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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04-03)


새 사람을 입은 생활 원칙

에베소서 4장 17-24절


어린 시절 설날이 가까우면, 어머니께서는 자녀들을 위해 며칠 전에 설빔을 사오셨습니다. 사 오신 설빔을 입혀 보신 후, 명절 때까지 장롱에 보관하셨습니다. 며칠을 기다려야 했지만, 기다리는 동안 새 옷을 입는다는 기대감에 즐거웠습니다. 새 옷을 입을 때, 과거에 더러워진 옷 위에 끼어 입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옛 사람을 더러운 것을 벗어버리고, 거룩함으로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새롭게 지음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옛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에 합당한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 개인적인 생활과 관련해서 일반적인 원칙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삶(17-19)

옛날 항해하는 선원들은 별을 보면서 방향을 잡았습니다. 많은 별들 중에 오직 북극성과 십자성만으로 기준을 잡았습니다. 북극성은 정북쪽에 십자성은 정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지구에서 보았을 때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기준점으로 잡았던 것입니다. 영적인 부분에도 움직이지 않는 기준점이 있어야 합니다.

17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17-19)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세 번째로 에베소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라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과거에 이방인으로 있을 때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하나님 없는 어두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고 세상과 분리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에베소 성도들 중에는 예전 잘못된 방식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르심을 받은 후, 성도의 기쁨도 누렸습니다. 그것도 잠시 주변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하나 때문에 그들과 다른 삶의 패턴으로 살아갔습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베소 아데미 여신을 섬기며 음란한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우상의 소굴인 에베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형제 이웃과 친구들에게 압박과 고난 그리고 핍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 때문에 익숙한 생활로 돌아가서 편하게 살아가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이유 때문에 거룩한 삶과 반대되는 이방인의 잘못된 삶을 상기시킵니다(참고 2:2-3). 하나님의 새로운 구성원이 된 성도들이 이방인처럼 산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분과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이방인으로 있던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2:12-13)

바울은 그리스도 밖에 삶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공동된 특징입니다. 그 특징은 세 가지로 ‘영적 무지’(17), ‘영적 죽음’(18) 그리고 ‘영적 타락’(19)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엄숙히 선언하듯이 주안에서 하나씩 설명해 나갑니다.

⑴ 영적 무지(17)

첫 번째 특징은 ‘영적인 무지’입니다. 이방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으므로 허망한 것으로 행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생각에는 ‘마음’을 행동에 관련된 도덕적인 판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의 허망’은, 이방인의 불경건한 삶 전체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사람은 이 능력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없는 마음은 ‘하나님의 계시’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목적에 대한 계념조차 잃어버렸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씀합니다.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로마서 1:21-25)

소경이 목적지를 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없는 사람은 정확한 목표를 설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고, 더 이상의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물질과 성공에 최종적인 가치를 둡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바른 목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바르게 세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시편 73:28).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삶은 ‘목표가 없는 삶’이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지 말라고 엄중히 권면합니다.

⑵ 영적 죽음(18)

두 번째 특징을 영적인 죽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18)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신데, 하나님과 떠나 있다는 것은 영적인 죽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총명은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총명’은 ‘인지 능력’입니다. 영적 인지 능력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 또한 없습니다. 그 결과 ‘무지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과 ‘굳어진 마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꺾어진 나무 가지는 잠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잠시 후엔 말라 죽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을 통해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1서 5:12)

깜깜한 밤에 불빛이 없으면 방향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똑똑한 인생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면 정확한 방향을 잡을 수 없습니다. 부평초처럼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살아갑니다. 스스로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로마서에서 잘 서술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로마서 1:21-23)

⑶ 영적 방탕(19)

세 번째 특징은,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사람은 바른 기준이 없기 때문에 ‘방탕’하게 살아갑니다. 이곳에서 ‘방탕(放蕩)’이란 ‘주색잡기 빠진 상태’도 의미하지만, 부평초처럼 ‘마음이 들떠서 갈피를 잡을 수 없음’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은 영적으로 강퍅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서 하나님을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마치 불에 대인 딱딱한 피부처럼 옳고 그름에 감각이 없습니다. 당연히 영적으로 양심은 마비되고 무감각합니다. 아무런 수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의 삶의 기준은 ‘탐욕’입니다. 그들은 탐욕으로 순간적인 쾌락을 누릴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허전함이 찾아옵니다. 허전함 때문에 또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은밀하고 더러운 것을 탐닉합니다. 점점 더 자극적인 쾌락을 찾습니다. 마약, 게임, 스포츠 심지어는 섹스 등과 같은 중독에 빠집니다. 이러한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면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을 선택합니다. 결국 방탕한 삶은 영적 죽음의 열매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없는 이방인들에 대한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영적인 무지한 상태로 살아가고, 다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영적 사망에 이르렀고, 마지막으로 사망에 이른 삶은 부평초와 같이 방탕한 삶을 살다가가 결국 멸망당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로마서 6:23).

 

추구할 새 삶의 근원(20-21)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으로 유토피아 세상을 만들려 시도하지만, 악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어두운 생각에서 아무리 노력하고 연구해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병든 세상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거듭난 지체들은 다릅니다.

