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욥기(15-01)

 


엘리바스의 두 번째 욥에 대한 변론

욥기 15장 1-16절


세상에는 다양한 이해와 다층적인 견해가 존재합니다. 획일적인 주장으론 부족할 만큼 복잡합니다. 진리에 근접하려는 노력을 하되 자기 견해만 옳은 듯이 믿고서 주장하면, 독선과 배제와 폭력을 유발하고 소통이 단절됩니다. 오류에서 벗어나 온전해지는 데 필요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 세 친구들과의 두번째 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첫 번째 논쟁과 두 번째 논쟁의 차이점에 주목하며 어떤 변화 혹은 발전을 강조하는 읽기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논쟁에서 등장하지 않은 새로운 주제가 등장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친구들의 말은 짧아지면서 고난과 아픔의 문제에 점점 더 둔감해지며 규범적 지혜의 신학을 더욱 원론적으로 나열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라지고 원리와 원칙만 남습니다.

 

욥에 대한 반박(1)(1-6)

타인을 함부로 정죄하고 비판하는 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교만한 자입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께 정죄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보이고, 믿음으로 덕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을 그의 복부에 채우겠느냐 3어찌 도움이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4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5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6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1-6)

 

엘리바스의 두 번째 발언인 15장의 전반부를 구성하는 1-16절은 욥의 발언을 평가하고 반박하는 것에 주된 목적을 둡니다. 후반부(17-35절)에서 엘리바스 자신의 규범적 지혜를 본격적으로 논하기 이전에 상대방의 주장을 약하게 만드는 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이 장에서 반박 논지를 전개하는 특징은 욥이 한 말들 중 정확히 어떤 말이나 표현을 반박하는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네가 너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다 엘리바스가 지적하는 욥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지혜자는 욥처럼 감정적이지 않다(2-3)

 

욥을 반박하는 엘리바스의 첫번째 문장은 수사의문문으로 시작합니다. 지혜자라면 ‘바람의 지식’으로 대답할 리 없고 자신의 뱃속에 동쪽으로 채울 리가 있겠습니까? ‘바람의 지식’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는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지만(문맥을 벗어나면 ‘영적 지혜’라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평행어인 하반절의 ‘동쪽’과 연결하여 ‘동쪽에서 부는 바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동풍은 뜨겁고 건조한 바람으로, 성경에서는 곡식을 말라죽게 하거나(창 41:6,23), 애굽에 재앙을 불러오고 (출 10:13), 홍해의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는 장면(출 14:21)에서 나타납니다. 욥의 말을 매우 뜨겁고 강력한 바람으로 평가하는 것은 빌닷의 “거센 바람”(욥 8:2)이라는 평가와 일치하며, 그 의미는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욥 5:2)라는 엘리바스의 이전 말과 연결됩니다. 분노와 시기처럼 극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지혜자의 특질이 아닙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 14:30),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4). 욥처럼 분노와 화를 표출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익한 것으로(3) 지혜자라면 그렇게 말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지혜’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욥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말입니다.

 

(2)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4)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버렸다고 비난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르아)는 잠언이 말하듯 모든 지혜와 지식의 출발점입니다(잠 1:7;9:10).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자의 첫 번째 특질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무엇을 근거로 욥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버렸다고 주장하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욥기의 저자와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서 욥이 당대의 누구보다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합니다(욥 1:1,8;2:3). 이 평가를 엘리바스는 모르고 있습니다. 욥은 오히려 하나님께 자신을 두렵게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9:34-35).

 

(3) 무지한 말을 하는 걸 보니 악인이 분명하다(5-6)

 

엘리바스는 욥의 무죄 항변을 참지 못합니다. 5절과 6절은 동일한 의미를 다른 표현을 써서 나타내는 평행절입니다. ‘너의 죄가 너의 입을 가르친다’라는 표현 자체로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 가능하지만 6절의 ‘너의 입이 너를 악하게 한다’라는 구절과 연결하여 이해한다면 엘리바스의 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욥이 죄인이기 때문에 지혜가 아닌 말을 하는 것이며, 또한 순환적으로, 무지의 말을 내뱉는 것을 보니 악인임이 분명합니다. 혹은 더 나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말을 함으로써 욥은 스스로를 더욱 죄인으로 만들어갑니다. 욥을 정죄한 것은 엘리바스 자신이 아니라 욥의 입이라는 것입니다. 욥의 입술이 욥에게 불리하게 증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비판은 욥의 어떤 말이 문제가 되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당한 비판이라기보다 공허한 비난으로 보입니다.

