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01)
신령한 인사말
에베소서 1장 1-2절
오늘날 예배당은 현대 감각으로 아름답게 건축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건축된 아름다운 예배당은 많은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인도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먼저 믿는 성도들의 삶이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 다시 발길을 세상으로 돌려 버립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예배당도 아름다워야겠지만, 내면적인 구성원의 삶들은 더 아름다워야 합니다. 이런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때, 많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서 이런 모범적인 교회와 아름다운 성도에 대해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은 초대교회들을 돌아봅니다. 본 서를 기록할 당시에 그는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계속 교회를 보살핀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현장에는 직접 갈 수 없지만 서신을 통해서라도 멀리 있는 교회들을 돕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열정적으로 옥중에서 기록한 편지가 바로 ‘옥중서신’인데, 그 중에 본 ‘에베소서’가 속해 있습니다. 본문은 에베소서에서 서론(序論) 중 인사말입니다.
발신자 바울(1)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회복한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은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달았을 때, 요셉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능력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정체성이 회복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서신의 첫 부분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1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1a)
본 에베소서는 당시 일반적인 편지 형식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그 당시 편지에는 발신자, 수신자 그리고 인사말 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형식은 에베소서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골로새서, 디모데후서에서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신을 기록할 때마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부름 받은 ‘사도’로 소개합니다.
(1) 발신자
에베소서를 기록할 당시에 편지을 작성하는 형식은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먼저 발신자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이 에베소서에서도 자신을 ‘바울’이라고 소개합니다. 한국 성경은 번역하면서 바울 앞에 많은 단어들을 수식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먼저 발신자의 이름인 ‘바울’을 기록하였습니다. 영어 성경들도 번역하면서 원문 헬라어 어순(語順)을 따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서양의 편지들은 이러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will of God, … (NASB)
사도 바울은 본 에베소서를 기록할 당시 로마 있는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투옥된 상태에서도 각 지역 교회들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았습니다. 옥중에서 각 교회들의 소식을 듣고서 회답 형식으로 기록한 서신들이 바로 바울이 기록한 ‘옥중서신’입니다. 이 옥중서신 중에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록한 서신이 바로 본 ‘에베소서’입니다. 하지만 이 서신은 단순하게 에베소만 위한 것이 아니라 에베소 근동 소아시아에 있던 교회들에게 돌려가면서 볼 수 있도록 기록된 ‘회람형 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까지도 회람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삶이 변화되었던 사람이 필요합니다. 에베소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시키기 위한 일군으로 바울이 적격(適格)이었습니다. 바울의 일생을 살펴보면 더욱 적당한 일군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본 서신을 기록한 바울의 삶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① 바울의 출생
사도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길리기아 다소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출생했습니다(사도행전 22:25-28). 또한 그는 율법에 정통한 독실한 유대인이었고(사도행전 9:11;21:39;22:3), 그의 이름은 유대식으로는 ‘사울’이며, 로마식은 ‘바울’이었습니다(사도행전 13:9).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의 부모님은 다소에서 영향력 있는 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소의 바울은 엄격한 근본주의 유대교 가정에서 자라서, 모세 율법대로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성인 때까지 율법을 준수하며 성장했습니다(갈라디아서 1:14;빌립보서 3:5-6). 다소에서 살다가, 공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바리세인으로 저명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철저한 근본주의 유대교 교육을 받습니다(사도행전 21:39;22:3,28). 그는 가말리엘 문하 중에서 가장 총망 받던 문하생이었습니다.
② 바울의 변화
유대교에서 총망 받던 바울을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생각과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자신이 유대인으로써 최고의 엘리트라고 착각하면서 거만하게 행동했었습니다. 유대교를 위해서라면 목숨 받힐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바울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름 받을 만한 자격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주후 33-34년경에, 그는 매우 특심이었습니다. 당시 다른 유대인들처럼 나사렛 예수를 이단자라고 생각했었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즉, 기독교인들은 이단을 추종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거룩한 이스라엘에서 암적인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박멸시키기 위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더욱 모든 이단자들을 박멸하기 위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600km가 넘는 먼 거리인 다메섹까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지역에 여러 회당에 있는 기독교인을 체포하려고 대제사장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들을 체포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사도행전 9:3-5). 이 사건은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일이지만, 역사적으로도 참으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하게 됩니다.
