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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5-02)

 


이방인에게도 역사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5장 21-39절


요리 프로그램이 부쩍 늘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먹는 문제 자체가 해결되니 이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맛있게 먹을지를 궁금하게 여기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먹는 음식이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먹는 문제로 이방인들을 상대하십니다. 그렇게 하신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 예수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과 논쟁 후 급히 이방 지역으로 옮겨 가십니다. 거기서 한 이방 여인을 만납니다. 예수님 사역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특별히 여인의 반응과 태도는 이방인들의 구원 사역 위치를 명확히 해줍니다. 그러나 그녀의 남다른 믿음은 예수님 안에서 이방인들이 누릴 구원을 투사합니다. 이어지는 치유 사역과 칠병이어 기적은 예수님 안에서 충만한 구원을 경험하는 이방인들을 그립니다

 

가나안 여인의 간구(21-28)

정말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지를 알아보시려고 주께서 우리를 수치의 자리로 낮추실 때가 있습니다. 이방인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낮아져야만 합니다.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살려 달라는 가나안 여인의 거듭된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1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1-28)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하는 길은 헛된 자부심이나 말씀 소유 여부가 아니라 은혜를 갈구하는 겸손입니다. 이방 여자가 자격 없음을 인정하며 부스러기 은혜라도 구하는 믿음은 이스라엘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1) 이방 여자와 만남(21-22)

 

예수님께서는 대표적인 이방 도시들인 두로와 시돈에 가십니다(21). 그 지역에서 가나안 여자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딸은 귀신의 공격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중입니다. 귀신 들림은 사탄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특징이며(4:24; 8:16,28,33; 9:32, 12:22; 17:14-20),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하수인들인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사탄의 나라를 무너뜨리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이방 지역으로 확장됩니다.

이방 여자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다윗의 아들이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마태는 여자가 계속해서 부르짖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2) 예수님의 낯선 반응(23-24)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치유를 부탁할 때 즉각 응답하셨지만(8:2-4,6-7,14-15,16,28-34) 이번에는 침묵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여자가 뒤에서 소리를 지르니 보내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24). ‘보냄 받았다’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을 돌봐야 하는 목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목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쉴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렘 50:6; 겔 34장).

예수님께서는 목자가 필요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회복하기 위해 보냄 받은 목자입니다(마 9:36; 10:6). 얼핏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목자가 필요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회복하기 위해 보냄 받은 목자입니다(마 9:36; 10:6). 얼핏 보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가나안 여자가 듣도록 의도하셨습니다. 구원 역사의 순서에서 이스라엘을 돌보는 목자의 사명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돌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 사역은 ‘이방의 갈릴리’(4:15)에서 출발했고, 데가볼리(4:25)와 같은 곳에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본 이야기를 전체로 읽으면 예수님의 대답은 여자의 간청에 대한 거절을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3) 여인의 믿음과 예수님의 응답(25-28)

 

이방 여자는 예수님의 냉찬 반응에도 관여치 않고, 예수님께 엎드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4절에 이어서 두 번째로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빵을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본문의 개는 집에서 기르는 애완용으로서 집주인은 자녀가 먹는 같은 음식을 집어서 개에게 주지 않습니다. 개는 자녀와 대조됩니다. 개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비유어이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이미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개는 이방인을, 자녀는 이스라엘의 자녀(출 4:22; 신 14:1; 참조 마 5:9,45)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거절에 대해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면서 세 번째로 요청합니다. 집안의 개들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개가 밥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받아 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자는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태도를 칭찬하십니다(28). 어떻게 지속적으로 예수님께 매달릴 수 있습니까? 여자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예수님을 병자를 불쌍히 여기고 치유하는 다윗의 아들로 이해했으며, 구원 역사의 흐름에서 다윗의 아들이 이방인들을 치유할 것을 믿었습니다. 여자는 구원 역사를 이해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간청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의 세 번째 요청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큰 믿음을 칭찬하면서 ‘원하는 대로 되라’고 명령하십니다(28).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는 바로 그 순간 여자의 딸이 낫습니다.

 

본문에 묘사된 여자는 큰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예수님의 치유하는 권위를 믿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여자의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반응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믿음이라는 주제만 강조하지 않고 여자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말하자면, 여자의 믿음은 구원 역사에 대한 이해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여자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로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주어지고, 그 다음에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빵 부스러기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구원사의 전망에서 파악할 때, 기도는 더욱 확신에 차게 되고 더욱 간절해집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님을 긍휼을 베푸는 메시아로 믿기 때문입니다.

