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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4-01)


세례 요한의 체포와 죽음

마태복음 14장 1-12절


사람들은 죄악을 지적당할 때,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먼저는 충고를 듣고서 겸손하게 회개하는지, 아니면 어리석게 더 큰 불의를 저지르는지 오판을 낳기도 합니다. 죄악 속에서 살다 보면 두려움에 쫓기고 자신을 정당화시키려 더 큰 죄를 범합니다. 더 큰 실수하지 않으려면 항상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 고향에서의 배척에 이어 세례 요한의 죽음과 관련한 자세한 정보가 이어집니다. 평소 헤롯 왕가의 부정과 불법을 꼬집었던 세례 요한이 마침내 투옥됩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딸 실로메에게 무모하고 어리석은 맹세 합니다. 그녀는 어머니 헤로디아의 간교한 뜻에 간교한 뜻에 따라 결국 세례 요한의 참수형을 끌어냅니다. 선지자가 부패한 왕실의 잔치에 조롱거리가 되어 죽습니다.

 

세례 요한의 체포(1-5)

사람들은 진리보다 여론을 따라가기가 쉽습니다. 옳은 것보다도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것을 더 안전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당대에 유행이나 상식 그리고 지지받는 것들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런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잘못이라고 주장한 사람을 불편해합니다. 헤롯에게는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께서 그런 존재였습니다.

 

1구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3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5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1-5)

 

마태는 고향 나사렛에서의 배척 이야기를 분봉왕 헤롯의 세례 요한 참수 사건과 연결합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본문 역시 세례 요한도 환영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 헤롯의 예수님에 대한 반응(1-2)

 

헤롯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신하들에게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아마도 예수님과 요한의 메시지가 같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자신이 죽인 요한으로 착각한 것은, 그가 요한을 얼마나 위협적인 인물로 생각했는지 가늠하게 합니다.

헤롯에게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요한과 예수님으로부터 나타난 ‘권능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2)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다시 나타났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헤롯이 자신이 행했던 일들에 대해서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2) 세례 요한의 죽음 과정(3-5)

 

마태는 세례 요한을 헤롯에 의해 어떻게 죽였는지 설명합니다. 요한은 말로만 주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도 예수님께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가 형제 빌립의 아내와 결혼한 문제를 지적했기 때문에 헤롯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4). 요한은 유대 광야의 동쪽에 있으면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에(요한복음 1:28), 요단강 동쪽인 베레아를 담당했던 헤롯 안티파스(4:12; 19:1)는 이곳에서 요한을 체포했습니다. 요한은 헤롯이 첫 아내(아레타스의 딸)와 이혼을 한 문제나 아내를 여러 명 두는 문제보다도 형제의 아내를 취한 문제를 지적했습니다(참조, 레 18:16; 20:21; 요세푸스, 고대사 17.341). 하나님께서는 형제의 아내를 범하는 것을 크게 지적하셨습니다.

 

‘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는 네 형제의 하체니라’(레 18:16)

‘누구든지 그이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의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에게 자식이 없으리라’(레 20:21)

 

만일 요한이 샴마이 학파의 결혼에 대한 해석처럼 엄격한 입장을 견지했다면 음행한 연고 없이 왕이 이혼하고 결혼한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됐을 것입니다.

 

요세푸스는 세례 요한이 백성을 선동한 것으로 체포됐다고 기록하는데(고대사 118.118-119), 왕의 재혼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행위를 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통치를 반대하고 백성을 선동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헤롯은 자신의 권위를 훼손한 어떤 행위도 용납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주도한 세례 운동 자체를 정치적 위협으로 느꼈을 것이기 때문에, 이혼과 재혼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요한의 전반적인 활동 자체를 저지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헤롯은 요한을 죽이려고 했지만,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백성의 눈을 두려워해서 정치적인 부담을 안고서 당장은 실행하지 못했습니다(11:9, 21:26). 그는 하나님의 율법이나 뜻에 따라서 산 사람이 아니라 백성을 함부로 하면서 그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요한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의 세례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드디어 헤롯에게 기회가 왔을 때 요한은 죽게 되고, 예수님도 종교지도자들의 손에 죽게 됩니다(16:21; 17:33; 26:4).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본 것은 정확한 판단입니다(21:26). 요한은 선지자이므로, 고향과 자기 집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운명을 겪습니다(13:57). 특히 5절의 핵심 용어는 ‘죽이려 하는 것’과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핍박을 받거나 죽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두 용어의 결합은 구약에서 살해당한 선지자들의 운명을 떠올리며 마태복음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5:12; 17:12; 21:33-41; 22:3-6; 23:29-36).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시대의 조류에 편승해서 그 시대가 좋아하는 말, 듣고 싶어 하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특히 헤롯과 같은 고위층 사람들을 축복하고 그들의 성공을 응원하는 소리를 내기 쉽습니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마태복음은 이렇게 번영을 약속하고 지원하는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 사람들을 멸망의 길, 넓은 길로 초대하는 사람으로 꾸짖습니다(예, 7:21-23). 세례 요한으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것을 알았지만, 소신껏 발언하다가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선지자적 사명을 부여받은 교회도 시대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반대로 교회가 권력과 밀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스스로 선지자적 기능을 놓아버리겠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좁은 문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목소리를 내는 선지자의 길은 번영을 추구하는 시대에는 배척당하기 쉽지만, 이런 사명을 수행할 때 사람들이 교회의 소리를 두려워합니다. 듣기는 싫지만 옳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움을 품습니다. 우리 시대의 사역자는 교회를 향하여, 교회는 시대를 향하여 선지자적 메시지를 전할 용기가 절실합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6-12)

세상에 속한 권력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 큰 권력 앞에서 눈치를 보는 존재가 세상 권력자들입니다. 헤롯 또한 아무 미약한 지도자일 뿐입니다. 그는 자기 세 치 혀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어리석은 지도자일 뿐입니다.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무고한 선지자를 죽이기로 합니다.

