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06-01)
마른 개울 같은 우정
욥기 6장 1-30절
아이들의 특징 중 하나는 끊임없이 ‘왜요?’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참 궁금한 게 많습니다. 성장하면서 이런 호기심을 잃어가지만, 여전히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지?’, ‘왜 이번 일이 잘 안 되었을까?’, ‘왜 지금 나에게 상황이 일어나고 있지?’이란 질문들을 많이 합니다. 욥이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하는 궁금했던 것입니다.
칠일 동안 침묵하며 욥의 고통을 함께 나누던 세 친구 중 엘리바스가 입을 열어 던진 조언이 욥에게는 더욱 커다란 상처가 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고난보다 친구들의 ‘지혜의 말’이 욥에게는 더욱 “혀의 채찍”이 되었을 것입니다. 욥의 저항과 도전은 하나님께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친구들을 향한 것입니다. 엘리비스의 어떤 말이 욥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6장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에 대한 호소(1-10)
‘절망’은 모든 희망을 포기한 정서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극심한 고난 때문에 절망 상태에 빠지면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차라리 죽는 것 훨씬 낫겠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것이 바로 욥이 맞닥뜨리는 상태였습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4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5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7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8○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9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10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1-10)
6장은 욥의 전체 진술 중 중요한 주제들이 등장합니다: (1)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2) 나는 무죄합니다, (3) 인과응보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4) ‘지혜’의 말이 상황에 따라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욥은 3장에 이어 친구 엘리바스의 무정한 비난에 대해 욥은 대답합니다. 자신의 고통이 극심함을 토로합니다. 고통의 무게를 잴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고 표현합니다(2). 복수형 명사 ‘바다들’을 사용하여 욥의 고통이 크고 무겁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라는 지난 발언에 대한 반성이라면 문맥상 어울리지 않게 됩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처럼 욥이 3장에서의 표현이 ‘거칠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로 보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뒤이어 나오는 욥의 말이 그렇다면 좀 더 진중하게 말하거나 부드럽게 표현해야 하는데, 6장 이하의 욥의 언어가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진 점을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런 말이 나왔던 것이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의 괴로움이 너무 커서 격렬하게 감정을 토로하는 과정에서 조리 있게 말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4절에서 그는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이 보내신 화살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 화살과 두려움은 복수로 표현합니다. 그의 가축들을 몰살하고 10명의 자식들을 죽인 모든 공격들을 하나님의 독화살로 느꼈고, 그것들이 하나님께 대한 공포감을 촉발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화살은 자신의 몸을 악창으로 공격하고, 친구들의 비난과 조롱의 형태로 찾아왔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이에 그는 입맛을 잃고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7). 7절 하반절을 직역하면 ‘나의 음식은 마치 질병 같다’가 되는데, 개역개정의 번역처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꺼리는 음식물” 정도가 아니라, 먹으면 더 아프고 고통스러워질 것 같다는 심경 토로입니다. 욥은 자신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4,9). 그러나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진술이 곧 욥의 불신앙이나 하나님에 대한 도전과 공격으로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신앙은 고통과 재앙마저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만약 4절과 9절의 욥의 발언이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면,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룻 1:20)와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룻 1:21)이라는 나오미의 말도 불신앙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의 관점에서도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라는 진술은 문제적 발언이 아닙니다. 욥의 진술은 “우리가 하나님께 …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 2:10)라는 진술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8-9절에서도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내동댕이치는 기막힌 현실을 원통해합니다. 아무도 간구를 들어줄 사람 없고, 심지어 죽고 싶은 소원조차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께서는 산 자들의 땅에서 자신을 끊어버리실 것이라고 예상합니다(9). 그런데도 욥은 회개하거나 항복할 뜻이 없습니다. 엘리바스가 말한 해피엔딩을 기다릴 기력도 없다고 하소연합니다(10).
