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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2-01)

 


안식일에 주인이신 예수님

마태복음 12장 1-13절


한 성도의 남편이 ‘술 먹지 말라는 말만 안 하면 교회 나갈게요.’라고 말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교회가 어떤 곳인지 짐작이 갑니다. 그에 생각하는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이라기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곳’으로 이해되고 있는 곳입니다. 제자는 금지 명령을 잘 지키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계속적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한 공격이 이어집니다. 본문은 안식일과 관련된 충동을 묘사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하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는 자가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그날을 성취하는 자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안식일에 관한 첫 논쟁(1-8)(∴마가복음 2:23-28; 누가복음 6:1-5)

자신의 성경 지식이 옳을지, 믿고 있는 믿음이 바른 것이 종종 조명해 봐야 합니다. 무조건적으로 고집 부리면서 자신만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성경적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 신앙과 행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격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잘못됐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남을 죽이되, 그 안식일의 성취자를 죽이려고 합니다.

1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1-8)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계속적으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안식일에 대한 문제입니다. 안식일은 10계명에 네 번째 계명입니다.

(1) 안식일 문제 제기(1-2)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과 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응입니다.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그 자체로 율법을 반한 행위는 아이였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추수행위가 된다면 율법에 반하는 것이 됩니다. 안식일에 대한 계명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핵심적인 계명입니다. 안식일에 계명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안식에 나라입니다. ‘안식’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이 창조주로서 경배를 받으실 때 찾아옵니다. 사람이 또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이 더불어 함께 살아갈 때 안식이 찾아옵니다. 안식을 누리는 조건을 성경은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안식’은 ‘생명’과 동의어입니다. 안식법은 할례와 음식법으로 가장 확실하게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면 안식일을 준수하는 민족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2) 예수님의 답변(3-5)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와 안식일에 밀밭을 통과하실 때, 그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본 바리새파 사람들은 보았습니다. 이것을 비판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당시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안식일에 일한 것은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심각한 위법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읽지 못했느냐?’로 시작하면서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 제자들의 행위에는 문제가 없다고 논증하십니다. 첫째, 예수님은 다윗이 예루살렘 남쪽에 있던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을 방문한 사건을 근거로 제시하십니다(삼상 21:1-7). 다윗은 하나님의 집, 곧 성막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고 안식일에 마련된 진설병을 허락도 없이 먹었습니다(레 24:5-9). 왜 이 사건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됩니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다윗은 율법의 권위 있는 해석자로서 인간의 간절한 필요를 위해서는 진설병이라고 해도 목숨을 위해 먹을 수 있다고 해석했고(참조, 행 13:22), 다윗의 아들이면서 다윗보다 더 큰 예수님은 다윗의 행위를 다윗의 해석 원리로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다윗의 해석 원리를 보면, 생명을 위협하는 배고픔은 안식일의 요구보다 앞설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고 온 하늘나라의 특징과 어떤 종류의 하나님의 아들인지 드러내기 위해 다윗을 메시아의 원형으로 사용합니다. 메시아의 원현인 다윗(삼상 7:11-16; 시 110:1)이 생명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앞으로 다가올 메시아의 모습을 알리는 전조와 같습니다. 다윗의 행위는 불법이 아니라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이(탐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언약 관계의 갱신을 보여주는 표시입니다(사 32:6;49:10; 65:13; 참조 58:6-7,10). 둘째,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안식일 규례를 어겼으나 그것은 불법이 아니었습니다(5; 민 28:9). 문제는 과연 제자들이 제사장들과 같은 지위에서 그러한 제사 행위를 했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6절에서 성전과의 관계를 통해서 제자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십니다. 안식일에 성전에서 행하는 일이 허락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인 것처럼, 제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밀을 잘라 먹는 것이 허락된다는 논리입니다. 안식일의 규례가 성전의 규례를 능가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안식일의 규례가 성전보다 더 큰 이를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시고 예수님의 ‘긍휼’은 성전의 제사보다 더 크므로, 제자들은 긍휼의 원리에 따라서 평가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호세아 6:6을 인용해서 바리새인들이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기 때문에 제자들을 정죄한 것이 라고 질책하십니다(7). 긍휼이 제사의 본질이고 긍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면 제자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긍휼은 사람을 향해 동정심을 발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배고픔이 의미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희생시키면서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 긍휼을 배워야 합니다.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호세아 6:6에 근거해서 궁핍한 사람들이 안식일에 음식을 즉시 만들어 먹은 행위는 죄가 아님을 가르치십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채우려고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변호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인자, 곧 자신을 안식일의 주로 선언하십니다. 안식일은 창조에 근거하고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규례이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결코 안식일에 대해서 권위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마치 자신이 창조의 질서 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안식일의 주이신 예수님은 일을 금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당시의 안식일 규례보다 긍휼의 행위가 더 우선된다는 사실을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로서 안식일이 제정된 의도를 정확히 그리고 가장 권위 있는 목소리로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실 수 있는 권위를 갖고 계십니다. 안식일이나 안식일 규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교정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실 뿐 아니라 안식일의 주로서 제자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십니다. 배고픈 제자들은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기 원하는 대상이며, 안식일에 그들이 배고픔을 채운 것은 긍휼을 베풀기 원하시는 뜻이 안식일에 성취된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기 위해 오신 분이며, 긍휼이 안식일의 규례와 성전의 제사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나라의 특징은 제사가 아니라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여러 사안에 대해 답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특정 교파나 교리를 준수하기 위해서 규칙을 세부적으로 세웁니다. 그러나 세칙을 아무리 견고하게 만들어도 인간에 대한 긍휼을 품지 못하면 그런 법은 사람을 정죄하는 데 사용될 뿐입니다. 때로는 건전한 법칙이라고 믿는 것이 성경을 오해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으로 사람을 옥죄는 율법주의적 태도로는 사람이 회복될 수 없습니다. 긍휼이 식은 사람의 날카로운 눈과 논리적인 말은 무서운 칼날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과 교회는 끊임없이 성경을 겸손한 태도로 읽어서 예수님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예수님처럼 긍휼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며 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안식일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고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안식일에 관한 둘째 논쟁(9-13)(∴마가복음 3:1-6; 누가복음 6:6-11)

