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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9-01)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욥기 9장 1-16절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죄의 은혜입니다. 이는 인간이 죄인임을 전재로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욥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인 인간의 본질을 다시 한 번 깨닫기를 바랍니다.

 

  • 빌닷의 첫 번째 발언(8장)에 대한 욥의 응답의 전반부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로 욥의 죽은 자녀들을 저주하며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빌닷의 말에 대해 욥은 저항합니다. 여기에서는 반성적 지혜의 두 가지 중요한 주제가 다루어집니다. 첫째,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인간의 생활 영역을 한참 벗어나는 것이며, 둘째, 그렇게 커다란 창조주를 한낱 피조물인 인간은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주장 일부에 대한 동의(1-4)

욥의 탄식은 우리가 현실 신앙생활에서 가끔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나를 도와주시고 나의 억울함을 풀어 주신다고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내 눈앞에서는 전혀 다른 현실이 펼쳐질 때가 있습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이런 현실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3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4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1-4)

 

욥은 친구들이 말하는 전통적인 지혜(규범적 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자 최선을 다하는 지혜의 화신이었습니다(욥 1:1-5). 그러나 욥의 신앙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 원리를 초월해서 주권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즉, 반성적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욥 1:21;2:10). 그는 9-10장에서 친구들의 논리를 대응하는 데서 더 나아가 하나님과 담판을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의 원인을 설명해야 할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데 그분이 침묵하고 계시다고 항의합니다. 심지어 초하나님 존재가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심판해줄 것을 기대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죄하신다면 감히 하나님께 맞설 수 없는 존재인 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견주어 결코 의로울 수 없다는 친구들의 주장을 욥은 잘 알고 있습니다(2). 사실 이 말은 빌닷의 말이 아니라 엘리바스의 말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욥 4:17).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진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지혜자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방법을 예측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엘리바스나 빌닷 등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 수 있는가를 질문하게 됩니다. 지혜와 힘은 하나님께 있고(4)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하나님에 대해 어느 인간도 제대로 알 수 없다(3)는 것이 반성적 지혜의 주장입니다. 욥의 항변은 ‘왜 너희들의 지혜를 너희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느냐?’는 물음입니다.

 

반성적 지혜 : 하나님의 크심과 절대주권(5-9)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이기거나 설득하여 마음을 바꾸시게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역사를 행하시는 이유는 악인들을 심판하고 의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평소에 욥은 이런 표현으로 하나님을 찬양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자기의 대적이 되시자 찬양의 내용은 오히려 욥에게 크나큰 절망으로 다가옵니다.

 

5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6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7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8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5-9)

 

이어서 욥은 하나님의 크심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분의 운행을 어떤 법칙으로 설명하지 않으려 합니다. 지진 등의 천재지변으로 산이 무너지고 옮겨지는 현상은 인간이 조종할 수 없는 것으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관용구입니다(시 18:7; 29:8; 97:7; 나 1:5; 합 3:6 등). 시편의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시 18:7)라는 구절은 5절과 유사합니다. 계속되는 욥의 말에 언급되는 창조세계는 “땅”과 “그 기둥들”(6), “해”와 “별들”(7), “하늘”과 “바다”(8), 그리고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9)입니다. 5장에서 엘리바스가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는”(10) 등 농사와 관련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나, 8장에서 빌닷이 갈대나 거미줄, 가지가 돌무더기 틈에 뿌리를 내리는 현상 등에 빗대어 하나님의 운행을 설명하는 것(11-18)과는 스케일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규범적 지혜는 인간의 생활 반경 안에서 주로 관찰되는 것을 통해 삶의 법칙(규범)을 끌어내고 그것을 인간의 삶에 적용합니다. 이런 면에서 규범적 지혜는 ‘인간중심적’인 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성적 지혜는 신학적 사유의 지평을 훨씬 더 크게 가져 갑니다. 인간의 삶의 영역 바깥의 세계마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런 점에서 반성적 지혜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거리를 규범적 지혜에서보다 더욱 크게 벌리고 차이를 극대화합니다. 스케일을 확장하면서 질문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산에 임한 것은 산이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행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기둥들을 흔드시고(6) 해를 뜨지 못하게 하시거나 별들을 가둬두는 것이(7) 땅이나 해, 별의 무지나 악 때문이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에게는 인과응보의 원리로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지만, 욥은 인과응보의 원리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 또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원리 하나에 가둬놓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원리를 창조하신 분은 물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원리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반성적 지혜 : 인간의 한계(10-16)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눈앞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이 시간 내 앞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통치와 역사를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섬겨야 하겠습니까? 욥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10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11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12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13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14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15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16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10-16)

 

10절은 5-9절과 11-16절을 연결하는 경첩(hinge)입니다. 그렇게 거대한 창조주를 한낱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욥의 고백은 욥기를 관통하는 주제어 중 하나인 ‘니플라오트’로 연결됩니다. 크신 하나님의 움직임은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이 “셀 수 없는” 것입니다. 욥기에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엘리바스입니다. 5:9과 9:10의 히브리어 원문은 완전히 동일합니다. 엘리바스는 이 구절을 “분노”와 “미련함”에서 벗어나도록, 즉 ‘지혜자’가 되라고 욥을 설득하는 것에 사용하는 반면, 욥은 그 구절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인간이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자유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주실 수도 있고 거두실 수도 있으며, 복을 주실 수도 화를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산과 바다와 별의 움직임이 바뀌는 것은 그들이 죄를 지어서가 아닌 것처럼, 욥에게 임한 불행 역시 죄나 무지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에 대한 인간의 인식 가능성,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규범적 지혜는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습니다. 물론 지혜에 다다르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지혜와 무지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는 불안한 존재이고, 그들을 유혹하는 악의 손길(잠언의 ‘음녀’)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지혜를 추구해야 하고 부모 세대와 조상들에게서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잠언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모가 자식 세대에게 지혜를 전수해주는 형식을 취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리고 잠언의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엇이 옳고(선) 무엇이 그른지(악), 무엇이 지혜이고 무엇이 무지인지 아주 친절하게 반복적으로 알려줍니다. 개미를 통해 부지런함을 배울 수 있는 것처럼(잠 6:6-7; 30:25), 피조세계의 현상들도 우리에게 어떠한 규범에 따라 살아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그러나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반성적 지혜의 기본적인 입장은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이 친절한 분으로 묘사되지 않고 저 천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입니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 땅의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분이 내 옆을 지나간다 해도 내가 알 수 없으며(11),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면 인간은 막을 수 없습니다(12). “라합을 돕는 자들”과 같은 천상적 존재들마저 굴복시키는 분이 왜 재앙을 내리시는지 그 이유를 인간 따위가 알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인간인 엘리바스나 빌닷은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을 잘 알 수 있는가? 너희는 인간이 아닌가? 욥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하찮은 인간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의 평가를 할 수 없고, 동시에 그 뜻을 돌이켜달라는 요청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14-15).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판단/평가에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15). ‘불쌍히 여기다’라는 동사 ‘하난’은 1:9와 2:3의 “까닭 없이”와 동일한 어근을 가집니다. 한 인간의 올바름(쩨데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미쉬파뜨)에 있어서, 행동한 그대로 보응 받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벗어나 하나님의 “까닭 없는” 긍휼과 은혜를 간구하는 욥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평생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럽고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여전히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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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8-01)

 


빌닷의 잘못된 관점들

욥기 8장 1-22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일수록,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훈계하는 태도를 보이기 쉽습니다. 성경 지식이 많으면 사람들을 가르치고 고치려 하기 쉽습니다. 엄정한 잣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권면이나 훈계가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합니다.

 

빌닷의 첫 번째 발언은 엘리바스의 첫 발언(4-5장)과 유사한 내용과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악인/죄인/무지자에게는 화가 임하고, 의인/선인/지혜자에게는 복이 임한다는 원칙을 설명합니다. 다만, 엘리바스가 개인적 경험과 신비 체험을 바탕으로 주장을 전개했다면, 빌닷은 “옛 시대 사람”과 “조상들”에게서 지혜의 근거를 찾습니다.

 

인과응보와 하나님의 의(1-7)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하고 따르기를 강요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경우를 봅니다. 상대방의 아픔이나 성황을 헤아리지 않고 신앙이라는 잣대를 사정없이 들이대는 경우도 많습니다. 판단과 정죄의 언어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권면이 아니라면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1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1-7)

 

빌닷에게 욥의 말은 “거센 바람”처럼 들립니다. 7장에서 욥이 인간의 인생을 한낱 바람(루아흐)에 불과하다며 바람의 짧게 스쳐 지나가는 성질을 강조한 것과는 다르게, 빌닷은 바람의 세찬 힘(캅비르)을 부각 시킵니다.

욥의 말을 빌닷은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굽게 하신다’는 주장으로 해석합니다. 욥은 앞에서 (그리고 뒤에서도)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빌닷에게 욥의 말이 그렇게 ‘해석’된 이유는, 욥이 고난을 당하는 현실과의 무죄 주장을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에게 벌을 내리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과응보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는 규범적 지혜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드신 창조 원리인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칙에 어긋나게 움직이시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선한 분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빌닷은 욥의 자녀들의 죽음을 그들이 지은 죄에서 찾습니다. “수아 사람” 빌닷은 (수아라는 지역이 어디 있든지 간에) 욥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직접 옆에서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욥의 자녀들에 대한 빌닷의 정죄는 그러므로 인과응보의 원리를 적용한 추론일 뿐입니다. 욥기의 독자인 우리는 욥의 자녀들의 죽음이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빌닷은 자신의 추론을 이어나갑니다. 죄인에게 멸망이 할당된 것처럼 의인에게는 온전함의 회복(샬롬)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의인과 지혜자를 빌닷은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사람(5), 순수/순결하고 올바른 사람(6). ‘자크’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금(개역한글 “정금”)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형용사입니다. “정직”으로 번역하는 ‘야샤르’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그 길을 ‘똑바로’ 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비록 지금 현재의 상태가 작고 “미약”할지라도 미래에는 매우 커질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이 유명한 구절을 빌닷은 지금 자식들을 다 잃고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욥에게 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잃은 아픔을 겪는 사람의 면전에 ‘너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다’라는 말을 대놓고 한 뒤에 이어지는 말입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그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놓는 끔찍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반성적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불의한 자에게 임하는 화(8-19)

오랫동안 축적한 지식과 지혜라고 해서 어떤 상황에든지 다 적용할 수 있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오래되어 검증된 지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모든 문제에 적용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재앙을 만나기 때문에 과거에 범죄한 것은 아닙니다.

