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07)
바울의 두 번째 기도
에베소서 3장 14-21절
정치인들은 공식적으로 선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후원회의 밤’을 실시합니다. 이러한 후원회 활동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될 수 만 있으면 많은 사람을 초청해서 많은 후원을 받으려 합니다. 만찬회는 일정한 원칙에 따라서 자리를 배치해 줍니다. 그것은 기부금액이나 정치 영향력에 따라 앞자리부터 앉도록 특혜를 줍니다. 세상의 법칙은 일반적으로 이런 모습입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좋은 자리를 배치하지만, 천국에서는 세상의 법칙과 다릅니다. 천국에서도 세상의 법칙을 따라 배치한다면, 조차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의 법칙대로 하지 않으시고 모든 성도들에게 잔치 자리를 공평하게 배치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전반부인 교리 부분을 기도로 마감합니다. 그 기도는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기도와 그 기도를 응답해주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기도의 내용은 첫째, 속사람이 강전해지길 위한 것, 둘째,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실 것, 셋째,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해달라는 것,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충만케 하신 것으로 채워달라는 것을 구합니다. 이 기도는 전반부 신학을 마감하며, 후반부 권면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14-15)
날마다 기도하면서도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기도하다 보면 기도하는 대상과 응답해주시는 분을 잊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형식적으로 하다 보니, 기도를 응답해주실 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어려움에 빠지면 스스로 연민을 느끼면서 기도합니다. 때로는 푸념을 늘어놓고, 나중에는 기도가 원망으로 변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14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14-15)
사도 바울은 자신의 형편에 대해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을 설명한 후, 이제 다시 돌아와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이 기도는 첫 번째 기도인 1장 15-23절을 이어받아서 하는 두 번째 기도입니다.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서 기도는 앞부분에서 한번만 등장합니다. 하지만 에베소서에서는 앞부분뿐만 아니라 이렇게 특이하게 중간에서도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앞부분의 기도는 ‘에베소 교회를 위한 감사 기도’였다면, 본문에서는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관심과 소원 기도’였습니다.
(1) 기도를 드릴 마음(14)
사도 바울은 이전에 3장 1절에서 ‘이러므로’라고 기도하려다가 잠시 동안 기도를 멈추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 갔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바울이 투옥된 상황에 대해 오해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위해 로마 제국의 죄수가 되었고 환란을 당하지만, 그 ‘그리스도의 비밀’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을 동일하게 구원을 주신 사실과,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의 비밀’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모든 족속을 위해 전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란 사실에 대해 설명했었습니다.
이제 재정비하고 다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3장 1절과 똑같이 ‘이러므로’란 단어로 시작합니다. 1절에서 이어 받고 싶었던 내용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하는 사람을 ‘내가’라고 소개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바울’이란 걸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는 변함없이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살펴보면서, 자연스럽게 성도들의 좋은 점도 보았지만 부족한 점을 보았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비판했을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한 점을 보면서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처럼(마가복음 14:32-42), 그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2) 기도를 드릴 대상(15)
① 기도의 대상(15a)
사도 바울은 항상 기도할 때마다 기도를 드리는 대상을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기도를 받으실 분인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온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 굶고 간구합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하는데 기도를 받으실 분에 대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 즉 ‘이 세상에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의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있을 만큼, 하나님과의 친밀함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 친밀함은 하나님께서 아버지일 수 있는 것은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셨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른 의미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만물의 소유주임을 증명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더욱 설득력 있는 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이란 말이 ‘아버지’를 수식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권세를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우주적인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을 강조한 하나님을 우주적인 아버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아우르는 온 족속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는 예상은 하나님께서 만물의 아버지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한편으로 바울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마태복음 6:9;요한복음 17장).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갖는 화해적 성격에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아버지로서 사랑하시고 자녀로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에서는 성도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4-18)
