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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8-01)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

마태복음 18장 1-10절


인간의 비교의식은 타락한 본성에 따른 불가피한 것입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안에서도 존재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원한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 묻습니다. 인간적 동기에서 비롯된 불순한 질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고 계십니까?

 

 

  • 본문에서 제자들은 하늘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큰 지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의 존재(2-5)와 하늘의 장면(10)으로 대답하십니다.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지옥의 실상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6-9).

  

하늘나라에서 큰 자(1-4)

천국을 소유한 자들은 영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의를 갈망하고 핍박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사람들입니다. 주의 도우심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예수님의 인격으로 변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면, 아직까지 우리는 참 복음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4)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큽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하늘나라는 왕적인 메시아인 예수님께서 다스리실 지상 왕국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의 주권이 회복된 나라, 이방의 제국이 물러가고 세리와 죄인들이 심판을 받아 청결하게 된 나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권위의 체계를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새로운 나라의 권력 순위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지 궁금해 합니다. 특히 그들의 질문은 바로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와 관련이 있습니다(17:24-27).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금을 내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 땅의 왕들이 세금을 면제받듯이 하늘나라 왕의 ‘아들들’은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25-26).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후 예수님께서 통치하실 나라에서 차지하게 될 구체적인 서열을 알고 싶어한 것입니다(20:26-2; 23:11-1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을 듣고 그들이 배워야 할 모습으로 제시하려고 어린 아이 한 명을 그 제자들 가운데 세우십니다(2). ‘돌이켜서 …처럼 되라’(3)는 말씀은 제자가 의도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를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누가 큰지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 누가 큰 자인지에 대한 대답은 4절에서 나옵니다. 3절과 4절은 개념상 연결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원리(3)는 하늘나라에서 ‘큰 자’의 개념(4)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존재 혹은 구원과 관현이 있다면, 하늘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은 실존 혹은 생활의 관련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원리는 하늘나라에서의 생활 원리에도 적용됩니다. 어린 아이처럼 돼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뿐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큽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할 때 얻는 것이기에, 어린아이처럼 의존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 의존하여 사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크다는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은 ‘너희’인 제자들이며, 제자들은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가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신 약속(16:1)이나 17장에서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26)고 말씀하신 내용은 제자들의 신분이 하늘나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증명합니다. 또한 1장 이후 19:28에서 제자들은 종말론적인 하늘나라에서 ‘열두 보좌에’ 앉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따라서 넓은 문맥을 고려하면, 본문에서는 제자들의 신분이나 구원을 빼앗길 수 있다는 입장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간 제자는 이후에도 그런 자세로 살아야 하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낮추는 태도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갔다(‘소금’)고 해서 어린아이의 태도(‘소금의 맛’)를 버리는 삶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하늘 아버지께만 의존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 있으며, 종말론적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어린아이처럼 낮은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이 원칙은 또한 타인을 위해 또는 길을 헤매는 사람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삶으로(18:12-13) 나타나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되는 삶은 수직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 의존하는 상태와 절대 낮아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며, 수평적으로는 공동체나 사회에서 수치를 경험하는 삶으로까지 낮아지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노해하면서도 타인에 대해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며, 은혜로운 교회는 서로를 겸손히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태도와 운명(5-9)

성도들은 세상의 권세에 대한 누림을 갈망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또 어린아이처럼 이 세상에서 보잘것없고 힘없는 듯이 보이는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갖고, 디 힘이 있을수록 자발적으로 이런 삶을 추구하지 않으면 저절로 영이 가난해 질 수 있습니다.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5-9)

 

어린아이의 존재는 5-9절에서도 제자도의 교훈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과 영접하지 않는 것에 따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반응하실 것을 알려주십니다. 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할뿐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된 사람을 영접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5절은 작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람을 선지자, 의인, 제자로 영접하라는 명령이 담긴 10:40-42의 내용과 병행을 이룹니다(특히 10:40). 가장 낮은 위치에 처한 제자는 가장 높으신 예수님을 대표하므로, 낮은 자를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6절의 실족시키는 것은 5절의 영접하는 것과 대조됩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은 죄를 짓게 만들어버리는 행동이며, 심지어 복음을 믿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시키는 죄에 대한 형벌은 나귀가 돌리는 무거운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 속으로 끝없이 끌려 내려가는 것보다 더 무겁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자를 실족시키는 것은 지옥에 던져지는 죄이기 때문입니다(8). 6-7절이 타인을, 특히 작은 자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가해자의 입장에 있는 자들에게 경고했다면, 8-9절은 세상에서 오는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는 타인을 공격하는 것과 달리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과 손이라는 신체 기관이 실족시키는 도구가 되면 그런 기관 없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발과 손과 눈은 세상과 접촉하는 신체 기관을 대표합니다. 사람은 세상과 접촉하는 신체 기관을 통해서 끊임없이 유혹을 받게 됩니다. 8-9절은 죄에 대해 사람들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자신의 관점에서는 매우 작은 일, 아무것도 아닌 문제로 보일지라도, 죄의 결과는 가해자가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피해야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6-7절의 메시지를 듣는 대상은 3인칭 반면에 8-9의 메시지를 듣는 대상은 2인칭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유혹에 이끌릴 위험에 처한 사람은 제자 또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작게 여기기 쉬운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기 위해 지옥을 사용하십니다. 말하자면, 마태복음에서 지옥의 경고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는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무시당하기 쉬운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을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땅의 작은 자들, 하늘에서 있는 천사들(10)

가장 작은 자, 낮은 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무시해도 좋을 조건을 가진 자를 세상처럼 똑같이 대하면서 실족하게 하는 자는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과 자신을 동일히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10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10)

 

1절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4절이고 간접적인 대답은 10-14절이므로, 우리는 10-14절의 핵신은 하늘의 장면이며, 헤매는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12-13)가 하늘 장면 사이에 들어가 있습니다. 목자는 하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사람과 하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늘 장면(10)에서 작은 자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하늘에서 항상 뵙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수호천사들로 해석합니다. 수호천사는 유대교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개념이며, ‘그들의 천사들’이기 때문에 작은 자들을 지키는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절은 땅에 있는 천사들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천사들’로서 수호천사의 개념 이상입니다. 이들은 하늘궁정(또는 하늘회의, 하늘법정)의 구성원들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 앞에 서서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하고 하나님의 평결을 받기 위해 기다립니다. 특짛 작은 자를 실족시킨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늘에서 전하고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립니다.

작은 자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은 자들 편에 서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땅의 장면을 정확히 보고받으시고, 적절한 때에 무섭게 반응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작은 자를 무시할 것이 아니라, 12-13절의 비유에서 설명하는 내용처럼 작은 자의 회복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인간의 갈등은, 높아지고 지배하는 자리를 탐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욕심은 타인을 업신여기거나 하찮게 여기는 시선을 갖게 되고, 교만해져 함부로 행동하게 됩니다. 천국은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섬김으로 행하는 자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은 어떠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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