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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09-02)

 

 


빌닷에 대한 욥의 답변Ⅱ

욥기 9장 17-35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거리낌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진 일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영과 자체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일이 가능한 오직 하나님의 이우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중보자를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어떤 법칙이나 원리를 인간이 알 수 없다는 반성적 지혜의 일반론(1-16)을 17절 이하에서는 욥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고난을 주시는지 욥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벌어진 일(욥 1-2장)을 알지 못하는 욥에게 그 고난은 “까닭 없는”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더욱 고통스럽고 두렵습니다. 욥은 그 두려움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까닭 없는 고난에 대한 탄식(17-24)

때로는 사람이 매우 지혜롭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전적으로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일 뿐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백을 통해 스스로의 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지혜를 얻기를 바랍니다.

 

17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18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19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20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21나는 온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22일이 다 같은 것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23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 24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냐(17-24)

 

1-16절은 반성적 지혜의 두 가지 중요한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1) 하나님의 절대주권(하나님의 자유)과 (2) 인간 인식의 한계. 욥은 규범적 지혜의 인과응보의 틀이 아니라 반성적 지혜의 관점에서 자신의 고난을 바라봅니다. 그 고난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며, 그 고난의 이유를 한낱 피조물인 자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고난(17-19)

 

하나님께서 산들을 “진노하심”으로 무너뜨리시는 것처럼(5) 욥에게 임하는 고통도 “폭풍”과 같은 것입니다(17). 하나님께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괴로움을 채우셨다고 고백합니다(18). 폭풍이 왜 부는지 그리고 언제 부는지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이며 “셀 수 없는 기이한 일”(10)인 것처럼 욥이 당하는 고난 역시 “까닭 없는”, 즉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17). 여기서 “폭풍”은 폭풍우(storm)나 회오리바람(whirlwind)같이 강하고 거센 바람을 가리킵니다. 일상적인 바람과는 다르고, 또 언제 어떤 방식으로 부는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을 나타내는 데 주로 사용됩니다(왕하 2:1; 사 29:6;40:24;41:16; 시 107:29; 겔 1:4; 슥 9:14). ‘니플라오트’의 두 가지 의미 (일상적이지 않고 특이한, 인간의 예측을 뛰어넘는)가 강하고 거센 바람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이러한 바람을 잠잠케 하는 능력(시 107:29)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신적 능력을 나타냅니다(마 4:35-41; 막 8:23-27). 힘과 능력에 있어서 아무도 하나님과 견줄 수 없으며 그 분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19; 참조. 3,12절). 19b절은 ‘누가 (그분의) 판단 기준에 맞겠는가’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그분의 판단 기준에 욥 자신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부합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반성적 지혜의 전형적인 신학적 진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이 다르다는 20절의 진술과 연결됩니다.

 

(2) 인간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은 다르다(20-24)

 

욥은 설령 자신이 아무리 의로울지라도 자신이 당한 처참한 곤경을 보면 자신은 입으로 스스로를 정죄할 수밖에 없으며, 설령 자신이 온전할지라도 내 입이 자신을 정죄할 것이라고 염려합니다(20).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의로울 수 없다는 것(4:17; 9:2)은 곧 인간의 입장에서 최대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려고 노력한다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다고 보증할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1:8; 2:3)로 여기시지만, 하늘 아래 있는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시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스스로를 의롭고 온전하다고 평가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얼마든지 다르게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20).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의인/선인/지혜자(“온전한 자”)도 악인과 마찬가지로 죽는다(22)는 것은 전도서 2:14-16에서도 언급됩니다(“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16). 의인/선인/지혜자에게는 생명이, 악인에게는 멸망(죽음)이 임한다는 이분법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객관적 사실에 무너집니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고 누구나 추울 수 있고 누구나 끊어질 수 있고 누구나 패할 수 있다는 전도자의 말처럼(전 4:10-12), 갑작스레 닥치는 재난은 “무죄한 자”를 포함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습니다(23). 23절의 “무죄한 자”에게 “갑자기 재난이 닥쳐”라는 표현은 1:15-19에서 묘사된 재앙에 정확히 부합합니다. 24a절을 개역개정이 번역한 것처럼 ‘현실에 대한 관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미 세상은 악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고 공정한 재판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것이 욥이 경험하는 현실일 수 있습니다. 23절의 조건문을 이끄는 접속사 ‘임’이 24절에도 계속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온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간다 하더라도, 올바르게 판결해야 할 재판관들이 하나같이 눈이 가려져 있더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24)이고 하나님의 주권 하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고백(25-35)

