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09-01)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욥기 9장 1-16절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죄의 은혜입니다. 이는 인간이 죄인임을 전재로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욥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인 인간의 본질을 다시 한 번 깨닫기를 바랍니다.
- 빌닷의 첫 번째 발언(8장)에 대한 욥의 응답의 전반부입니다. 인과응보의 원리로 욥의 죽은 자녀들을 저주하며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빌닷의 말에 대해 욥은 저항합니다. 여기에서는 반성적 지혜의 두 가지 중요한 주제가 다루어집니다. 첫째,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인간의 생활 영역을 한참 벗어나는 것이며, 둘째, 그렇게 커다란 창조주를 한낱 피조물인 인간은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의 주장 일부에 대한 동의(1-4)
욥의 탄식은 우리가 현실 신앙생활에서 가끔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나를 도와주시고 나의 억울함을 풀어 주신다고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내 눈앞에서는 전혀 다른 현실이 펼쳐질 때가 있습니다. 욥기는 우리에게 이런 현실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3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4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1-4)
욥은 친구들이 말하는 전통적인 지혜(규범적 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자 최선을 다하는 지혜의 화신이었습니다(욥 1:1-5). 그러나 욥의 신앙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 원리를 초월해서 주권적으로 임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즉, 반성적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욥 1:21;2:10). 그는 9-10장에서 친구들의 논리를 대응하는 데서 더 나아가 하나님과 담판을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의 원인을 설명해야 할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데 그분이 침묵하고 계시다고 항의합니다. 심지어 초하나님 존재가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심판해줄 것을 기대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죄하신다면 감히 하나님께 맞설 수 없는 존재인 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견주어 결코 의로울 수 없다는 친구들의 주장을 욥은 잘 알고 있습니다(2). 사실 이 말은 빌닷의 말이 아니라 엘리바스의 말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욥 4:17).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진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지혜자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방법을 예측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엘리바스나 빌닷 등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알 수 있는가를 질문하게 됩니다. 지혜와 힘은 하나님께 있고(4)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하나님에 대해 어느 인간도 제대로 알 수 없다(3)는 것이 반성적 지혜의 주장입니다. 욥의 항변은 ‘왜 너희들의 지혜를 너희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느냐?’는 물음입니다.
반성적 지혜 : 하나님의 크심과 절대주권(5-9)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이기거나 설득하여 마음을 바꾸시게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역사를 행하시는 이유는 악인들을 심판하고 의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평소에 욥은 이런 표현으로 하나님을 찬양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자기의 대적이 되시자 찬양의 내용은 오히려 욥에게 크나큰 절망으로 다가옵니다.
5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6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7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8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5-9)
이어서 욥은 하나님의 크심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분의 운행을 어떤 법칙으로 설명하지 않으려 합니다. 지진 등의 천재지변으로 산이 무너지고 옮겨지는 현상은 인간이 조종할 수 없는 것으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관용구입니다(시 18:7; 29:8; 97:7; 나 1:5; 합 3:6 등). 시편의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시 18:7)라는 구절은 5절과 유사합니다. 계속되는 욥의 말에 언급되는 창조세계는 “땅”과 “그 기둥들”(6), “해”와 “별들”(7), “하늘”과 “바다”(8), 그리고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9)입니다. 5장에서 엘리바스가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는”(10) 등 농사와 관련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나, 8장에서 빌닷이 갈대나 거미줄, 가지가 돌무더기 틈에 뿌리를 내리는 현상 등에 빗대어 하나님의 운행을 설명하는 것(11-18)과는 스케일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규범적 지혜는 인간의 생활 반경 안에서 주로 관찰되는 것을 통해 삶의 법칙(규범)을 끌어내고 그것을 인간의 삶에 적용합니다. 이런 면에서 규범적 지혜는 ‘인간중심적’인 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성적 지혜는 신학적 사유의 지평을 훨씬 더 크게 가져 갑니다. 인간의 삶의 영역 바깥의 세계마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런 점에서 반성적 지혜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거리를 규범적 지혜에서보다 더욱 크게 벌리고 차이를 극대화합니다. 스케일을 확장하면서 질문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산에 임한 것은 산이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행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기둥들을 흔드시고(6) 해를 뜨지 못하게 하시거나 별들을 가둬두는 것이(7) 땅이나 해, 별의 무지나 악 때문이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에게는 인과응보의 원리로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지만, 욥은 인과응보의 원리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 또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원리 하나에 가둬놓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원리를 창조하신 분은 물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원리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반성적 지혜 : 인간의 한계(10-16)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눈앞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이 시간 내 앞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통치와 역사를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섬겨야 하겠습니까? 욥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10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11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12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13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14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15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16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10-16)
10절은 5-9절과 11-16절을 연결하는 경첩(hinge)입니다. 그렇게 거대한 창조주를 한낱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욥의 고백은 욥기를 관통하는 주제어 중 하나인 ‘니플라오트’로 연결됩니다. 크신 하나님의 움직임은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이 “셀 수 없는” 것입니다. 욥기에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엘리바스입니다. 5:9과 9:10의 히브리어 원문은 완전히 동일합니다. 엘리바스는 이 구절을 “분노”와 “미련함”에서 벗어나도록, 즉 ‘지혜자’가 되라고 욥을 설득하는 것에 사용하는 반면, 욥은 그 구절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인간이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자유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주실 수도 있고 거두실 수도 있으며, 복을 주실 수도 화를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산과 바다와 별의 움직임이 바뀌는 것은 그들이 죄를 지어서가 아닌 것처럼, 욥에게 임한 불행 역시 죄나 무지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에 대한 인간의 인식 가능성,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이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규범적 지혜는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습니다. 물론 지혜에 다다르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지혜와 무지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는 불안한 존재이고, 그들을 유혹하는 악의 손길(잠언의 ‘음녀’)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지혜를 추구해야 하고 부모 세대와 조상들에게서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잠언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모가 자식 세대에게 지혜를 전수해주는 형식을 취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리고 잠언의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엇이 옳고(선) 무엇이 그른지(악), 무엇이 지혜이고 무엇이 무지인지 아주 친절하게 반복적으로 알려줍니다. 개미를 통해 부지런함을 배울 수 있는 것처럼(잠 6:6-7; 30:25), 피조세계의 현상들도 우리에게 어떠한 규범에 따라 살아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그러나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반성적 지혜의 기본적인 입장은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이 친절한 분으로 묘사되지 않고 저 천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입니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 땅의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분이 내 옆을 지나간다 해도 내가 알 수 없으며(11),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면 인간은 막을 수 없습니다(12). “라합을 돕는 자들”과 같은 천상적 존재들마저 굴복시키는 분이 왜 재앙을 내리시는지 그 이유를 인간 따위가 알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인간인 엘리바스나 빌닷은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을 잘 알 수 있는가? 너희는 인간이 아닌가? 욥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하찮은 인간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의 평가를 할 수 없고, 동시에 그 뜻을 돌이켜달라는 요청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14-15). 하나님께 대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판단/평가에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15). ‘불쌍히 여기다’라는 동사 ‘하난’은 1:9와 2:3의 “까닭 없이”와 동일한 어근을 가집니다. 한 인간의 올바름(쩨데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미쉬파뜨)에 있어서, 행동한 그대로 보응 받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벗어나 하나님의 “까닭 없는” 긍휼과 은혜를 간구하는 욥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평생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럽고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여전히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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