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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2-04)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2장 31-37절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성령의 사역은 제대로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데살로니가전서 5:19-22)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변에 일어난 일들이 주의 성령의 역사인지 잘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주의 영이 하신 일인데도 자신의 신학적인 관점과 다르다고 거절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또 모든 영적인 현상을 성령께서 하신 것으로 추종한 것도 안 됩니다.

 

  •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축사 사역을 바알세불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비난한 것에 대한 예수님의 논평입니다. 하늘나라를 보여주는 예수님의 사역을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결과가 다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31-32)

성령의 역사를 보고도 마귀의 일로 취급한 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의도적인 모독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마귀의 일로 선언했으니, ‘자신이 걸터앉은 나뭇가지를 톱으로 잘라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이전에 스스로 사함 받을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31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1-32)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을 통한 예수님의 축사(逐邪) 행위를 바알세불의 힘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한 행위를 신성모독이라고 평가하십니다(31).

모든 죄와 신성모독은 용서되지만, 성령에 대한 신성모독은 용서되지 않습니다. 죄 용서는 예수님께서 행하러 오신 목적인데도 불구하고(9:2,3,5,6,8), 성령을 대항한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32절은 31절의 의미를 더욱 강조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가리키는 인자에 대해 반대하더라도 회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성령에 대항하는 자는 이 시대와 오는 시대에서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32). ‘이 시대나 오는 시대’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의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인자가 성령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다거나 덜 중요하다는 의미는 당연히 아닙니다. 인자를 모독하는 부분에 대해서,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즉 인자의 지상 사역으로 시간을 제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자를 거부하는 죄는 회개와 용서의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거부하는 것은 진리를 의도적으로, 악의적으로 지속적으로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성령의 능력에 의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의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사역과 주장을 거부하는/모독하는 죄는 성령을 거부하는 죄로 발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탄의 나라를 궤멸하는 역사적 현장에 있으며 느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악의적으로 대하기 때문에 이 나라를 부정합니다. 12:28과 연결해 보면, 축사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기 때문에, 성령을 통한 사역을 모독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운동 전체를 반대하는 것이고 결국 예수님을 통해서 용서받는 기회를 얻지 못하므로 구원의 혜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계획에서(1:21; 26:28) 성령의 역할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그 만큼 예수님을 통한 구원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음(33-35)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반대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말과 글은 자신의 존재의 증거물들입니다.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찬 이의 입에서 선한 말이 나올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내면의 썩은 것들을 말로 토해냈습니다. 상투적인 자기 종교 언어는 무미건조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33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33-35)

 

예수님께서는 30-31절의 내용을 바리새인들에게 적용하기 위해서 나무가 좋으면 그 나무의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나무의 열매도 나쁘다는 사실을 언급하십니다. 이 내용은 일반 상식이며 지혜 문헌의 가르침입니다(시락서 27:6). 1세기 당시에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을 가장 좋은 나무로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악하거나 죄 용서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된 정체는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에 의해 결정되기보다 자신의 실제 행위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나무와 열매의 관계로 강조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행위를 바알세불에 의한 것이 라고 비난한 모습은 그들이 나쁜 나무임을 드러낸 증거입니다(7:16-19).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행위는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수준이지만 성령의 사역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열매입니다. 예수와 그의 사역을 악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은 나쁜 나무임을 증명하며, 나쁜 나무인 바리새인들이 맺은 나쁜 열매는 성령에 대한 모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인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손들아’라며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사역을 사탄의 일이라고 비웃은 그들이야말로 ‘사탄’ 또는 ‘마귀’를 상징하는 뱀의 후손들임을 일깨우십니다. 이들의 운명은 지옥에 던져지는 것입니다(23:33), ‘독사’로 번역하는 ‘에키드나’는 독이 있는 뱀을 가리킵니다. 독사의 특징은 ‘독’이기에, 독사는 내뿜는 독으로 상대방을 마비시키고 죽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악한 독으로 예수님을 공격해서 죽이려고 하며, 이런 특징은 35절에서 ‘악한 것’을 낸다는 그림과 연결됩니다. 말하자면, 이들이 파괴하는 말을 내뱉는 것은 그 정체가 독사이기 때문입니다.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들은 악하기 때문에 선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34절 후반절을 직역하면 ‘입이 마음에서 넘쳐나는 것을 말한다.’입니다. ‘넘침’(περίσσευμα)은 신약에서 이곳과 마가복음 8:8; 누가복음 6:45; 고린도후서 8:14에서 사용됩니다. 마음은 인격의 중심입니다(5:8).

