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13-01)
소발에 대한 계속되는 욥의 항변
욥기 13장 1-19절
당신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혹시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아는 지식과 경험을 근거로 가르치려 하시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지식과 경험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사랑의 마음으로 품어 주는 것입니다. 명철한 판단보다 아픔을 안아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떠한 말보다 침묵이 더 유익할 때가 있습니다. 침묵 가운데 주어지는 참된 위로는 고난 중에 있는 자에 고통을 덜어줍니다.
- 욥기 12장이 규범적 지혜의 한계를 논리적으로 지적하며 친구들의 말에 대한 비판을 전재하는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13장의 욥은 친구들의 말에 대한 평가를 하나씩 나열하면서 감정에 호소합니다. 특별히,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친구들의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까. 어떤 것이 진정한 위로인가에 대해 깊은 울림이 있는 말을 합니다. 이어서 욥은 친두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말을 올곧게 들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친구들의 말에 대한 욥의 평가(1-12)
타인의 불행 앞에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를 위로해야 하고, 어떻게든 낙담하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욥의 친구들처럼 진정한 위로를 전하지 못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교만과 자기 지혜로 위로보다 상처를 주곤합니다. 아마 세 친구들처럼 ‘정답’을 주려고 햇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도 잘 모르는 답을 주기 위해 수고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답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1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2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3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4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5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6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7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8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 9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10만일 너희가 몰래 낯을 따를진대 그가 반드시 책망하시리니 11그의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 12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1-12)
13장은 12장과 연결되며, 세 친구 모두에게 주는 욥의 대답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선악 이분법을 초월하실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 인과응보의 원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실 세계를 직시하라는 말 다음에 이어집니다. 이 장에서는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 규범적 지혜를 적용하려는 시도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설명합니다.
12장에서 욥은 친구들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인과응보라는 렌즈를 통해 각색된 채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반면에 욥은 맛을 보면 무슨 맛인지 아는 것처럼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요청합니다(12:11). 13장을 시작하며 욥은 자신의 지혜는 이론적이거나 피상적인 지혜가 아니라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이고 귀로 듣고 깨달은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1).
(1) 첫 번째 비판: 너희의 지혜는 나도 알고 남들도 다 아는 것이다(2,12)
친구들이 욥에게 가르치려는 규범적 지혜는 어떤 특별한 비밀이 아닙니다. ‘환상’ 같은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엘리바스)이 아니며, 선조들의 지혜를 각고의 노력을 통해 갈고 닦아야 알게 되는 것(빌닷)도 아닙니다. 좋은 것을 뿌리면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씨앗을 뿌리면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기본적인 원리는 욥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고(2), 너무나 뻔하고 남들도 다 아는 말들입니다(12). 12절 상반절의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라는 표현을 풀이하면, 우선 “격언”은 ‘지카론’을 번역한 것으로, 직역하면 ‘너희의 기억’입니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지혜를 기억하는 것은 규범적 지혜에서 가장 중요한 학습법입니다. 그 다음 “재”로 번역되는 ‘에페르’는 하반절의 “토성”의 ‘호메르’와 더불어 크신 하나님에 대비하여 작고 천한 인간을 상징하는 단어로 쓰입니다. 정리하면, 12절은 ‘너희가 지키려는 그 조상으로부터 배운 지식은 지극히 인간적인 속담들에 불과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2) 두 번째 비판:너희의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4,7)
욥은 친구들이 ‘거짓말을 퍼뜨리는 자들’이고 ‘돌팔이 의사’일 뿐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합니다(4). 그들의 말이 거짓말인 것은 직접적인 경험에 입각한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욥이 사는 지역에 함께 살지 않아서 욥이나 욥의 자녀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신학적 신념에 따라 그들이 죄를 지었음이 분명하다고 단정 짓습니다. 욥과 자녀들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욥기의 독자들은 친구들의 말이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욥의 평가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친구들을 ‘헛된 치유자’로 규정한 욥의 말에서 그들이 하려는 것이 욥을 치유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문하고 위로하려는 방문 목적은 욥을 고치려는 시도로 변질됩니다. 그들의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3) 비판: 너희의 말은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것이다(7-8,11)
친구들이 이렇듯 거짓말을 하고 가짜 치유자 행세를 하려는 의도는 고난 당하는 욥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행위일 뿐입니다. 욥과 그의자녀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면서까지 그들이 ‘살리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입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지켜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위하여”라고 번역된 전치사 ‘라메드’는 '~에게’로도 ‘~를 위하여’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는 하나님에게 거짓을 말하는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하여’라는 해석이 다음절인 8절의 의미와 더 잘 연결됩니다. 친구들은 하나님의 편을 들면서 하나님을 위해 욥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호하고 변호하려는 시도를 욥기의 하나님은 거부합니다.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선함과 의로움을 변호하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38-41장을 보라).
