다 아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보편적인 진리였습니다. 여기서도 사정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17절의 직접 경험을 강조한 뒤 엘리바스는 그 경험을 조상들의 지혜와 연결시킵니다: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18). 리바스의 ‘개인적 경험’은 결국 (빌닷이 강조한)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지혜에 다름 아닙니다. 즉, 엘리바스의 ‘개인적 경험’은 직접 체험한 특수한 개별적 경험이 아니라 지혜자 집단의 공통적인 규범적 지혜입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이 배운 지혜의 ‘배타성’을 강조합니다. 이 지혜는 “지혜로운 자들” 내부에서는 아무런 숨김없이 그대로 전수되어 온 것이지만(18), 그 지혜의 세계(“이 땅”)는 오직 이 ‘내부자들’에게만 허락된 것입니다. 외지인은 들어올 수 없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입니다(19). “외인”으로 번역된 ‘자르’는 ‘낯선’, ‘다른’, ‘외부의’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비합법적인’, ‘자격 없는’, ‘금지된’, ‘이상한’ 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확장되는 단어입니다. 출애굽기 29:33에서는 제사장(‘거룩한[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신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쓰이고,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나 이방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많이 쓰입니다(사 1:7; 렘 5:19; 30:8; 51:51; 겔 11:9,28:7). 특히 규범적 지혜인 잠언에서는 “너희(내부자들)”와 “타인(외부자들)”을 나누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잠 5:10, 17; 6:1; 11:15; 14:10; 20:16; 27:2,13). 이러한 이분법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대체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기준은 대체 무엇입니까? 엘리바스가 말하는 “지혜로운 자들”은 누구이며 “외인”은 누구입니까?

 

두려움으로 인해 하나님을 공격하려는 악인(20-27)

지식은 정직과 함께해야 합니다. 정직이 사라진 지식은 너무 쉽게 교만과 탐욕의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은 악인의 번성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결국 망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형통과 번성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20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의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포악자의 햇수는 정해졌으므로 21그의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고 그가 평안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이르리니 22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 칼날이 숨어서 기다리느니라 23그는 헤매며 음식을 구하여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의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24환난과 역경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라 25이는 그의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에게 힘을 과시하였음이니라 26그는 목을 세우고 방패를 들고 하나님께 달려드니 27그의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20-27)

 

이렇게 남들에게는 비밀로 감추어진 지혜의 내용은 그렇게 특별하지도 신비롭지도 않습니다. 악한 사람은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또한 그 삶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20). “포악자의 햇수”가 정해졌다는 표현은 사는 날을 ‘셀 수 있다’는 것으로 짧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셀 수 없는’ 것은 “크고 측량할수 없는” 하나님의 크심과 놀라우심을 가리킵니다(5:9;9:10). 악인에게 공포가 임하고, 악인이 의인/지혜자에게 할당된 평안(샬롬)을 잠시나마 누릴 때에도 곧 그 평안을 파괴하는 자가 나타납니다(21). 어둠과 죽음(“칼날”)이 그의 몫입니다(22). 두려움과 어둠, 혹은 죽음의 공포가 악인을 휩싸면 그의 다음 행보는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24-25). “싸움을 준비한 왕”(24b)이라는 표현은 중의적으로 사용된 듯합니다. (1) 24a절의 주어인 “환난과 역경”이 마치 아주 강한 왕처럼 악인을 사로잡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개역개정의 번역이 이 해석을 따랐다). 그리고 동시에 (2) 25절과의 연관성으로 보아 “싸움을 준비한 왕”은 악인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악인이 자기가 받는 공격이나 혹은 앞으로 받게 될 공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전쟁을 준비하는 왕처럼 하나님을 공격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악인은 손을 들어 하나님을 공격합니다. 한 가지, 개역개정의 “대적하며”와 “교만하여”(25)는 원문에는 없는 번역자의 첨가입니다. 원문은 ‘그는 하나님께 손을 뻗고 전능자를 (힘으로) 이기려 한다’입니다. “그는 목을 세우고”(26)라는 개역개정의 해석은 ‘목’이 악인의 목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지만 여기서도 다른 판단이 가능합니다: ‘그(악인)는 그(하나님)의 목을 향해 달려간다.’ 이어지는 ‘두꺼운 등을 가진 방패’도 악인의 무기로 번역했지만, 칼이나 창 같은 흔한 공격형 무기가 아닌 수비형 무기를 들고 하나님께 달려간다는 문장은 어색합니다. 대안적인 해석으로는 ‘그(악인)는 그(하나님)의 두꺼운 방패 같은 등을 (공격하러 달려든다)’를 제안할 수 있습니다. 27절의 뚱뚱함을 나타내는 표현들(살찐 얼굴, 지방이 많은 허리 혹은 넓적다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인을 묘사하는 구절로 이해할 수 있지만, 또한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예레미야 5:28에서도 살찜과 지방(기름)이 악인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살지고 윤택하여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그러나 이런 예는 극히 드뭅니다. 가뭄이 쉽게 드는 가나안 구릉 지역에 위치한 고대 이스라엘 지역에서 오히려 지방(기름)과 살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지방 혹은 유지방을 뜻하는 ‘헬레브’는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것을 가리킵니다(창 45:18; 민 18:12, 29, 30, 32). 사람 몸에 지방이 많아 살찌는 것도 아주 긍정적인 가치를 지닙니다(창 27:39; 49:20; 삿 3:29; 느 9:25). 참고로, 사사기 3:29에서 개역개정이 “장사”로 번역한 단어는 ‘살찐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27절을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즉, 두려움에 사로잡힌 악인이 하나님을 공격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두꺼운 목과 등, 살집이 많은 얼굴과 허벅지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이 구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악인이 살이 쪘다는 해석은 15장의 문맥으로 보아서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먹을 것이 없어 헤매는 자로 묘사되며(23)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에서 살아갑니다(28). 그는 재산도 없고 앞으로도 재산이 증식될 리가 없습니다(29).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이 얼굴에 살이 찌고 허리(혹은 허벅지)에 지방이 많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뚱뚱한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현대의 미적 기준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오히려 왜소하고 비쩍 마른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근동 지역에서 발견된 신상들을 생각해보라).

