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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17-01)


하나님을 의지하는 욥

욥기 16장 18절-17장 16절


우리가 시련 속에서 외치는 탄식은 사람들을 향할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이해와 공감은 한계가 있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이해와 공감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시련 중에 찾고 의지했던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인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 욥의 말이 계속 이어져 절규가 됩니다. 욥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조롱을 당하게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욥의 항변을 들어주실 분도 하나님 한 분뿐이고 욥이 옳다고 욥은 무죄하다고 판정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욥은 고난 이전과 마찬가지로 “까닭 없는” 극심한 고통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욥의 절규(1): 나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기를(18-22)

우리도 힘든 일을 당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욥과 같이 우리의 증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을 내어놓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한 모든 사정을 아시며 해결해 주시는 아버지가 되실 뿐아니라, 우리의 호소를 들으시고 기꺼이 우리의 증인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18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19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20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21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22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18-22)

 

욥은 18절의 “땅”과 “피” 그리고 “부르짖음”을 말하고 있는데, 17절과 함께 창세기 4장의 아벨의 죽음을 연상시킵니다. 개역이 “포학”이라고 번역하는 ‘하마스’(7)는 폭력을 의미하고 폭력을 행사한 자는 ‘가인’입니다. 아벨의 제사(제사도 일종의 “기도”라고 한다면)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정결”한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수난과 최초의 죽음은 무죄한 자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도저히 인과응보의 원리를 적용할 수 없습니다. 땅으로 하여금 자신의 피를 덮지(“가리지”) 말기를, 자신의 부르짖음이 땅에서 그대로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아벨의 피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했듯이 자신의 울부짖음 또한 하나님께 닿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벨처럼 무죄하게 고통당하는 것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욥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욥의 무죄를 아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욥에게서 이 고난을 제거해주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주시는 분도 거두시는 분”이라고 했던 욥의 최초의 고백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면 중간에서 문제를 중재하는 사람이 있듯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중재자가 있기를 바랍니다(21). 하나님과 욥 사이의 ‘수직적인 갈등’을 중간에서 중재해줄 사람은 없습니다(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 혹은 성령 같은 개념은 이 시대에 없었다).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둘이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곧 그렇게 될 거라고 욥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몇 년 지나지 않아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절의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에서 “조롱하는 자)”로 번역된 단어는 ‘멜리쯔’입니다. 이 단어는 잠언에서 ‘조롱하다’, ‘비웃다’, ‘업신여기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지만(잠 3:34;9:12;14:9;19:28), 그 밖에서는 ‘중재자’, ‘통역자’, ‘해석자’, ‘가르치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창 42:23; 대하32:31; 욥 33:23; 사 43:27). 따라서 본문을 ‘내 친구들은 나를 가르치려고 하지만 (혹은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재자 노릇을 하지만) 나의 눈은 하나님을 향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로 번역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욥의 절규(2): 하나님 외에 누가 내 손을 잡아주겠습니까(17:1-5)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편을 들어주는 변호사가 필요합니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편에 서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의뢰인을 보호하여 의뢰인이 고민하고 결정하는 시간을 벌어 줍니다. 욥은 자신을 변호해 줄 중재자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1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 2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 3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 4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마소서 5보상을 얻으려고 친구를 비난하는 자는 그의 자손들의 눈이 멀게 되리라(1-5)

 

16절을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로 번역하면, 바로 앞 절인 16:22과 잘 연결됩니다. 욥은 이제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칠십인역(LXX)은 이와는 다르게 ‘나는 무덤을 찾아다니지만 얻지 못했다’로 읽고 있습니다. 이 독법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2절과 잘 연결됩니다. ‘나는 죽고 싶지만 죽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고 있구나.’ 이런 해석의 차이는 동사 ‘니즈아쿠’가 이 구절에서만 단 한 번 쓰인 단어(hapax)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근은 아람어에서 ‘잘리다’, ‘(불이) 꺼지다’, ‘끝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의미를 적용하여 본문을 직역하면 ‘나에게는 무덤들이 잘려나갔다(없어졌다)’가 됩니다. 칠십인역의 해석에 좀 더 가까운 결과물입니다. 욥은 자신을 조롱하는 이들의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탄식합니다(2). 그러면서 동시에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신 이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4). 이 고통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거둬 가실 분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손을 잡아달라고, 욥의 무죄를 믿어주고 지지해줄 이가 하나님 외에 대체 누가 있겠냐고 외칩니다(3).