 

8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9(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10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11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12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13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14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15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16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17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18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19그 길의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8-19)

 

빌닷은 자신의 지혜의 근거를 “옛 시대 사람”과 “조상들”에게 둡니다(둘은 평행어로 동일한 의미를 지님). 규범적 지혜가 말하는 규범(패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던 때부터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천지창조의 때에 더 가까이 있는 과거 시대와 조상들이 그 규범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규범적 지혜는 따라서 ‘과거 지향적’입니다. 규범을 더 많이 경험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므로,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점점 더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대표적인 잠언이 부모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구도로 되어 있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잠 1:8).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동일합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 32:7). 참고로, 나중에 등장하는 엘리후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참고 있었다는 것(32:4,6)은 나이와 지혜를 동일시하는 규범적 지혜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입니다. 동시에,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32:9)라는 엘리후의 말은 반성적 지혜의 표현입니다.

이어서 빌닷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규범적 지혜의 근본 원리를 설명합니다. 이 지혜는 자연 세계에 대한 관찰(‘경험’)에서 온 것입니다. 좋은 것(“왕골”, “갈대”)이 나쁜 곳(“진펄 아닌 데”, “물 없는 데”)에서 나올 리가 없습니다. 물론 척박한 곳에서도 무엇인가 자라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 지속될 리는 없고, 하나님께서 본래 지정하신 충분한 수명(“뜯을 때”)을 다 살지 못하고 명멸하게 됩니다(11-12). 악인/무지자(“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 “저속한 자”)의 운명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13). 여기서, “저속한 자”라고 번역된 ‘하네프’는 어원적으로 길에서 벗어나거나 똑바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17:8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똑바로 사는 사람(예샤림)과 반의어로 사용되었고, 20:5에서는 악인들(레샤임)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악인은 멸망한다’는 공식은 다음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왜 악인은 존재하는가?’ 악인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통해 다 없어져야 마땅한데 악인들이 존재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빌닷의 대답은 한마디로 ‘그들은 오래 가지 못한다’입니다. 비록 악인들이 존재하기는 합니다. 그들도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그 뿌리”를 내릴 수는 있습니다(16-17). 그러나 그들이 뿌리내린 곳은 “돌무더기”이고 그 돌 틈 사이로 뿌리를 겨우 내렸다 하더라도 쉽게 뽑히고 맙니다(17-18). 그들이 집을 지을 수는 있어도 그 집은 마치 거미줄 같아서 쉽게 끊어지고 오래 “보존되지”는 못합니다(14-15). 그들은 곧 “다른 것”으로 대체됩니다(19).

이 자연의 법칙에서 끌어낸 인과응보의 원리를 욥이 처한 현실에 적용하면, 욥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수명을 충분히 다 살지 못하고 일찍 죽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4절에서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라는 ‘주장’의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이고 “저속한 자”(비뚤어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빌닷의 주장은 재난이나 천재지변이 닥쳤을 때 그것이 죄 때문이라고 정죄하는 목회자들의 경우를 연상시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의 이름으로(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라는 명분으로) 2차 가해를 저지릅니다. 욥기의 반성적 지혜는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신학적 원리’로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지혜가 아닌 악이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온전한 자에게 임하는 복(20-22)

종종 환자 심방에서 환자를 찾아가 회개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 자신은 죄가 없기에 아프지 않고 상대방에게 위로는커녕 상처만 주게 됩니다. 성도들은 어려움에 당한 타인의 상황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규정하지 말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위로를 전해야 합니다.

 

20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21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22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20-22)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지혜자(“순전한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상은 “웃음”과 “즐거운 소리”입니다(21). 기독교의 금욕주의 전통이 ‘웃음’을 사탄이 틈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과는 달리 (보들레르의 “웃음의 본질/On the Essence of Laughter(1855)”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호르헤 신부를 보라), 규범적 지혜는 웃음을 의인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선물로 여깁니다. 시편 126:2에서는 “웃음”과 “찬양”을 평행어로 취급하기까지 합니다(반면에,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는 “웃음”을 “미친 짓”과 연결시키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전 2:2]).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자를 “미워하는 자”는 곧 “악인”이며, 그들에게 내리는 벌은 “부끄러움”과 “없어짐”입니다(22). 누군가에는 큰 용기와 위로를 줄 수 있는 말이 누군가에는 정죄와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빌닷은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우리의 온전하지 못한 지식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가고 그들을 품어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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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7-01)

 


한낱 바람에 불과한 인생

욥기 7장 1-21절


사람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의 생활과 다양한 경험의 모든 것 즉 일생을 가리켜서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가치와 목적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나름대로 견해를 갖는 것을 인생관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낙관주의나 비관주의라고 그리고 현실주의, 이상주의 등으로 나누어 말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욥기 6장의 욥의 말이 엘리바스를 비롯한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를 겨냥한 것이라면 7장은 다시 3장과 연결되는 탄식과 탄원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에 대한 비판적 발언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인생의 고통이라는 깨달음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토로하는 욥의 탄식이 주를 이룹니다. 욥은 크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작은 인간의 삶에 일일이 관여하시느냐고 항변한다.

 

하루는 길고 인생은 짧다(1-10)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알고 있는 욥에게 소망이라는 단어는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소망과 희망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에 남겨진 희망이 헛된 희망일 수밖에 없는 것은 죄인인 우리에게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이제 희망 없는 자신의 삶에 대한 탄식을 하나님께 쏟아 놓고 있습니다.

 

1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2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3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4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5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6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7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8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9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10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1-10)

 

욥의 질병은 피부 질환입니다(2:7-8).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온몸을 질그릇 조각으로 긁어야 할 정도로 심한 질병이었습니다. 질병은 ‘관계적’입니다. 개인적인 고난과 질병에서 시작된 욥의 탄식은 인간 전체의 고난으로 시야를 확장합니다.

본문에서 욥은 고통을 삶의 대가로 지불받는 임금으로 표현합니다. 보통 힘든 노동이나 고역도 무한히 연장되지 않고 정해진 때에만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하루 끝에 작은 위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즉 급료를 받는 노동자에 인생을 비유하면서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노동이라면 그 노동에 합당한 급료를 받아야 하는데, 욥 자신에게는 “여러 달째 고통”과 “고달픈 밤(들)”(3)이 할당된 몫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욥 고통스런 하루 일과가 끝나면 뭔가 좋은 일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욥의 밤에는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2). 욥의 진술의 특징이자 강점은 인생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과 개인적인 경험을 연결 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내가 보건대”(4:8)라는 표현과 “환상”과 같은 신비한 체험을 통해 개인적인 생각을 진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엘리바스가 말하는 내용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한정되는 개인적 체험이 아닙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일반론이 모든 인간과 모든 현상에게 적용된다는 규범적 지혜는 개별적 예외들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엘리바스의 지혜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지혜는 빌닷이나 소발의 지혜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반면에 욥은 자신의 인생에서 인과응보의 원리가 무너지는 고통스런 ‘개인적 체험’을 겪고, 여기에서부터 타인과 다른 이들의 고통으로 나아갑니다. 규범에 대한 예외가 있을 수 있고, 사실 그 예외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생에서 겪는 현실이기에 욥기를 읽는 독자들의 공감도 자아냅니다. 걱정과 근심으로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4)하는 “고달픈 밤”(3)을 보내본 누구나 욥의 심정이 어떠할지 헤아리게 됩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잠을 자는 기본적인 원리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원리이고, 한 사람의 인생에서도 대부분의 세월을 그 원리에 따라 보내겠지만, 그 원리가 깨어진 경험, 즉, 밤에 잠 못 들어 괴로운 경험 역시 대부분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5절에 욥이 맞이하는 고통스런 밤의 풍경이 그려집니다. 살에는 구더기와 흙덩이가 의복처럼 덮여 있고,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집니다. 피부 악창으로 고통을 겪으며 밤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탄식 속에 시간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교차합니다. 고통을 견디는 시간은 매우 더디게 가는 반면(4), 한 사람의 인생 전체는 한낱 바람이 부는 것같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입니다(6-9). 잠자리에 누우면 “언제나 밤이 갈까”(4)를 생각하는 불면의 밤의 시간은 무척 느리게 갑니다. 그러나 동시에 삶 전체는 마치 “베틀의 북보다 빠르고”(6) “한낱 바람”과 같이 스쳐 지나가는 것입니다(7). 욥기는 전도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크심과 인간의 작음을 대비하며 한 인간의 삶이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무죄한 자에게 임하는 고통’(innocent suffering)이라는 개인적이고 예외적인 경우를 통해 규범적 지혜를 비판하는 미시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통의 시간을 겪는 인간에게 그 시간이 얼마나 느리게 가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7-10절은 탄식 중에 드리는 욥의 기도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2인칭으로 나옵니다. 7절에서 욥은 자신의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고 자신을 구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자신이 죽으면 자신을 본 사람들이 다시는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의 눈이 자신을 향할지라도 자신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8). 구름이 사라져 없어지듯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생명의 땅으로 올라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9). 죽은 자는 다시 생전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돌아가더라도 그 처소가 자기를 모를 것이라고 합니다(10).

 

하나님을 향한 탄식(11-21)

무한하신 하나님과 동행할 수만 있다면 짧은 우리의 인생도 영원한 삶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짧은 인생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우리 자신의 유한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11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12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13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14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15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16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17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9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20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21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11-21)

 

11절은 욥이 불평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괴로움 때문에 입을 다물 수 없다고 합니다. 자신이 마치 하나님께서 무찌르셔야 하는 바다 괴물이나 된 듯이 감시하신다고 하소연합니다(12).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꿈과 환상으로 자신을 놀라게 하고 두렵게도 하시는 분입니다(13-14). 그러니 차리라 질식사라도 당하고 싶다면서 괴로움을 토로합니다(15). 자신이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니 제발 죽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16).

