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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1-01)


메시아를 향해 질문하는 세례 요한

마태복음 11장 1-10절


신뢰하던 사람을 신뢰할 수 없을 때나 믿었던 사람을 의심하게 될 때, 우리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의심에서 믿음으로 돌이키는 첫째 단계는 자신의 곤경을 주 예수께 직접 가져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자세가 옳은 것인지 질문하는 것은 전혀 죄가 아닙니다.

 

이제 11-12장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증거 했던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사역에 대해 직접적으로 보질 못했습니다. 보내 예수님께 오실 메시아가 맞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듣고 본 그대로 전하라고 하신 후에 세례 요한 사역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사역에 대한 요약(1)

제자는 스승을 따르고 그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이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스승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면서 그 스승을 닮아가는 이들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훈련하여 추수를 위해 보내시면서 천국 복음을 어떻게 증거하고 전할 것인지, 그리고 수반되는 어려움과 핍박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준비합니다.

 

1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1)

 

본 절은 예수님께서 10장의 제자 파송 강화를 마무리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불러 권능을 주시며, 천국 사역에서 마주할 다양한 현실들을 생생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을 위한 가르침을 마치고 또다시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 여러 동네로 떠나가십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제자 파송과 사역 내용이 소개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6:12-13)와 누가복음(9:6)는 짧게나마 그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보고합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분리되어 홀로 갈릴리 마을들에 가서 사역하신 것으로 두 번째 강화를 매듭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연약한 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또한 그 제자들도 예수님과 사역을 동일하게 진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사역이 마무리 되어 갈 때, 새로운 이야기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이제 새로운 무대(11-12장)를 준비하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세례 요한의 두 가지 질문(2-6)

전쟁터에 나가서 죽었다고 통지가 왔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면, 대부분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들 ○○이 맞냐?’라고 여러 차례 묻고 확인하고 또 확인할 것입니다. 본문에도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사역을 듣고서, 다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메시아에 대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2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2-6)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은 요단강이었습니다. 그 후 요한의 투옥 사실이 갑자기 소개됩니다(4:12). 투옥 사유는 요한이 헤롯 왕가의 스캔들을 꼬집어 헤롯의 눈엣가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요한은 서사 무대에서 점점 사라지고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후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 나와 금식에 대한 문제를 질문합니다(9:14).

본문에서는 감옥에 투옥되어 있던 세례 요한의 공식적인 반응을 소개합니다. 그는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펼친 그간의 사역을 들었습니다.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에는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는 그 메시아임이 사역을 통해 확증되었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 일은 가르침, 복음 전파, 그리고 병고침을 통해 천국을 가져오는 일입니다. 요한이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들이었습니다.

 

(1) 요한의 질문들(2-3)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요한이 생각하고 기대한 메시아 사역은 그가 했던 ‘주의 길을 예배하는 회개와 세례 사역’에 나타나 있습니다. 즉 그는 메시아가 와서 손에 키를 들고 타작해 알곡은 들이고 쭉정이는 영원한 불에 태우는 구원과 심판의 사역을 하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3:12). 하지만 감옥에서 들은 예수님의 사역은 그 기대와 사뭇 달랐습니다. 요한은 임박한 종말과 메시아의 심판의 사역에 무게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두 번째 질문으로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덧붙입니다. 요한은 자기가 확신한 메시아 사역을 간절히 기대하는 심정에서 이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마태는 지금 요한의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다시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대답(4-6)

예수님께서는 직답 대신 현답(賢答)을 주십니다. 우선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지금까지 ‘듣고 보는 것’을 그대로 전하라고 하십니다. 순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듣고)과 곧이어 등장했던 예수님의 사역(보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앞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금식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을 볼 때, 그들은 예수님과 오랫동안 동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지금까지 본 것을 여섯 가지 일들로 말씀해주십니다. 전부 이사야의 예언을 반영합니다(순서대로 사 29:18; 35:6; 25:4; 29:18; 26:19; 61:1). 세례 요한도 등장할 때, 마태복음 3:3에서 이사야 40:3의 예언을 인용한 바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련의 일들이 전부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아의 사역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더욱 확신을 심어주시려고 자신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되다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세례 요한의 실족을 염려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현장의 제자들에게 둘려주시는 말씀이고, 궁극적으로 마태복음을 읽는 모든 성도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 실족하는 사람들은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장차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는 이 말씀이 더욱 실감나게 들릴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대답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참수로 순교를 당했을 것입니다(14:1-12).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7-10)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를 보려고 광야로 나갔으면서도 그가 선포한 메시아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관심사에 사로잡혀 말씀 앞에 나아갈 때 그 말씀이 가리키는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7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7-10)

 

요한의 의심과 솔직한 질문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의 신앙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뒤에 모인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 말씀하십니다.