③ 바울의 사명
사명자는 사명을 다 할 때까지 죽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명이 없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변화된 바울은 평생 동안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사명을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이렇게 한 길을 갈 수 있엇던 것은 자신의 사명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3:7-13).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확신은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을 통해서 입니다. 다시 다메섹 사건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눈이 멀었고, 사람들에 인도되어 다메섹 직가(直街)에 위치한 유다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바울에 대한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9:15)
사람의 생각으로 광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람을 기독교를 세우는 일군으로 사용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불러 구원하시고 이방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그릇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도직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라고 소개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친히 사도로 뽑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변화시켜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던 중, 에베소 교회는 3차 전도여행 때에 세우게 됩니다. 3년 동안 많은 고난을 받아가면서 세웠던 교회입니다. 그 만큼 사랑이 가는 교회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들려온 에베소 소식은 모두가 좋은 소식만은 아니었습니다. 부정적인 소식으로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회의와 갈등을 느끼고 있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지금 바울이 처한 형편 때문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젊어서 고생하고 노년에 열매를 먹고 삽니다. 하지만 오직 복음만을 위해 헌신했던 바울은 그 법칙에서 예외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신실하게 평생 하나님의 일군으로 사역했던 바울이 노년에 호사(好事)는 누리지 못할지라도, 로마 감옥에서 중죄인 신분으로 사형을 기다리는 상황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이미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미숙한 상태였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세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상황에 마치 불난 곳에 기름을 끼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거짓 선생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했던 곳에 거짓 선생들이 방문해서, 바울이 가짜 사도이며 가짜 사역자라고 가르쳤습니다. 가짜 사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고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정말 미숙한 성도들에게는 매우 혼돈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혼란(混亂)은 회의(懷疑)를 부릅니다. 회의는 삶을 방황케 하고, 결국 세속적인 방식대로 살아가고, 결국 방황하면서 범죄 하도록 만듭니다. 방황하는 사람은 사단의 먹잇감입니다. 작은 유혹에도 쉽게 넘어집니다. 사단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 미숙한 에베소 성도들이 혼란스러워할 때, 거짓 교사들로 정확하게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란스러울 때는 다른 무엇보다 바른 신앙으로 정립한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에베소 소식을 들은 바울은 에베소를 직접 방문할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서신으로 격려하고 신앙을 바르게 정립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에베소서’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2) 사도성
사도 바울은 대외적으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 받고 투옥되었지만, 자신의 사명이나 상황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 나라의 사자(使者)로 쓰임 받고 있음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 받고 있음에 감사하면서 죽도록 충성했던 것입니다.
사단은 복음이 확장되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일군들의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가령 그 대상이 돈에 약하면 돈으로, 이성에 약하면 이성으로, 명예에 약하면 명예로 유혹해서 공격합니다. 깨어있지 않는 일군들은 바람에 낙엽 떨어지듯이 속수무책으로 떨어집니다. 사단은 선한 일군인 바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공격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군인 사도권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도들과 비교해서 그 점에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단이 바울을 공격할 목표는 ‘사도직’이었습니다. 사단은 바울과 충돌이 일어나는 곳마다 사도직을 가지고 단지를 걸었습니다. 바울에게 사도직을 공격하면, 힘을 잃을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교회 안팎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항상 ‘사도권’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갈라디아 교회에 있던 거짓 선생들도 바울을 공격하면서 정면으로 ‘사도’가 아니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권’을 흔들면 흔들수록, 사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욱 더 강력하게 ‘사도권’을 주장하며 나갔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도권’에 대해 살펴봅시다. 예수님 이후 ‘사도’에 대해 설명한 곳은 사도행전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가 죽은 후, 그 빈자리를 대신할 사도를 뽑았습니다. 이 때 사도의 자격을 소개했습니다.
21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22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사도행전 1:21-22)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12사도들처럼 함께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지 못했고, 더 나가서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자신을 사도로 부르셨고, 12사도들과 동일한 사도직을 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장하는 ‘사도권’을 로마서를 통해 살펴보면, 사도로서 3가지 조건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로마서 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어야 하고
2. 하나님의 복음 속으로 온전히 구별되어져야 하며
3.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당시에는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고 있었기에 사도나 성도로서 자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에 성도들을 체포하려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반전을 이룬 확실한 체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바울을 사도로 부르셨고, 바울은 사도로서 부르심에 응답 하였습니다.