17절에서는 시편 8:4이 생각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니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지나치게 자신을 감시하고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시는 것에 질려하는 심정을 토로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자신에게 그만 신경 쓰고 놔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런 과한 관심을 받을 만큼 대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크게 하여 마음을 두시기 때문에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신다고 보고 있습니다(18). 잠시도 가만두지 않으십니다. 침 삼킬 만큼 짧은 순간도 놓아주시지 않습니다(19). 욥은 설령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그렇게 대단한 손해를 주길래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하소연합니다(20). “어찌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21절에서 욥은 자신의 허물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렇다고 해서 드디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이 고난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설령 자신이 허물을 범했다고 해도 왜 그것을 용서하거나 제거하지 않고 응징하느냐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죽어 흙이 될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도 못 찾을 만큼 하찮은 존재가 될 것인데,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시느냐는 뜻입니다.

정리해보면, 이 장에서 욥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둬 달라는 마음을 ‘사라짐’으로 표현합니다. 욥의 고통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수직적 차원과 사람들에게서 오는 수평적 차원이 있습니다. 그처럼 사라짐 역시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사라짐과 하나님으로부터 사라짐이라는 두 가지 차원으로 나타납니다. 인생은 바람과 같고(7) 입김과 같이 짧은 것이라서(16) 빨리 지나가야 하는데, “뼈를 깎는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은 그 짧은 순간인 인생마저 너무 길게 느껴지고, 더 빨리 그 고통스런 삶을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 표현됩니다(15). 이런 삶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16). 욥은 하나님께 자신을 놓아달라고,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그만 죽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15-16). 영원하시고 무한한 하나님 앞에 입김과 같은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한 인간의 행위가 그 커다란 하나님께 어떤 영향을 미칠 리는 없습니다(20, 엘리후 35:6-7). 그렇게 크신 하나님께서 미천한 인간 하나의 잘잘못에 일일이 관여하셔서 작은 잘못 하나에도 벌을 내리실 필요가 있느냐고 항변합니다(17-20). 죄가 있다면 없애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일 터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욥을 표적으로 삼아 고통스럽게 하시는 것이냐고 토로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욥의 외침이 하나님께 대한 불경한 발언으로 여겨지겠지만, 욥과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소리치는 욥의 마음에 절절히 공감할 것입니다. 욥의 발언 역시 1-2장의 하늘에서 벌어진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통이 어쩌면 가장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친구들처럼 고난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유를 찾아 해석하려는 것입니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참된 안식과 영원한 생명을 소망합니다. 인생의 가장 큰 소망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소망 없는 세상의 방법들을 버리고 생명의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참된 구원의 은혜를 넉넉하게 맛보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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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6-01)


마른 개울 같은 우정

욥기 6장 1-30절


아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끊임없이 ‘왜요?’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참 궁금한 게 많습니다. 성장하면서 이런 호기심을 잃어가지만, 여전히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지?’, ‘왜 이번 일이 잘 안 되었을까?’, ‘왜 지금 나에게 상황이 일어나고 있지?’이란 질문들을 많이 합니다. 욥이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하는 궁금했던 것입니다.

 

칠일 동안 침묵하며 욥의 고통을 함께 나누던 세 친구 중 엘리바스가 입을 열어 던진 조언이 욥에게는 더욱 커다란 상처가 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고난보다 친구들의 ‘지혜의 말’이 욥에게는 더욱 “혀의 채찍”이 되었을 것입니다. 욥의 저항과 도전은 하나님께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친구들을 향한 것입니다. 엘리비스의 어떤 말이 욥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6장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에 대한 호소(1-10)

‘절망’은 모든 희망을 포기한 정서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극심한 고난 때문에 절망 상태에 빠지면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차라리 죽는 것 훨씬 낫겠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것이 바로 욥이 맞닥뜨리는 상태였습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4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5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7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8○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9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10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1-10)

 

6장은 욥의 전체 진술 중 중요한 주제들이 등장합니다: (1)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2) 나는 무죄합니다, (3) 인과응보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4) ‘지혜’의 말이 상황에 따라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욥은 3장에 이어 친구 엘리바스의 무정한 비난에 대해 욥은 대답합니다. 자신의 고통이 극심함을 토로합니다. 고통의 무게를 잴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고 표현합니다(2). 복수형 명사 ‘바다들’을 사용하여 욥의 고통이 크고 무겁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라는 지난 발언에 대한 반성이라면 문맥상 어울리지 않게 됩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처럼 욥이 3장에서의 표현이 ‘거칠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뒤이어 나오는 욥의 말이 그렇다면 좀 더 진중하게 말하거나 부드럽게 표현해야 하는데, 6장 이하의 욥의 언어가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점을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런 말이 나왔던 것이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의 괴로움이 너무 커서 격렬하게 감정을 토로하는 과정에서 조리 있게 말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4절에서 그는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이 보내신 화살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 화살과 두려움은 복수로 표현합니다. 그의 가축들을 몰살하고 10명의 자식들을 죽인 모든 공격들을 하나님의 독화살로 느꼈고, 그것들이 하나님께 대한 공포감을 촉발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화살은 자신의 몸을 악창으로 공격하고, 친구들의 비난과 조롱의 형태로 찾아왔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이에 그는 입맛을 잃고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7). 7절 하반절을 직역하면 ‘나의 음식은 마치 질병 같다’가 되는데, 개역개정의 번역처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꺼리는 음식물” 정도가 아니라, 먹으면 더 아프고 고통스러워질 것 같다는 심경 토로입니다. 욥은 자신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4,9). 그러나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진술이 곧 욥의 불신앙이나 하나님에 대한 도전과 공격으로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신앙은 고통과 재앙마저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만약 4절과 9절의 욥의 발언이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면,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룻 1:20)와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룻 1:21)이라는 나오미의 말도 불신앙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의 관점에서도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라는 진술은 문제적 발언이 아닙니다. 욥의 진술은 “우리가 하나님께 …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 2:10)라는 진술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8-9절에서도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내동댕이치는 기막힌 현실을 원통해합니다. 아무도 간구를 들어줄 사람 없고, 심지어 죽고 싶은 소원조차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께서는 산 자들의 땅에서 자신을 끊어버리실 것이라고 예상합니다(9). 그런데도 욥은 회개하거나 항복할 뜻이 없습니다. 엘리바스가 말한 해피엔딩을 기다릴 기력도 없다고 하소연합니다(10).

 

주위 사람들이 주는 고통에 대한 호소(11-21)

사람을 의지하면 결국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귐은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의 주인이 되는 성도의 사귐에는 서로를 향한 동정의 마음과 위로가 넘칩니다. 자신이 죽고 예수로 사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11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12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13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14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16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17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18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19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20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21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11-21)

 

욥은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음을 고백합니다(11,13b). 13절에서 “나의 능력”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투쉬야 정확한 의미를 알기는 어렵고 아마도인데 존재 부사인 ‘예쉬’와 같은 어근을 지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이 맞다면 ‘존재할 힘’ 정도의 의미로 이 문맥에서 쓰였을 것입니다. 이 단어를 ‘지혜’와 유사한 의미로 번역하는 것은 11:6에서 호크마(지혜)와 평행어로 사용되기 때문인데, 12:16에서는 오즈(힘)와 평행어로 쓰입니다. 모든 힘이 소진되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진 것은 양방향에서의 공격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화살”과 “독”(4)과 “손”(9)으로 표현되는 고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재앙, 특히 질병을 나타내는 숙어적 표현입니다(출 9:3; 신 2:15; 삿 2:15; 겔 3:14; 대하 30:12 등). 욥은 이러한 하나님의 공격을 받아낼 힘이 없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힘이 돌만큼 단단하겠는가, 내 피부가 금속으로 되어 있는 줄 아는가’(12). 둘째, 주위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한탄합니다(13a). 주위 사람들(친구와 형제들)은 그에게 “동정”을 베풀기는커녕(14), 뜨거운 태양 별에 물이 말라버리듯이 욥의 주위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16-18). 욥에게 닥친 재앙을 보고 두려워졌기 때문입니다(21). 14절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라는 번역은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친구에 대한 신의(헤세드)를 저버린 자는 전능자에 대한 경외심도 버린다.’ 14절 하반절을 직역하면 ‘그는 전능자(샨다이)의 경외를 버렸다/떠났다’입니다. 14절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마스(무너진 자, 녹아내린 자)가 욥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친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판단하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의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는 전자로 해석한 것이고, 대안적인 해석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 근거는 (1) 평행법적으로 ‘헤세드’와 ‘이르아트 샨다이’가 평행하고, 친구/이웃에 대해 헤세드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특질이라는 점; (2) 이어지는 15절에서 헤세드를 지키지 않는 이웃/형제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는 점; (3) 6:10에서 욥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 점 때문입니다. 욥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저버렸다고 고백하는 것은 욥의 무죄 주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친구들에 대한 질책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자네들은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은가?’

15-20절은 친구들이 사막의 신기루 같이 헛된 위로를 하고 있다고 공격합니다. 변덕스런 그들을 ‘와디’(乾川)에 비유합니다. 평소에는 건천이었다가 비가 올 때만 창창한 강이 되는 와디처럼, 친구들도 한결같지 않고 잘 나갈 때는 잘 대하더니 힘겨울 때 자신을 공격한다고 원망합니다.

