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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2-03)


성령을 모독하는 자에 대한 심판

마태복음 12장 22-30절


 

전쟁할 때, 교전국 사이에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 그곳만은 싸우지 않기로 협정한 지역을 ‘중립지역(中立地域)’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탄의 영적인 전투에는 중립지역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탄에게 속하든지 하나님께 속하든지 해야만 합니다. 항상 사탄은 타락한 영적존재이므로 자신을 인간에게 접촉하여 그 사람을 타락시켜서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힘으로 쫓아냈다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힘입어 귀신을 쫓은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고, 성령 모독 죄는 사함을 얻지 못하며, 사람은 심판 날에 자기 말로 의롭다 함과 정죄함을 받는다고 반박 하십니다.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심(22-24)

믿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많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부족해서 또 받은 은혜가 모자라서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모르면서 자신을 믿고, 하나님을 올라서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22그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 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 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22-24)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간 동안 수많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려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남자를 치유하십니다(22). 귀신 들린 자는 눈이 멀고 말을 하지 못합니다(참조. 9:27-31). ‘말을 못하는’은 9:33에 나온 용어로서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는 한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치유하십니다. 문맥의 흐름을 보면, 한 손 마른 자의 치유가 있었고(9-14), 마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으로 밝혔고(15-21), 예수님께서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인생인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십니다(22). 예수님께서는 종으로서 맹인을 치유할 것이라는 이사야 42:7의 역할을 성취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앞 장면과 마찬가지로 22절의 치유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종으로 행하신 사건입니다. 무리는 놀라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아들’은 치유에 이어서 나온 메시아 칭호입니다(9:27). 무엇보다도,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이며, 당시 유대인들이 치유자로 믿었던 솔로몬(-다윗의 아들)보다 더 큰 자입니다. 이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다음 질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약속된 다윗의 아들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것입니까? 아니면 악령의 능력으로 축귀를 행한 사람, 사탄과 한 패거리입니까? 귀신을 쫓아내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을 살려주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이고 다윗의 아들입니다. 복음서에서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와서 사탄의 나라를 궤멸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축사(逐邪) 사건은 다른 치유와 마찬가지로 성경에 약속된 다윗의 아들이 드디어 와서 하늘나라를 실천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치유하는 다윗의 아들로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목적 중 하나는 그를 통해 이 땅에 실현되는 나라가 회복의 나라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한쪽 손 마른 자를 치유한 사건처럼 귀신 들린 자가 회복된 사건 역시 다윗의 아들은 회복을 실현하는 종으로 왔음을 입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지금도 회복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십니다. 교회는 회복의 일에 쓰임 받아야 하며, 회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확장하는 도구가 되지 못하는 교회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의 바알세블 논쟁(25-29)

귀신 들려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 살았으나 즉은 것이나 다름없이 빛과 소리 없이 살아왔던 혼돈의 인생이 빛 되신 예수님. 말씀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빛과 소리를 찾았습니다.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찾았고, 샬롬과 쉼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5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25-29)

본 단락은 22-23절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으로 구성됩니다. 17-21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종이며 평화와 긍휼과 겸손으로 정의를 실현한 종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정체성과 정반대의 평가를 내립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령이 아니라 사탄의 힘을 사용하고, 예수님의 사역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사탄의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이로써 이들의 평가는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축사 사역이 귀신들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으로 한 것이라고 비난합니다(24).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고 서로 분쟁하는 나라나 도시나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25). 사탄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사탄의 힘으로 쫓아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26). 26절에서 바알세불이 사탄으로 바뀝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는 장면은 마치 사탄의 세력 안에서 벌어지는 내전과 같습니다. 사탄은 악의 세력을 통치하는데 통치자가 자기 나라에서 군대를 쫓아낸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자신의 축사가 바알세불의 힘으로 된 것이라면 ‘너희의 아들들’이 행한 축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되물으십니다(27). ‘너희의 아들들’은 유대인들 또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유대 문헌에는 유대인들이 귀신들을 쫓아낸 기록이 나옵니다. 이들의 행위는 하늘나라가 온 증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임함은 예수님을 통한 축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를 통해서 통지하시는 나라이므로, 다윗의 아들인 예수님을 통한 회복의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이 쫓겨난 사건은 하늘나라가 온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28).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성령의 힘으로(눅 11:20에는 ‘하나님의 손가락’) 일어났으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종에게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라는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18; 사 42:1-4; 61:1).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성령의 능력으로 여호와의 종이 회복의 나라를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참조, 사 44:3; 59:21). 여기서 ‘왔다’는 과거형으로 ‘임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행하신 축사 사역을 통해 실제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의 전체 문맥을 고려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셨고(4:17; 10:7), 예수님의 축사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예, 4:24, 10: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메시아적 사역을 하고 있는 그 시대와 영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임함을 보고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적대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강한 자인 사탄이 더 강한 자인 예수님에 의해 결박당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9). 사탄을 결박해야 사탄의 집에서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구원하는 힐을 시작하신 것은 사탄이 결박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의 치유 사건들(12:10-13, 15)과 마찬가지로 축사도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증거입니다. 구원 역사의 측면에서 사탄이 결정적으로 결박되는 시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시는 때이지만, 예수님의 활동으로 사실상 사탄은 결박당하기 시작합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처럼 예수님께서 땅에서 행하신 일(귀신 축출)을 통해서 하늘에 있는 뜻(사탄이 묶이는 것)이 성취됩니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특히 성령(=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예, 사 52:7)를 가지고 온 것은 이사야 61:1-3에서 주의 영이 주의 종에게 임해 희년을 실현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30)

신앙의 중립지대, 완충지대,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서 걸쳐 있을 곳은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반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넘겨주신 것은 우리를 얻으려고 자신의 전부를 주신 사건입니다.

30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하지 않는 자마다 흩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30; 개역개정은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마다 흩어진다’를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로 번역함).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탄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모으신 자들이고 함께하지 않는 자들은 흩어진 자들입니다. ‘흩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승리자가 정복당한 군대를 흩어버리듯이 원수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흩어버린 사건이 구약에 여러 번 묘사됩니다. 특히 마태복음은 앞의 내용에서 예수님을 여호와의 종으로 이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예수님께서 치유하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흩어진 백성(양 떼)을 모으러 오신 것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종의 사명을 떠올리게 하며(사 49:5, 24-25), 이는 양 떼를 모으러 온 종의 사역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회복 혹은 구원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종으로서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러 오셨지만(사 49:5,24-25), 예수님에게 모이지 않으면 종을 통한 회복의 기회를 놓치고 용서 받을 기회를 잃는 비극에 처합니다(마 12:31).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대적하는 편에 서기 때문에 모이는 양 떼가 아니라 흩어지는 양 떼에 속합니다. 29절과 연결해 보면, 예수님은 양떼를 모으려고 사탄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탄의 집을 공격해서 양 떼를 살려내는(=모으는) 예수 편에 서야 하며, 예수께 반응하는 일에 있어서 중간 지대는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영적 전투에서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반대하는 자이며, 자신과 함께 모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라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과 같으며, 예수님의 통치를 받지 않을 때 우리는 결국 귀신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오늘 예수님 편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반대편에 서 있습니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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