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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04)


구원을 성취하신 하나님

에베소서 2장 1-10절


미국에서 일어난 황당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한 어르신이 길거리에서 쓰러져서 응급차로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의사가 진단해본 결과, 이미 숨도 맥박도 멈추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망진단을 내렸습니다. 시신을 영안실로 옮기고 장의사가 염하려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의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처럼 죽었던 사람이 생명을 얻어서 다시 살아난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만약 죽을 고비를 넘겨본 사람은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살아있으매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었던 사람을 생명으로 바꾸셨습니다. 본문은 구원 받은 전후 상태와 직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 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찬양’(3-14)과, 그 사역을 온전히 알기 위한 ‘기도’(15-23)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 성도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제 바울은 성도들이 알아야할 ‘구원론’에 대해 소개합니다. 그 내용은 먼저 구원 받기 전에 비참한 상태와,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소개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구원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소개합니다.

 

구원을 받기 전 상태(1-3)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죽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생명이 있어보지만 이미 죽은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그 비참한 상태로 놓아두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비참한 상태에서 어떻게 살리셨는지에 설명합니다.

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1-3)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구원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먼저 구원 받기 이전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본문은 신약성경에서 구원에 대해 명확하고 사랑 받는 설명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구원에 대한 기준점을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단연코, 그리스도 이전의 구원 받기 전 모습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비참한 상태라고 선언합니다. 구원 받기 전 과거에 비참한 모습을 상기시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에서 자신을 제외시키려 하고 그 문제는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영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이런 비슷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지그까지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섬겨왔고 말씀을 지켜 왔기 때문에 죄와는 상관없이 구원이 확정된 민족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죄인의 범위를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본문에서 대명사의 변화를 중요하게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너희’(2)는 이방인들을 의미하지만, ‘우리’(3)는 유대인들을 지칭합니다. 결국, 본문을 살펴보면, 죄인의 범위에 대해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죄인이라고 단언합니다. 이런 죄인의 범위에 대해 로마서에서는 설명합니다.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기 전의 상태를 이방인부터 시작해서 유대인까지 살피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영적인 상태를 살펴보겠습니다.

⑴ 구원 전 이방인의 상태(1-2)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이방인 성도들에게 ‘너희’(2)라고 지칭하면서, 그들에게 영적으로 죽었었다고 단언합니다. 당연히 이방인들은 조상 때부터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죽은 사람들이 맞습니다. 죽은 시신은 외부 환경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의 사랑에 대해 아무런 반응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죽음의 상태를 두 가지 영적인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① 죄와 허물 가운데 행함(2a)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만드셨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계속적으로 생명을 공급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환자실 환자에게 산소 호흡기를 떼면 죽은 것처럼 하나님과 영적으로 단절된 사람은 영생이 없고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에 관한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 없는 사람은 영적인 죽음으로 간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죽음에 대한 원인을 ‘허물과 죄’이라고 관련짓습니다. 허물과 죄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그(허물과 죄) 가운데서 죽었다’라는 의미입니다.

먼저, ‘허물(παραπτωμα)’은 ‘경계선을 넘어 벗어나는 것’을 의미함으로, ‘사람이 잘못된 행위나 실패하여 하나님의 뜻과 법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죄(ἁμαρτιαις)’는 ‘과녁을 비켜 가는 화살’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뜻과 법에 어긋나게 행하는 것’이나 ‘잘못된 일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 단어는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어거스틴(Augustine)의 해석에 의해서, ‘허물’은 고의성이 없이 범한 죄이고 ‘죄’는 고의성을 가지고 행한 것이라고 구분합니다. 두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인간의 죄악성을 포괄적이며 다양성을 설명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께 창조되었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만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만 높이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넘어서 있는 목적에서 벗어난 죄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이방인들이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분리되어 떠나 있었습니다(에베소서 4;18; 골로새서 1:21; 2:13). 이것은 바로 죄이며 영적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죄에 대한 결과에 대해 말씀합니다.