 

고통을 더욱 악화시키는 친구들의 조언(22-30)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빛은 한없는 위로와 은혜의 눈빛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은 정죄와 판단의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날 봐 달라고 소리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죄인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향할 때 우리는 참된 위로를 얻고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말과 태도로 그저 욥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22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23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24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25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26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27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 넘기는구나 28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29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30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22-30)

 

고통 속에 있는 욥이 친구들에게 바랐던 것은 친구들의 힘을 나누어달라는 것도 아니고(22) 고통에서 건져달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23). 22절의 ‘코아흐’는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말로, 개역개정의 “재물”은 힘/능력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원수의 손”과 “폭군의 손”이라는 번역(23)은 문제가 있는데, 9절의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과 함께 읽게 되면 욥이 말하는 원수와 폭군이 하나님을 가리키게 됩니다. 그러나 하반절의 ‘아리찜’은 복수형으로 ‘폭력적인 사람들’을 의미하며, 일반적인 폭력을 지칭합니다. 욥이 원하는 것은 14절의 ‘헤세드’였습니다. 헤세드는 계약 관계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로, ‘인자, 인애, 자비, 사랑’이라는 뜻에 ‘신실, 성실, 신의, 변함없음’이라는 의미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헤세드 대신 친구들이 선택한 방식은 “옳은 말”로 “책망”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욥의 가슴을 후벼 파며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25). 인과응보의 일반론은 분명 “옳은 말”이지만, 욥과 같이 예외적인 경우에 적용하게 되면 그 옳은 말은 ‘가치 없는 말’, ‘무의미한 말’이 됩니다(26 “실망한 자의 말”). 욥은 친구들에게 “행악자가 되지 말라”(29)고 간절히 부탁하는데, 욥을 바로잡아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그들의 선한 의도가 욥을 죄인으로 낙인찍는 폭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대하여 헤세드를 지켰고 그가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29-30). 다시 한 번, 욥의 무죄 주장으로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말과 생각을 전하기에 앞서 들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말을 경청해 주고 긍휼과 사랑으로 공감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음에 귀를 기울여 주시듯 우리가 고난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참된 위로자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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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5-01)


섣부른 충고를 던진 엘리바스

욥기 5장 1-27절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실패와 고통의 원인이 우리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선택과 행동의 결과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무고한 고난도 많습니다. 생각지 않는 고난을 당할 때, 전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여정을 통해 기존의 신앙 틀을 깨시고 한 차원 높은 신앙으로 이끌어주고 계십니다. 욥의 일생을 통해 귀로만 듣던 신앙이 눈으로 보는 신앙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 엘리바스는 1-2장의 천상의 일을 모른 채 ‘경험’과 ‘환상’을 통한 계시를 바탕으로 고난의 원인을 욥에게 알려주었습니다(4장). 욥의 고난은 욥의 죄 때문이고 욥이 하나님 앞에 바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7). 그것은 곧 ‘지혜’가 없다는 말과 동일합니다(21). 5장에서 엘리바스는 그 다음 단계의 조언을 욥에게 건넵니다. 고난을 벗어나고 이겨낼 방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의 해결책은 신앙인들이 아픔을 겪는 사람들에게 흔히 하는 위로의 말이기도 합니다.

죄인/무지자에게 임하는 재앙(1-7)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실패와 고통의 원인이 우리 자신이 저지른 잘못된 선택과 행동의 결과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무고한 고난도 많습니다. 아무 잘못 없이 고통 당하고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됩니다. 회개를 촉구할 수도 없습니다. 죄의 결과가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만 국한되어 임한다면, 그것은 죄로 인한 파국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 실현이라 볼 수 있습니다. 죄가 무서운 이유는 아무 잘못 없는 사람에게까지 그 악한 영향이 미치기 때문입니다

 

1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2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3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4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5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6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7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1-7)

 

위기를 당할 때 친구의 존재는 더 없이 소중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재난을 만난 욥에게 그러한 친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조언은 욥에게 적절하지 않은 내용입니다.

 

(1) 무의미한 욥의 말(1)

 

욥기 5장에서는 4장에 비해 엘리바스가 더 직접적으로 독설을 쏟아냅니다. 4장에서 ‘경험’과 ‘환상’을 바탕으로 욥에게 인과응보의 원리를 설득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거룩한 자”(1)라는 표현을 써서 설득을 더욱 강화하려고 시도합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말을 지지할 사람이 없음을 명확히 합니다.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라고 합니다. 욥은 “거룩한 자”(천사, 케도쉽) 중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처지라는 뜻입니다.

 

(2) 어리석은 욥의 말(2)

 

엘리바스가 왜 이렇게까지 거칠게 충고합니까?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2). 욥은 분노 중에서 멸망할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문장에 쓰이는 모든 단어는 잠언을 비롯한 규범적 지혜가 사용하는 전형적인 어휘들입니다. “분노”와 “시기” 같은 감정의 동요는 지혜자의 특질이 될 수 없습니다(잠 6:34; 14:30).

 

(3) 악인의 결말(3-5)

 

3절의 정확한 번역을 “내가 씨 뿌리는 한 미련한 자가 갑자기 가문 전체가 저주받은 현장을 보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이 미련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런 지혜 없는 자에게 벌어지는 일은 자녀들이 성문에서 짓밟힘을 당하는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구해주지 않고(4), 열심히 농사를 지어 수확을 얻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게 됩니다(5).

 

(4) 고난의 원인(6-7)

 

이러한 원리는 땅에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6) 하늘의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입니다. 욥의 재난은 욥 자신의 죄 때문에 발생했을 뿐 ‘땅’(티끌과 흙)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접속사로 시작하는 7절은 6절의 이유입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죄를 지은 인간이 고난 당하는 것은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처럼 필연적인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말은 시편 50:22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악인들에게는 구원자가 없다’는 표현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이 ‘지혜’를 엘리바스는 지금 자녀를 모두 잃고 재산을 다 잃은 욥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욥의 자녀들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아무도 구해줄 수 없었던 이유는 아버지인 욥이 ‘미련한 자’이고 ‘어리석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자녀를 잃은 부모한테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혀의 채찍”입니다. 욥의 고난이 죄나 무지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독자는, 엘리바스의 규범적 지혜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끔찍한 폭력이 될수 있는지 여실히 깨닫게 됩니다.

 

엘리바스의 조언 하나님께로 돌아가라(8-16)

성도들은 다른 사람을 위로할 때 성경 구절을 인용해 가며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감당할 만한 시험만 주신다’고 말하곤 합니다. 상대를 위로하려는 마음이 진심이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약은 독이 될 뿐입니다. 그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 하나님을 의비하라고 권면하기 전에, 우리 자신부터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 그를 의탁해야 합니다.

 

8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9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10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11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12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13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14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15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또한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시나니 16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이 스스로 입을 다무느니라(8-16)

 

엘리바스는 고난 당하는 욥에게, 만약 자신이 욥이라면 하나님을 찾고 자신의 일을 의탁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권면은 자신의 존재적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만이 절대적 위로자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이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위로입니다.

 

(1) 욥을 설득하는 엘리바스(8)

 

엘리바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욥을 설득합니다.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을 위한 엘리바스의 조언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8). 그가 보기에 욥의 고난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무지와 그분을 의지하지 않는 악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한 조언이라도, 선한 의도가 항상 선한 결과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것을 뿌린다고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맺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욥기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비판합니다. 여기서, 엘리바스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묘사하는 장면을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9-16).

 

(2)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능(9)

 

엘리비스는 욥이 당한 고난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큰 일 혹은 기이한 일의 하나라고 보고 있습니다(9). 여기 “헤아릴 수 없이 큰 일”과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9)라는 구절은 인간의 이해나 인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크심을 나타내는 표현들입니다. “기이한 일”로 번역된 ‘니플라오트’는 “까닭 없이”와 더불어 욥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이자 반성적 지혜의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은 사실 엘리바스가 아니라 욥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말입니다(욥 9:10에서 욥이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헤아리고 세는 주체는 인간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원리 안에 가둬놓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는 그 원리에 따라서만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3) 비를 주시는 하나님(10-11)

 

하나님께서 하신 큰 일 중 하나는 비를 내리시고, 밭에 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꼐서 척박한 땅에 물을 공급하심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은 자와 애곡하는 자를 일으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자비로운 분입니다. 11절은 기이한 일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4)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12-14)

 

따라서 엘리바스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지혜자(“교활한 자”)의 계획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그들을 실패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12). “지혜로운 자”와 슬기로운 자(“간교한 자”)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인과응보)에 따라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더라도 그 예측한 대로 하나님께서 움직이셔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13). 규범적 지혜의 이분법에 따르면 낮과 밝음은 좋은 것이고, 밤과 어둠은 나쁜 것으로 그 둘은 분명하게 나뉘어 있는데, 이 이분법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는 지혜자와 의인이라도 대낮에 어둠을 만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14). 14절의 “그들”은 악인들이 아닙니다. 개역개정이 부정적 의미를 담아 번역한 “교활한 자”(12)와 “간교한 자”(13)는 잠언에서는 모두 “슬기로운 자”로 번역되었고 지혜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참조 잠 12:16,23; 13:16; 14:8,15,18; 22:3; 27:12).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자유는 욥의 “주시는 분도 거두시는 분도”와 “여호와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에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병도 주시고 약도 주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욥의 신앙고백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심을 나타내는 ‘니플라오트’라는 단어를 엘리바스는 전혀 엉뚱하게 인과응보의 원리와 연결시킵니다.

 

(5) 가난한 자의 희망(15-16)

 

이제 엘리바스는 욥이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로 자처하면서 입을 다물 때 희망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 자에게 임하는 복(17-27)

위기를 당할 때 친구의 존재는 더 없이 소중합니다. 극한 고통에 직면한 친구에게 친구의 위로는 어느 때보다 절실했습니다. 섣부른 단정은 오히려 상대방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섣부른 조언이 오히려 한 사람의 영적 건강을 해칠 수 있습니다.

 

17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8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19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21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22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24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26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27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17-27)

 

17-18절에서는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18; 참조 호 6:1-3). 욥의 고난이 하나님께 받는 “징계”라는 것이 엘리바스의 진단입니다(17). 1-2장의 천상회의를 모르는 사람이 내릴 수 있는 진단입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표현들은 전형적인 규범적 지혜의 표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혜자와 의인은 “환난”과 “기근”과 “전쟁”과 “멸망”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구원받게 됩니다(19-22). 징계가 복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섯 가지 환난에서 욥을 구원하시고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욥에게 미치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욥이 최악의 상황에 있는 것을 망각한 쓸모 없는 위로입니다. 그는 이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을 소개하지만, 징계로 여기지 않는 욥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허황된 약속으로 회개 이후에 주어질 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값싼 회개 신학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22-23절은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자에게 임하는 복 중에 ‘야생동물과의 화목’이 있습니다. “들짐승”은 가축의 반대말입니다. 인간의 영역 외부의 존재로서 인간의 통제나 예측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라는 점에서 환난과 기근, 전쟁과 멸망(죽음)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간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이러한 야생동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22) 그들과 “언약”, 즉 평화조약을 맺게 됩니다(23). 야생 세계에 대한 엘리바스의 이해와 하나님의 언설에서 나타난 야생동물에 대한 진술을 나란히 비교해서 읽으면 흥미로울 것입니다.

