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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6-02)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자세

마태복음 16장 21-28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전부를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 전체가 옳다고 믿는 것이며, 그분이 만들어가는 세계에 참여하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당신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이든지 간에 치르겠다는 뜻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 베드로의 고백이 끝나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과 제자들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본 단락은 메시아의 길을 설명하고 메시아의 길이 곧 제자들의 길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고난의 메시아(21-23)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스승인 예수님을 시인해야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칭찬을 받다가 주님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 사탄(4:10)의 하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21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21-23)

 

예수님께서는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또한 제자들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가이사랴’는 황제 사이사랴에 나온 명칭입니다. ‘빌립보’는 분봉왕 빌립에서 나온 명칭입니다. 당시에 로마 황제 ‘가이사’는 ‘주’로, ‘빌립’은 신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세상 나라의 주와 그에 대리 통치자인 신의 아들이 통치하는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물으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세상의 주인은 가이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그의 대리 통치자는 ‘빌립’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고백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점점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이지만, 그 메시아를 통해 하실 일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항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항변하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강하게 거부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동사인데(공관복음서에 27회[마 6회, 막 44회, 눅 12회], 딤후 4:2; 유 1:9), 문맥에 따라 ‘책망하다’, ‘경고하다’, ‘심각하게 말하다’, ‘벌하다’ 등으로 번역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어 쫓을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막 1:25=눅 4:35; 마 17:18=막 9:25 9:42).

22절은 ‘주여, 하나님이 이것을 금하셨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그는 ‘이것은 결코 당신께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라며 예수님께서 생각을 고쳐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들려 세우고 꾸짖으십니다(23).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내 뒤로 떠나라, 사탄아!’라고 하십니다. 광야 시험에서 사탄에게 ‘떠나라, 사탄!’이라고 하셨습니다(4:10),

베드로에게 있는 사탄이 쫓겨나야 하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제자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태는 마가복음에는 없는 ‘너는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할 것이다’를 사용합니다(참조 5:29; 18:6). ‘스킨달론’은 ‘함정’,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 ‘죄를 짓게 하는 유혹’ 등의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유혹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을 어기고 넘어지게 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과 16:18에서 베드로에게 적용된 ‘바위’를 연결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위가 됐으나(16:18). 자신의 뜻을 추구하자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단계는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 다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메시아로 오셨기에 그를 따르는 자들은 고난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교회의 목표는 사람들이 성경에 묘사된 예수님을 정확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목적을 정확히 이해했는지 여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으로 입증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회복하기 위해 나의 아까운 시간과 소중한 보화를 희생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자도는 구원받은 감격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무한한 감사를 무한한 헌신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따른 제자의 길(24-28)

십자가가 끝이 아닙니다. 인간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부여받으실 것입니다. 그날을 구원과 심판이 판가름 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버렸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얻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는지에 따라 그 운명이 갈릴 것입니다.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24-2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 없는 영광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살겠지만, 예수님을 죽이고 자기만 살겠다고 하면 다 잃게 될 것입니다.

 

(1) 자기 부인과 십자가(24)

 

예수님의 운명은 제자들의 운명을 뜻하므로 제자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제자도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해야 합니다. 바른 신앙고백은 반드시 예수님을 닮은 삶으로 표현돼야 한다는 것은 마태복음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7:21-23; 10장; 11:28-30; 13장 등).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증명되며, 세 가지 삶(‘자기를 부정하라,’/‘자기 십자가를 지라.’/‘나를 따르라’)의 표현은 사실상 같은 의미의 반복입니다.

먼저 예수님께 나오기를 원하는 자는 자기를 부정해야 합니다. 자기 부정은 자신의 욕망이나 계획이 아니라 앞서가시는 예수님만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삶을 규정하는 핵심이므로, 제자는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2) 목숨을 잃음과 얻음(25-26)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순종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이 십자가는 자신이 아니라 남을(또는 많은 사람을) 위한 희생을 의미했습니다.