욥기의 반성적 지혜는 권선징악/인과응보의 시각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것을 ‘거짓’이고 ‘헛된’ 것이라고 비판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변호하거나 하나님을 위해 변명하는 것이 신앙인의 역할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반성적 지혜가 드러내는 절대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은 인간의 변호가 필요할 정도로 약하신 분이 아닙니다. 11절의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는 일종의 저주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이 천벌받을 놈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경외)하지 않는 행위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4) 네 번째 비판: 고난 당하는 자들 앞에서 침묵하며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다(5-6)
친구들의 본래 목적인 위문과 위로를 위해서라면 첫 칠 일 동안처럼 욥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질울며”(2:12) 친구의 극심한 고통 앞에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2:13). 욥은 친구들의 ‘진정한 지혜’는 ‘침묵’이었다고 말합니다(5). 고통당하는 자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주는 것이 진정한 위로라고 말하는 욥의 말(6)은 아마도 욥과 유사한 고난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일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부탁하는 욥(13-19)
어떤 의미에서 사람의 위로는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함께 부둥켜안고 울어도 결국 자기를 위해, 자기 의를 위해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좋은 마음으로 상대방을 돕고 세울 능력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 가져도 실패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계속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참된 위로를 간구해야 합니다.
13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14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15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16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17너희들은 내 말을 분명히 들으라 내가 너희 귀에 알려 줄 것이 있느니라 18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19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13-19)
욥은 이제 5-6절에서 언급한 올바른 위로자의 태도를 친구들에게 요청합니다. 제발 좀 입 다물고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13절을 다시 번역하자면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가 말할 수 있도록’이 됩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처럼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한 말일 수도 있지만, 친구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바로잡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들의 논리에 의하면 욥의 재앙은 욥 자신이 불러온 것이 됩니다.
14절은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내 자신이 내 살을 뜯어 먹고 내 손으로 내 목을 칠 수 있겠는가!’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내 살을 내 이로 물고”라는 표현은 ‘어떻게 내가 나의 살을 내 이빨로 들어 올릴 수 있나’로 직역됩니다.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표현이 때문에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이 표현은 대표적인 우리말 성경 번역들도 의미를 다양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나라고 해서 어찌 이를 악물고서라도”; 공동번역, “나 이를 악물고.” 친구들의 인과응보의 법칙을 비판하는 문맥에서 파악한다면, 자신의 죄로 스스로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빨로 자신의 살을 드는 것’은 한편으론 어리석고(지혜가 아니고), 또 한편으론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욥은 죽어서라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평가받기를 원합니다. 친구들에게 말하는 것이 소용없는 짓이어서 하나님께 말씀드리겠다는 욥의 소망과 마찬가지로(3), 지나온 삶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친구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15). “희망”으로 번역한 ‘어야헬’은 무엇인가 소망하고 희망하는 것이기보다는 ‘기다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욥은 자신의 극심한 고통으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죽음이 자신으로 인해 촉발된 것이 아니라(14)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하나님을 대면하여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하나님께 묻고자 합니다. 그분만은 욥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살아온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8).
인간은 본능적으로 질병, 재난, 경제적 어려움 등을 두려워하고 걱정합니다. 사실 이것이 욥의 친구들의 태도였습니다. 생명은 결국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인정하며 담대하 나서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담대함을 소유하는 데까지 성장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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