하나님께서 아버지란 사실은 하나님과의 회복과 친밀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친근한 아버지로서 기도를 응답해주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에 소유하시고, 그리고 모든 통치하신 전지전능하신 주권자이십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참 주인이십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하나님께 아버지로 모시면서 그 아버지께 담대하게 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족속(πατρια)’는 한 조상에게서 파생된 가족 단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창조주 한분 하나님 아래서 한 족속으로 창조되었지만, 아담 타락 이후 바벨탑 사건을 통해 각 족속별로 나누어졌습니다(창세기 11:1-9). 그 결과는 사람들 사이, 족속들 사이에 분열과 전쟁이 지속하였습니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 이렇게 분열한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하나 되지 못하고 이처럼 분열한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의 대상을 소개하면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듣고 응답하신 것을 소개합니다. 또 다른 숨은 의도는 에베소서가 추구하는 교회의 연합에 대한 의도를 명확하게 제시한 것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비로운 연합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② 기도의 자세(15b)
다른 사람 앞에 자세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대하는 태도에 따라 상대방의 위치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몸의 자세보다 마음가짐이 더 중요합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무릎 꿇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는 두 가지로 서서하는 기도(마태복음 6:5;마가복음 11:25;누가복음 18:11,13)와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에스라서 10:1;누가복음 18:13)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대부분 서서 하늘을 향해 손을 펴서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방법들 중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당시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경외심과 기도하는 사람의 겸손을 나타냈습니다(누가복음 22:41;사도행전 7:60;20:36;21:5). 기도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절하게 구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는 이처럼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세가 여러 번 소개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6:39;누가복음 10:13; 18:11,13;디모데전서 2:8). 바울의 기도하는 자세는 아마도 이사야서 45장 23절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23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이사야서 45:23)
전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함께 무릎 끓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장로들은 생전에 바울을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알고 그들 끌어안고 입 맞추며 크게 울었습니다(사도행전 20:36-37). 그 장로들은 기억 속에 바울과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던 모습을 인상 깊게 남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는 서신을 보면서, 그 때 간절하게 기도하던 모습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바울의 깊은 사랑과 함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겸손함과 간절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왕 노릇하실 것입니다. 그 기도는 약해지거나 비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더 강력하게 간구할 것입니다.
바울 기도의 내용(16-19)
자녀들은 성장하면서 부모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닮아갑니다. 부모님이 기도하면 자녀도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 자녀도 같이 읽습니다. 이처럼 영적 부모인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을 위한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바른 신앙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줍니다.
16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6-19)
사도 바울을 살펴보면, 투옥된 상태에서도 자신의 안위보다 밖에 있는 성도들을 더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빌립보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설명한 후, 다시 돌아와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본문의 기도를 정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본인은 설교학에서 가장 존경하는 영국의 존 스타트 목사(Rev. John Stott)의 견해를 따라 네 가지-강건, 사랑, 지식 그리고 충만-로 정리해 봤습니다.
(1) 속사람이 강건하길(16)
사도 바울은 먼저 에베소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하길 위해 기도합니다. 에베소 환경은 심적으로 낙심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3:13). 이러한 낙심할 수 있는 환경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강건하게 하시는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할 때, ‘속사람’이 힘을 얻어 강건해집니다.
