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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21-01)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순들

욥기 21장 1-16절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을 누립니다. 그들이 실제로 세속적인 부를 얻고 때로 의인들보다 더 많은 복을 누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이와는 반대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욥은 그들의 말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답답함을 호소합니다.

 

  • 소발의 마지막 발언이 끝나고 욥이 대답합니다. 소발 한 사람이 아니라 세 친구 모두를 겨냥하지만, 발언의 요지는 앞선 소발의 ‘악인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라는 주제를 반박하는 것입니다. 소발은 자신의 주장을 인류가 생긴 이래 변함없는 진리라고 말했지만, 욥은 악인이 잠깐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대대로 잘 먹고 잘사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반박합니다. 신앙의 렌즈로 현실을 왜곡하지 말라는 반성적 지혜의 가르침이 이 장의 핵심입니다.

 

친구들을 향한 요청: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1-6)

이 세상에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통과 억울함 속에서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잠히 고통을 감내하신 이유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모든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우리는 복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1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3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너희가 조롱할지니라 4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 마음이 어찌 조급하지 아니하겠느냐 5너희가 나를 보면 놀라리라 손으로 입을 가리리라 6내가 기억하기만 하여도 불안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1-6)

 

욥과 친구들은 서로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요청하며 평행선을 달립니다. 이번에 욥은 특별히 더 힘을 주어 자기 말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심우 사모아’는 ‘부정사 절대형의 강조용법’이라는 문법이 적용되는 형태로, 개역개정은 “자세히”라는 부사를 첨가함으로써 강조의 의미를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는 여러 해석이 가능한 문장입니다. 문맥적으로 가장 가능성 있는 해석을 두 개만 제안하자면, (1) ‘(너희의 어쭙잖은 조언이 아니라) 내 말을 자세히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너희가 줄 수 있는 진정한 위로다’라는 해석과, (2)‘나의 말이 너희의 생각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해석이 그것입니다. (1)의 의미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지만, (2)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욥은 친구들이 자신의 하소연을 진지하게 경청해준다면, 자신이 당한 곤경이 하나님의 악인 심판 현장이 아님을 알고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니다. 친구들이 욥 자신을 조롱하려면 자기 말을 다 듣고 조롱하라고 합니다(3).

욥은 이어지는 7-13절에서 인과응보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현실을 근거로 규범적 지혜에 고착된 친구들의 생각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말이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야말로 마음이 조급한 상황이라고 합니다(4). ‘시아흐’는 “원망”보다는 중립적인 의미의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욥 자신의 고난은, 악인이 자기가 놓은 덫에 스스로 걸리듯 인간의 행위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일입니다. 만약 욥 자신을 비롯한 사람이 문제의 원인이었다면 욥은 지금처럼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4절의 “조급”은 호흡이 가빠지고 숨을 못 쉴 정도가 아니라 더 깊은 괴로움과 마음의 번민을 나타냅니다(유사한 표현이 등장하는 민 21:4와 삿 16:16 참조). 욥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까닭 없는”, 즉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기 때문에 괴로움이 가중됩니다. 고통이 발생하는 원인이나 이유를 알면 그에 대한 해결책도 생기는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하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욥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욥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봐달라고 부탁합니다(5).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달라는 부탁입니다. “너희가 나를 보면”으로 번역된 구절을 직역하면 ‘너희는 나에게 몸을 돌려라/향해라’가 됩니다. 욥이 처한 상황과는 관계없는 규범적 지혜의 일반론만 얘기하지 말고, 친구인 욥이 어떠한 상태인지 어떠한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친구들의 몸을 자신을 향해 돌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자신의 말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이후에 나오는 ‘현실을 직시하라’라는 요청과 맥이 닿아 있습니다. 5절과 6절은 놀람과 두려움이 언급되는데, 좁게는 욥 자신이 처한 고통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토로하는 말이면서, 좀더 넓게는 규범적 지혜의 인과응보 원리가 무너진 현실(7-13)에 대한 놀람과 공포를 지칭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욥이 부당하게 폭행당하여 망가졌다는 것을 안다면 친구들도 경악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반성적 지혜의 근거로서의 현실(7-16)

악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침묵은 그들을 하나님의 최후 심판 아래 두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우리의 잘못이 드러나고 교만이 꺾이며 거룩한 삶을 향한 교정이 일어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자녀로 삼아 주셨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평안은 주님이 오시는 날에 산산이 때어지고 부서질 것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7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8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9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10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11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12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13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14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15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16그러나 그들의 행복이 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멀구나(7-16)

 