23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 6:23)

이러한 인간의 비참한 상태는 이미 인간 타락 이전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선악과 언약을 맺으면서 경고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경우 사람에게 반드시 임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2:17). 시조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실제적으로 죽음이 임하게 되었습니다(창세기 3:24).

② 세상과 악한 영을 좇음(2b)

사도 바울은 에베소 이방인 성도들이 ‘허물’과 ‘죄’ 때문에 죽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만나기 전까지 그 가운데 살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그 가운데서 행하여’라고 소개한데, ‘행한다(περιπατεω)’는 행동이나 생활 방식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구원 전의 이방인 성도들이 죽음의 상태에서 계속해서 어두운 방식으로 죄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 비참한 처지를 표현합니다. 바울은 과거의 ‘어두운 삶’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현재 ‘영광스러운 삶’(10)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방인 성도들의 과거 어두운 삶에 대한 특징을 두 가지로 묘사합니다. ‘이 세상 풍속’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의도한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된 불신앙의 삶의 방식을 가리킵니다(요한복음 17:14). 세상 풍속을 좇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노아 시대 사람들’(창세기 6장)과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창세기 19장)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을 배척하고 세속적 사고, 물질적인 가치 그리고 육체적인 쾌락에 집중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도 죄악에 대해서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두 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들의 삶과 별로 차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도 ‘노아 시대’와 ‘소돔과 고모라 시대’와 비교했을 때, 참으로 답답하고 슬퍼집니다.

이방인 성도들은 과거의 세상에서 삶의 인도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며, ‘불순종의 영’이었습니다. 당시 성도들은 ‘공중(αμρ)’는 ‘하늘’과의 차이를 두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높은 신성한 곳으로, ‘공중’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바로 위인 세속적인 곳을 의미했습니다. 그만큼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사람들에게 쉽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사용한 것입니다. ‘권세 잡은 자’는 ‘불순종의 영’과 동격입니다. 성령께서 순종하는 영혼들 가운데서 선한 일을 역사하듯이 사단은 악인들 가운데서 악한 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에 있던 이방인 성도들은 과거에는 공중 권세자를 따르면서 불순종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대한 결과는 죄이고 사망이었습니다. 공중 권세자에게 불건전한 지배 영역과 분위기를 받으면서 모든 거짓과 악을 행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⑵ 구원 전 유대인의 모습(3)

사도 바울은 이제 눈을 돌려서 에베소 교회 안에 유대인 성도들을 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유대인 성도들을 이방인들과 구분해서 부릅니다. 유대인들을 ‘우리(유대인)도 다 그 가운데서’라고 강조한 표현을 사용해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도 별반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범죄 상태 있다는 증거로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① 정서적인 타락(3)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도 구원 전의 삶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았다고 합니다. 입니다. 본문에서 ‘육체(σαρξ)’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욕심’은 정신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욕망과 충동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16).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은 관심 없고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로마서 8:7). 그들의 생각에는 육체의 욕심이 기준이 되어 살았던 것입니다. 자아 중심적인 욕망에 지배할 뿐 아니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들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② 신체적인 타락(3)

이어서 바울은 두 번째 증거는 ‘육체의 원하는 것’을 제시합니다. ‘육체’는 ‘성령’과 반대되는 의미입니다. 정신이 타락하면, 자동적으로 행동도 타락합니다. 그들은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속 중심적인 가치관의 중심-물질만능주의, 권력만능주의, 육체쾌락주의 등-으로 살아갑니다.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모든 역량을 다해서 살아갑니다. 삶에 하나님께서 끼어들 곳이 없습니다. 구원 전의 유대인들도 옛 본성의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다름없었습니다. 허기진 사람들처럼 채우지 못한 세상의 욕망을 채우기 모든 가득하였습니다.

