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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1-03)


세례 요한이 선포한 새 시대

마태복음 11장 20-30절


결혼식이나 대사가 있을 때, 잔치에 초대하는 청첩장이나 초대장을 보냅니다. 그 초대장대로 가면 잔치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당연히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천국의 초대장입니다. 이 초대장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거절하는 사람은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베푼 일에 대해서 적절히 반응하지 않는 마을들과 가버나움을 정죄하시고 자신의 사역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사람들의 의외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과 이에 대한 운명, 제자들의 반응과 이에 대한 운명을 대조적으로 설명합니다. 권능을 경험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도시를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어린이와 같은 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며, 사람들을 안식으로 초대하십니다.

 

회개하지 않은 영혼들(20-24)

진정한 ‘안식(安息)’은 주님과 만남에서 시작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삶에 지친 인생에게 진정한 안식을 선물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 내게로 오라’고 명하십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쉼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20-24)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가장 많은 행했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꾸짖기 시작하셨습니다. 기적을 베푸신 갈릴리 도시들-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능의 행위에 대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능력의 행위에 대해 예수님께 기대하신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요구한 것으로, 하늘나라가 임할 때 사람들이 보여야 하는 반응입니다(3:2; 4:17). 만일 이방 도시인 두로와 시돈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다면, 그들은 요나의 메시지에 반응했던 니느웨 사람들처럼,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은 문제는 소돔이 멸망한 이유보다 더 심각하여 가버나움의 불길한 운명이 예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하늘나라 사역의 본부로 삼았고(마 4:13; 9:1), 많은 기적을 이곳에서 행하셨습니다(8:5-17; 9:1-34). 이는 이방의 갈릴리에 빛이 비친 것으로 예언의 성취를 의미했습니다(4:14-16; 9:1-2). 가버나움은 음부에 보내질 것입니다(23). 은유적으로 우주에서 가장 낮은 곳인 음부는 교만한 대상의 운명을 묘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운명을 위해 사용한 본문은 이사야 14:13-15입니다. 이 본문은 바벨론 왕(느부갓네살)의 운명으로 설명하는데, 구약 본문 역시 하늘과 음부를 수직적으로 배치해서 하늘에까지 올라가려고 할 만큼 교만한 바벨론이 음부(스올)에 떨어지게 될 운명을 강조합니다. 바벨론 왕은 하늘을 상징하는 높은 산에 오르려고 멸망했으나 깊은 구덩이로 떨어집니다. 가버나움은 바벨론 왕의 운명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을 사용하십니다(24). 유대인들은 소돔 땅을 가장 악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경고를 목적으로 소돔을 자주 활용했습니다. 유다서에서 소돔 사람들과 타락한 천사들은 창조 질서를 거스른 죄를 지은 것으로 불 심판을 받은 것으로 묘사됩니다(참조. 23). 메시아를 만난 특권을 가진 가버나움의 죄는 소돔의 죄보다 더 큽니다. 가버나움(과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기적과 복음을 경험한 특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교만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아는 데 실패했고, 높은 교만의 정반대 개념인 낮은 음부가 운명이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도래했기 때문에, 이 나라를 가지고 온 메시아에게 반응하지 않는 자들의 운명은 음부에 있는 자들과 같게 될 것입니다. 특권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기대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가버나움은 메시아를 드러내고 하늘나라의 도래를 알리기 위해 가장 많은 기적을 경험하고 복음을 듣는 특권을 얻었으나, 회개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버나움은 하늘나라의 현존을 경험한 특권을 누렸지만,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몰락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운명과 초대(25-30)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친 사람들에게 쉼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며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자고 하십니다. 참된 쉼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주님께 맡겨야 쉼이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 배우고 도움을 받아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이 주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5-30)

예수님께서는 악하기를 소문난 세 도시 두로와 시돈 그리고 소돔과 비교하면서, 이 도시들이 당한 심판보다 더 크고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의 운명과 달리 제자들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25). 하나님께서 계시를 슬기롭고 똑똑한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십니다. 이는 아버지와의 친밀한 신뢰 관계를 의미하고 하나님과의 예수님만의 독특하고 유일한 관계를 내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뜻하는 이 모든 것을 아들을 통해 제자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이 어떤 것이든 잘 파악하고, 어린아이들은 어려운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과 같이 자신들의 지식이나 선입견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깨닫게 하십니다(예/18:14). 예수님께서는 소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깨닫게 된 것을 아버지의 기쁜 뜻으로 이해하십니다(26). 마태는 ‘보좌 앞의 회의’, 즉 ‘코람데오’를 묘사하려고 ‘당신 앞’을 사용합니다. ‘앞’은 하늘 법정(또는 회의)의 공간적 장면을 암시한다면, 본문에서 가리키는 ‘아버지 앞의 뜻’은 하늘 법정(회의)에서 선포된, 예정된 하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정된 목적 또는 뜻을 전달하는 것은(마 11:26) 예수님의 선재성을 의미합니다. 아들은 하늘에 숨겨진 ‘모든 지식’을 선언할 수 있는 모든 권세를 받았습니다(참조, 단 7:13-14). 아들은 하늘(법정 또는 회의)에 선재한 아들이요, 하늘의 하나님 옆에 앉아 있던 신적 지혜이기에, 하늘의 뜻을 전하는 예수님의 권위는 절대적이기 때문에,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수 없습니다. 제자 공동체는 어린아이들로서 이 지식을 알기에 구원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친밀하고 유일한 관계를 언급하고 나서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28). ‘내게로 오라’는 지혜를 향한 초대이며, 초대의 결과는 29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두 마리의 짐승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목에 설치하는 도구로 은유적으로는 순종, 섬김 등을 뜻합니다. 토라의 멍에(시락서 51:26)라는 표현을 고려하면, 예수님의 멍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돕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왜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까? 첫째, 예수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친절한 성품이 아니라 겸손한 태도를 가리킵니다(5:5).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도 온유로 표현됩니다(21:5). 이 단어는 ‘낮아진’ 예수님의 삶을 가리킵니다. 낮아진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수치의 정점인 십자가에 달리는 길을 가십니다. ‘낮아진’(개역개정 ‘온유한’)은 이어서 나오는 ‘겸손한’과 같은 의미입니다. 구약의 몇 본문에는 ‘온유한’과 ‘겸손한’이 함께 등장합니다(이사야 26:6; 스바냐 3:12). ‘겸손한’은 낮춘다는 의미입니다. 18:4의 ‘낮춘다’는 수치를 겪는다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짐은 그가 겪은 수치를 의미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멍에는 좋고 그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쉬운’은 주인의 배려를 의미하는 ‘좋은’, ‘적합한 등의 뜻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제자의 인생에 가장 적합한 것이고 긍휼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짐은 실제로는 가볍지 않기 때문에(16:24), ‘가볍다’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의 삶은 낮아지고 희생하신 예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짐은 쉽게 느껴집니다. 또한 예수님의 멍에(가르침)는 회복을 목적으로 주시는 것이기에 가볍습니다. 그의 쉼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행함으로써 얻는 만족이며, 종말론적으로는 영원한 나라에서 안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히 4:3). 특히 희생하시는 예수님과의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얻게 되는 안식은 12:1-14에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하셔서 우리 개별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낮아지고(온유하고) 낮아져서(겸손해서) 십자가에서 온갖 수치를 당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인생에서 지치고 해답이 보이지 않아 좌절할 때 유일하게 안식할 곳은 예수님의 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초청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이끄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요즘 자신의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입니까? 무겁게 그리고 무섭게 짓누르며 안심과 쉼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짐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안식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우리의 모든 짐뿐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맡기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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