친구들이 말하는 규범적 지혜의 작동 원리에 대한 욥의 반문은 이것입니다. 7절의 의문문은 다음의 세 질문으로 나뉩니다: (1) 다 죽고 없어져 눈앞에서 사라져야할 악인들이 지금도 저렇게 많이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2) 악인들이 잠시 강성할 수는 있지만 그들은 제 수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그들은 가까스로 생존하는 정도가 아니라 천수를 누리며 살고 있는가? (3) 그냥 오래 사는 것 정도가 아니라 왜 악인들은 힘이 세고 또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힘이 강해지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친구들의 규범적 지혜대로라면 악인들은 후손이 없거나(18:19) 있어도 가난한 자에게까지 구걸하며 빌어먹는 비참한 신세로 살아감이 마땅한데(20:10),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들 옆에는 후손들이 튼튼히 버티고 서 있고, 그들은 장수해서 자손들을 직접 눈으로 봅니다(8).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가 악인들에게 임하는 것이 당연한 ‘원리’인데, 그들의 처소는 아무 걱정 없이 평안합니다. 왜 그들의 집은 ‘피우지도 않은 불이 그것을 삼킬 것이고 그의 거처에 남은 것들 모두 타버릴 것이다’(20:26)라는 소발의 말대로 되지 않습니까? 욥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매’(9:34)가 오히려 저들에게는 임하지 않습니다. 욥의 재물과 자식들이 끔찍한 재앙을 맞이한 것과는 정반대로 악인들은 그의 소유물과 자손들까지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수소는 씨를 퍼뜨리는 데 실패가 없고 암소들은 새끼를 낳는 데 실패가 없습니다(10). 개역개정의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라는 번역은 수컷마저 잉태한다는 의미로 오해될 소지가 있는 번역입니다. 악인의 후손들은 춤추며 뛰놀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행복해합니다(12).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고(수명을 다 살고)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13). 악인들은 곧 지혜가 없는 무지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감히 하나님께 ‘당신의 법도를 아는 것에 우리는 관심이 없소’라고 할 정도로 교만한 무지자입니다(14). 인간이 마땅히 섬겨야 할 전능자가 과연 있기나 하느냐고 묻고, 그분을 만나는(“기도한들”) 일이 대체 자신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냐고 묻습니다(15). 여기서 “유익”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의 효용성을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까닭 없는 신앙이 가능한가’라는 사탄의 질문과 연결됩니다. 욥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자 지혜자로 살아가는 이유는 그만한 대가를 하나님으로부터 지불받기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 좋은 것을 얻기 위한 투자로서 ‘유익’이 있기 때문에 신앙이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의 대가를 빼앗으면, 즉 투자의 효용가치가 사라지면, 욥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릴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지금 욥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악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은 동시에 욥의 반성적 지혜가 “무익한 말”, 즉 아무 효용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엘리바스의 말을 겨냥하기도 합니다(15:3). 선과 악의 구분이 분명하고, 의인과 지혜자에게는 복이 임하고 악인과 무지자에게는 벌이 임하는 선명한 이분법이 소위 ‘종교 장사’에는 훨씬 유리합니다.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에 풍성한 열매가 맺히고 외양간이 소떼와 양떼로 넘쳐난다고 가르쳐야 장사가 됩니다. 하박국과 욥의 신앙은 ‘무익’합니다. 이렇듯 욥이 서술하는 악인들의 ‘현실’은 친구들의 ‘이론’과 전혀 다릅니다. 현실은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자손손 이어지는 악인들의 행복과 번영은 그들의 손으로 직접 일군 것이 아닙니다(“그들의 손 안에 있지 아니하니”)(16). 16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그들의 번영(복)은 그들의 손에 있지 않다. 악인들의 도모가 나로부터 멀어지기를!” 뿌린 대로 거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욥 자신은 이러한 악인들의 패거리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아짜트 레샤임’은 “악인의 계획”일 수도 있고 ‘악인들의 무리’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라면, 악인들의 도모에 자신이 혹하지 않기를 스스로에게 타이르는 문맥입니다. 악인들의 견실하게 보이는 행복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도모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기를 바란 것입니다. 후자라면, 욥이 ‘악인들의 무리’에 속해 있지 않다는 의미는 중의적입니다. 첫째, 악한 자들에게 벌어지는 일이 욥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악인에게조차 행복과 번영이 주어지는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온 자신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탄식일 수 있습니다. 둘째, 신앙을 효용가치로 평가하는 무리 속에 가담하는 것을 거부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2장에서 고백한 욥의 신앙은 이미 대가를 초월한 신앙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악한 자들이 번성하며 의로운 자들이 고난에 처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 부조리한 일들을 보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이 땅을 감찰하시며 고난 중에서도 의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상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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