(3) 사도의 근원
수많은 공격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흔들리지 않고 사역할 수 있었던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사명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이었습니다. 이는 스스로 자기 확신에 찬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소개했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가 된 것이 자신의 자격으로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다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다른 의미는 당시 바울에게 사도권에 대한 공격에 대한 방어였습니다. ‘사도’라면 예수님을 직접 목격해야 된다고 공격할 때,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던 사건으로 방어했던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대표적인 공격은 갈라디아서에 나와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공격할 때, 자신의 사도권과 사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변론합니다.
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라디아서 1:10-12)
사도 바울의 ‘사도직’은 자신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던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처럼 직접 예수님을 따라다니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섭리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 항상 낮추어서 말합니다.
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9-10)
하나님께서 바울을 강제적으로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즉 하나님의 주권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변호했던 것입니다. 종의 권한처럼, ‘사도권’도 자신의 의도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은 어떤 권한이 없습니다. 주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도권’을 부인하는 것은 단순히 사도권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동안 사도권을 가지고 사역했던 모든 하나님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즉, 이것은 복음을 무력화하기 위한 사단의 공격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도로 세우신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이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깝지 않고 죽도록 충성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영적 정체성이 흔들릴 때, 사단은 그 성도들을 공격 목표로 삼습니다. 과거의 약점으로 ‘너는 죄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고 공격합니다. 이렇게 사단이 공격해올 때, 성도들은 담대하게 ‘과거에는 몰라서 그렇게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 나는 하나님의 일꾼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단은 이러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자신의 신분과 직분에 대해서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때, 요셉처럼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수신자 성도들(1b)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적인 것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적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불평하거나 원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누렸던 복을 헤아려보면 너무나 많은 것들을 누렸고 또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1b)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었고, 이제는 세상과 단절되고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의 풍속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소유라면 그의 소유로서 합당한 새로운 방식과 그의 요구에 걸맞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또한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성장해 왔습니다.
⑴ 영적인 직분
사도 바울은 본 에베소서 수신자들을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중으로 ‘성도(聖徒)’와 ‘신실한 자’이라고 부릅니다.
① 성도
먼저 ‘성도(ἅγιος)’란 구약에서 종교적 경외심을 뜻하는 ‘신성한 사람’, ‘봉헌된 사람’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구약에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였습니다(신명기 33:3).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 영적인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결국,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거듭난 자, 또는 세상으로부터 성별(聖別)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된 자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성도’란 호칭이 도덕적인 의미에서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거룩한 신분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身分)을 의미합니다. 이 ‘성도’란 호칭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명예(名譽)입니다.
② 신실한 자
다음으로 ‘신실한 자(πιστος)’란 ‘신뢰하다(πειθω)’에서 유리한 단어로 ‘믿을 만한 자’, ‘신임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신약에서 사용할 때는 성도들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결국 성도의 신실한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무리’ 또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종합해 보면, 신분상으로는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성도’이고, 실제 삶에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호칭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자신들을 구별된 거룩한 사람이며,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불렀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께 세상에서 구별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쉬운 표현으로 두 가지를 정리해 보면, ‘하나님의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제는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만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방법에 영향 받지 않을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과거에는 세상에 속해서 부정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은 거룩한 사람,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한 의도한 것은 에베소 성도들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과 동격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또한 믿음을 소유한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정체성으로 ‘성도’와 함께 ‘거룩’이 동시에 사용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며, 말씀을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⑵ 실질적 생활
성도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할 에베소 성도들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과 후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었지만, 일상에서는 일반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이 에베소에서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가기란 매우 힘들었습니다.
① 다양한 구성원
에베소 교회 안에는 구성원이 유대인과 이방인, 로마인과 지역민, 주인과 종 등으로 다양한 형태로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은 소수지만 영적 자부심 때문에 서로 화합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방인 출신 성도들은 아직까지 이방 영향으로 도덕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도 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이러한 이방인 성도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비판하게 되고 점점 파벌 싸움으로 비화될 수 있었습니다.
② 지역적 상황
서론에서도 소개했지만, 에베소는 물질적으로는 풍부했지만, 영적인 면으로 보면 매우 열악했습니다. 항구도시로서 무역이 활발해서 경제적인 부요했습니다. 당연히 물질적인 풍요에 따라오는 것은 도덕적인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는 매우 음탕한 지역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달의 여신 아데미를 섬긴 우상숭배의 중심지 지역이었습니다.
