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마태복음(10-04)

마태복음(10-04).pdf
0.08MB


예수님의 제자로서 진실한 자세

마태복음 10장 34-42절


당신은 복음의 가치를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소중한 분입니까? 소중한 것의 가치를 모르고,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소중한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소중한 것의 가치를 알고, 마음을 다해 소중히 여길 줄 압니다. 이 시간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임하고 그 나라의 왕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온 목적을 알려주시면서 이에 합당하게 행동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새로운 가족 관계로 정체를 규정하시면서 그 밖의 모든 관계를 상대화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합당하게 행동한 것에 대한 종말론적 결과가 언급됩니다.

 

평화보다 소중한 복음(34-39)

평화만큼 소중한 게 없고, 화목한 가정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평화는 소중하지만, 진정한 평화를 얻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 안에 진정한 평화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4-39)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결과를 알려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정확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을 언급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에 대해 ‘나는 ~하려고 왔다’라는 문장을 세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1) 검을 주시려 온 예수님(35-36)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땅의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십니다(34). 이 구절은 앞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사명을 맡기셨고, 평화의 사람들이 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도래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시대가 온 것이므로 평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가 완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아직’에 기간에는 여전히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 사이에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은 이 땅의 가치관과 충돌을 일으키고 제자들은 고난을 받겠지만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제자들은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5절은 34절의 내용을 구체화하며 검의 이미지를 가정해 적용합니다. 검의 이미지는 38-39절에 있는 핍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오심으로 인해 가족 내 분리가 일어날 것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방식은 당연히 가족과 사회가 생각한 평화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주는 고통을 가슴아프게 느낄 수밖에 없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의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가족만큼은 사명을 수행하는 자신을 이해하고 축복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족의 반대는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 사이에서 충돌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제자들은 가족의 원수가 되지만, 예수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입니다.

 

(2) 제자들의 우선권(37-39)

예수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 예수님보다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기서도 예수님께서는 우선권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합당한’을 반복하여 강조하시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통과 수치를 상징했으므로 제자로 사는 길은 위험하고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상태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찾는 자는 멸망할 것이며 자기의 목숨을 멸하는 자는 목숨을 찾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 때문에’ 또는 ‘나를 위하여’를 사용해서 제자가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을 언급하십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본문에서도 고난의 이유가 예수님 때문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은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는 이 신비를 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덕에 명성을 얻으려 하거나 공동체에서 유익을 얻으려는 태도는 제자의 길이 아닙니다. 사람의 운명은 땅에서의 삶을 끝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종말론적 삶이 있습니다. 땅에서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최후 심판 이후의 목숨을 얻고 예수님을 첫째 목적에 두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찾는 사람은 비판받을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가 얻을 상(40-42)

제자들의 말과 삶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삶이고,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현현이기 때문에,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선지자나 의인이나 소자의 모습으로 복음을 전할 때 그 말씀을 믿고 제자들을 환대하면, 하나님께서는 냉수 한 그릇의 호의라도 잊지 않고 가차주실 것입니다.

 

40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0-42)

 

지금까지의 말씀을 통해 세상의 차가운 거절과 그것에 직면할 제자들이 치러야 할 제자도에 초점이 있었다면, 마지막 부분은 제자들이 경험할 긍정적인 반응으로 마무리 됩니다.

 

(1)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4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4절과 같이 40절도 예수님과 파송을 받은 제자들 또는 선지자들의 일체성 내지 동질성을 보여줍니다.

40절에서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라는 개념이 나타납니다. 제자들을 환영함으로써 그들이 선포하고 보여주는 하늘나라의 도래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임마누엘’을 맛보게 됩니다. 파송 받은 자들이 머물러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평화가 주어집니다.

 

(2) 영접한 자에게 줄 상급(41-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얻을 것입니다.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얻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선지자와 의인을 짝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선지자와 의인은 비슷한 기능을 갖고 있는 직분입니다. 의인은 완벽을 추구하는 제자들을 일컫는 표현이며 그들의 의는 마지막 날에 들어날 것입니다. 선지자는 선포하는 사람이며 10장에서 선포되는 반복되는 소재입니다. 제자들은 과거 선지자들과 같은 사명을 맡은 위치에 있으며 선지자와 의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입니다. 제자들을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은 그들을 선지자의 지위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의 상은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하는 결과로 하나님께 받게 될 보상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제자들을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로 그렇게 하신 것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를 가진 신분이었지만, 실제 현실은 소자로서 냉수 한잔이 절실한 신세가 됩니다. 유대교에서 소자들은 사회적으로 연약한 상태의 사람들 그리고 미성숙한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어린아이나 소자는 사회적 개념으로 낮은 지위에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시에 사회적 관점에서 작은 자들, 낮은 자들이었습니다. 42절의 ‘소자들’은 예수님의 파송을 받아 순회하며 전도하는 제자들 또는 선교자들을 포함합니다.

40-42절은 제자들의 신분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의미를 전달합니다. 첫째, 보냄받은 자에게 보낸 자의 권위가 주어집니다. 보냄받은 자를 영접하면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보냄 받은 자들을 위해 작은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하나님의 포상을 받게 됩니다. 둘째, 그만큼 그리스도의 존재 혹은 삶 자체가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0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는 강화에는 제자들이 사명을 수행한 내용이 없습니다. 즉 어떻게 전도했는지 보고 내용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은 제자들의 존재 자체가 전도 혹은 선교의 핵심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땅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 되므로 성도의 일거수일투족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마음, 특히 긍휼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아서 따라 행하는 제자들을 통해서 전파됩니다.

셋째, 권위를 부여받은 제자들의 모습은 소자와 같습니다. 선지자, 의인과 같은 직위를 가졌으나 사람들의 눈에는 소자로 보입니다. 예수님 당시 초기 교회에서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제자들은 냉수 한잔이 절실할 정도로 낮은 삶을 살았습니다. 역설적으로 작아진 제자는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통로입니다. 본문을 확대한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소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가져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 모습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길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제자들을 소자가 아니라 큰 자로 세우셨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낮아진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드러납니다.

넷째, 제자는 환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줄 뿐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 배후에 또는 그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냉수 한잔을 받은 제자는 냉수 한잔을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제자는 긍휼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스쳐 지나가는 소자를 향해 긍휼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제자를 영접한 사람은 자제의 보상을 받게 되며, 제자 역시 소자를 환대라는 마음으로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하게 됩니다. 긍휼이 순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자신을 부인할 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욕망과 죄의 본질로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사랑을 못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진 희생과 섬김의 길을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더욱 잘 따르기 위해서 버리고 내려놓아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도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걷기 위해 자신의 삶 가운데 자기 부인이 필요한 부분은 무엇인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매우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