제자의 길은 예수님의 길을 모방하는 것이므로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25). 목숨을 구하고 잃는다는 이미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목숨의 위협을 경험하는 상황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잃더라도 미래에는 (부활을 통해서) 확실히 얻게 됩니다. 물론 여기서 목숨을 잃고 얻는 것을 반드시 문자적 의미로만 볼 필요는 없으며 죽을 것 같았던 현실이 바뀌어 죽지 않고 사는 역설적인 경험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는 몸값으로 자신의 목숨을 주기 위해 오셨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희생을 통해 주어지는 혜택으로 목숨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비록 고난이 필수적으로 따르지만 목숨을 얻는 길입니다.

 

(3) 인자가 올 때(27-28)

 

이제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재판장으로서 미래에 등장할 신분과 역할(27-28)을 묘사합니다.

2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미래의 목숨, 최후에 심판대에서 주어질 목숨을 26절에서 암시한 다음에 27절에서는 그 일을 결정하는 인자의 오심을 언급하십니다(예. 25:31-32). 다른 본문과 비슷한 표현을 고려할 때 27-28절의 인자가 자신의 천사들과 함께 와서 행한 대로 심판하는 장면은 최후 심판을 가리키며 그는 종말론적 심판을 집행하는 재판장으로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의 천사들’이나(13:41,49; 24:31, 25:31) 행한 대로 갚는 모습을 통해 인자의 신적인 권위를 강조합니다. 원래 보상은 하늘 아버지의 행위인데(6:4,6,18) 인자가 이것을 행할 것입니다.

16:27과 19:28의 유사점을 연결하면, 인자는 천사들과 함께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심판을 집행할 것입니다. 24:30-31도 인자 그의 천사 종말의 심판이 나옵니다. 16:27과 25:21-32의 유사점은 각자 행한 대로 심판하는 인자의 역할을 강조합니다(참조 25:33-46). 인자는 신적인 존재로서 하늘 법정을 주재하는 존재입니다.

 

인자가 종말의 심판을 집행한다면 심판의 시기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아니라 역사의 끝, 즉 재림입니다(28). 그런데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서 죽기 전에’(28)는 재림이 아니라 제자들 중 일부가 인자가 그의 나라를 가지고 오는 것을 목격하게 될 특정 시간을 가리킵니다. 죽기 전에 제자들이 인자를 보게 될 사건과 시기에 대해 학자들은 변화산 사건, 십자가와 부활, 예루살렘의 멸망, 예수님의 재림 등을 제안해왔습니다. 이 중에서 예수의 재림은 ‘죽기 전’이라는 고려할 때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27절과 28절 사이에는 시간 간격이 있으며 이는 재림과 인자가 영광을 간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27절이 ‘재림’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28절을 재림과 연결해 보면, 제자들은 살아 있을 동안 재림을 부분적으로 경험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28절은 변모 사건(17:1-8)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자들 중 일부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형되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모습은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행사하는 것의 맛보기라고 할 수 있으며, 17:1의 ‘엿새 후’는 16:28과 변화산 사건을 연결하는 암시로 볼 수 있습니다. 부활도 예수님께서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미리 맛볼 수 있는 장면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28:18).

제자의 길과 인생은 인자의 길과 인생을 모방합니다. 인자의 인생은 십자가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제자들도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아닙니다. 제자의 일생은 예수님의 일생, 특히 그의 고난을 반영해야 하고, 이런 여정을 통해서 예수님과 일치되는, 예수님을 닮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한 사람은 심판의 때에 그 행함으로 신앙을 검증받습니다. 그래서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와서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약속은 한편으로는 격려를 한편으로는 긴장감을 갖도록 경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말씀에 예수님을 위하여 인간적 마음으로 반대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거부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기는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항변은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한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따르려면 무엇보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정확하게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과 방식이 아닌 자신의 뜻과 방식으로 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방식이 무엇인지 말씀을 잘 기울리고 깨달라아 주의 뜻을 온전히 쫓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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