다른 모든 율법처럼 안식일도 고통스런 인간의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그 고통의 원인인 죄와 욕심에서 인간을 구원하여, 보시기에 참 좋았던 창조의 질서대로 진정한 쉼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손 마른 자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9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9-13)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떠나 그들의 회당으로 가십니다(참조 11:1).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자 고발하려는 사람들이 손 바른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은 안식일을 어기는 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한쪽 손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허락되는지 묻습니다(10).

바리새인들은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상태가 아니라면 이 환저를 치료하는 행위는 안식일의 법에 맞지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들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사건처럼 예수님께서 이 환자도 안식일에 치유하실 것을 예상하고 함정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을 경우를 예로 드십니다. 자신의 양이 구덩이에 빠진 것을 보고도 지나칠 주인은 없습니다(11). ‘않겠느냐?’는 이런 경우에 모든 사람이 양을 글어낸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용법입니다. 특히 가난한 농부에게 단 한 마리의 양만 있었다면 당연히 살려낼 것입니다(참조 사무엘하 12:3).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양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이므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일은 선을 행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12). 안식일에 양을 살려내는 것이 선이라면, 안식일에 생명을 회복하는 일은 당연히 선합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환자에게 손을 뻗도록 명령하는 것으로 치유하십니다(13).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이 쉼을 누리는 복된 날, 억압이 아니라 지친 영혼을 해방하는 날이고 즐거움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긍휼을 베풀어 안식일의 원래 목적과 의미를 성취하시고 유대인들이 왜곡한 안식일을 창조하신 목적이며, 생명을 살리는 일은 언제나 긴급한 일이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날이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곧바로 고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복음의 혜택을 누리는 날에 안식일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안식일은 한 손의 장애로 안식을 누리지 못한 인생이 치유받기에 가장 적합한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므로, 안식일보다 크신 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려고 안식일의 주인을 고발합니다. ‘하지 말이야 할 일’에 사로잡혀 ‘해도 되는 일’의 여백도, ‘해야 하는 일’의 사명도 잃었습니다. 이 모순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우리 손을 주 앞에 내밀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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