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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4-02)

 


오병이어 기적으로 먹이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14장 13-21절


어떤 목사님께서는 결혼식 주례할 때마다, ‘체력’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말을 빼놓지 않습니다. 잘 싸우되 ‘밤 먹고 나서 싸우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일, 쇠약해져 가는 몸, 이것과 신앙은 결코 별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을 일치시키면 욕망의 종교가 되지만, 분리시키면 위선의 종교가 됩니다.

 

  •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의 죽음을 보고했으나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말씀이나 반응을 보이지 않고, 배를 타고 빈들로 가십니다. 빈들로 가신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치유하시며 그들을 떡과 물고기로 먹이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사야 61:1-2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병자를 치유하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희년의 약속을 성취하러 오신 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빈들에 홀로 계신 예수님(13-14)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성령을 통해 구원 얻을 자들을 모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빈 들까지 찾아온 무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13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13-14)

 

세례 요한의 죽음의 소식과 헤롯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나서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헤롯은 요한의 죽인 일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3-12절까지 장황하게 요한의 죽음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로 가셨습니다.

 

(1) 광야로 가신 예수님(13)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듣고 혼자서 배를 타고 빈 들로 물러가십니다(13). 마태는 예수님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3절의 ‘광야’는 알려진 특정 장소가 아니라 단지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죽은 이후 사역의 새로운 전환점에서 기도하기 위해 홀로 광야로 가셨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오병이어 사건이 끝난 직후를 보여주는 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배로 건너편에 보낸 다음 혼자서 광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A 혼자서 광야로(14:13)

A' 오병이어 기적(14:14-22)

B 혼자서 산으로(14:23)

B' 바다 위의 기적(14:24-33).

말하자면 ‘배’와 ‘혼자서 광야로’(13) 또는 ‘혼자서 산으로’(23)가 오병이어 사건을 감싸는 기능을 합니다.

혼자 계신 예수님께서는 13절 이후에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며 기적을 행했고, 23절 이후에는 제자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십니다. 어쨌든 23절에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목적으로 혼자 산으로 가신 것을 고려하면, 13절도 광야로 가신 목적을 기도와 연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할 때마다 의미 있는 사역을 보여주기 때문에, 마태는 혼자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곧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을 암시합니다.

 

(2) 병든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14)

 

예수님께서는 홀로 있는 시간을 원했으나 무리가 걸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배로 가로질러 가는 거리와 시간에 비하면 무리는 그만큼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보고는 배에서 나와서 무리 중에서 병든 자들을 고치십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목자 없는 양 같아서 불쌍히 여기셨다고 기록합니다(막 6:34).

예수님께서 치유로 나타납니다. 즉 불쌍히 여기는 목자의 마음은 양 떼의 필요를 채우는 행위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의 전환점에서 홀로 계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예수님에게는 언제나 우선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떠나 홀로 계신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하신 것입니다. 홀로 계신 예수님의 이후 행동은 도피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회복하고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떠나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찾고 두려움 없이 행동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홀로 있는 것이 도피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홀로 있지 못하는 사람은 한없이 가벼운 사고와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발걸음을 내딛기 쉽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15-21)

하늘나라는 풍성하고 부유한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오천 명을 먹이시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부요한 나라인지, 그 풍요의 원천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오병이어로 먹이셨습니다.

 

15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15-21)

 

큰 무리가 몰려들었기 때문에 에수님의 치유 사역은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고, 제자들의 마음은 다급해졌습니다. 제자들은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도 동시에 굶주린 무리를 염려합니다.

 

(1) 무리를 마을로 돌려보내려는 제자들(15)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무리를 마을로 보내 음식을 사 먹게 말씀하시라고 부탁합니다(15). 제자들의 눈에 들어온 엄청난 무리의 저녁 식사를 해결해줄 능력이 자신들에게 없다는 사실이 현실적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2) 예수님의 반응(16)

 

제자들의 요청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반응하셨습니다. 대단히 충격적인 선언이 등장합니다. 무리를 보내는 대신 ‘갈 것 없다’고 명령하십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지금 당장 떠나야 한다는 제자들의 생각과 달리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리의 저녁까지 책임이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더 놀라운 선언은 뒤에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치유의 사역으로 무리의 필요를 채워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무리의 또 다른 필요를 채워주신 사역에 제자들을 초청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주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현실적으로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응답이 나옵니다.

 

(3) 오병이어(17)

 

지금 제자들은 자기들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있다고 대답합니다.

