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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3-01)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하는 욥

욥기 3장 1-26절


우리는 고난이 없는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종종 피할 길을 내시는 대신에 그것을 직면하여 정면으로 다루는 방법을 훈련 시킵니다. 우리는 문제 해결을 종종 바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문제를 영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십니다. 비록 우리의 이해의 범위를 벗어난 고난 일지라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고 세심하게 돌보심을 믿는다면,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욥의 극심한 고통 앞에서 세 명의 친구들은 아무 말 못 한 채로 칠 일 동안 함께 보냅니다. 욥의 이야기는 이들의 침묵을 깨는 계기가 되며, 앞으로 진행되는 아주 긴 논쟁의 시작이 됩니다. 3장에 나타난 욥의 말 중에 세 친구로 하여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을 하도록 촉발한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욥기 3장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도입부:단절인가 연속인가(1-2)

고난은 우리가 직면하는 어려운 상황이나 역경을 가리킵니다. 이는 삶의 여정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일부분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으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고난은 단절이 아닌 연속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겪을 때에도 삶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겪는 동안에도 우리는 여전히 경험을 쌓고 배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과 어려움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요소 중 하나이며, 우리의 인생 이야기를 완성하는 일부분입니다.

 

1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1-2)

 

욥기 3장을 이해하는 핵심은 3장의 욥의 말이 1-2장과 단절되는 것이냐 아니면 연속되는 것이냐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욥의 성격에 변화가 있다는 관점은 1-2장과 3장 사이의 단절을 강조하는 해석입니다. 착하고 순종적이었던 욥이 반항적이고 도전적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보는 이 해석의 문제점 혹은 약한 고리는 욥이 그렇게 바뀌게 된 계기에 대해 욥기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추측과 상상력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심한 고통(욥 2:13) 이 욥으로 하여금 더 이상 침묵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밤낮 칠 일 동안”(2:13)이라는 시간의 경과를 지칭하는 표현과 ‘침묵’을 깨고 마침내 ‘자신의 입을 열었다’(3:1)라는 구절이 이러한 단절의 관점을 지지해 줍니다.

그러나 태도나 말투에 현혹되지 않은 채로 1-2장의 욥과 3장 이하의 욥의 진술이 과연 차이가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1:21)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2:10)라는 욥의 신앙고백은 욥이라는 인물의 착하고 순종적인 캐릭터를 표현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바로 인과응보의 원리, 즉 뿌린대로 거두는 원리를 초월해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결정과 판단이 “까닭 없는”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행동이 무작위일 뿐이라는 진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 즉 하나님의 주권 하에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 인간은 그 까닭(원인)을 다 알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진술입니다.

 

고통에 대한 호소(1): 저항인가 탄식인가(3-13)

고통에 대한 호소는 개인의 인식과 태도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저항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고통을 도전으로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힘들게 시도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고통을 기회로 여기며, 성장과 발전을 위한 동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3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4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5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6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7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8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9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10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11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13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3-13)

 

욥기 1-2장과 3장 이하를 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은 욥기 3장을 하나님께 대들고 반항하는 ‘저항시’가 아니라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상태를 호소하는 ‘탄식시’로 이해합니다. 욥기 3장은 2:13에서 언급된 “욥의 고통이 심함”을 욥의 입을 통해 표현한 것입니다. 욥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장면(특히 3:3-13)은 예레미야 20:14-18과 그 언어 표현이 상당히 유사합니다(“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예레미야의 이 탄식을 하나님에 대한 반항과 도전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약속의 땅을 잃어버린 현실 앞에 망연자실한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욥 또한 2장에서 묘사된 뼈와 살을 치는 심한 고통(5,13)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혹은 ‘죽으면 이 고통이 없어질 텐데’라는 의미의 표현들이 현대 독자들에게 불편함을 야기 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생명을 값어치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욥의 태도에서 ‘하나님께 대한 불경함’을 읽어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나오는 세 친구들의 발언과 엘리후,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욥의 탄식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하는 장면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즉, 욥기의 등장인물들과 하나님께서는 욥의 이 진술을 하나님께 도전하는 ‘문제적 발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칠 일 동안 말없이 욥의 고통을 함께한 친구들로 하여금 침묵을 깨도록 만든 것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욥의 사후 세계에 대한 진술입니다.

 

욥의 사후 세계에 대한 묘사(14-19)

인생에는 다양한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생은 우울하고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아닌지,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이기 때문에 더더욱 나에게 행복과 따뜻함을 선물해주는 이들의 존재가 소중한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프고 슬픈 일에 대해 억울해 할 것이 아니라, 되려 아픔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날들에 대해 더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묻게 되었습니다.