마음, 곧 사람의 중심에 가득 찬 것이 넘쳐 날 때 열려서 입을 통해서 말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급한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바꾸는 것입니다. 존재를 바꾸는 것입니다. 이 일은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는 자마다 마음이 새롭게 됩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이런 갱신의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35절에도 비슷한 논리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선한 보고에서 선한 것 들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보고에서 악한 것들을 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쌓여 있는 선의 창고에서 선한 말이 쌓여 있는 악의 창고에서 악한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악한 창고가 성령의 사역을 부정하는 자들을 가리킨다면, 선한 보물을 내는 선한 사람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35절과 13:52은 동일한 어록일 가능성이 크며, 서기관인 제자 또는 마태 자신을 가리킬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έκ του θησαυρου)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는 선한 보물을 가진 자로서 선한 것들을 냅니다.

성령의 사역을 거부하는 사람은 열매 없는 인생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모습으로 종교 생활을 한다고 해도 종의 회복하는 사역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열매는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으로는 산상설교에서 이 행위를 설명했습니다. 사람의 실제 모습은 특히 언어생활로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반드시 뒤따릅니다.

 

무익한 말에 대한 결과(36-37)

심판의 근는 우리의 말입니다. 말이 나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돌고 돌아 결국 자신을 심판합니다. 자신의 말로 구원 받을 수도 있고,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말의 값은 곧 존재 값입니다. 무심코 한 모든 말들의 값을 톡톡히 치를 것입니다.

 

3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36-37)

 

36-37절은 31-37절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말과 관련된 일반적 인 원리를 언급합니다. 사람들은 내뱉은 모든 무익한 말에 대해 계산해야 할 것입니다(36). 아르고스(άργός)는 ‘나태한’, ‘고용되지 않은’의 뜻인데, 쓸데없고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 말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공적으로는 지혜롭고 부지런한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쓸데없고 무익한 말을 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무익한 말은 산상설교에 나온 열매가 없는 행위(7:15-20)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쁜 나무에서 그들의 무익한 말이 나온 것입니다. 나쁜 나무가 심판을 받는 것처럼, 나쁜 나무와 같은 사람이 내뱉은 말도 결산을 해야 할 시기가 올 것입니다. 회계하는 일은 청지기가 주인이 맡긴 사업에 대해 언젠가 실행해야 하는 책무입니다. 자신이 내뱉은 무익한 말에 대해 반드시 회계를 해야 할 것이라는 원리에 따라서, 예수님의 치유와 축귀 사역을 사탄의 힘으로 한 것이 라고 평가한 그들의 말은 평가를 받게 됩니다(37).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나서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말한 사람의 운명은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정죄를 받는 것으로 갈리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경고를 ‘너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36-37절의 경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제한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해야 합니다. 언어는 그 사람의 존재를 드러내기에 가장 쉬운 평가 수단입니다. 독설로 상처를 입히고 회개하는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이런 악한 소리를 개선의 여지없이 지속적으로 내뱉는 사람은 심각하게 자신의 정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는 독한 언어가 그 사람의 특징이라면 나쁜 나무, 악이 쌓인 창고일 수 있습니다.


갈수록 말과 글이 힘겹습니다. 존재의 가벼움이 여과 없이 드러납니다. 교회의 속 빈 언어가 오늘날 교회의 속내를 보여줍니다. 속이 꽉 차 있지 못하니 말이 풍요로울 리 없습니다. 기형도 시인도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존재와 삶을 먼저 다듬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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