 

6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8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10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11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12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6-12)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지만 아주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절대자라고 생각한 헤롯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요한은 투옥된 상태에서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을 맞았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갈릴리의 유력 인사들 앞에서 축하의 춤을 추었습니다(6). 요세푸스는 딸의 이름이 살로메라는 정보를 제공합니다(고대사 18.5.4). 살로메는 고관대작들에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했습니다(참조, 마가복음 6:21). 남성들이 즐기는 연회에 참여하는 여성은 주로 성적인 유희를 제공하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살로메가 춤을 춘 것은 매우 부적절했습니다. 이는 헤롯 가문의 여성들이 성적으로 문란했고 부도덕한 사실, 즉 헤롯 가문과 당시 궁중의 낮은 도덕 수준을 반영합니다. 헤롯은 자신이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헤롯은 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맹세로 약속합니다(7). 마가복음 6:23에서 헤롯은 ‘나라의 절반이라도 줄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립니다.

 

7절과 8절 사이에는 마가복음 6:24-25의 이야기가 빠져 있습니다. 마가에 따르면 딸은 모친에게 가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모친은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도록 하고 딸은 급히 왕에게 가서 그대로 간청합니다. 딸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요한의 머리를 요구합니다. 이는 자신의 결혼을 비판한 요한을 죽이려고 헤로디아가 시킨 일이었습니다.

쟁반은 잔치의 음식을 담는 용도였을 것입니다. 머리는 전쟁에서 승리한 증거로 잘랐으며(고대사 18.115), 헤로디아는 요한이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확인할 용도로 참수형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특히 잔치에서 처형을 집행하는 것은 잔인함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고대사 13.380). 헤롯은 백성의 반응을 염려했지만 맹세한 것 때문에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령합니다(9). 헤롯은 사람을 보내서 옥에 있는 요한을 참수했습니다. 10절은 요한이 갇히고 참수형을 당한 감옥이 왕궁에서 멀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딸은 요한의 머리를 직접 들고 자기 어머니에게 전달합니다. 

마태는 헤로디아의 딸을 소녀로 묘사합니다(9:24-25). 소녀라는 단어는 피가 흐르는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어머니에게 가져다주는 행동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헤롯은 정식 재판 절차도 없이 요한을 처형한다. 헤로디아는 자신을 비판한 요한에게 복수했습니다.

 

요한이 죽고 나서 요한의 제자들(9:14; 11:2)이 시체를 매장했습니다(2). 마태는 ‘몸’을 가리키는 ‘소마’가 아니라 시체를 가리키는 ‘프토마’를 사용합니다. 요세푸스는 동일한 용어를 로마 제국의 폭력에 희생당한, 굶주려 죽은 수천 명의 시체를 위해 사용했습니다(유대전쟁사 5.570).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알린 장면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됩니다. 1절에서 헤롯이 예수님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면, 1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요한을 죽인) 헤롯에 대한 보고를 받으십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선생을 매장하고 나서 예수님을 찾아간 것은 요한과 예수님의 운명이 서로 연결된다는 사실, 곧 요한과 예수님의 연대성을 의미합니다. 두 인물이 연결되지 않는데도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올 리는 없습니다.

선지자 요한의 운명은 예수님의 운명을 알리는 전조입니다. 예수님 역시 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자들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마태는 요한과 예수님의 운명을 다음과 같이 문학적으로 병치시키고 있습니다. 첫째, 요한은 체포됐고(14:3) 그를 죽인 책임은 헤롯에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체포됐고(21:46; 27:2) 예수님께서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은 빌라도에게 있습니다. 둘째, 해로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는 백성을 두려워하고(14:5),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는 백성을 두려워합니다(21:46). 셋째, 헤롯은 다른 사람의 요구로 마지못해 요한을 죽이고(14:6-11), 빌라도는 다른 사람들의 사형 요구를 받아들입니다(27:11-26). 넷째, 요한은 제자들에 의해(14:12), 예수님께서는 제자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묻힙니다(27:57-61). 이와 같이, 요한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고난과 죽음을 향한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이 시간에도 요한과 예수님처럼 고난의 길을 가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의를 위해 사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은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세상에 온통 악이 반복되고 성행하고 이긴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말씀으로 그 세상을 고발하는 아들의 일갈도 멈추지 않습니다. 악한 권력자들을 두렵게 한 요한의 후예입니다. 누가 알아주고 있지 않고 잊힌들 어떻습니까! 시원한 국물 맛 내고 사라지는 멸치도 근사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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