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08-01)
빌닷의 잘못된 관점들
욥기 8장 1-22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일수록,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훈계하는 태도를 보이기 쉽습니다. 성경 지식이 많으면 사람들을 가르치고 고치려 하기 쉽습니다. 엄정한 잣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권면이나 훈계가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합니다.
빌닷의 첫 번째 발언은 엘리바스의 첫 발언(4-5장)과 유사한 내용과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악인/죄인/무지자에게는 화가 임하고, 의인/선인/지혜자에게는 복이 임한다는 원칙을 설명합니다. 다만, 엘리바스가 개인적 경험과 신비 체험을 바탕으로 주장을 전개했다면, 빌닷은 “옛 시대 사람”과 “조상들”에게서 지혜의 근거를 찾습니다.
인과응보와 하나님의 의(1-7)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하고 따르기를 강요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경우를 봅니다. 상대방의 아픔이나 성황을 헤아리지 않고 신앙이라는 잣대를 사정없이 들이대는 경우도 많습니다. 판단과 정죄의 언어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권면이 아니라면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1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3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4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5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6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7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1-7)
빌닷에게 욥의 말은 “거센 바람”처럼 들립니다. 7장에서 욥이 인간의 인생을 한낱 바람(루아흐)에 불과하다며 바람의 짧게 스쳐 지나가는 성질을 강조한 것과는 다르게, 빌닷은 바람의 세찬 힘(캅비르)을 부각 시킵니다.
욥의 말을 빌닷은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굽게 하신다’는 주장으로 해석합니다. 욥은 앞에서 (그리고 뒤에서도)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빌닷에게 욥의 말이 그렇게 ‘해석’된 이유는, 욥이 고난을 당하는 현실과의 무죄 주장을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에게 벌을 내리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과응보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는 규범적 지혜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드신 창조 원리인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칙에 어긋나게 움직이시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선한 분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빌닷은 욥의 자녀들의 죽음을 그들이 지은 죄에서 찾습니다. “수아 사람” 빌닷은 (수아라는 지역이 어디 있든지 간에) 욥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직접 옆에서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욥의 자녀들에 대한 빌닷의 정죄는 그러므로 인과응보의 원리를 적용한 추론일 뿐입니다. 욥기의 독자인 우리는 욥의 자녀들의 죽음이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빌닷은 자신의 추론을 이어나갑니다. 죄인에게 멸망이 할당된 것처럼 의인에게는 온전함의 회복(샬롬)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의인과 지혜자를 빌닷은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사람(5), 순수/순결하고 올바른 사람(6). ‘자크’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금(개역한글 “정금”)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형용사입니다. “정직”으로 번역하는 ‘야샤르’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그 길을 ‘똑바로’ 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비록 지금 현재의 상태가 작고 “미약”할지라도 미래에는 매우 커질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이 유명한 구절을 빌닷은 지금 자식들을 다 잃고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욥에게 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잃은 아픔을 겪는 사람의 면전에 ‘너의 자녀들이 죽은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다’라는 말을 대놓고 한 뒤에 이어지는 말입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그의 영혼을 갈가리 찢어놓는 끔찍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반성적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불의한 자에게 임하는 화(8-19)
오랫동안 축적한 지식과 지혜라고 해서 어떤 상황에든지 다 적용할 수 있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오래되어 검증된 지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의 모든 문제에 적용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재앙을 만나기 때문에 과거에 범죄한 것은 아닙니다.
8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9(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우리는 아는 것이 없으며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10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 11왕골이 진펄 아닌 데서 크게 자라겠으며 갈대가 물 없는 데서 크게 자라겠느냐 12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13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14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15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16그는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17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18그 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19그 길의 기쁨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8-19)
빌닷은 자신의 지혜의 근거를 “옛 시대 사람”과 “조상들”에게 둡니다(둘은 평행어로 동일한 의미를 지님). 규범적 지혜가 말하는 규범(패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던 때부터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천지창조의 때에 더 가까이 있는 과거 시대와 조상들이 그 규범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규범적 지혜는 따라서 ‘과거 지향적’입니다. 규범을 더 많이 경험한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므로,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점점 더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대표적인 잠언이 부모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구도로 되어 있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잠 1:8).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동일합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 32:7). 참고로, 나중에 등장하는 엘리후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참고 있었다는 것(32:4,6)은 나이와 지혜를 동일시하는 규범적 지혜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입니다. 동시에,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32:9)라는 엘리후의 말은 반성적 지혜의 표현입니다.