③ 이성적인 타락(3)

마지막으로 바울은 유대인들의 타락한 모습을 ‘마음의 원하는 것’을 행했다고 지적합니다. 사람의 이성적 기능은 지적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이성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할 틈이 없었습니다. 선택의 기로에 서면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모두 자신의 생각대로 육적 우선순위에 따라 자기기만, 자기 합리화, 혼미함, 불합리한 신념 등으로 결정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까지도 완벽하게 죄인이라고 세 가지 반증을 들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기 때문에 이방인들과는 구별된 존재라고 생각했고, 이방인들을 부정한 죄인으로 간주해서(갈라디아서 2:15),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도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사도행전 10:28). 겉으로는 선민으로서 하나님께 제사하고 말씀을 가르쳤지만, 내면에는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순응하며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동족이라고 해서 연민으로 감싸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죄인이란 사실은 의사에게 암 3기를 진단 받은 것보다 더 하늘이 무너지는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완벽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자신들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선언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조건이든지 예외 없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모든 인류의 구원 받기 이전 인류의 상태를 간결하게 살폈습니다. 모든 인류가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죄 가운데 살고 있음을 밝혔습니다(로마서 5:12-14). 죽은 사람은 움직일 능력이 없는 것처럼, 구원을 위해 어떤 능력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범죄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세상의 풍조를 따랐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악한 지배를 받으면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까지도 패역한 삶을 살았습니다. 영적으로 아무런 소망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이 필요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4-9)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외적으로는 아무런 육체적인 변화는 없지만,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단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가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게 됩니다(로마서 8:15; 갈라디아서 4:6).

4(그러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4-7)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이방인이나 유대인 모든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입니다. 사람들은 죽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킬 어떤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아서 영원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구원 작전을 수행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서 죄인들을 구원하신 일입니 다(요한복음 3:16; 갈라디아서 4:4-5; 디모데전서 1:15).

 ⑴ 모든 인류를 구원하심(4-6)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비극적인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먼저 ‘(그러나) 하나님께서 …(ό δε θεος)’라고 앞 1-3절의 비극적인 내용을 극적인 반전하면서 시작합니다. 하나님 밖에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습니다. 극적인 변화는 “죽었던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5)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 때문에 영적으로 죽은데다가 마귀의 권세에 눌려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속죄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면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도 함께 살리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은 이미 정죄되어 저주 받을 운명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은 아무런 느낌이 없듯이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물며 구원에 대해서 무지하고 무능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위대한 사랑이며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사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하셨던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시고 가슴 아파하셨습니다(참고 출애굽기 2:24-25). 가만히 계시지 않고 ‘자기의 큰 사랑 때문에’ 인류를 살리시기 위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아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는 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또한 구체적으로 넘치도록 풍성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기쁜 소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에 대해 ‘우리’를 향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앞에서 유대인들만 한정한 ‘우리’(3)와는 다르게 모든 유대인들을 포함한 이방인까지 모든 인류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와 사역과 연결시킵니다(1:20-23). ‘우리’를 위해 이루셨던 구원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와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이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1:20)과 동일한 사역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고 하늘에 함께 앉히신 일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전치사와 중요한 세 가지 동사는 ‘함께 살리셨다’, ‘함께 일으키셨다’ 그리고 ‘함께 앉히셨다’는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동사들 앞에는 ‘함께(συν)’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 전체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부활과 승귀가 동참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일으키시고 자기 우편에 앉히셨던 하나님의 능력과 동일한 능력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살아 있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입니다(요한복음 3:3,7; 베드로전서 1:3,23).

 아무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인류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구원은, 개인적으로 과거 사건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만 그의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 승귀가 자신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연합한 사람들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와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십니다.