규범적 지혜는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게 된 것을 복으로 여깁니다. 집안도 평안하고 부족함도 없게 됩니다(24). 자손의 복(25)과 장수의 복(26) 역시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자연스레 따라옵니다. 26절에서는 전능자의 징계를 받고 돌이킨 자에게는 장수의 복이 임하고 마치 곡식단이 제 때에 추수되듯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천수를 다 누린 후에 하나님께 되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위로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입장과 고통을 100페센트 이해할 수도, 느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잘 안다고 해서, 의롭고 지혜롭다고 해서 이웃을 잘 위로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난 당한 이웃 앞에서 말을 아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시길 바랍니다. 진정한 위로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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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4-01)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대답

욥기 4장 1-21절


우리는 각자의 틀로 사물과 사람을 봅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쉽습니다. 특별히 결과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안 됩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의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무한하고 완벽한 시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크고 지혜로우며,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욥기에서 가장 많은 부분이 할애된 욥과 세 친구들 사이의 논쟁(4-31장)이 시작됩니다. 세 친구들 중에서 엘리바스가 할 수 있습니다. 4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3장의 욥의 발언 중 엘리바스로 하여금 침묵을 깨도록 만든 것이 무엇이냐를 가장 먼저 말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두 친구들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는 점에서 엘리바스가 세 친구들의 대표격이라 파악하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지키고 변호하고 싶은 지혜(신학적 입장)는 무엇이었습니까?

 

고난의 원인에 대한 엘리바스의 추론(1-6)

사람은 누구도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삶이 여러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믿음이나 삶을 쉽게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비판과 지적이 답이 아니라, 고난 당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답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런 평가와 판단이야말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더 큰 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3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4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5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6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1-6)

 

욥의 말이 끝나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처음으로 욥의 말에 답변하고 있습니다. 4-5장에 언급된 엘리바스의 말속에 욥과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 전개될 모든 종류의 주제, 논쟁이 들어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첫 발언인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2)을 욥을 꾸짖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조심스럽게 상처주지 않으려고 욥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태도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불편한 말을 하면 과연 자네가 견딜 수 있을까?’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욥의 지나온 삶에 대해 칭찬을 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방식(3-4)은 한편으로는 상대를 설득하는 기술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대화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법이기도 합니다.

3-6절에서 엘리바스가 사용하는 언어는 철저하게 규범적 지혜의 언어입니다. 연약한 자들(“손이 늘어진 자”), “넘어지는 자”와 “무릎이 약한 자”(4)는 규범적 지혜에서 ‘지혜가 부족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들에게는 “훈계”가 필요하고 “강하게” 해 줄 지혜자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욥이 훌륭히 해냈다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따르는 지혜자/의인의 특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리고 이와 동의어로서 “온전한 길”을 “소망”하는 것입니다(6). 엘리바스가 평가하는 욥은 ‘규범적 지혜의 화신’이며, 이는 1-2장에서 언급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1:1,8; 2:3)라는 평가와 일치합니다. 5절의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와 “이 일이 네게 닥치매”라는 ‘비인칭 주어’라 할 수 있습니다. 문맥상 욥에게 닥친 고난을 의미하고, 앞 문장의 표현으로는 ‘손이 늘어짐’, ‘넘어짐’, ‘무릎이 약해짐’을 의미합니다. 엘리바스의 규범적 지혜의 관점에서 이러한 일은 지혜가 없는 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은 악인에게 벌어지는 일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근간: 인과응보(7-1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와 선택에 대한 결과를 보상하거나 징벌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잉과응보는 일반적으로 행위와 결과 사이의 상호작용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 사회에서 보상과 벌을 포함하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잉과응보와는 별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푸시는 동시에, 우리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7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8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10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11사자는 사냥한 것이 없어 죽어 가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7-11)

 

하나님의 세상 통치 원리는 신상필벌, 인과응보라는 주장으로 시작합니다. 욥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진 이유는 한마디로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고, 욥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정직”)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도덕적 공종 통치 원리를 생각하라고 촉구합니다(7).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리가 8절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여기서, 죄 없이 망한 자가 없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산 사람(“정직한 자”)에게는 끊어짐이 없다는 엘리바스의 말(7)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이 나고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것이 나온다는 극히 ‘당연한’ 원리(규범)는 성경 말씀(특수 계시)과 자연 현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일반 계시)을 통해 지극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잠언 22:8; 호세아 10:12; 시편 126:5-6 등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이 이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이 말씀들로 우리는 삶을 견딜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죄없이 망한 자는 없다는 엘리바스의 단언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경우를 직접 관찰해서 도출된 결론이 아닙니다. ‘이론적인 추론’일 따름입니다. ‘나쁜 것을 뿌리면 나쁜 결과를 맺는다’는 말을 뒤집어, ‘나쁜 결과를 맺은 것을 보니 나쁜 것을 심은 것이 분명하다’고 하는 결과론입니다. 그러나 ‘악인에게 징벌이 찾아온다’는 말과 ‘고난이 오는 사람은 모두 악인이다’라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둘째, 욥이 죄를 지어서 고난을 당한다는 엘리바스의 추론은 욥이 죄를 짓는 장면을 목격한 뒤에 나온 분석이 아닙니다. 1-2장을 읽은 욥기의 독자는 욥에게 닥친 고난이 욥의 죄 때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욥뿐만 아니라 엘리바스도 하늘에서 벌어진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욥기는 엘리바스의 ‘신학적 추론’이 천상의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폭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설사 욥의 잘못을 지적하는 엘리바스의 말이 욥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를 바로잡기 위해 건네는 조언일지라도, 독자는 엘리바스의 말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말’일 뿐입니다. 진실이 아닌 말은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셋째, ‘넘어짐’(4)과 ‘끊어짐’(7)이 죄인과 악인,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아둔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규범적 지혜의 일반적 진술에 대해 반성적 지혜는 반론을 제기합니다. 욥기의 반성적 지혜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100퍼센트 예외 없이 항상 적용되는 규칙이 아니고, 욥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도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그럼으로써 규범적 지혜의 인과응보 원리는 많은 경우에 해당되는 근본적인 원리이긴 하지만, 그 원리 하나로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규범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반면에, 전도서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 반성적 지혜를 보여줍니다. 전도서 4:10의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와 전도서 4:12의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는 말은, 넘어짐과 끊어짐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서 악인/무지자에게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므로 거기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 (반성적) 지혜라는 뜻입니다.

 

계시와 지혜의 내용(12-21)

성도들에게도 인과응보 사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삶에 항상 인과법칙이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분에 넘치는 사랑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만약 선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오로지 형벌만 받는다면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당하다고 생각는 이러한 법칙으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12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13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14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15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16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 17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18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19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20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21장막 줄이 그들에게서 뽑히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12-21)

 

욥기 4장에 나타난 엘리바스의 진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해석가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진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8절의 “내가 보건대”라는 표현과 13절의 “환상”이라는 단어를 문제 삼습니다. 엘리바스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진술하고 있다거나, ‘직통 계시’의 신비적 체험을 기반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은 특정한 표현들에 집착하여 전체적인 문맥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보건대”라는 문장의 목적절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8)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를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이 원리가 엘리바스 개인에 한정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주장입니까? 동일한 주장을 빌닷도 하고 소발도 합니다. 잠언과 신명기 등의 규범적 지혜도 같은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의 “환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이 눈앞을 지나가는 특이하고 신비한 체험이 엘리바스에게 알려준 내용의 결론은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21)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는 죽음과 멸망을 초래한다는 ‘규범’에 대한 진술입니다.

하나도 특이하고 신비할 것 없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환상”은 계시의 정당한 한 방법입니다. 그는 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 목소리의 내용이 17-21절입니다. 그 핵심은 허무하고 연약한 인간 자체가 하나님 앞에 불의하고 불결한 존재라는 것입니다(17). 그래서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않고 천사라도 미련하다고 하신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욥을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1:8). 그는 지금 하나님의 평가를 부정하는 거짓 증언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부각하였지만, 인간을 지나치게 격하시킴으로써 도리어 하나님의 명예와 성품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믿지 않는 분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9-21절은 인간에 대한 엘리바스의 경멸의 시각을 계속 보여줍니다. 천사도 미련하다고 책망하시는 하나님께서 흙 집(진토에 사는 육신)에 사는 티끌로 지어진 존재이며, 하루살이 앞에서 부셔 뜨려지는 자를 믿어주시겠느냐고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인간이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지를 부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3장에서의 욥의 진술이 선악 이분법을 기반으로 한 인과응보의 원리에 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바로잡으려는 것이 엘리바스의 첫 번째 진술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삶의 원리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이 원리가 늘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잉과 응보의 법칙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판단과 헤아림으로 우리 자신도 평가받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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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3-01)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하는 욥

욥기 3장 1-26절


우리는 고난이 없는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종종 피할 길을 내시는 대신에 그것을 직면하여 정면으로 다루는 방법을 훈련 시킵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을 종종 바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문제를 영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십니다. 비록 우리의 이해의 범위를 벗어난 고난 일지라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세심하게 돌보심을 믿는다면,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욥의 극심한 고통 앞에서 세 명의 친구들은 아무 말 못 한 채로 칠 일 동안 함께 보냅니다. 욥의 이야기는 이들의 침묵을 깨는 계기가 되며, 앞으로 진행되는 아주 긴 논쟁의 시작이 됩니다. 3장에 나타난 욥의 말 중에 세 친구로 하여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을 하도록 촉발한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욥기 3장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도입부:단절인가 연속인가(1-2)

고난은 우리가 직면하는 어려운 상황이나 역경을 가리킵니다. 이는 삶의 여정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일부분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으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난은 단절이 아닌 연속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겪을 때에도 삶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동안에도 우리는 여전히 경험을 쌓고 배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과 어려움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요소 중 하나이며, 우리의 인생 이야기를 완성하는 일부분입니다.

 

1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1-2)

 

욥기 3장을 이해하는 핵심은 3장의 욥의 말이 1-2장과 단절되는 것이냐 아니면 연속되는 것이냐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욥의 성격에 변화가 있다는 관점은 1-2장과 3장 사이의 단절을 강조하는 해석입니다. 착하고 순종적이었던 욥이 반항적이고 도전적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보는 이 해석의 문제점 혹은 약한 고리는 욥이 그렇게 바뀌게 된 계기에 대해 욥기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추측과 상상력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심한 고통(욥 2:13) 이 욥으로 하여금 더 이상 침묵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밤낮 칠 일 동안”(2:13)이라는 시간의 경과를 지칭하는 표현과 ‘침묵’을 깨고 마침내 ‘자신의 입을 열었다’(3:1)라는 구절이 이러한 단절의 관점을 지지해 줍니다.