성도들이 음탕한 에베소에서 거룩하게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으로 심각했던 지역이라 그만큼 영적인 전쟁이 심각했습니다. 날마다 강력히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고 나가야했지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③ 영적 성숙도
마지막으로 성도들의 성숙도 문제였습니다. 이방인 성도들 중에는 부르심을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지만, 아직 미숙한 상태였습니다. 세상에서 생활한 모습은 거룩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에베소에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사도행전 19:1-20). 먼저 사도 바울이 안수 기도할 때 성령 임재 체험하였고, 바울이 가는 곳마다 병자들이 치유되고 악한 귀신들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수많은 우상 책과 부적들을 불사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외적으로 믿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아직 내적인 면에서는 성숙하지 못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봅니다. 아직 부족하고 미숙한 모습이 있었지만, 이들을 향해 바울은 ‘성도’라고 부릅니다. 분명한 것은 에베소 성도들은 부족해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부족해서 ‘성도’로써 합당해 보이지 않지만, 장차 성장하면 강력한 일군이 될 것을 본 것입니다. 지금은 연약해도 그들은 분명히 ‘성도(聖徒)’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부족하다고 손가락질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장차 장성한 모습을 바라보시고 자녀로 축복하십니다.
인사말(2)
오늘날 어느 시대보다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다른 시대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감사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치 못하고 불평이 많습니다. 감사치 못한 이유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태도는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
사도 바울은 편지를 받는 성도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 인사에는 ‘은혜’와 ‘평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들에는 헬라식 인사와 히브리식 인사를 하나로 만들어서 기독교화한 인사법입니다. 이러한 인사는 바울의 서신에 잘 나타난 특징입니다. 간단한 몇 단어로 구성된 인사법이지만, 그 속에는 에베소 교회 안에 히브리 성도와 이방인 성도들로 분열을 일치하도록 하는 인사가 담겨있습니다.
⑴ 은혜
‘은혜(καις)’란 자격 없는 사람에 주신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호의, 그리고 성령을 통한 모든 은총을 의미합니다. 이 은혜는 사람의 행위와 조건을 뛰어넘어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⑵ 평강
‘평강(ειρηνη)’은 구약 히브리어의 ‘샬롬(שלום)’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했습니다. ‘평강’은 ‘평화’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어서 모든 관계가 회복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은혜 없이는 평화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은혜’가 임하는 곳에 ‘평강’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심령에 ‘평강’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맺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곧 세상에 모든 조건, 상황 그리고 환경을 넘어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⑶ 은혜와 평강의 기원
‘은혜’와 ‘평강’이 어디에서 오는지 기원(起源)을 살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기원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고 소개합니다. 이 근원은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합니다.
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때, 창조주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특별한 관계인 아버지로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그의 자녀입니다. 자녀로서 특별하게 은혜와 평강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으며(2:3), 하나님이 없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2:12).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시고 자기의 아들로 입양시켜 주셨습니다(1:5).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줄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든지 아낌없이 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마음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으로 아낌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② 주
다만 이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만 옵니다. 예수님을 수식하는 단어는 ‘주(κυριυς)’입니다. ‘주’란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자신의 우편에 앉히시고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빌립보서 2:9).
당시에는 ‘주’란 표현은 로마 황제에게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팍스 로마(Pax Romana)’라고, 강력한 힘을 가진 로마 황제가 무력으로 지배한 지역에는 로마가 주는 평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주는 평화는 로마가 주는 평화와 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가 되셔서 진짜 평화를 주십니다. 이 평화는 로마의 평화처럼 무력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주신 평화입니다.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신 평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부른 것은 모든 세상에 진짜 통치자와 주권자는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에게 은혜와 평강을 부여하는데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합니다.
사단은 성도들에게 거짓 평화를 누리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평강은 모든 세상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참으로 위대한 평화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나갈 때만, 이 하나님 아버지의 평강을 누립니다. 대표적으로 이것을 누리는 곳은 바로 하나님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를 누리길 원하십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성도로 세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령한 복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이제 세상에 어떤 것에 얽매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없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깨닫는 성도들은 모든 관계가 회복되고 어느 곳에든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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