이곳에서 중요한 두 단어인 ‘속사람’과 ‘강건한다’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속사람’이란 바울서신에만 나타난 독특한 표현으로(로마서 7:22;고린도후서 4;16), 회심할 때 입는 ‘새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속사람’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거주하는 내적 부분, 곧 마음이나 심령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마음에 계속해서 머물러 계시면, 그리스도와 동행함으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또한 ‘강건한다(κραταιωθηναι)’는 ‘강해지다’란 뜻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서 강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풍성’은 하나님의 모든 면에서 완전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구원하는 근원일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역사하여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속사람이 성령으로 강건 해달라는 기도는 성도들의 마음을 강건하게 해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강건해져야 할 이유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위함입니다. 승리의 비결은 오직 성령충만입니다. 에베소처럼 도덕적으로 문란한 이방 사회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면서, 악한 영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심령이 강건해야 합니다. 약한 성도는 자기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며, 우유부단하여 죄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고, 시험과 고난 앞에 무너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룩한 삶을 살 수도, 결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은 모든 부분의 주인이 그리스도께서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시면 모든 삶이 그리스도의 가치관으로 대처하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성도들 한 사람 한사람의 그리스도로 심령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은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나이 들고 육신은 늙어지고 병들고 그리고 죽게 됩니다. 세상 이치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늙어 질병으로 무너져 가지만, 속사람인 영혼은 결코 쇠하거나 약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인격 수양이나 교양으로도 가능하지 않고, 사람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드십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을 위해 성령께서 성도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겉사람인 육체가 강건하게 하는데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물며 보이지 않는 속사람이 강건 하는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속사람의 강건해야 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먼저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16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6-18)
사도 바울이 말한 ‘속사람’은 이 말씀을 기본적인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받을 수 있는 유혹과 고난 그리고 환난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승리케 하는 배경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달라는 간구는 인격수양이나 성품 훈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무장시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려고 할 때, 유혹이나 핍박에 직면할 것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하면 이 모든 것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항상 속사람이 강건할 수 있도록 이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며 승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내주(17a)
성도들의 강건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령에 내주하셔야만 가능합니다. 바울은 첫 번째 제목은 성령의 임재를 통한 성도들의 강건을 위해 기도했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내주하시길 위해 기도합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해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에 내주하심은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의 심령에 거하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한복음 15:4-10)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심령에 거하심으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내기 시작됩니다. 이 약속은 이미 예수님께서 성도들 속에 성령으로 내주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20). 바울도 같은 의미로 성도의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6;19).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주인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주인이 되면 평상시에는 괜찮지만 어려운 일을 만나면 위축되고 초라해 집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심령에 내주하시면 더 강력해집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충만하면 더욱 강건해집니다.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미 영접한 순간 성령께서 심령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상스럽게 또 내주하심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도한 이유는 성령께서 내주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 흔들림 없이 견고해지길 위해서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항상 승리하길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과 강건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서 심령에 내주하시면,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인도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바로 머리나 입술만의 믿음을 아닌 실질적으로 삶 속에서 증거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 좌정하시면 선하게 인도하시고,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3) 사랑을 분명히 깨달음(17b-19a)
계속해서 세 번째 간구는 에베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을 깨달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지식을 기초해서 하나님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도록 원했던 결과입니다. 그 제목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온전하게 이해하고 강건해지기를 간구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식물과 건물에 비교합니다. 바람직한 믿음은 단순히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마치 식물이 계속 성장하듯, 그리고 건물이 계속 건축되듯이 믿음 또한 계속적으로 성장해 해야 합니다.
시편 1편에서 보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고, 날씨에 상관하지 않고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
본문에서 ‘사랑’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랑’(17)은 그리스도와 관계 때문에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사랑을 말하지만, 두 번째 ‘사랑’(18)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나 무한해서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런대도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로 사랑을 측량할 수 있는 것처럼 수사적(修辭的)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8절에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라고 동일하게 표현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식으로 아는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체험적인 사랑을 알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한없이 넓고, 깊고, 높아서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깨닫게 됩니다.