 

14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5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6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17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18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19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14-19)

 

차라리 죽었으면 이 고통을 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욥의 진술은 그의 사후 세계에 대한 묘사로 이어집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라는 주제는 반성적 지혜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잠언을 비롯한 규범적 지혜에서는 이 주제를 다루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규범적 지혜는 ‘의인/지혜자에게는 생명이, 악인/무지자에게는 멸망(죽음)이’라는 도식 이상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규범적 지혜는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됩니다(잠 4:22), 이 지혜가 결여된 악인을 기다리는 것은 멸망(죽음)입니다(잠 1:32; 6:15; 10:8-15,29; 18:7; 28:24). 지혜와 의는 죽음에서 건지며(잠 10:2; 11:4),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습니다(잠 14:32). 육체의 건강과 생명(‘영적 생명’이 아니다)은 지혜에 속해 있고, 멸망과 죽음(마찬가지로 ‘영적 죽음’이 아니다)은 무지와 악의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반성적 지혜는 이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렇다면 의인/지혜자는 죽지 않습니까? 죽음이 그들에게도 찾아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욥기 1-2장이 규범적 지혜가 다루지 않는 천상의 공간을 신학적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온 것처럼, 욥기 3장은 규범적 지혜에서 언급되지 않는 죽음의 평등성을 논의의 단상에 올려놓습니다. 욥이 묘사하는 사후 세계는 의인과 악인, 지혜자와 무지자가 모두 함께 있는 곳입니다. “임금들”과 “모사들”(14절)은 의인과 지혜자를 나타냅니다. 잠언에서 임금(왕)은 “의/공의”(8:15; 16:12, 13), “재판/심판/정의”(16:10;29:4), “정직”(16:13), “생명”(16:15), “지혜(20:26)”와 연결됩니다. “모사들”에게는, 잠언에 따르면, “평안”(11:14), “화평, 희락”(12:20), “경영”(15:22), “승리”(24:6)가 주어집니다. 또한 15절의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 역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로서, 부요는 의와 지혜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욥의 사후 세계에 대한 진술은 이 의인이자 지혜자들이 정반대의 영역에 속해 있는 사람들과 한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나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16), “악한 자”와 “피곤한 자”(17), 그리고 “갇힌 자”(18)가 바로 그들입니다.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으며 종과 상전의 구분도 없는(19) 사후 세계는 규범적 지혜의 근간인 인과응보의 원리가 무너진 곳입니다. 반성적 지혜에 속해 있는 전도서 역시 이 지점에서 욥의 이해와 궤를 같이하면서 한발 더 나아갑니다. 죽음에 있어서는 지혜자와 우매자의 구별이 없을 뿐 아니라 인간과 짐승의 구별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전 3:19-20). 만약 지혜자와 우매자의 결말이 동일하다면, 규범적 지혜를 추구해야 할 ‘까닭'이 있습니까? 욥의 첫 번째 발언 중에 친구들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의 원리가 무너지면, 규범적 지혜의 선악 구분이나 지혜를 추구하는 명분이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한 ‘까닭 있는 신앙’ 혹은 ‘영적 투자’를 아무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고통에 대한 호소(2)(20-26)

고통은 우리에게 불편함과 아픔을 주지만, 그 안에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성장과 변화의 기회를 제공하며,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가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동기부여를 받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연대감과 동정심을 키울 수 있습니다. 또한 고통은 우리가 감사하고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할 수 있는 경험입니다.

 

20○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22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4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20-26)

 

고통에 대한 두 번째 호소는 ‘죽음으로써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탄식(1-13)에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첫째, 고난과 고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이 23절에 묘사되어 있습니다(“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발언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이 말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 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2:10)에서와 동일합니다. 둘째, 규범적 지혜에 대한 반문입니다. 고난이 악인에게 주어지는 징벌이라면, 그 악인에게는 멸망(죽음)이 뒤따라와야 하는 것이 규범입니다. 그런데 욥은 왜 “고난”과 “생명”이 동시에 주어지는지를 고통스럽게 묻습니다(20). 22절의 ‘기쁨’과 ‘즐거움’은 의인과 지혜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라는 것이 규범적 지혜의 진술인데, 고통에 신음하는 자들에게는 “무덤”을 발견하는 것, 즉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 “보배”요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는 역설입니다(21-22). 선과 악, 상과 벌의 이분법이 깨집니다.

 


욥은 자신의 짧은 지식으로 죽음을 갈구했지만, 죽음은 영원한 안식과 쉼이 아닙니다. 죄 아래에서 죽는 모든 인간은 영원한 절망과 고통 속에 던져집니다. 욥이 그토록 바랐던 참된 안식은 오직 에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그분을 만난 사람은 불안을 던져 버리고 평온함을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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