⑵ 구원의 목적(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죽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죽음의 쇠사슬이 풀려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요한복음 5:24; 골로새서 2:13-14). 장차 그리스도의 부활에 함께 참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천국의 모든 것을 누릴 것입니다. 이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지극히 크심을 보이셨습니다(에베소서 1:19-20). 성도의 구원에는 인간은 무능력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왜 아무런 가치 없는 사람을 위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즉,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를 오는 세대에 알리려는 것’입니다. ‘오는 세대’란 현재 세대와 앞으로 계속 이어지는 미래 세대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풍성하고 영광스러운지 보여주시길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영원히 나타나실 원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은혜’를 살펴보면, 사람의 공로가 없이 하나님께 거저 주시는 것, 즉 구원의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베푸신 자기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그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휘페르발로(ὑπερβαλλω)’, 즉 ‘엄청난’, ‘탁월한’이란 단어와 함께 ‘플루토스(πλουτος)’ ‘부요함’이란 단어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지극히 풍성함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긍휼히 충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구원을 값없이 은혜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신 분이시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랑이 지극히 많으신 분입니다. 인자하시며 하나님의 은혜가 엄청나게 풍성하신 분입니다. 엄청난 풍성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그의 인자하심에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긍휼히 풍성하신 은혜를 오는 세대들에게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는 특권을 주신 목적입니다. 은혜란 자격과 공로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와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⑶ 구원의 방법(8-9)

이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인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두 가지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의 믿음’을 언급합니다. ‘은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믿음’은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잘못생각하면 구원이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단언합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한 값없고 조건 없는 긍휼이며 ‘믿음’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 구원을 받았으니’(5,8)라고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시작합니다. 단순한 반복 서술이 아니라 기쁨이 넘치는 탄성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지금도 계속 구원을 누리고 있는 상태를 기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에베소 성도들이 구원 받은 ‘그 은혜로’,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은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적으로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에서 나온 것처럼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위에서 언급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에 대한 성도의 인격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이루신 구원의 사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성령께서 성도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제부터 구원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서술합니다. 구원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들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받아드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없음으로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을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선민(選民)’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했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단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성령의 강권적인 은혜의 역사를 통해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사도행전 18:27; 빌립보서 1:29). 그러므로 자신이 받은 구원에 대해 유대인처럼 구원 받은 백성이라고 거만하게 자랑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구원 받은 인간(10)

지금까지 많은 선물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선물을 받을 때에 값없이 받지만, 반대로 선물을 줄 때는 선물의 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구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실 때는 값없이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물을 주시기 위해 값진 대가를 지불했어야 합니다.

10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10)

사도 바울은 10절을 ‘그러므로(γαρ)’로 시작하면서, 구원에 대해 인간적인 자랑이 있을 수 없는 이유를 다시 주장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작품이며, 곧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설명합니다.

⑴ 하나님의 작품(10a)

본문에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고 소개합니다. ‘만드신 바(ποιημα)’는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미 ‘만들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구원하신 사건을 설명합니다. 구원의 사건은 개인적으로는 구원 받은 성도를 말하지만, 공동체적으로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의 작품’임을 밝힌 것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작품’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창조하신 피조물을 말합니다. ‘창조’란 단어는, 창조 때뿐만 아니라 재창조 때도 동일하게 사용합니다. 이것은 창조나 재창조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에게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누누이 강조하지만,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은 구원에 대해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도자기를 빚듯이 죽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재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와 함께 일으키시고, 그와 함께 하늘에서 앉히신 것, 모든 구원 사역은 태조에 천지만물을 만드신 창조 사역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재창조를 심도 깊게 하셨습니다.

작품은 그 작품을 만든 작가의 솜씨를 그대로 들어냅니다. 재창조된 성도는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동원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작품으로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온 세상에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⑵ 선한 일을 위함(10b)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작품으로 만드신 또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죽어서 스스로 아무 것도 행할 수 없었던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라고 재창조되었습니다.

앞 단락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구원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1:6,12,14).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과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은 입술로 찬양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을 만드실 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창세기 1:26). 아담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창조주의 원하심대로 따라 다스렸으면, 만물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계속 나타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허물과 죄로 죽은 사람은 죽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권과 영광도 상실되어졌습니다.

새롭게 창조된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부모를 닮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한 모습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특히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선한 모습을 들어 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물을 주신 분의 뜻에 합당한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창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회복시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과 함께 선한 일을 하기 위한 선한 도구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말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어느 한 부분도 우리에게 능력을 허락하신 것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값없이 최고의 선물인 ‘구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새로운 작품으로서 탄생되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오직 겸손히 감사함으로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허락하신 이유를 하나님의 선한 일을 도모하기 위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힘쓰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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