20-27절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엘리바스의 악인에 대한 묘사가 욥에 대한 평가라는 사실입니다. 악인은 고난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치 최후의 발악을 하듯 하나님을 공격합니다. 욥이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배타적인 지혜자 그룹에서 물려받은 엘리바스의 신비한 지혜가 가르쳐주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욥은 악인입니다. (2) 그래서 욥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3) 고통이 욥을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만들었습니다. (3) 그 공포가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공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악인의 결말(28-35)

우리가 행해야 할 것, 우리를 통해 나타나야 하는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어떤 것이 온전한 사람으로 귀결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귀하고 가치 있어 보이는 지식이나 교훈이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28그는 황폐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주하였음이니라 29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보존되지 못하고 그의 소유가 땅에서 증식되지 못할 것이라 30어두운 곳을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의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으로 그가 불려가리라 31그가 스스로 속아 허무한 것을 믿지 아니할 것은 허무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32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인즉 그의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33포도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 34경건하지 못한 무리는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며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35그들은 재난을 잉태하고 죄악을 낳으며 그들의 뱃속에 속임을 준비하느니라(28-35)

 

28-35절은 모두 규범적 지혜가 정의하는 악인의 결말입니다: (1) 악인은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에 살거나 혹은 그가 사는 곳은 곧 무너져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됩니다(28); (2) 그는 부자가 되지 못하고 그의 재산은 증식되지 못합니다(29); (3) 그는 어둠 속에서 머물며 하나님의 뜨거운 입김으로 말라 비틀어집니다(30); (4) 그는 헛된 것(‘가짜/거짓’)을 믿고 헛된 것을 돌려받습니다(31); (5)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습니다(32-33); (6) 악인은 후손이 없고 그의 집은 불탑니다(34); (7) (후손을 낳는 대신) 그가 낳는 것은 고통과 죄악과 속임입니다. 악인의 결말을 설명하는 이 구절의 특징은 누가 악인인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뇌물을 받는 자”(34)가 악인이라는 것만 유일하게 알 수 있을 뿐입니다(욥이 뇌물을 받은 적이 있는가?). 반면에, 이 구절을 통해 엘리바스의 지혜가 의인/지혜자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역으로 추정할 수있습니다. 그는 부유하고 장수하며 많은 후손이 있고 고통 없이 편안한 인생을 삽니다. 욥은 이 정의에 해당 되지 않으므로 악인 임에 분명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교만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자신의 경험과 나이를 내세우면서 욥을 윽박지르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교만한 자였습니다. “내 말 잘 들어”는 교만의 언어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말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의 말을 진심으로 경청할 줄 압니다. 들으라고 하기 전에 먼저 듣습니다. 잘 말하기보다 잘 듣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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