그러나 태도나 말투에 현혹되지 않은 채로 1-2장의 욥과 3장 이하의 욥의 진술이 과연 차이가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1:21)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2:10)라는 욥의 신앙고백은 욥이라는 인물의 착하고 순종적인 캐릭터를 표현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바로 인과응보의 원리, 즉 뿌린대로 거두는 원리를 초월해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결정과 판단이 “까닭 없는”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행동이 무작위일 뿐이라는 진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 즉 하나님의 주권 하에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인간은 그 까닭(원인)을 다 알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진술입니다.

 

고통에 대한 호소(1): 저항인가 탄식인가(3-13)

고통에 대한 호소는 개인의 인식과 태도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저항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고통을 도전으로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힘들게 시도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고통을 기회로 여기며, 성장과 발전을 위한 동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3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4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5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6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7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8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9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10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11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13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3-13)

 

욥기 1-2장과 3장 이하를 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은 욥기 3장을 하나님께 대들고 반항하는 ‘저항시’가 아니라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태를 호소하는 ‘탄식시’로 이해합니다. 욥기 3장은 2:13에서 언급된 “욥의 고통이 심함”을 욥의 입을 통해 표현한 것입니다. 욥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장면(특히 3:3-13)은 예레미야 20:14-18과 그 언어 표현이 상당히 유사합니다(“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예레미야의 이 탄식을 하나님에 대한 반항과 도전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약속의 땅을 잃어버린 현실 앞에 망연자실한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욥 또한 2장에서 묘사된 뼈와 살을 치는 심한 고통(5,13)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혹은 ‘죽으면 이 고통이 없어질 텐데’라는 의미의 표현들이 현대 독자들에게 불편함을 야기 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생명을 값어치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욥의 태도에서 ‘하나님께 대한 불경함’을 읽어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나오는 세 친구들의 발언과 엘리후,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욥의 탄식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하는 장면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즉, 욥기의 등장인물들과 하나님께서는 욥의 이 진술을 하나님께 도전하는 ‘문제적 발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칠 일 동안 말없이 욥의 고통을 함께한 친구들로 하여금 침묵을 깨도록 만든 것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욥의 사후 세계에 대한 진술입니다.

 

욥의 사후 세계에 대한 묘사(14-19)

인생에는 다양한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생은 우울하고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아닌지,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이기 때문에 더더욱 나에게 행복과 따뜻함을 선물해주는 이들의 존재가 소중한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프고 슬픈 일에 대해 억울해 할 것이 아니라, 되려 아픔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날들에 대해 더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묻게 되었습니다.

 

14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5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6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17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18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19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14-19)

 

차라리 죽었으면 이 고통을 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욥의 진술은 그의 사후 세계에 대한 묘사로 이어집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라는 주제는 반성적 지혜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잠언을 비롯한 규범적 지혜에서는 이 주제를 다루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규범적 지혜는 ‘의인/지혜자에게는 생명이, 악인/무지자에게는 멸망(죽음)이’라는 도식 이상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규범적 지혜는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됩니다(잠 4:22), 이 지혜가 결여된 악인을 기다리는 것은 멸망(죽음)입니다(잠 1:32; 6:15; 10:8-15,29; 18:7; 28:24). 지혜와 의는 죽음에서 건지며(잠 10:2; 11:4),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습니다(잠 14:32). 육체의 건강과 생명(‘영적 생명’이 아니다)은 지혜에 속해 있고, 멸망과 죽음(마찬가지로 ‘영적 죽음’이 아니다)은 무지와 악의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반성적 지혜는 이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렇다면 의인/지혜자는 죽지 않습니까? 죽음이 그들에게도 찾아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욥기 1-2장이 규범적 지혜가 다루지 않는 천상의 공간을 신학적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온 것처럼, 욥기 3장은 규범적 지혜에서 언급되지 않는 죽음의 평등성을 논의의 단상에 올려놓습니다. 욥이 묘사하는 사후 세계는 의인과 악인, 지혜자와 무지자가 모두 함께 있는 곳입니다. “임금들”과 “모사들”(14절)은 의인과 지혜자를 나타냅니다. 잠언에서 임금(왕)은 “의/공의”(8:15; 16:12, 13), “재판/심판/정의”(16:10;29:4), “정직”(16:13), “생명”(16:15), “지혜(20:26)”와 연결됩니다. “모사들”에게는, 잠언에 따르면, “평안”(11:14), “화평, 희락”(12:20), “경영”(15:22), “승리”(24:6)가 주어집니다. 또한 15절의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 역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로서, 부요는 의와 지혜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욥의 사후 세계에 대한 진술은 이 의인이자 지혜자들이 정반대의 영역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 한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나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16), “악한 자”와 “피곤한 자”(17), 그리고 “갇힌 자”(18)가 바로 그들입니다.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으며 종과 상전의 구분도 없는(19) 사후 세계는 규범적 지혜의 근간인 인과응보의 원리가 무너진 곳입니다. 반성적 지혜에 속해 있는 전도서 역시 이 지점에서 욥의 이해와 궤를 같이하면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죽음에 있어서는 지혜자와 우매자의 구별이 없을 뿐 아니라 인간과 짐승의 구별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전 3:19-20). 만약 지혜자와 우매자의 결말이 동일하다면, 규범적 지혜를 추구해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욥의 첫 번째 발언 중에 친구들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무너지면, 규범적 지혜의 선악 구분이나 지혜를 추구하는 명분이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한 ‘까닭 있는 신앙’ 혹은 ‘영적 투자’를 아무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고통에 대한 호소(2)(20-26)

고통은 우리에게 불편함과 아픔을 주지만, 그 안에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성장과 변화의 기회를 제공하며,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가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동기부여를 받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연대감과 동정심을 키울 수 있습니다. 또한 고통은 우리가 감사하고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할 수 있는 경험입니다.

 

20○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22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4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20-26)

 

고통에 대한 두 번째 호소는 ‘죽음으로써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탄식(1-13)에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첫째, 고난과 고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이 23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발언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이 말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2:10)에서와 동일합니다. 둘째, 규범적 지혜에 대한 반문입니다. 고난이 악인에게 주어지는 징벌이라면, 그 악인에게는 멸망(죽음)이 뒤따라와야 하는 것이 규범입니다. 그런데 욥은 왜 “고난”과 “생명”이 동시에 주어지는지를 고통스럽게 묻습니다(20). 22절의 ‘기쁨’과 ‘즐거움’은 의인과 지혜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라는 것이 규범적 지혜의 진술인데, 고통에 신음하는 자들에게는 “무덤”을 발견하는 것, 즉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 “보배”요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는 역설입니다(21-22). 선과 악, 상과 벌의 이분법이 깨집니다.

 


욥은 자신의 짧은 지식으로 죽음을 갈구했지만, 죽음은 영원한 안식과 쉼이 아닙니다. 죄 아래에서 죽는 모든 인간은 영원한 절망과 고통 속에 던져집니다. 욥이 그토록 바랐던 참된 안식은 오직 에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그분을 만난 사람은 불안을 던져 버리고 평온함을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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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2-01)

 


두 번째 시험을 당하는 욥

욥기 2장 1-13절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며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유혹 앞에서 입술을 지키는 것이 죄로부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시작입니다. 입술에 원망을 담지 말고, 믿음의 고백을 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의 고백과 간절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위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다시 욥을 칭찬하시자, 사탄은 뼈와 살을 치시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 합니다. 사탄이 욥을 치니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납니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하지만 욥은 입술로 죄짓지 않습니다. 세 친구가 위로하려고 와서 밤낮 7일 동안 말을 하지 못합니다.

 

 

사탄의 두 번째 천상회의(1-6)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신앙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뜻을 알 수 없는 가혹한 재난들을 만나면 대답은 궁색해지고 변증은 난관에 부딪힙니다. 하지만 해명할 수 없는 곤한 중에서 비로소 신앙은 빛을 발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고민 속에서 욥이 보인 태도는 무엇입니까?

 

1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2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3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4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6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1-6)

 

본문은 욥기 1장 6-7절에 언급된 것과 유사한 형식과 내용이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경건을 옹호하자 사탄은 소유의 시험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생명과 직결된 시험을 제안합니다.

 

(1) 두 번째 천상회의(1-2)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께 나아올 때 사탄도 함께 등장합니다. 첫 번째 천상회의와 약간 달라진 부분은 사탄이 여호와 앞에 섰다라는 구절이 추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첫 번째 천상회의에서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의 소유물을 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일 때문에,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사탄이 특별히 하나님께 나왔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2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어디서 왔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아마도 욥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이에 사탄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땅을 두루 다니다 왔다고 말합니다.

 

(2) 욥에 대한 신뢰(3)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일어난 일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사탄에게 하는 질문은 단지 1:8의 반복이 아닙니다. 사탄이 까닭 없이 욥을 쳤음에도, 욥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온전함을 지켰습니다. 이것으로 욥의 경건은 사탄의 주장대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 아님이 증명되었습니다.

 

(3) 두 번째 시험(4-6)

 

사탄은 자신의 주장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다른 주장을 관철하려 합니다. 사탄은 가죽으로 가죽을 바꿀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신의 생명과 물질을 바꾸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가죽으로 가죽을 바꾼다는 의미는 물물교환과 관련된 말입니다. 돈으로 돈(물질은 물질로)을 대신할 수 있지만, 생명을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이말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의 생명이기에, 사람은 생명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욥의 소유물을 다시 거두어가시고, 그의 자녀들을 죽게 하셨지만, 정작 욥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기에 경건을 계속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욥 자신의 생명에 비하면, 그의 재산이나 심지어 자녀들까지 읍에게는 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만약 주님이 손을 펴서 욥의 몸(뼈와 살)을 치신다면 욥은 틀림없이 주님을 향해 욕을 하리라는 것이 사탄의 주장입니다.