 

환자들의 치유(29-31)

지금 우리가 살고 자녀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은 금력, 학력보다 주의 권능을 의지하는 이 믿음뿐입니다. 자녀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만으로도 딸에게서 귀신이 물러날 것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큰 능력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29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29-31)

 

본문은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면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요약하는 내용입니다. 치유(14:13-14)에 이어서 오천 명이 먹은 사건이 나온 방식과 같이 사천 명이 먹는 사건 앞에 치유 장면이 나옵니다. 치유와 먹는 것은 희년(사 61:1-2)의 실현인 메시아의 사역이므로 결합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본 단락의 치유와 먹는 사건은 단순히 앞의 사건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지역에서의 메시아 사역을 다룹니다. 두로와 시돈을 통과해서 갈릴리 동편으로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 바다를 건넜다는 서술은 없습니다.

 

본문은 가나안 여자의 팔이 치유 받는 사건과 자연스럽게 연결하면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는 내용을 압축합니다(11:5).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종말의 회복이 이방 지역에서도 성취되고 있음을 묘사함으로써 예수님을 메시아로 드러냅니다. 긍휼의 메시아는 제의적으로 정결한 사람들, 현대의 개념으로 보면 종교적 전통에 충실한 사람들을 찾아서 치유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비록 당시의 종교적 관점에서 소외된 자들일지라도 메시아의 권위를 믿고 초대를 받은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목자의 마음으로 치유하십니다. 어떤 조건과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긍휼의 메시아에게 초대를 받은 사람은 치유 받습니다. 이사야의 약속이 성취된 본문의 치유는 하나의 모형이 되어 어느 시대든지 상처 받고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만듭니다.

 

사천 명의 식사(32-39)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메시아도 되십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공평하게 사랑하십니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데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따로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사흘 동안이나 자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떠나지 않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32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32-39)

 

사람들은 외형적인 자격이나 조건에 따라 차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일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으셨습니다.

 

(1) 칠병이어(32-34)

 

32절에 나오는 무리는 29-31절에 등장한 사람들입니다. 이방인 무리는 치유하는 예수님 곁에서 3일을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무리를 불쌍히 여긴다고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무리를 먹이는 동기입니다. 무리는 3일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므로 가져온 음식이 다 떨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굶겨 보내지 못하겠다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몇 개의 빵이 있는지 묻자 제자들은 빵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다고 대답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본문의 숫자는 이방인과 관련이 있습니다(70개의 나라 등).

 

(2) 예수님의 축사(35-36)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 때처럼 무리를 앉히신 다음 빵과 생선을 취해서 감사를 표한 다음에 무리에게 주십니다(14:19).

본문은 오천 명이 먹은 사건(14:15-21)과 여러 점에서 비슷합니다. 두 장면의 차이는 없습니까? 인원의 차이 외에도 두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각각 갈릴리와 이방 지역의 갈릴리 바다 근처의 산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산에서 먹었으나(렘 31:10-14; 34:14, 26-27), 유대인들에 의해 부정하다고 무시당하는 이방인인 가나안 여자(21-28절)와 많은 환자들(29-31)은 이방 지역에서 메시아의 현존을 경험했습니다.

가나안 여자가 개들이 자녀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말한 내용은 이방인들이 치유의 혜택을 누리는 사건에 이어서 4천 명이 빵을 먹는 장면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긍휼을 받는 대상에서 제외되는 계층은 없습니다.

 

(3) 배불리 먹고 남는 기적(37-39)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외에, 이번에는 사천 명가량은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일곱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맛봅니다. 광야에서 사흘 동안이나 말씀을 듣기 위해 떠나지 않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필요에 깊은 관심을 보이십니다. 이들도 이방인들로 보입니다.


 

큰 믿음은 바른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 바르게 알고 있었기에 무시와 거절 심지어 모욕에 가까운 말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바른 앎, 절대적 신뢰 그리고 딸을 향한 극진한 사랑이 결합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하며 어떤 자세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또 예수님께 무엇을 간청하길 원하십니까? 이 여인처럼 겸손하게 주님의 신뢰하는 마음으로 나아가 간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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