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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1-02)


새 시대의 도래를 선포한 세례 요한

마태복음 11장 11-19절


천국이 이 땅에 임하였지만, 모두 그 나라의 백성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눈앞에 천국을 두고도 놓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참된 생명의 길이 있음에도 굳이 사망의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천국 백성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요한의 정체를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 그가 온 것이 구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직설적으로 묘사하십니다. 그의 시대적 위치와 역할이 도드라집니다. 세례 요한은 ‘그 엘리야’이고 예수님께서는 ‘오실 그 메시아’입니다. 이렇게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역사적 무대에서 운명적으로 묶여 있습니다. 이 세대는 그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의 정체(11-15)

천국 백성은 비판보다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비판하고 흠잡기에 골몰하느라, 구원의 주를 눈앞에 두고도 놓쳤습니다. 세례 요한의 금식을 귀신 들림으로, 교제하는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합니다. 구원은 진리에 반응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1-15)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는 표현인 ‘아멘(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로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은 여자들이 낳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이 말은 요한의 인물됨이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드러내는 역할에 있어서 크다는 뜻입니다.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요한의 정체를 언급하십니다. 요한은 말라기 3:1을 성취하는 역할을 맡아 백성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그들을 앞서 갑니다. 이 사역은 요한을 옛 시대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로 만듭니다(눅 7:28).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위대합니다. 옛 시대와 새 시대 사이의 차이는 매우 커서 새 시대에서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큽니다. 요한은 약속 혹은 기대의 시대와 성취의 새 시대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합니다. 그는 옛 시대의 마지막 인물이면서 새 시대를 시작하는 메시아의 선구자입니다.  구원사의 관점에서 이제 하늘나라가 11:5의 설명처럼 강력하게 도래했고 5:3-10의 가르침처럼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의 복을 누리는 시대가 왔기 때문에 이 나라에 들어와서 구원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요한보다 더 큽니다.

12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폭력을 가하는 자들이 그것을 강제로 뺏고 있다.’ 첫째, 하늘나라는 요한 이래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고난은 하늘나라가 온 표시입니다. 요한의 때에 하늘나라는 임해 있으나 폭력적인 저항을 만납니다. 폭력은 헤롯 안티파스와 유대인들이 요한을 반대해서 보인 모습입니다요한이 폭력에 목숨을 잃은 것은 요한의 시대에 이미 하늘나라가 임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이 폭력을 경험할 뿐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폭력적인 자들이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늘나라를 공격하는 일은 요한의 때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오늘날 교회 시대에도 일어납니다. 둘째,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언한 요한이 고난을 받은 사건은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언하고, 그 나라를 가져온 메시아의 고난을 예고합니다. 셋째, 본 단락이 요한의 정체에 대한 내용임을 고려할 때, 요한의 고난선지자의 신분을 증명합니다. 마지막 선지자이면서 엘리야의 역할을 수행한 요한은 역시 선배들의 고난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신분입니다.

요한은 모든 선지자들과 율법, 곧 구약이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13절에서 언급한 선지자들이 전한 예언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마지막 선지자인 요한은 바로 다시 올 엘리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34). 요한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확인해주는 표시입니다. 요한의 정체를 선지자와 엘리야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요한이 가리키는 대상인 예수님의 정체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 받는 요한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돌아온 엘리야인 요한은 새 시대의 도래를 선언했지만, 옛 시대의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고난을 겪습니다. 고난’, ‘선지자’, ‘엘리야’, ‘하늘나라의 선포는 서로 연결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선포한 것과 고난을 겪는 것을 통해서 그의 정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한편, 요한이 돌아온 엘리야라면 이스라엘이 보여야 하는 반은 회개인데, 그들은 요한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요한을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된 엘리야로 알았다면, 이 엘리야가 올 때 보여야 할 회개로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폭력으로 갇히자 실망한 사람들의 시야가 흐려져서 요한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결국 예수님에 대한 오해로 이어집니다. 마태의 독자들 역시 ‘고난’ 때문에 하늘나라를 이해하는 시야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고난이 하늘나라의 핵심적인 요소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은 선지자이기 때문에 폭력에 의한 고난을 경험합니다. 요한의 고통은 그가 선지자임을 증명합니다. 무엇보다도 12절은 하늘나라의 특징이 고난임을 알립니다.