사탄의 이러한 제안에 하나님은 욥을 사탄에게 맡기십니다. 그러나 욥의 생명만큼은 건들지 말라는 조건을 거십니다. 뼈와 살은 사람의 육체를 구성하는 요소지만, 생명 자체는 아닙니다. 따라서 뼈와 살을 치라는 것은 욥에게 육체의 질병과 고통을 가하여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어 보라는 말입니다. 사탄의 말에는, 사람은 지극히 이기적 존재이기에 자기가 살기 위해시는 무슨 일이든지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욥에게 닥친 두 번째 재앙(7-9)

 

고난이 닥치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시 141:3). 고난 중에서 우리는 하나니믈 운망할 뿐만 아니라 우리 부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말들은 우리가 당한 고난을 더 악화시키고 관계를 깨뜨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때보다 고난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입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7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7-9)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의 전신에 종기가 생기게 했습니다. 욥이 걸린 병은 피부병으로, 이는 고대 근동에서는 저주받은 자나 악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식되었습니다(신 25:3.5). 이러한 질병은 욥의 고난을 악인이 당하는 심판과 연결시킴으로, 욥이 은밀하게 악을 행했기 때문에 고통 당한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욥은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마을 밖 쓰레기 더미에 앉아 그릇 조각으로 피부를 긁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욥은 그때껏 쌓아 왔던 화려한 경력을 잃고, 미래의 안녕을 보장하는 자녀들 역시 잃음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생겨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욥은 정신적, 물질적, 신체적으로 고통당했으며, 사회적으로도 격리되어 철저히 소외되었습니다.

 

 

욥의 두 번째 반응(10)

하나님 외에 누구도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두려움을 완전히 이해하고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킬 때 하나님께서 고난 중에 있는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10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10)

 

이제 욥에게 남은 것은 아내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욥의 아내마저 욥을 향해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기서 ‘욕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사실 ‘축복하다’를 의미하는 그리다. 이 히브리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을 축복하고 죽으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번역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있지만, 1:5의 경우처럼 굳이 이 부분을 완곡어법으로 보고, 욕하고 죽으라는 말로 대치시킬 필요까지는 없어보입니다. 70인역도 욥의 부인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지 않습니다. 욥의 아내는 괴로워하는 남편을 향해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 바에는 하나님을 축복하고 죽는 편이 더 낫지 않겠냐는 한탄 섞인 조언을 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신학자가 욥의 아내를 부정적으로만 판단했습니다. 정말 욥의 아내는 칼뱅이나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처럼 사탄의 도구이거나 악마의 조력자입니까? 욥의 아내는 많은 오해를 받지만, 실제로 욥을 떠나지 않았고 끝까지 그와 함께했으며 그를 지켜 주었던 사람입니다. 어찌되었든 아내의 이러한 제안을 욥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기 때문에 화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욥은 결코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세 친구 등장(11-13)

성도는 가까이 있는 이들이 고통을 당할 때 선한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며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유혹 앞에서 입술을 지키는 것이 죄로부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시작입니다.

 

11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12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11-13)

 

욥의 친구들이 그를 위문하고 위로하기 위해 세 친구가 욥을 방문합니다. 이들은 에돔의 북쪽 지역으로 추측되는 데만 사람 엘리바스(하나님께서 정복하신다), 유프라테스강 중부 지역으로 여겨지는 수아 사람 빌닷(하닷의 아들)과 어느 지역을 의미하는지 짐작하기 쉽지 않은 나아마 사람 소발(새)입니다. 이들의 등장으로 욥기의 프롤로그와 대화 부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등장은 두 부분을 연결 시키는 매개체입니다. 친구들은 처음에 욥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만큼 욥의 상황이 안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욥을 알아본 후엔 소리를 질러 울며,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해 재를 날립니다. 그들은 7일 밤낮을 침묵하며 욥과 함께 있었습니다.


욥의 고통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이 그를 더욱 괴롭혔습니다. 욥을 보면서 목숨까지 잃었던 주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죽는 순간까지 아버지께 대한 신뢰를 보였던 주님을 따라 나의 시험을 인내로 잘 감당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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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1-02)


욥에게 닥친 고난들

욥기 1장 13-22절


우리는 고난을 생각하면 고난의 원인을 먼저 생각합니다. 인과응보라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욥기를 통해서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은 고난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욥기에는 난해한 내용이 적지 않게 나오지만, 고난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새롭게 하는 즐거움을 주시기도 합니다.

 

하늘에서 결정된 대로 욥에게 고난이 닥칩니다. 외국인들의 폭력과 하늘에서 내리는 불과 바람으로 인해 욥의 종들과 가축, 그리고 심지어 자녀들까지 모두 잃게 됩니다. 숨 쉴 틈 없이 연속적으로 불어 박치는 ‘까닭 없는 고난’ 앞에서 욥은 인과응보의 원리를 초월한 신앙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욥의 신앙고백은 규범적 지혜를 뛰어넘는 반성적 지혜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욥에게 닥친 첫 번째 재앙(13-19)

사람들은 비극적인 일을 겪으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더구나 비극이 닥친 이유를 알지 못할 때, 그 원망의 정도는 더 심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도 갑자기 재난을 맞을 수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굴하지 말고 믿음으로 끝까지 견뎌 내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냅니다. 천상회의에서 사탄이 제기한 질문, 곧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분명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주장이 틀렸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증명했습니다.

13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6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7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18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19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13-19)

욥에게 닥친 첫 번째 재앙은 욥의 생명 외에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참혹한 재난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소유물, 즉 가축과 종들 그리고 심지어 10명의 자녀들까지 한 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예배자의 모습으로 반응합니다.

(1) 맏아들의 생일 모임(13)

욥의 고통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날들 중 한 날 시작됩니다. 이날도 여느 때처럼 욥의 자녀들은 첫째 아들의 생일을 맞아 그의 집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2) 소와 나귀와 종들 재앙(14-15)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14) 일상의 삶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렀습니다(15). 소와 나귀들을 약탈하고 종들을 죽입니다.

(3) 양과 종들의 재앙(16)

두 번째 비보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과 종들이 희생됩니다. 연이어 갈대아인들의 기습적 공격으로 낙타를 빼앗기고 종들이 살해됩니다. 결정적으로 욥의 10자녀가 몰살됩니다. 장자의 생일날이 열 자녀의 애도일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버렸습니다. 최선의 삶을 살던 욥은 최악의 고통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첫 번째 재난 보도는 서론 2-3절에서 언급된 욥의 소유물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들 일곱과 딸 셋, 양과 낙타, 소와 암나귀 그리고 많은 종들. 첫 번째 재난을 통해 이제 욥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건드리지 말라고 명령한 욥의 건강한 몸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욥의 잃어버린 가축의 리스트는 이미 구약성경 다른 곳에서 그대로 나옵니다. 바로 신명기에서 모세가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불순종했을 때 받는 저주 가운데 낙타를 제외한 모든 항목이 적시되어 있습니다(신 28:31-32a`

아이러니한 사실은 어떻게 율법에 충실하고 온전하였던 욥이 오히려 율법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선포된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이다. 욥기를 접하는 독자들에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여기에 있다. 악인에게 일어났어야 할 저주가 의인 욥에게 일어났다는 현실이다. 더군다나 보다 독자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정보에 의하면 그 재난 자체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있었던 욥의 의로움에 대한 토론으로부터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토론의 결과가 가져다준 재난은 욥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막대한 것인데 그 원인을 아는 독자들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무참한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에 우리의 관심은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욥기 이야기를 전해주는 거가는 사실상, 이러한 드라마틱한 환경을 서론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조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존의 율법 순종 여부에 따른 축복과 저주의 교훈을 넘어서고 있으며 인간의 기대와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의 첫 번째 순종적 반응(20-21)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가장 빛나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좋은 상황 때문에 아니라 좋으신 하나님 때문에 찬양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이 있으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완전한 뜻에 따라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20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1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20-21)

로버트 알터(Robert Altern)가 발견한 히브리 문학 산문체의 수사학적 비평 방법에서 자주 쓰이는 방법 중 하나는 ‘침묵의 기술’(art of reticence)이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 형들에게 배신당하여 애굽으로 끌려가는 요셉, 우리는 그들로부터 아무런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저 사건의 전개에 의지할 뿐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의 입은 열리고 그들의 말을 통해 성경본문에서 정작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 메시지를 얻게 됩니다. 따라서 본문의 이야기 가운데 침묵이 진행될 때 긴장은 고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1) 땅에 엎드려 예배함(20)

휘몰아치듯 네 차례의 연이은 비보가 욥의 귀청을 따라고 온 존재를 흔들어놓았습니다. 그의 세계는 이제 인간이 느릴 수 있는 최고점의 삶에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참혹함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네 차례에 걸친 끔찍한 소식들 가운데 욥은 줄곧 침묵하고 있다. 아니, 본문의 저자는 일부러 욥의 반응을 먼저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20절에 이르러 욥의 반응을 그가 취한 행동을 통해 알려줍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욥의 침묵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욥이 보인 반응 역시 확실치 않습니다. 욥은 일단 “일어나”라고 보도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그는 족장시대 가부장의 권위로 앉아서 비통한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은 그의 겉으로 보이는 자세의 변화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와 관계된 방식의 변화 또한 동반합니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 행위가 진행되는데 처음 두 번의 행위는 애도의 의식을 보여줍니다: “겉옷을 찢고” 그리고 “머리털을 민다” 고대근동의 전형적인 조문자의 애도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행위는 예상을 깨고 있습니다.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욥이 갑작스레 망자가 되어버린 10자녀를 향해 애절한 탄식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했던 독자들에게 이러한 예배의 행위는 당황스럽습니다. 따라서 20절까지 오면 욥의 반응에 대한 침묵의 기술은 효과적인 차원에서 그 절정을 맞습니다. 도대체 지금 욥의 심리상태는 어떤 것입니까?