우리는 하나님께서 욥을 여전히 돌보고 계셨음을 알고 있지만, 욥은 이를 몰랐기에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어떤 상황까지 이르는지를 너무나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죽음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짧고 헛된 인생이라는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 향해가 의미 있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 목적지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복락이어야만 합니다.

 

25나의 날이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져 버리니 복을 볼 수 없구나 26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먹이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27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28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29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30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31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32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33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34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35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25-35)

 

25-27절의 표현은 전도서를 연상케 합니다. 인간의 삶이 매우 짧아서 인간 경험의 한계 안에서는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진술은 전도서의 신학과 일맥상통합니다. 전도서는 하나님의 판단을 인간이 알 수 없기 때문에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삶을 누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선)이라고 가르칩니다(전 3:12; 8:15; 9:9). 전도서는 한 인간의 삶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시간과 전체 세계라는 공간을 논의의 배경으로 삼는 초거시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는 한 사람이 당하는 고통에 집중하는 지극히 미시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도서와 같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욥은 마치 전도자의 조언과 같은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전 9:8)와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전 11:10)와 같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27)고 다짐을 하여도 그럴 수 없습니다. 고통과 두려움 때문입니다(28). 욥은 전도자처럼 어느 정도 초월적이고 초탈한 듯한 태도를 취할 수 없습니다. 전도서가 고난을 다 겪고 난 후 과거를 되돌아보며 그 고난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함으로써 위로를 준다면, 욥기는 지금 현재 깊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합니다. 고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하는 것은 불신앙의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아프고 무섭고 괴롭다고 말하는 것은 ‘신앙의 결여나 부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욥은 고통스럽다고 말하고(28) 자신도 자신의 모습이 끔찍하다고 말합니다(31). 욥은 당당히 ‘나는 두렵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자신이 그럴 수 없는 인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35). 고난과 고통, 두려움 앞에서 솔직한 것은 자기 자신한테 솔직한 것이며,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솔직한 것입니다. 아것을 아프지 않은 척하는 것이 ‘인내’가 아닙니다. 삶이 고통스럽지 않은 척,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외면하고 모른 척하는 것이 하나님꼐서 우리에게 요청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욥기는 말해줍니다. 자신의 괴로움에 솔직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습니다. 두렵지 않게 해달라고, 그분의 “막대기”와 “위엄”이 떠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34),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합니다(15). 27절의 ‘옴리’(나의 말) 다음에 이어지는 세 동사는 모두 1인칭 청유형(cohortative)으로 되어 있습니다. 화자의 바람과 소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개역개정은 존대어로 번역하면서 27절 이하를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으로 해석합니다. 욥의 간청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셔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어떤 행동이 반드시 하나님의 어떤 행동을 촉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시니 욥에게 주실 수도 있고 거두실 수도 있습니다. 복을 주실 수도 있고 화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판단에서 납득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누가 옳은지를 따질 수 없습니다(32-33). 규범적 지혜가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시니(“경외”) 그분의 뜻을 알고 따라야 한다고 가르칠 때, 반성적 지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움직이실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은 더욱 두려운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지금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우리 마음의 소원을 아뢰고 성령과 동행하며 온전하고 거룩한 푯대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기억하며 비록 지치고 힘들지라도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의지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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