20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0-21)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삶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지체가 된 성도들은 이방인과는 전혀 다른 존재임을 피력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알면,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할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제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배우지 않았다’는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에베소 성도들은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보혈로 거듭났음을 확신했었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데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가치와 방식을 따라야 했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변화는 완전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어두움에서 빛으로 완전하게 새로운 백성으로 근본(根本)부터 변화를 이룬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음’을 지적하고,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에게서 듣고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하게 성도들에게도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가 있음을 확인시켜줍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행적을 돌아보면, 은혜가 너무 큽니다. 그래서 과거 어두움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마땅히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에베소 성도들은 첫 사랑을 잊어버렸습니다(요한계시록 2:4). 깨끗하게 씻긴 돼지가 다시 진흙 속으로 들어가듯이, 점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삶의 방식에서 전혀 이방인들과 구분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대로 살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변화된 새로운 사람(22-24)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을 향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왜 싸우는가, 그리고 성도들이 거룩하게 구별되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에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들은 교회를 향해 성도의 삶이 주장하는 이론과 삶이 일치하길 원합니다.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22-24)

성도들이 변화된 삶을 산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활이 몇 가지만 바꾸어진 것을 의미한 것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삶이 바뀌는 것이며,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과거에 그리스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내용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이 내용은 그렇게 살라는 명령이 아니라 배운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한 것입니다.

⑴ 옛 사람을 벗어버린 것(22)

에베소 성도들은 위에서 제시했던 어두움으로부터 빛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래서 새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옛 사람처럼 살아갈 수 없습니다. 과거의 어두움을 완전히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옛사람’은 타락한 첫 아담과 연합하여 과거의 삶의 방식에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거짓된 욕심을 따라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부패한 삶을 누립니다. 그들의 특징은 영적인 것은 망각하고 육체적인 것으로만 살아갑니다(에베소서 2:3).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서 속임수에 빠져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이루면 만족하고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짓과 기만에 속은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도 만족과 행복이 없습니다. 욕심으로 자기 만족 때문에 더 채우기 위해 도덕적인 부패까지 가져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얻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사실을 벗어 버렸습니다. 몇 가지만 변한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모든 것이 변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썩어져 가는 과거의 삶의 방식을 따르던 옛사람을 벗어 버렸습니다.

마치 새 옷을 입기 위해 헌 옷을 벗은 것처럼 설명합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렸던 것’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삶입니다. 앞에서 거론했던 이방인의 생활방식(2:1-3, 4:17-19)에 대해 강력하게 거부하고, 이제는 새 사람으로 새로운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은 과거의 방식으로 어둡고 더러운 옛 옷을 다시 입도록 유혹합니다.

믿음이 연약해질 때, 사단은 거짓으로 성도를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속임입니다. 순간마다 옛 옷을 다시 입히고 어두운 삶으로 이끌고 가려고 시도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만, 아직도 어두운 과거의 삶의 방식이 남아서 갈등합니다. 그래서 부패한 음식에 파리가 쉽게 모이듯이, 조금만 틈을 주면 너무 쉽게 어두운 것들이 달라붙습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렇게 옛사람과 새사람이 계속해서 싸우게 됩니다.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로마서 7:19-21)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도 동일한 영적 싸움이 있었습니다. 종종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자신 안에 있는 어두운 모습을 보면서 흠칫 놀라운 경우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사단은 순간마다 판단력을 흘리고 어리석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에서 패하도록 합니다. 영적 전쟁은 평생 동안 해나가야 합니다.

⑵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23)

바울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심령이 새롭게 되어간다는 점입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그리스도를 믿을 때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새로워지는 것은 성도의 모든 삶에서 반복적이며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순간으로 마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이루어져 가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은 성도들은 지속적으로 본성과 삶에서 온전하게 새롭게 되어가야 합니다.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로마서 8:5-6)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영의 생각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령이 새롭게 되었다”는 생각의 틀이 새로워졌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부분들만 헌신된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분을 하나님의 생각이 지배하고 지속적으로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은혜로 부르셨고,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므로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이방인은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또한 지각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직 욕심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으로 타락해 가면서, 순간적인 쾌락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만족이 없습니다. 점점 더 많은 물질이나 강력한 것 그리고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며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가치관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여 그 본성과 삶이 온전한 새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세상은 사라지고 하나님만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⑶ 새 사람을 입은 것(24)

에베소 성도들이 영적으로 배운 것에 대한 마지막으로 새사람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헌 옷을 벗었으면 깨끗하게 씻고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새사람을 입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새사람’의 근원을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스럽게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옛사람 아담을 창조하신 일을 기억나게 하십니다(창세기 1:27). 처음 창조 때처럼, 두 번째 창조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형상(“의와 거룩함”)을 따라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이며(에베소서 2:15), 더 자세히 본문에서 “새사람”은 ‘옛사람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새사람들을 보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신분이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 재창조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므로 이제 옛사람(이방인)의 가치와 방식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서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새사람을 입었다는 것은 동시에 새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새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에베소 지역은 아데미 우상숭배와 음란한 생활이 들끓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승리하는 것은 대단한 결단과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움으로 진리 안에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인격이 제자의 인격이 되고 그분의 삶의 목표와 가치가 제자들의 삶의 목표와 가치가 되어야합니다. 항상 진리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제자로 성숙해가지 않는다면 성도가 아니라 단순히 ‘구도자(求道者)’에 머물 뿐입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새사람으로 거룩한 삶을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새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성도는 더 이상 이방인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창조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귀한 존재입니다. 내주하신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속적인 성장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공동체의 연합을 이루어 가야합니다. 새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새로운 심령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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