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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2-02)


생명을 주시고 정의를 행하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12장 14-21절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만왕의 왕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보란 듯이 이방나라 특히 로마 제국을 꺾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높이 존경받는 백성들로 세울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종의 모습을 한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종인 당신은 오늘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박하지 못했던 바리새인들은 회당을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고쳐주십니다. 마태는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사역을 고난 받는 종에 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42:1-4)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위험에 빠진 하나님의 종(14-16)

예수님의 말씀은 탁월했고,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귀신, 바람, 파도 그리고 각종 질병이 떠났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바로 그 메시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혁명가처럼 요란스럽게 떠들지 않았습니다. 황소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14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5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14-16)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에 대해 더 이상 논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이 사건을 목격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모의하기 시작합니다. 이 사실은 여러 가지로 충격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죽일 음모(14)

왜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합당한 질문을 던지고 치유의 권세를 보여 그들의 말문을 닫게 말들어버리신 것은 바리새인들이 유지해 온 권위 체계에 대한 도전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 해석에 기초해서 매고 푸는 권세를 행사했으므로, 율법의 해석 또는 율법의 의미를 가르치는 일은 그들에게 독점적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참조 16:18-19). 안식일 사건을 계기로 권위에 위협을 느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다른 이슈로 죽일 모의를 짜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안식일 사건은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든 계기가 됐습니다.

(2) 병 고치심과 경고(15-16)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아시고 물러나십니다(15; 예 4:12; 14:13; 15:21; 16:5). 물러나신 것은 피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더 많은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15절의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회당이 아닌 곳이지만 요일이 바뀐 암시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더 많은 사람들을 치유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인 긍휼을 실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치유하고 나서 자신을 드러내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16).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위를 선전하기 위해서 치유하지 않으셨습니다. 19절과 연결해 보면 예수님께서 침묵을 요구하신 것은, 주의 종의 겸손을 의미하고 승리주의와 반대되는 예수님의 성품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불필요한 소동을 피하고, 사람들의 잘못된 요구와 소망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병 고치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메시아를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이 잘못된 동기에 의해서 따르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이방 사람들을 위해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아직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민족들의 소망인 하나님의 종(17-21)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보라’고 외치십니다. 모든 종교적 위선과 죄악에 대한 심판이 이방에까지 알려질 것입니다.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셨던 예수님, 하나님께서 택한 종의 이름을 이방인들이 바라볼 것입니다. 숨겨졌던 것을 환히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모략입니다.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17-21)

마태는 안식일에 일어난 두 사건과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사건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기 위함이라고 선언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기초로 그를 여호와의 종으로 묘사하며,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사야 42:1-4에 기록된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이 모형론적으로 성취됐음을 강조합니다.

(1) 하나님께서 택한 종(17-18)

마태가 구약의 긴 구절을 인용한 목적은 단지 예수님께서 물러나신 이유나 침묵하라고 요구하신 이유를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안식일 치유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의 전체 모습을 묘사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종 기독론’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한 종의 역할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에서 ‘심판’으로 번역한 ‘그리스시’는 ‘정의’에 가깝습니다. 억압받고 무거운 짐에 눌린 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정의의 실현입니다. 또한 본문의 심판은 무질서 또는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것이기에, 이 용어는 잘못된 질서를 바르게 회복하는 것, 곧 불의의 현 시대에 정의를 실현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열방을 향한 복음이므로(예, 1:1: 2:1-12; 3:9; 4:15-16; 8:5-13; 28:18-20), 회복을 가져온 메시아를 이방 나라들이 고대하게 됩니다(참조, 이사야 51:4): ‘내가 내 공의(미쉬파트)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그리고 성령의 임함은 선택 받은 종이 메시아적 사역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목적일 뿐만 아니라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회복하는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치유(축사 포함)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회복의 일을 행하시고(8-9장의 기적) 12장에서 안식일에 대해 해석하시고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을 통해 심판 곧 정의가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성령의 부어짐과 관련된 예수님의 증언은 안식일의 치유와 16절의 치유와 같은 활동을 두고 사탄의 일이라고 비난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2) 겸손의 종(19-21)