빵과 소금으로 절인 물고기는 갈릴리 바다 주변 주민들의 음식이었고 도시락이었습니다(참조. 7:9-10, 요 21:9-10,13).

그들이 가진 오병이어는 큰 무리의 필요를 채워줄 답이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무능력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왕하 4:42-44).

 

(4) 예수님의 축사와 기적(18-19)

 

다시 예수님의 반응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오병이어를 자신에게 가지고 오도록 지시하십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손을 통해 일어나므로, 기적의 초점은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과연 누구이기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게 하십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보며 축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신 것(얼굴을 드는 동작은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욥 22:26-27; 사 38:14, 눅 18:13). ‘축사하다’는 ‘(하나님께) 감사하다’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유대인의 관습에서 아버지가 식사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드린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떼서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제자들이 무리에게 줍니다.

 

(5)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남음(20-21)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14:14) 목자로서 무리를 잔디 위에 앉혀 먹이십니다(시 23편; 겔 34:11-16). 빈 들에 있던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21-22).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숫자가 오천 명이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먹었습니다. 헤롯의 사치스러운 잔지는 의인을 죽이는 결과를 낳았으나, 잔디에서의 소박한 만찬은 사람들을 만족시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은 메시아와 함께 누릴 잔치를 미리 맛보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풍성하게 먹이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소망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잔치를 누리는 나라로서 이사야 25장의 아름다운 그림을 떠올립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오병이어 사건은 주의 만찬과 여러 가지 점에서 비슷합니다. 주의 만찬 외에도 몇 가지 의미를 전달합니다. 현재 빵과 생선을 먹는 무리는 당연히 주의 만찬을 알지 못할 것이므로, 그들은 오병이어 기적으로 출애굽의 광야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주의 만찬과 연결하면서도, 현장에 있던 무리와 제자들로서는 애굽에서 해방된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음식을 먹었던 장면을 떠올렸을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사가 열두 개의 빵으로 이백 명을 먹인 사건(4:42-44)도 있으나, 모세를 통해 광야에서 먹은 사건이 훨씬 큰 규모의 기적이고(출 16장)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장면과 유사합니다. 특히 출애굽의 백성이 ‘광야’에서 ‘중개자’(모세)를 통해 ‘빵’(출 16:4,8,12; 실제로는 '만나'가 내려옴)을 ‘배불리’(출 16:8) 먹은 장면은 본문의 기적과 유사합니다(참조, 요 6:25-34). 유대 문헌에는 메시아의 시대에 만나가 다시 내려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만일 애굽의 광야에서 벌어졌던 기적이 갈릴리의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의 모형이라면, 무리는 지금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메시아의 시대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여러 가지 입장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오병이어 사건은 주의 만찬을 상징합니다. 교회는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공동체이며, 이 행위를 통해서 종말론적 잔치를 땅에서 경험합니다. 남은 음식이 열두 바구니를 채우고 남은 것처럼 교회를 위한 주의 만찬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주의 만찬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즐길 감격(26:29)에 미리 참여하는 사건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늘나라는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하늘의 잔치입니다. 배고픔은 인격을 가진 인간을 우울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입니다. 무엇보다 식민 통치와 폭압 정치로 궁핍을 피할 수 없던 광야 백성에게 배고픔은 더욱 처절한 현실로 다가옵니다. 이사야 61:1-2에서 주의 종을 통해 실현될 치유와 풍성함의 나라를 예고한 것처럼, 이사야 25:6에서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해 연회를 마련해주실 것을 기대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넓은 광야를 만찬의 자리로 바꿔서 수많은 백성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십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하늘의 잔치와 같습니다. 셋째, 본문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강조합니다. 14:3-21에 나타난 예수님의 능력을 영적으로만 제한하지 말고, 예수님을 생활의 어려움, 즉 신앙적이지 않게 보이는 평상시의 필요에도 반응하시는 분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넷째,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은 제자들을 통해 전달되므로, 교회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우는 일에 긍휼의 마음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물질적인 것으로 사람을 도울 때 부작용이 생길 수 있지만, 교회는 영적인 부분이 중요하다는 논리에 따라 영과 육을 분리해서 경제적 문제로만 간주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천 명을 먹으신 사건의 초점은 예수님의 긍휼과 능력을 통한 기적입니다. 하늘나라의 기적은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련하시는 것이며, 사람들은 이 나라의 감격에 참여하고 혜택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광야까지 온 무리들을 돌려보내자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많은 이들을 배불리 먹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을 갖고, 예수님의 길을 가져 이 땅에서 헐벗고 굶주린 이들의 고달픈 현실과 탄식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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