주위 사람들이 주는 고통에 대한 호소(11-21)
사람을 의지하면 결국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귐은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의 주인이 되는 성도의 사귐에는 서로를 향한 동정의 마음과 위로가 넘칩니다. 자신이 죽고 예수로 사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11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12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13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14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16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17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18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19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20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21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11-21)
욥은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음을 고백합니다(11,13b). 13절에서 “나의 능력”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투쉬야 정확한 의미를 알기는 어렵고 아마도인데 존재 부사인 ‘예쉬’와 같은 어근을 지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이 맞다면 ‘존재할 힘’ 정도의 의미로 이 문맥에서 쓰였을 것입니다. 이 단어를 ‘지혜’와 유사한 의미로 번역하는 것은 11:6에서 호크마(지혜)와 평행어로 사용되기 때문인데, 12:16에서는 오즈(힘)와 평행어로 쓰입니다. 모든 힘이 소진되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진 것은 양방향에서의 공격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화살”과 “독”(4)과 “손”(9)으로 표현되는 고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재앙, 특히 질병을 나타내는 숙어적 표현입니다(출 9:3; 신 2:15; 삿 2:15; 겔 3:14; 대하 30:12 등). 욥은 이러한 하나님의 공격을 받아낼 힘이 없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힘이 돌만큼 단단하겠는가, 내 피부가 금속으로 되어 있는 줄 아는가’(12). 둘째, 주위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힘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한탄합니다(13a). 주위 사람들(친구와 형제들)은 그에게 “동정”을 베풀기는커녕(14), 뜨거운 태양 별에 물이 말라버리듯이 욥의 주위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16-18). 욥에게 닥친 재앙을 보고 두려워졌기 때문입니다(21). 14절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라는 번역은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친구에 대한 신의(헤세드)를 저버린 자는 전능자에 대한 경외심도 버린다.’ 14절 하반절을 직역하면 ‘그는 전능자(샨다이)의 경외를 버렸다/떠났다’입니다. 14절의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마스(무너진 자, 녹아내린 자)가 욥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친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판단하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의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는 전자로 해석한 것이고, 대안적인 해석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 근거는 (1) 평행법적으로 ‘헤세드’와 ‘이르아트 샨다이’가 평행하고, 친구/이웃에 대해 헤세드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특질이라는 점; (2) 이어지는 15절에서 헤세드를 지키지 않는 이웃/형제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는 점; (3) 6:10에서 욥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 점 때문입니다. 욥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저버렸다고 고백하는 것은 욥의 무죄 주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친구들에 대한 질책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자네들은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은가?’
15-20절은 친구들이 사막의 신기루 같이 헛된 위로를 하고 있다고 공격합니다. 변덕스런 그들을 ‘와디’(乾川)에 비유합니다. 평소에는 건천이었다가 비가 올 때만 창창한 강이 되는 와디처럼, 친구들도 한결같지 않고 잘 나갈 때는 잘 대하더니 힘겨울 때 자신을 공격한다고 원망합니다.
고통을 더욱 악화시키는 친구들의 조언(22-30)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빛은 한없는 위로와 은혜의 눈빛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은 정죄와 판단의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날 봐 달라고 소리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죄인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향할 때 우리는 참된 위로를 얻고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말과 태도로 그저 욥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22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23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24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25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26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27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 넘기는구나 28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29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30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22-30)
고통 속에 있는 욥이 친구들에게 바랐던 것은 친구들의 힘을 나누어달라는 것도 아니고(22) 고통에서 건져달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23). 22절의 ‘코아흐’는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말로, 개역개정의 “재물”은 힘/능력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원수의 손”과 “폭군의 손”이라는 번역(23)은 문제가 있는데, 9절의 하나님의 손이라는 표현과 함께 읽게 되면 욥이 말하는 원수와 폭군이 하나님을 가리키게 됩니다. 그러나 하반절의 ‘아리찜’은 복수형으로 ‘폭력적인 사람들’을 의미하며, 일반적인 폭력을 지칭합니다. 욥이 원하는 것은 14절의 ‘헤세드’였습니다. 헤세드는 계약 관계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로, ‘인자, 인애, 자비, 사랑’이라는 뜻에 ‘신실, 성실, 신의, 변함없음’이라는 의미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헤세드 대신 친구들이 선택한 방식은 “옳은 말”로 “책망”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욥의 가슴을 후벼 파며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25). 인과응보의 일반론은 분명 “옳은 말”이지만, 욥과 같이 예외적인 경우에 적용하게 되면 그 옳은 말은 ‘가치 없는 말’, ‘무의미한 말’이 됩니다(26 “실망한 자의 말”). 욥은 친구들에게 “행악자가 되지 말라”(29)고 간절히 부탁하는데, 욥을 바로잡아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그들의 선한 의도가 욥을 죄인으로 낙인찍는 폭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대하여 헤세드를 지켰고 그가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29-30). 다시 한 번, 욥의 무죄 주장으로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말과 생각을 전하기에 앞서 들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말을 경청해 주고 긍휼과 사랑으로 공감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음에 귀를 기울여 주시듯 우리가 고난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참된 위로자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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