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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05-01)


구체적인 두 번째 권면

에베소서 5장 1-7절


러시아 경찰이 늑대 떼들과 함께 생활하던 소년을 발견하고, 모스크바의 병원으로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 만에 늑대 소년은 병원을 탈출해서 행방을 감추었습니다. 의사의 말로는 그를 처음 발견했을 때, 너무 지저분했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데다가, 늑대처럼 할퀴고 깨물고 난폭한 행동을 보여서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아이를 변화시키려고 했지만, 적응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어쩌다가 야생에서 늑대들과 지내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아이를 통해 한 번 고정된 습관은 좀처럼 바꿀 수 없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사랑과 관심이 있어야 사람답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거듭난 새사람의 삶에 대한 권면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4:25-32). 계속해서 교리적으로 적용해서 성도로서 마땅히 행하면서 살아야 할 삶을 계속 권면합니다. 이 부분은 믿는 자들의 행위를 언급함에 있어서 세 번째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 됨으로서 거룩함으로 그리고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측면 :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1-2)

성도들이 아이를 출산해서 심방할 때마다 느낀 점들이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결같이 신생아들이지만 자기 부모를 닮았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닮지 않은 아이라면 더 이상할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님을 닮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도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아야 당연한 것입니다.

1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1-2)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성도로서 바른 삶을 권고합니다. 그들에게는 성도로서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문제를 극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긍정적인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권고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변화된 성도로서 알맞은 모습으로 살아가길 제시합니다.

⑴ 하나님을 본 받으라(1)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을 향해 ‘사랑을 받는 자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라’고 권고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본 받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 베푸신 사랑입니다.

누구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그들의 신분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불순종의 아들들이었습니다(2:2). 전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도 없었고, 오히려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순종의 아들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서 십자가에 드리셨습니다(25; 요한복음 10:11,15,17-18; 갈라디아서 1:4; 히브리서 9:14). 그 제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 향기로운 제물을 받으시고 죄인들의 용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운 제물 때문에 이제 불순종의 아들들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들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심령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은바 되었습니다(로마서 5:5). 하나님의 사랑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가 그의 부모를 닮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믿는 자는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마태복음 5:48; 누가복음 6:36).

성도들의 변화되어가야 할 이상적인 모습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본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닮아가야 알 수 없지만, 우리 가운데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화된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본 받은 사람으로서, 그 희생적인 사랑을 자신의 삶에 나타나야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하나 된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 위해 서로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본 받으라’고 권고한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는 명령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그 행위를 그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할 것을 강하게 권면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은 바로 사랑을 통한 ‘용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면 그들을 깊이 용서하며 사는 것입니다.

⑵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2)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본 받으라’고 권고한 후, 바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 15:21)라고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드리신 사건을 모델로 제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권면과 병행을 이룹니다. 즉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고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제물’은 하나님께 드린 희생제물을 의미합니다. ‘향기로운’이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물이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친히 행동으로 십자가 위에서 실천하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핵심은 바로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사랑으로 실천하였듯이, 이제 성도들이 이웃을 향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실천해야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을 본받아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권고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의무 사항이 아닙니다. 희생하는 태도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받은 자임을 확인하는 방법이며 사랑받는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육신적인 부자간에는 모습뿐만 아니라 성품과 행실에서도 닮아가듯,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사랑의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에 좋은 영향력을 받아서 좋은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성도들은 누구보다도 영향을 받아야 할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본받아서 그리스도처럼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죄인을 용서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부정적인 측면 : 악을 삼가하라(3-7)

누구나 새로운 옷을 좋아합니다. 새 옷을 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더러워진 헌 옷을 벗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더러운 옷 위에 새로운 옷을 덧입는다면 새로운 옷을 입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에 버려야할 더러운 것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버려야할 더러운 것들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3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4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5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6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3-7)

사도 바울이 개별적인 삶에 대한 두 번째 권고입니다(3-21). 첫 번째는 실질적인 삶에 대해 권면했지만, 이번에는 종교적인 면에서 어떻게 성도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본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세워가야 합니다. 이곳에서는 앞부분인 3-7절까지만 먼저 강론하겠습니다.

⑴ 책임 : 악한 행위를 삼가라(3-4)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것을 설명한 후, 이제 그것과 대립되는 어두움에 속한 행위에 대해 설명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에게는 지역적인 종교 특색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에서는 음란한 종교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바울은 주로 성적인 죄를 염두해 두고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① 생각지 말아야할 것(3)

당시 바울은 이방 종교의 영향력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행위는 에베소 교회뿐만 아니라 우상숭배 하던, 당시 이방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방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 신을 숭배한다는 명목으로, ‘음행(淫行)’과 ‘더러운 말’과 ‘개인적인 탐욕’을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더러운 행동들이 종교 활동으로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교회 안에서도 같은 종교 행위로 생각하고 행했을지 모릅니다. 먼저 ‘음행(immorality)’에 대해 언급합니다. ‘음행’은 온갖 종류의 성적인 범죄를 다 포함하는 일반적인 용어이지만, 주로 창기와의 성관계를 염두에 두고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온갖 ‘더러운 것(any impurity)’은 부도덕한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것인데, 여기서는 특히 음행과 같은 성적인 죄를 가리켜 더러운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에베소서 4:19; 5:5). ‘탐욕(greed)’ 역시 이 문맥에서는 성적인 욕망뿐만 아니라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모든 육체적 욕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했듯이, 데살로니가전서 4:5-6에는 이방인의 색욕이 형제의 아내를 탐내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것들을 이름조차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절대로 합당하지 않습니다. ‘성도(聖徒)’란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음행’, ‘더러운 행동’ 그리고 ‘탐욕’과 같은 단어들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을 행하는 것은 거룩한 성도들에게 더러운 것을 끼 얻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에 역겨운 것을 끼 얻는다면, 그 더러워진 제물을 절대로 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되도록 부름 받은 성도에게 마땅치 않은 부도덕한 단어들입니다. 사람을 파괴하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제거해야할 단어들은 음담패설, 어리석은 말, 상스러운 농담(희롱)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할 수 없는 생각이나 말 그리고 행동이라면 한 마디도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거룩함으로 덧입어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권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8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로새서 3:8-10)