(2) 주권자 여호와를 찬송함(21)

21절에서 급기야 욥이 입을 뗍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 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도대체 믿기지 않는 고백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욥이 당한 재앙의 경중과 상관없는, 말 그대로 정통적인 신앙 고백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욥의 이러한 고백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석은 다양합니다. 물론,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인내하는 욥”의 경건한 반응입니다. 현실에서 어떠한 고통을 당하더라도 의로운 욥의 하나님께 향한 신앙은 항상 신실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토론은 욥의 신실성을 기대한 하나님 편으로 승부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고통의 현실 앞에서 현재 욥은 진정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기보다는 어찌할 바 모르는 상황 속에서 기존의 관습에 따른 예배행위의 태도를 취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론 부분인 1-2장에서 욥기의 드라마가 바로 42장 결론 부분으로 이어진다면 일반적인 전자의 해석 즉 경건한 욥의 반응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내 3장에서 보이는 욥의 생일저주를 비롯해 이후 세 친구와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욥의 항변을 보면 오히려 뉴썸의 해석이 더욱 타당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아직 욥기 이야기의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지 않은 상황에서 어떠한 입장이 욥기 본연의 메시지와 더 가까운지 결정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욥의 예배자적 반응은 서론 1-5절에서 보여준 욥의 모습과 일치된다는 사실입니다. 온전하여 악으로부터 떠나 있는 의인 욥으로서의 당연한 반응이 보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첫 번째 반응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석이 어떠하든지 간에 현재로서 분명한 것은 욥기의 이야기는 일관성 있게 펼쳐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욥 이야기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이야기의 전개를 하나하나 그대로 따라가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해석자의 기존 관념이나 선입관이 아니라 본문 자체의 세밀한 관찰과 분석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본문과의 만남을 허락할 것입니다.

 

욥의 반응에 대한 평가(22)

우리가 인생에서 재난을 만나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살아 계시며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분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하고 그 주권에 순종하여 살아갈 때, 우리도 욥같이 모든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을 향한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22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22)

첫 번째 재앙 보도는 내레이터의 요약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요점입니다. 욥이 이 모든 일에 범죄치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범죄하지(과녁에서 벗어나다) 않았다는 것은 본래의 정통적 신앙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원망하지(불미스러움) 행치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결론에 따르면 현재 욥은 정통적 신앙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욥의 현실 상황에서 일어난 일은 정통적 신앙의 인과응보적 교리에 어긋났습니다. 내레이터의 사건 보도는 비정통적 현실을 그립니다. 반면에 내레이터의 사건 요약은 정통적 신앙을 그립니다. 양자 사이의 충돌은 다분히 의도적이요 이 충돌의 해결이 욥기의 중심 과제입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고 마음은 연약해지기 쉽습니다. 고난의 시기를 굳건한 믿음으로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 연약해진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실 것입니다. 또 고난의 시기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넉넉히 견디고 극복할 수 있도록 능력을 베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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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1-01)


온전하고 정직한 하나님의 자녀 욥

욥기 1장 1-12절


살면서 점점 인생에 대해서 확신이 없어집니다. 삶을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좋을지 모르겠고, 삶의 기술도 매번 달라지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삶을 윤택하고 평화롭게 사는 길을 ‘지혜’라고 부릅니다. 그 지혜라는 것은 어떤 ‘원리’나 ‘규칙’ 혹은 일정한 패턴이나 질서를 아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일은 항상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잠언을 비롯한 규범적 지혜의 근간입니다. 욥기 1장은 이 원리의 약한 고리를 파고드는 ‘그렇다면 무죄한 자의 고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을 위한 두 가지 전제를 1-12절에서 다룹니다. 첫째,욥은 의로운 자입니다. 즉, 욥은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1-5). 둘째, 욥의 고난은 하늘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이지 욥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6-12).

 

규범적 지혜의 화신으로서의 욥(1-5)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게 하시지만 정직한 사람들의 집은 흥하게 하십니다. 물론 물질적 부만이 하나님께서 그의 정직함과 온전함을 인정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욥의 높은 도덕성을 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온전한 성품은 동전의 양면과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온전하고 정직한 성품을 지닐 것을 오늘도 기대하고 계십니다.

1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3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4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5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1-5)

본 단락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욥이라는 인물의 캐릭터 설정(1-5)과 (2) 욥의 고난의 이유가 설명되는 천상회의(6-12). 이 단락(욥 1:1-12)은 앞으로 전개될 욥과 친구들 사이의 대화, 엘리후의 진술, 하나님의 언설 등을 이해하기 위한 대전제가 됩니다.

(1) 온전하고 정직한 자(1)

본문의 공간적 배경을 “우스 땅”으로 두고 있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이스라엘 지역 내에서 일어난 일로 그리기에는 앞으로 진행될 내용이 전통적 여호와사상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욥기의 저자는 책의 내용 자체가 기존의 이스라엘의 사상적 경계를 넘어서 있다는 사실을 공간적 배경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욥에 대한 묘사를 네 가지로 하고 있는데 “온전하고” “정직하여”,“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 그립니다. ‘온전함’은 ‘탐’이라는 형용사로부터 왔는데 외모를 포함하여 전인적으로 완벽한 삶을 의미합니다. 정직(야살)은 구부러짐 없는 올곧은 심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표현은 전통적 지혜 사상에서 최고의 현자적 삶을 살아가는 욥의 모습을 부각시킵니다.

(2) 자녀와 재물의 복을 누리는 자(2-3)

욥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났다는 보도는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는 자녀에 관한 한 완벽한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완전수 일곱과 셋은 이를 상징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 자녀들에게 장차 닥칠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그렇게 완벽한 자녀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될 때 욥이 경험할 참담함이 역설적으로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최선의 삶을 묘사함으로써 최악의 삶으로 떨어지는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문학적 의도는 3절에서도 나타납니다. 그의 재산목록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대의 소유를 자랑합니다. 이곳에서도 7과 3이라는 숫자는 여전히 부각됩니다. 말 그대로 우스 땅이 위치한 인근 동방 지역에서는 가장 “큰 자”(가톨)로 소개됩니다.

(3) 자녀를 위한 번제(4-5)

욥의 최선의 삶을 보여주는 절정은 자녀나 소유물에 대한 소개를 지나 종교적 하나님을 향한 경외를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즉. 그의 자녀들을 위해 한결같이 드리는 속죄를 위한 번제 장면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최고의 신앙적 행위의 보도 가운데 어두운 그림자가 동시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것은 속죄 제의를 드리는 욥의 분명치 않은 동기입니다.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5). 주석가들 가운데에는 욥의 자녀들의 희생 자체가 욥이 행여나 걱정했었던 일들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욥을 방문한 친구들의 과도한 교리적 입장입니다. 욥기의 서론부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욥이 지금 자신의 완벽주의적 신앙의 태도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삶에 있어서 흠이 없는 신앙은 자녀들의 혹시 모르는 죄악의 씨앗까지도 말소하려는 경향을 띠게 합니다.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에서 ‘항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욥의 완벽주의적 신앙의 화룡점정입니다. ‘콜하야밈’은 ‘모든 날들’ 즉 매일같이 일관되게 행하는 신앙적 성실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6-12)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으시며 오직 마음의 중심을 살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보시며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이처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욥기는 종교적 형식을 갖추는데 머물지 말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 머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6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7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8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9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12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9-12)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권자이시며 공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하늘의 법정에서 회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삳탄에게 욥에 대한 시험을 허락시는 것은 사탄의 도발과 충동 때문이 아니라 욥의 고난을 통해 드러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1) 천상회의(6)

지상에서 의인 욥의 행사가 소개되다가 갑자기 천상에서 벌어진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들의 회의로 장면이 전환됩니다. 욥이 받는 의로운 고통의 발단이 이곳에서 설명됩니다.

구약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천상회의 또는 하나님의 어전회의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한 하늘의 결정을 말할 때 도입되는 문학적 수단입니다. 실제로 천상회의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도 소집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창 1:26)라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보다 대표적인 예는 이사야의 소명 장면인 6장 8절입니다. 세상에 베풀 하나님의 말씀 선포 사명을 어떤 이가 감당할지 하나님께서 회의에 참석한 천사들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 천상회의를 목도하고 있던 이사야가 응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욥에 다한 하나님의 칭찬(7-8)

천상회의의 문학적 모티프를 통해 본문을 보게 되면 이곳에 참석한 사탄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서 의아해집니다. 타락 이전의 천사장 하사탄은 다른 천상의 존재들처럼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소집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하사탄의 역할이 본문에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바로 땅을 두루다니며 여기저기 구석구석 사람들과 그들의 행사를 파악하여 하나님께 보고하는 기능을 7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바로 이 한마디 질문으로 인해 욥의 고통은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 천상회의의 안건(agenda)은 ‘욥의 의로움에 대한 검토’였는지도 모릅니다.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1절에서의 욥에 대한 나레이터의 소개가 8절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통해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욥의 고통의 발단에 대해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 또 없는 욥의 의로움을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통해 검증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을 살펴보고 오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욥의 ‘여호와 경외’를 검증하려 하셨겠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욥기 38-41장의 하나님의 폭풍우 응답에 이르러서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이곳에서는 욥의 신앙의 동기에 대한 검토가 사건의 발단이었음을 아는 데 만족해야 합니다.

(3) 욥에 대한 사탄의 참소(9-11)

하사탄은 단순한 보고자의 역할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심지어는 고발까지 하는 검사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욥의 의로움을 보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하사탄은 욥의 신앙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묻고 있습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가히 충격적인 고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욥의 하나님 경외는 순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축복하셨기 때문에(10)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전제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보호하셨던 하나님의 손을 펴서 그의 소유물을 앗아간다면 욥의 신앙은 무너져 내릴 것이라 하사탄은 확신합니다(11).

(4) 하나님의 시험을 허가(12)

의외로 하나님께서는 순순히 하사탄에게 욥의 소유물을 처분토록 허락하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욥의 신앙의 동기의 순전성을 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몇몇 주석가들은 이 장면을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내기로 간주합니다. 마치 양자 사이의 힘겨루기가 진행되고 있고 욥은 그 와중에 희생양이 된 것처럼 해석합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피고인 욥을 둘러싼 검사인 하사탄과 변호사인 하나님 사이에 법정공방이 전개되고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전하는 더 정확한 진실은 본래부터 하나님께서는 “까닭 없는” 신앙을 강조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욥의 순전한 여호와 경외의 참모습을 확인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하사탄의 파송과 결과 보고를 위한 천상회의 장면에서, 그리고 까닭 없는 신앙에 대한 이의제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련의 하나님의 모습 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욥의 고통은 까닭 없는 신앙을 발견하기 위한 실험입니다. 물론, 그 실험의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그러나 실험의 결과는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놀라웠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리 없다는 말로 하나님께 대적합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하나님께서는 어디서 배운 하나님이고 어떻게 형성된 이해입니까? 우리는 설명하지 못하는 고난이나 예기치 않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하나님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이해 지평을 넓히고 깊게 하고 싶은 것은 아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 당신이 내 신앙의 이유가 되게 하시려는 뜻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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