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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3-03)

 

 


알곡과 가라지 비유

마태복음 13장 18-30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부분은 자신은 다윗이지 골리앗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악인은 언제나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고, 자신이 누군가를 힘들게 하는 악인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습니다. 피해자인 줄만 알았는데 가해자임을 깨달은 경험이 있습니까?

 

  • 전반부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3-8)에 대한 해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뿌려졌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는 좋은 마음 상태를 해설하십니다. 이어서 24-30절은 가라지의 비유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원인을 우주적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해설(18-23)

한 장소에서 같이 말씀을 듣는 것은 공통적일 수 있지만 반응이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제대로 들었는지의 여부는 열매 맺히는 과정과 결과로 나타납니다. 제자라고 해서 모두 같은 수준은 아니며, 깨닫는 정도에 따라 맺히는 열매도 다릅니다. 좋은 제자는 성장할수록 더 깊이 말씀을 깨닫고 더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과거의 경험에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깨닫는 자들은 더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18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18-23)

 

예수의 하늘나라 사역에 동참해온 제자들은 이 비유를 듣기 전에 깊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께서 놀랍고 충격 적인 기적과 말씀으로 활동하셨지만 사람들의 적대감이 커져갔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급성장할 것 같던 하나님의 일이 퇴보한다고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해설로 바른 눈과 귀로 현재와 미래를 정확하게 분석하게 도와주십니다.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회의에 빠지거나 낙심하는 사람에게 올바른 시각을 갖도록 돕습니다.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깨닫는 사람이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밭두렁 옆에 떨어진 씨를 새들이 먹어버린 것(4)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19). 마귀는 씨를 훔쳐간 새에 비유됩니다. 사탄이 빼앗아 가버리는 씨가 뿌려진 땅은 밭두렁입니다.

19절에서 씨가 그 사람의 마음에 뿌려진 것을 고려할 때, 씨가 뿌려진 장소는 밭두렁과 같은 마음입니다. 씨를 빼앗기는 현상은 예수께서 드러내신 선포가 불충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듣는 자의 완악과 듣기를 거부하는 태도 때문입니다(참조, 13:13-15; 11:21,23: 12:41-42),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사탄이 가져가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사탄이 방해하기 때문이지만 책임은 사탄이 아니라 땅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좋은 땅의 경우에는 사탄에게 말씀을 뺏기지 않기 때문에 밭두렁의 마음은 사탄 때문에 말씀이 자라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20절에서의 사람은 돌투성이 땅입니다. 이런 사람은 처음에는 하늘나라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지만(참조. 데살로니가전서 1:6),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못해 환난이나 핍박(5:10-12; 10:23, 23:34)이 오면 넘어집니다. ‘화난’(θλιψις)은 사람을 누르는 고통(7:14), 특히 예수 때문에 받는 고통을 가리킵니다(5:10,11,12,44; 10:23; 23:34). 마태는 환난을 종말이 오기 전에 겪을 핍박이나 종말론적인 시련에서 오는 고통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합니다(7:14). 하늘나라의 말씀은 예수께서 전하시는 것이므로, 이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는 공격이 따르기 마련인데, 돌투성이의 마음은 말씀 때문에 잠시 기쁨이 생겼으나 곧 닥치는 환난을 견디지 못합니다.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현재적인 환난이 오면 넘어지기도 하고, 마지막 날에 올 환난을 견디지 못해서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핍박은 예수의 말씀 때문에 받는 것이므로, 이런 사람은 말씀 때문에 오는 시련을 통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말씀 때문에 즉시 무너져버립니다(24:9-10), 세 번째 땅의 경우에 땅은 씨가 자라기에 좋은 것 같았으나,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자라는 것을 막아버리는 요소가 생깁니다. 가시덤불의 땅은 말씀을 듣지만, 이 시대(13:39,40,49; 24:3; 28:20)의 염려와 부의 속임이 씨를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부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현재와 미래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다고 확신을 주지만, 이는 속임수입니다(예, 잠언 11:28; 23:4-5), 네 번째 토양, 곧 좋은 땅에 씨가 뿌려진 자는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입니다(23). 제자들의 정체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 깨닫는 것입니다(15:10; 16:12; 17:13). 이해는 반드시 행함 연결되기에, 예수님을 통해 이해한 것은 행위로 입증됩니다.