19-20절은 예수님께서 종으로 보이신 낮아짐과 겸손을 묘사합니다. 싸우지 않고 외치지 않는 모습은 평화의 활동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싸우지 않으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전혀 논쟁도 하지 않고 싸움도 벌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규례와 관련해서 논쟁을 벌였으나 그것은 다른 생명을 회복하고 변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거리에서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16절의 명령처럼 자신을 숨기는 속성, 곧 겸손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아짐과 겸손으로 정의를 선포하십니다(11:29). 그리고 정의로 승리할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이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처럼 주변부의 사람들, 한쪽 손 마른 사람과 같이 바리새인들의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대하고 회복하시는 메시아입니다(11:28-30). 20절을 ‘그는 정의로 승리할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부러뜨리지 않으며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회복, 곧 정의의 실현이 승리할 때까지 회복의 일을 하십니다. 종의 정의, 곧 평화와 긍휼과 겸손을 통한 활동은 결국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민족주의적인 열망이나 제국주의적인 폭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사역을 수행함으로써 정의의 승리를 실현한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의 회복 사역은 모든 민족이 갈망하는 것입니다(21).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이 이방 민족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마태는 이런 유대인들의 생각을 넘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열방의 소망이 될 것을 알립니다. 맛소라 본문의 이사야 42:4에 있는 ‘토라’를 70인역은 ‘이름’(όνομα)으로 번역합니다. 그 이름은 이사야 42장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회복의 나라를 가져오는 종입니다. 이 종은 임마누엘로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1:21,23).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는 일은 이제 이사야가 예언한 종을 통해서 일어납니다(참조 8:11-12; 21:43; 24:14; 28:19), 열방을 초대하는 선교는 하늘나라의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제자들을 통해 이어질 것입니다(24:14; 28:19-20).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아들/종입니다. 그는 무질서의 세상을 질서로 회복하는 일을 실현하기 위해 순종하는 종입니다. 아들은 종으로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합니다. 이미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나왔던 그의 정체가 고난을 통해서 회복하는 활동으로 입증됩니다. 회복의 관점에서, 바리새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쪽 손 마른 자를 회복하시는 것은 안식일에 양을 구출하는 것이며(12:11-12), 이 행위는 종의 역할을 성취하는 것입니다(12:18-21=이사야 42:14, 참조 이사야 49:5). 회복하는 종의 사역은 한쪽 손 마른 자뿐만 아니라 12:22에서 맹인을 치유하는 사건으로 입증될 것입니다(이사야 42:7; 참조. 이사야 29:18; 35:5,6; 42:16,18,19; 43:8). 결국 아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종을 통해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종의 역할을 수행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아들/종이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은 평화와 긍휼과 겸손입니다. 종의 낮아짐을 통해서 사람들은 회복되며, 이 회복은 열방의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가져오시는 질서의 회복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열방으로 향하므로, 열방이 예수님을 통한 회복을 기대합니다.

본문의 기독론은 교회론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와 긍휼과 겸손으로 승리하셨는데, 교회는 어떻게 승리할 것입니까? 하늘나라는 무력과 오만으로 오지 않았고 그런 식으로 확장하는 나라가 아닌데, 교회는 어떻게 내부와 외부를 향해 하늘나라를 구현할 것입니까? 예수님의 공동체는 오직 하나의 방식으로만 승리하도록 지시 받습니다. 아들이면서 종으로 낮아진 예수님의 삶, 세상에서 무가치 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종의 삶, 바로 이것이 교회가 승리를 위해 실천해야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메시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가 승리할 때까지 인생들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불도 끄지 않고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스스로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주께 나아오는 자는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믿음 하나로 수년째 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진실을 감추려는 계략을 간파하고 그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모략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자신을 나타내려는 욕망을 보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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