굳이, 이곳에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대한 의미를 찾는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넓이’는 모든 사람들을 품을 만큼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 즉 땅끝까지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범위를 의미하고, ‘길이’는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긴 사랑, 즉 일회성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지속되는 사랑이며, ‘높이’는 모두를 무한한 영광으로 인도할 만큼, 변질된 사랑이 아니라 변함없이 차원 높은 사랑이며, ‘깊이’는 모든 필요를 채우고 죄나 상처에 덮을 만큼, 무한히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광대한 능력과 무한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상상할 수 없지만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설명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바울은 연약한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세상의 기준을 통해 표현하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상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는 모두를 이해할 순 없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믿음에 멈추지 않고 체험적인 믿음으로 더욱 성장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는 모든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지만, 심령에 내주하셔서 깨닫게 하시면 능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체험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을 때만 비로써 바른 신앙고백이 가능합니다(고린도전서 8:1;13:2; 빌립보서 4:7). 이렇게 하는 목적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사랑이 없는 교회는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고, 생명력이 없는 교회는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잘 아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드린 사랑처럼 성도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심령에 계시길 바라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도들에게 잘 뿌리내려져서 성장하길 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에베소 성도들이 매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교제를 나누길 원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 위에 굳건히 세워지길 기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세상의 지식을 초월해서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체험하게 해주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심령에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신 결과, 성령으로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뿌리는 내리고 견고해질 수 있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4) 충만함으로 채워짐(19b)
사도 바울의 마지막 기도는 에베소 성도들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유한한 사람들에게 무한한 하나님으로 가득 채울 순 없습니다(역대하 6:18). 하지만 바울이 의도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가능한 역량의 최대치만큼 하나님의 힘과 사랑과 지식이 흘러넘치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본문을 쉽게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로 점점 충만하게 하사 하나님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시길 구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충만하다(πληρωμα)’를 두 번이나 사용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될 수 없지만, 현재보다 더 성장해서 온전해져 갈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 내용이 서로 같습니다.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48)
성도들에게 성숙한 목표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심령에 충만하게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씸 같이 온전해 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도들이 충만하게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인도됨을 암시합니다. 이 ‘충만’은 이미 1장에서 교회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충만케 된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도 유사하게 말씀하시고, 에베소서 4장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십니다.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에베소서 4:13-14)
하나님의 소원은 성도들이 이렇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른 것이 그 절정(絶頂)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의와 진실과 사랑을 본받고, 그분과 같이 온전하게 해달라는 중보기도입니다.
성도들의 최종적인 결정체(結晶體)는 지상이 아니라 천성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완벽하게 변화될 하나님의 자녀로서 완전하게 구비되길 간구합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한 변화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먼저 성령 충만하게 무장해서 승리하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거룩한 하늘나라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두 번째 간구에 대한 제목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간섭을 전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이 성령을 통해 심령이 귀경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깨달아 가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 개인이 성령으로 새로워질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교제를 나누길 바라며 나가서는 온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송영 : 하나님께 영광(20-21)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하나님께 경배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지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주신 올바른 지식으로 예수님에 대해 깨달을 때, 하나님을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20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20-21)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로 네 가지 제목으로 기도한 후에, 이렇게 위대한 기도를 응답하실 하나님께 찬송하며 장엄함으로 전반부를 마무리합니다.
(1) 영광의 대상(20)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의 경륜을 시작하셨고 또한 완성하셨습니다. 그 구속의 경륜 가운데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충만한’, ‘넉넉한’, ‘후히 주는’, ‘채우시는’, ‘능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실 때, 은혜의 역사가 한없이 크고 풍성하다는 사실을 묘사합니다(로마서 8:28; 빌립보서 4:7). 바울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압도되었습니다. 크고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구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베풀어주십니다. 그 풍성하신 능력으로 세우신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영광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들도 그분의 능력과 은혜의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모든 부분을 신뢰하기 때문에, 교회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2) 송영(21)
사도 바울은 그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이 대대로 있기를 기원합니다.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넘치도록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송으로 기도를 마칩니다.
에베소서가 특이한 것은 다른 바울 서신의 송영에는 없는 ‘교회’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대부분 다른 서신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라고 끝맺지만, 에베소서는 ‘교회 안에서’라고 첨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 에베소서가 ‘교회론’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서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성도들에게 나타내셨고,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는 참으로 놀라운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비하면 갓난이 옹알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령을 통해 교회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가 교회답게, 성도가 성도답게 온전히 있게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성도와 교회를 통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실 분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크고 위대한 것뿐 아니라, 구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게 주시는 풍성하신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리시길 바랍니다.
바울의 기도는 만유(萬有)의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마지막은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이제 조직신학적인 부분을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인 기초가 제대로 구비되어야만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습니다. 오직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시작하여 마무리됨을 신뢰하며, 더욱 성도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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