 

예수님과 요한의 정체(16-19)

천국 백성은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하며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영광으로는 천국 백성의 영광을 묘사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행복으로는 천국 백성의 행복을 표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 백성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16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6-19)

 

이 시대는 요한과 예수님을 모두 거절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심술을 부르면서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시장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을 부르는 아이들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16). 마태복음에서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 세대는 예수님과 요한을 반대한 자들입니다(12:39-42; 16:4; 17:17; 23:36; 24:34). 요한이 하늘나라를 선포했으므로 이들이 요한을 거부한 것은 하늘나라를 거부했다는 뜻입니다. 이 세대는 시장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에 비유됩니다. 시장은 공공장소를 가리킵니다. 한쪽 아이들은 다른 쪽 친구들이 춤을 추도록 피리를 연주하고, 울도록 애곡했습니다(17). 전자는 결혼 놀이를, 후자는 장례식 놀이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친구들에게 춤과 애통을 요구하는 쪽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17-19절에서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어느 쪽 아이들에 해당합니까? 첫째, 견해는 요한과 예수님을 놀이를 요청하는 쪽, 이 세대를 놀이에 반응하지 않는 아이들로 보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고 애곡한 아이들은 예수님과 요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리를 연주해도(구원의 즐거움을 상징함) 반응하지 않고, 요한이 애곡을 해도(요한의 수도적인 삶을 상징함) 이 세대는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둘째 견해는 피리를 연주하고 애곡하는 아이들을 이 세대로 반응하지 않는 아이들을 요한과 예수님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둘째 견해가 적절합니다. 첫째, ‘이 세대’는 ‘부르는 아이들’로서 자신들의 놀이에 참여하지 않는 것에 불평합니다. 당시의 세대는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요한과 예수님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둘째, 아이들 요구한 순서는 ‘피리-춤’과 ‘애곡-울음’이었는데 만일 아이들이 요한과 예수님을 가리킨다면 순서가 요한과 예수님께서 활동한 순서와 정반대합니다. 춤과 울음을 요구한 이 세대는 춤을 추기보다 금욕적인 삶을 산 요한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울기보다 구원의 잔치와 같은 분위기로 반응하는 예수님(9:14-17)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이와 같이 악한 세대는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한과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사람들의 불만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행위로 옳은 것으로 평가 받습니다(19). 문자적으로 지혜가 ‘그녀의 행위들에 의해’ 의롭게 된다고 했을 때(눅 7:35에는 ‘행위’ 대신 자녀들로 나옴), 이 지혜의 행위는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 계획에 따른 행위 혹은 요한과 예수님의 가르침의 결과를 의미할 수 있고, 성육신의 지혜(잠 8:32-33)인 예수님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만일 둘째 견해를 따라 그리스도의 행위를 지혜의 행위로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구약에 나온 지혜입니다. 마태는 19절에서 지혜를 언급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25-30절에서 지하에 반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을 설명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왔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반응하지 않았지만, 지혜인 예수님의 행위는 그를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입증합니다. 예수님께 반응한다는 것,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희망에 예수님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응하는 것이 우선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초청에 응답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했고,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이 땅에 임하게 하려고 수고하셨습니다. 문제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 이 세대였습니다. 이 세대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며 세례를 베풀 때는 미친 사람 취급을 했고,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할 때는 타락한 세속주의자 취급을 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 치지 않는 모습과 같습니다. 결혼식 때 기뻐해 주지 않고, 장례식 때 슬퍼해 주지 않는 사람들처럼, 이 세대도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응답하지 않는 세대를 향하여 주님께서는 여전히 피리를 불고 계십니다. 믿음 있는 자를 찾기 위해 지금도 애절하게 피리를 불고 계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천국을 소개하고 그것에 들어오도록 초청하십니다. 기쁨으로 천국을 받아들릴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 태도를 분명히 하라고 응답을 촉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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