 

(1) 광야의 세례 요한(7-9)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자리를 떠난 후,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향해 요한과 관련해 말씀을 좀 더 이어가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향해 ‘너희는 무엇을 보기 위해 광야에 나갔더냐?’라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 질문은 세 번 반복되는 수사적 질문입니다(7,8,9). 질문을 받은 무리 중에는 요한이 광야의 소리로 사역할 당시 회개의 세례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갔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람들이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3:5). 그때 그 감정을 다시 들춰내듯 질문하십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광야로 몰려갔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질문에 또 다른 질문으로 답변하는 수사적 형식으로 무리의 마음을 꿰뚫으십니다. 질문의 답은 모두 ‘아니다’로 유도됩니다. 먼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나갔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서 ‘갈대’가 누구 또는 무엇을 지칭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대개 ‘요한’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 이미지의 정반대가 요한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우유부단함을 상징합니다. 요한은 왕실 권력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죄를 지적했습니다. 그의 삶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정결한 삶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무리가 광야로 나가 바로 그 요한을 본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과 답변에 나오는 은유는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은 왕궁에 있다고 하시며 대상을 구체화해주십니다. 향락과 권력에 심취한 채 화려한 삶을 영위하는 자들은 광야가 아닌 왕실에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헤롯 안티파스가 있습니다. 광야의 요한은 그와 정반대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3:4)이었던 금욕적 삶을 살았습니다. 무리가 광야에서 마주했던 인물은 광야의 걸인과 같은 초췌한 몰골의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질문과 함께 말씀하시는 비유는 ‘선지자’입니다. 무리에게 선지자를 보러 간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이번에는 긍정적인 대답 ‘맞습니다’를 기대합니다. 모두가 요한을 선지자로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압제와 부패한 성전 유대교로부터 당하는 착취는 서민 유대인 정서에 해방을 가져올 메시아를 향한 열망을 부풀게 했습니다. 개중에 ‘혹 세례 요한이 메시아는 아닐까’라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뒤섞인 기대와 열망이 그들을 광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가리켜 ‘너희가 기대한 선지자보다 훨씬 나은 선지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선지자보다 낫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의미를 분명히 하려고 말라기 3:1을 인용하십니다. 말라기 본문은 하나님의 1인칭 시점으로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 할’ 것으로 소개하는 반면, 예수님의 인용은 같은 1인칭 시점이지만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고 소개됩니다. 메시아인 자신을 강조하시고 또 요한이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그’ 선지자임을 강조하십니다. 그의 사명은 유일하며 특별합니다. 그래서 다른 선지자보다 훨씬 빼어납니다. 오랜 역사적 침묵을 깨고 등장한 선지자, 오랜 역사적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 빛, 오랜 역사적 부패를 씻기 위해 하늘에서 온 정결한 소리로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그 선지자입니다. 요한은 천국의 도래를 가장 먼저 알았던, 세상 권력과 화려함에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메시지의 발화자였습니다. 그가 바로 빈들에서 외치는 광야의 소리입니다. 비록 불의한 권력에 의해 옥에 갇혀 있지만, 그의 사명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입니다. 요한은 역사적 대변곡점에 우뚝 서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일에 모든 생애를 불태운 선지자입니다.

 

(2) 선지자 중 최고 선지자(10)

요한이 예수님께서 ‘오실 그 메시아’(3)인지 묻고,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메시아 앞에 올 바로 ‘그 선지자’라고 답을 주신 셈입니다. 즉, 요한이 ‘그 선지자’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실 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을 소망으로 변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러 오신 구약 성경의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하였습니다.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메시아를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이로 생각했고, 세례 요한 역시 마태복음 3장 11-12절에 그리스도를 불과 성령으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심판의 세례를 베푸는 자로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회를 변혁하거나 심판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거나 병자를 고치는 이를 주로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 대한 이런 의문은 당연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한 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이사야 35장 5-6절을 인용해서 성실하게 대답하여 주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누구든지 자신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말씀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그 권위에 도전하다가 심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심판을 받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찬 안식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믿는 모든 자가 하나님 나라에 평안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정서적 사회적 경제적 영적인 모든 절망을 치유하시고 소망으로 바꾸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런 사항 속에서도 주님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오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 안에서 하늘나라의 소망을 발견하시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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