바울은 거룩한 성도들에게 걸맞지 않는 부정한 것들에 대해 입에서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도록 권고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옛 사람이 아닌 새롭게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날마다 하나 된 공동체를 세우면서 살아가도록 권고합니다.

② 생각해야할 것들(4)

바울은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 할 타락한 성적인 언어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바로 ‘누추함’으로 음란하고 추접한 외설적인 대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말’도 성적인 농담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러한 대화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희롱’의 말은 단순한 대화를 넘어 성적인 농담을 즐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에게 대화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러운 것을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행동으로 옮겨가게 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입에도 올리지 말아야 할 ‘더러운 말’과 성도들이 반드시 해야 할 ‘감사하는 말’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더러운 말들을 버리고, 반대로 ‘감사하는 말’들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이것은 ‘서로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4:2)는 명령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서로 사랑을 베풀고 감사의 말을 하는 것이 성도들에게 합당한 언어생활입니다.

‘감사하는 말’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감사하는 것들이며, 남에게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헤아려보면서 감사해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것뿐입니다. 이 세상을 감사하면서 살아가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감사의 언어가 풍성할 때 거룩한 성도이며, 그들을 통해 하나 된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에베소 도시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눈만 뜨면 음란함이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유지하기 힘든 시대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에게 어떤 종류의 악이나 탐욕도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은 우리에 대한 사랑의 결정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성도들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므로 아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몸을 음탕한 곳에 타락시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망치지 않습니다.

⑵ 이유 : 우상숭배자들을 본받지 않음(5-7)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우상숭배자들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미 언급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바로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결과를 주실 것인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① 하나님의 기업을 받지 못할 자들(5)

여기서 3절에서 지적했던 ‘음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와 ‘탐하는 자’들을 ‘우상숭배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적인 범죄를 우상숭배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유대 전통에서 익숙한 것입니다. 헬라인에게도 우상숭배와 음행은 종종 같이 행해지는 풍습이었습니다. 특히 에베소 지역에는 우상숭배자들이 음행과 같은 더러운 행위를 종교 행위로서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악행자들을 멀리해야할 이유는 음행과 우상숭배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기 때문임을 엄하게 경고합니다. 그들이 ‘심판 받을 것’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독자들이 하나님의 기업을 받기로 약속된 자들이란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에베소서 1:14,18). 비록 독자들이 하나님의 기업을 약속 받았지만 그들이 더러운 생각과 말을 계속한다면 약속된 기업을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기업이 없는 자들’은 고린도전서 6:9-11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것처럼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 자들입니다. 성도들도 악행을 본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빛의 자녀가 아니라 어둠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5:8).

② 헛된 말에 속지 말라(6)

바울의 관심은 이제 헛된 말로 성도들을 속이는 이방인에게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헬라 철학자들의 이론과 주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헬라 철학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훌륭한 수사학으로 말한다고 해도, 그곳에는 진리가 없는 공허한 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헛된 말에 속지 않도록 권고합니다. 성도들은 ‘헛된 말’에 속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헛된 말로 속이는 자들은 불순종의 아들들로 규정되는데,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③ 불신자들과 함께하지 말라(7)

바울은 ‘헛된 말’에 속지 않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설명합니다. 그들과 함께하지 말라는 것은 불신자들의 더러운 언어나 행위에 참여하여 같이 어울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불신자들과 전혀 만나지도 말고 상종하지도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했는데, 어떤 성도들은 그것을 오해하여 불신자들과 전혀 상종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오해를 교정하면서 만약 우리가 불신자들과 전혀 상종도 하지 않으려면,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지만, 그들의 더러운 언행에 동참하는 자는 압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이방 종교들뿐이 아니라 거짓 율법 선생들이 들어와서 잘못된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근본은 탐욕스런 삶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거짓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삶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들은 죄악을 합리화시키는 헛된 교리를 만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거짓된 교리로 위안을 주는 거짓 선생들에게 속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불의가 아름다운 말로 꾸민다고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불순종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날에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흐리게 하는 유혹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고 그들과 어울려서는 안 됩니다.

시인 윤동주는 ‘서시(序詩)’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라고 했던 것처럼, 성도는 삶 속에 죄악이 한 점 없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악이 들끓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죄악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자녀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특권과 사명이 나옵니다. 이미 떠나온 세상, 이미 저버린 구습들, 이미 벗어난 옛 신분, 이것은 더 이상 당신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옛 사람처럼, 옛 사람으로서 더 이상 살지 않습니다. 이제 버려야할 옛 습관이 있다면 그것은 버려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아직까지 세상에 물들어서 헤매면, 죄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면서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죄악의 길과 정반대되는 방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악하고 더러운 것들로부터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강력한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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