 

욥에 대한 반박(2)(7-16)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무조건 존중받아야 한다는 태도는 전형적인 우매함입니다. 설령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지혜로 누군가를 질책하거나 굴복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결코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지혜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태도로 드러납니다.

 

7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8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9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10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 11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12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13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 14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15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16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7-16)

 

1-6절을 종합하면, 욥이 하는 말이 결코 지혜자의 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엘리바스는 계속해서 욥이 지혜자 일 수 없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논증하려고 시도합니다.

 

(1) 욥이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7,9-10)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라는 질문은 수사의문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서 중요한 것은 규범적 지혜의 과거 지향적 세계관입니다. 지혜는 과거에 있다는 개념이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규범적 지혜에서 늙음과 나이 듦은 지혜와 동의가 됩니다. 가장 먼저 태어난 사람이 가장 많은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태어난 사람, 즉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욥의 지혜를 약하게 만듭니다. 7절은 10절과 연결됩니다. “우리 중에는” 욥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있다는 적잖이 과장된 표현은 욥의 지혜보다 엘리바스의 지혜가 더 우위에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때 “우리”는 세 친구들만을 지칭하는 표현은 아닌 듯합니다. 엘리바스가 소속된 규범적 지혜의 수호자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여겨집니다. 욥보다 더 나이 많은 사람도 포함된 지혜자 집단이기에 욥의 나이의 한계 안에서 깨달은 지혜를 “우리”가 모를 리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2) 욥은 신적 존재가 아니다(8)

 

욥이 천지가 창조되던 때(“산들이 있기 전에”) 존재하지 않은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천상회의를 엿들었을 리도 없습니다. 개역개정이 “(하나님의) 오묘하심”으로 번역한 ‘소드’는 ‘모임’ 혹은 ‘회의/회합’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 단어는 예레미야 23:18의 “누가 여호와의 회의(소드)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욥기 안에서는 1-2장의 하나님과 사탄,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임을 지칭합니다. 이 자리에 욥이 참석했을 리가 없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던 때에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욥의 지혜를 약화시킵니다. 그러나 욥의 지혜를 약화 시키는 주장은 엘리바스 자신의 지혜 역시 동일하게 약화시킵니다. 욥의 아버지뻘이나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라도 천상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없고 천지창조 때에 함께 있던 사람도 없습니다. 이 질문은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로 시작하는 하나님의 첫 질문들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의 질문 역시 욥에게만 해당하는 질문 아닙니다.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 욥은 한낱 인간일 뿐이다(11-16)

 

욥의 진술을 가치 하락시키려는 엘리바스의 세 번째 전술은 하나님의 크심과 인간의 작음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인간(“여인에게서 난 자”)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습니다(14). “거룩한 자들”은 평행어인 “하늘”에 비추어 해, 달, 별들과 같은 천체를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에 위치한 존재들조차 신뢰하거나 의지하지 않으시는 분이고, 그분의 기준에서는 그 맑고 투명한 하늘조차 순결(자크)하지 않습니다(15). ‘의’와 ‘순결’ 그 자체이신 하나님에 비하면 제아무리 의롭고 순결한 인간도 더럽고 흠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16). 하나님 앞에 하찮은 존재가 감히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분노를 터뜨리고 입을 함부로 놀릴 수는 없습니다(12-13).

16절이 묘사하는 사람은 욥을 가리키는 말로 보입니다. 다시 한 번, 이 평가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욥 1:8; 2:3)와 정확히 상반됩니다. 욥의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엘리바스의 말은 그 자신도 동일하게 깎아내립니다. 만약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악하고 부정한 존재라면,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인간 모두가 욥과 동일한 징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엘리바스의 논리는 왜 엘리바스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욥과 같은 고난 혹은 ‘징벌’을 받지 않는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합니다. 엘리바스의 ‘인간에 대한 일반론’에서 자신은 제외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무턱대고 반박하고 자기주장을 관철시키려는 태도로는 어떤 목적도 이룰 수 없습니다.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굴복시키고자 하는 교훈은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자기 오류에 빠뜨려 신뢰성을 떨어뜨립니다.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지혜롭게 숙고해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