이어서 빌닷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규범적 지혜의 근본 원리를 설명합니다. 이 지혜는 자연 세계에 대한 관찰(‘경험’)에서 온 것입니다. 좋은 것(“왕골”, “갈대”)이 나쁜 곳(“진펄 아닌 데”, “물 없는 데”)에서 나올 리가 없습니다. 물론 척박한 곳에서도 무엇인가 자라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 지속될 리는 없고, 하나님께서 본래 지정하신 충분한 수명(“뜯을 때”)을 다 살지 못하고 명멸하게 됩니다(11-12). 악인/무지자(“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 “저속한 자”)의 운명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13). 여기서, “저속한 자”라고 번역된 ‘하네프’는 어원적으로 길에서 벗어나거나 똑바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17:8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똑바로 사는 사람(예샤림)과 반의어로 사용되었고, 20:5에서는 악인들(레샤임)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악인은 멸망한다’는 공식은 다음 질문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왜 악인은 존재하는가?’ 악인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통해 다 없어져야 마땅한데 악인들이 존재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빌닷의 대답은 한마디로 ‘그들은 오래 가지 못한다’입니다. 비록 악인들이 존재하기는 합니다. 그들도 “햇빛을 받고 물이 올라 그 가지가 동산에 뻗으며 그 뿌리”를 내릴 수는 있습니다(16-17). 그러나 그들이 뿌리내린 곳은 “돌무더기”이고 그 돌 틈 사이로 뿌리를 겨우 내렸다 하더라도 쉽게 뽑히고 맙니다(17-18). 그들이 집을 지을 수는 있어도 그 집은 마치 거미줄 같아서 쉽게 끊어지고 오래 “보존되지”는 못합니다(14-15). 그들은 곧 “다른 것”으로 대체됩니다(19).
이 자연의 법칙에서 끌어낸 인과응보의 원리를 욥이 처한 현실에 적용하면, 욥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수명을 충분히 다 살지 못하고 일찍 죽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4절에서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라는 ‘주장’의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이고 “저속한 자”(비뚤어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빌닷의 주장은 재난이나 천재지변이 닥쳤을 때 그것이 죄 때문이라고 정죄하는 목회자들의 경우를 연상시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의 이름으로(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라는 명분으로) 2차 가해를 저지릅니다. 욥기의 반성적 지혜는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신학적 원리’로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지혜가 아닌 악이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온전한 자에게 임하는 복(20-22)
종종 환자 심방에서 환자를 찾아가 회개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순간 자신은 죄가 없기에 아프지 않고 상대방에게 위로는커녕 상처만 주게 됩니다. 성도들은 어려움에 당한 타인의 상황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규정하지 말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위로를 전해야 합니다.
20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21웃음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22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20-22)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지혜자(“순전한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상은 “웃음”과 “즐거운 소리”입니다(21). 기독교의 금욕주의 전통이 ‘웃음’을 사탄이 틈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과는 달리 (보들레르의 “웃음의 본질/On the Essence of Laughter(1855)”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호르헤 신부를 보라), 규범적 지혜는 웃음을 의인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선물로 여깁니다. 시편 126:2에서는 “웃음”과 “찬양”을 평행어로 취급하기까지 합니다(반면에,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는 “웃음”을 “미친 짓”과 연결시키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전 2:2]).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자를 “미워하는 자”는 곧 “악인”이며, 그들에게 내리는 벌은 “부끄러움”과 “없어짐”입니다(22). 누군가에는 큰 용기와 위로를 줄 수 있는 말이 누군가에는 정죄와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빌닷은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우리의 온전하지 못한 지식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가고 그들을 품어 주어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
'18 욥기(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욥기(11) - 욥기 9장 17-35절 -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Ⅱ (2) | 2023.11.12 |
---|---|
욥기(10) - 욥기 9장 1-16절 -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3) | 2023.11.12 |
욥기(09) - 욥기 7장 1-21절 - 한낱 바람에 불과한 인생 (1) | 2023.11.09 |
욥기(08) - 욥기 6장 1-30절 - 마른 개울 같은 우정 (5) | 2023.11.09 |
욥기(07) - 욥기 5장 1-27절 - 섣부른 충고를 던진 엘리바스 (1) | 2023.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