 

씨 뿌리는 자 비유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땅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었으나 깨닫지 못해 열매 맺지 못하는 땅(밭두렁, 돌투성이, 가시덤블)과 깨닫고 열매 맺는 땅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늘나라가 왔다고 해서 모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종류의 사람들은 모두 말씀을 들었지만 앞의 세 가지 땅은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한 반면에 좋은 땅은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깨닫지 못한 이유는 예수의 비유에 반응하지 않았고, 메시아 사역을 보고도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말씀을 깨닫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열매를 맺는 자는 구원받은 상태를 증명합니다. 바른 이해는 열매로 입증됩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이해와 달리 거짓 선지자들은 나름대로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이해했다고 확신했지만, 그들의 열매는 그들의 이해가 잘못된 것임을 입증했습니다(7:16-23).

둘째, 비유의 일차적인 의도는 하늘나라의 비밀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은 왜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늘나라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하므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으라’고 하십니다.

셋째, 하늘나라의 사역이 라는 관점에서, 제자들은 하늘나라의 열매가 맺히지 않더라도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사역이 비록 귀한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행위로 보이거나 결실이 없어서 실패처럼 보일 수 있지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늘나라는 좋은 토양을 통해서 좋은 결실을 맺고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결실의 양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비유의 본래 의도, 곧 열매 맺지 못하는 땅과 열매 맺는 땅의 ‘대조’라는 주제를 놓칠 수 있습니다. 마태의 예수님은 ‘열매의 양’이 아니라 ‘열매 자체’에 관심을 두십니다. 이 점을 명확하게 인식한 다음에, 결실의 차이를 제자도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제자 또는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은 열매를 맺는 것(21:41)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의 열매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반응과 직결됩니다.

 

가라지의 비유(24-30)

말씀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건 쉽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단단히 마음을 무장하지 않아 유혹에 금방 빠져버리거나, 마음의 뿌리가 없어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금방 넘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 말씀이 아닌 세상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다. 말씀을 통해 세상의 일이 잘 풀리고 재물을 얻거나 지위와 명성을 얻게 되리라는 사고방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따라가더라도 그 궁극적인 목적은 말씀에 나타난 뜻을 행동으로 옮기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24-30)

 

가라지의 비유(13:24-30)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처럼 예수에 대한 반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에, 가라지의 비유는 마귀의 역할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번 비유는 앞의 비유와 마찬가지 로 씨를 뿌리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주제 역시 ‘하늘나라’와 관련이 있습니다. 좋은 씨는 밀(25)로서 식량을 제공합니다. 사람들이 자고 있는 동안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이삭이 패고 열매가 생기면서 밀 속에 섞여 있던 가라지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27). 종들은 가라지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이는 선한 일을 시작한 곳에 악한 요소가 섞여 있는 것을 목격하고 깜짝 놀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상황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부정 적인 분위기가 열매를 맺는 결과로 반전된 정반대입니다. 아마도 종들은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놀라운 양의 결실을 맺은 것처럼 이번에는 가라지가 생각보다 많이 생겨났기 때문에 놀란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은 가라지와 관련해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28). 그는 원수가 가라지의 씨를 뿌렸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종들은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는지 묻습니다. ‘뽑다’(συλλέγιο)는 ‘모으다’를 뜻하며 ‘모으다’는 최후 심판을 위해 악인들을 모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마태복음 7:16; 13:28-30, 40이하, 48). 주인은 가라지의 존재는 위협이 되지만, 가라지를 뽑으려 할 때 곡식을 뽑을 수도 있는 실제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미 많은 양의 가라지 뿌리가 밀 뿌리와 엉킨 상태며, 일반적으로 가라지 뿌리가 밀 뿌리보다 훨씬 강해서 좋은 곡식이 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인은 곡식을 보호할 목적으로 가라지를 그대로 두라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추수 때는 밀이 열매를 맺은 시기여서 가라지가 더 이상 열매 맺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여기서 추수는 심판의 의미를 갖고 있고 말합니다. 여기서 추수는 심판의의미를 갖고 있습니다(요엘 3:13; 호세아 6:11; 예레미야 51:33; 요한계시록 14:15-16).

가라지의 비유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처럼 하늘나라의 성장에 대한 설명입니다. 비유는 하늘나라가 시작된 이후부터 최후 심판, 곧 완성되기 전까지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합니다. 열심히 씨를 뿌렸으나 생각보다 결실이 맺히지 않는 원인은 땅뿐만 아니라 사탄 때 일입니다. 하늘나라가 활동하는 동안 사탄도 활동합니다. 의인들이 활동하는 동안 악인들도 활동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백성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사탄의 존재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늘나라 백성은 사람들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사탄의 원리를 파악하고 기도해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분열된 교회 한쪽에서 ‘양과 염소로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양이라는 확신입니다. 교회에 상처 받았다는 사람은 넘치는데 상처를 주었다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말씀을 읽기보다 말씀이 자신을 읽어내는 묵상 경험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마태복음(13-0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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