5절은 일종의 속담이나 격언으로 여겨지는데, 문장이 워낙 함축적이어서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직역하면 ‘몫을 위해 그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그의 자식들의 눈은 끝난다/멈춘다/죽는다’입니다. 우리말 번역 성경들도 모두 다르게 해석합니다: “옛 격언에도 이르기를 ‘돈에 눈이 멀어 친구를 버리면, 자식이 눈이 먼다’ 하였다”(새번역); “제 자식은 못 먹어 눈이 멀어 가는데 분깃을 받아 가라고 친구들을 청한다더라고”(공동번역). 하경택은 “어떤 사람이 친구들에게 물려줄 유산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의 말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의 자손들의 눈이 쇠하여질 정도로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하고 실망만 안겨주게 될 것이다”로 풀이합니다.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자식들에게 나눠줄 유산이 있다고 이웃들에게 자랑해봤자 자식이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인가.’ 5절이 4절에서 이어지는 ‘악인들의 결과’가 아니라, 6절과의 문맥 속에서 욥 자신에게 들려지는 조롱의 말(“속담거리”)이라는 해석입니다. ‘헬레끄’가 ‘상속할 유산’을 의미한다고 가정하면, 이 속담은 누군가 자녀들에게 상속할 유산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니는 상황을 언급하고 있는 듯합니다. 유산에 대한 언급은 규범적 지혜의 가장 큰 복인 ‘부귀’와 ‘자녀’(욥 1:23 참조)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규범적) 지혜자/의인의 자녀가 ‘눈이 멀게 되는’ 질병 혹은 죽음을 겪는 상황은 규범적 패턴이 깨진 상태입니다. 전도서가 지적하는 것처럼, 수고의 대가를 수고하지 않은 후손이 물려받게 되는 상황(전 2:21)이나, 유산을 물려줄 후손이 없음에도 부귀를 추구하는 것(전 4:8)은 규범적 패턴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욥의 절규(3): 너희의 지혜는 지혜가 아니다(17:6-10)

이 땅에서 우리의 의로움을 입증할 유일한 보증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없습니다. 암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피의 공로를 의지 하는 자마다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이를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아 영원한 심판에 이를 것입니다.

 

6하나님이 나를 백성의 속담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7내 눈은 근심 때문에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8정직한 자는 이로 말미암아 놀라고 죄 없는 자는 경건하지 못한 자 때문에 분을 내나니 9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10너희는 모두 다시 올지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6-10)

 

6-10절은 무죄한 자가 당하는 고난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반응을 비판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번역의 스펙트럼을 넓게 주지 않아서 이해하기 쉽습니다. 8-9절에서는 규범적 지혜의 익숙한 어휘가 주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정직한 자”, “죄 없는 자”, “경건하지 못한 자”, “의인”, “손이 깨끗한 자.” 욥은 규범적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인과응보의 원리가 무너진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1) 고난 받는 무죄한 자에게 침을 뱉으며 조롱해서는 안 됩니다(6).

(2) 인과응보의 원리가 무너진 현실 앞에서 놀라고 본누해야 합니다(8).

(3)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의인”)은 규범적 지혜의 원리에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9).

 

규범적 지혜는 욥의 삶을 지탱해준 근간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 살아왔습니다. 지금 비록 그가 처한 고난은 인과응보의 원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까닭 없는” 고난이지만, 예외가 있다고 해서 규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혜자는 예외에도 불구하고 규범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욥의 절규(4):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11-16)

고난에서 구원해 주실 이는 하나님뿐입니다. 비록 그 고난을 허락하신 이가 하나님이라하더라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보증이 되어 주셨습니다. 당신의 독생자인 예수님까지 우리 죄를 위한 대가로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에 시달리고 있든지 그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어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음과 탄식을 다 듣고 계시며, 이미 가장 근본적 문제인 죄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11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계획, 내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졌구나 12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 앞에서 어둠이 가깝다 하는구나 13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으매 14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15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16우리가 흙 속에서 쉴 때에는 희망이 스올의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11-16)

 

욥기 17장을 마무리하는 욥의 절규는 지금까지의 그의 다른 발언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언급으로 끝을 맺습니다(7:21; 10:20-22; 14:18-22). 11절의 “내 계획”과 “내 마음의 소원”이라는 번역은 현대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러나 과거 지향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고대인들에게는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짐마’는 규범적 지혜의 어휘로, 패턴을 잘 알고 그 패턴에 따라 계획을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과거를 잘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내 마음의 소원”을 직역하면 ‘내 심장이 상속받은 것들’입니다. 즉, 조상들로부터 배운 규범적 지혜를 뜻합니다. 욥은 그 동안 자신의 삶을 지탱해오던 것들이 다 무너졌음을 고통스럽게 토로합니다. 욥을 둘러싼 사람들 모두 밤을 낮이라 하고, 어둠을 빛이라고 말합니다. 낮과 밤, 빛과 어둠을 선명하게 나누던 이분법이 무너진 것입니다. 욥은 더 이상 삶을 지속할 힘이 없습니다. 그저 바라는 것은 무덤(“스올의 문”)으로 내려가는 것뿐입니다.


고난 중에 우리가 찾아야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억울한 상황을 아시며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모든 상황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구원으로 인해 마침내 독수리같이 힘차게 비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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