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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8-02)


잃어버릴 수 있는 한 영혼에 대한 관심

마태복음 18장 11-20절


오늘날은 영혼을 귀히 여기지 않는 시대입니다. 파라오의 나라처럼, 생산성에 기여하지 않는 이를 배제하고 무관심하게 대합니다. 교회도 작은 자를 무시하고 큰 자 중심으로 운영합니다. 그러나 소외된 이들을 향한 주님의 관심은 무한하십니다. 재자 된 교회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합니까?

  

  • 본문에서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12-13), 하늘의 장면(14), 공동체를 위한 훈육(15-20)으로 구성됩니다. 길을 헤매는 양과 같은 사람을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교회는 회복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양이 고회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15-20절의 지침을 따라야 합니다.

  

헤매는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12-13)

하나님께서는 작은 자들이 넘어지거나 길을 잃지 않고 모두 천국에 이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 사랑하시는 작은 자들을 다양한 이유로 실족하게 하는 죄는 실로 클 수밖에 없습니다. 비방이든 외면이든 우리의 사랑에서 누군가를 제외시킬 권리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12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12-13)

 

12-13절의 비유는 하늘의 장면을 묘사하는 10, 14절 안에 들어 있습니다. 독자는 하늘의 장면과 연결해서 비유를 해석해야 합니다. 12절의 ‘플라나오(πλαναω)’는 ‘잃다’보다는 ‘헤매다’에 가깝습니다. 양이 완전히 길을 잃은 상태는 아닙니다. 이어지는 15-20절과 18장 전체의 흐름을 볼 때 길을 헤매는 양은 어떤 문제를 일으켰습니다(12). 길을 헤매는 한 마리의 양은 남아 있는 아흔아홉 마리에 비하면 가치가 낮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안에 얌전히 있는 양 무리에 비하면 이탈한 한 마리의 가치는 더욱 떨어집니다. 그런데도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양에 대한 묘사와 양처럼 길을 헤매는 것에 대한 표현도 구약에 많이 등장합니다(예, 시편 23편; 시편 119:176; 이사야 53:6; 예레미야 50:6).

비유에서 목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목자는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을 떠올리게 합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 나선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양을 찾는 목자의 모습은 고난의 종의 모습과 같습니다(이사야 53:3,6). 14절은 목자가 한 마리 양을 찾는 이유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으로 밝힙니다. 하늘에 있는 뜻을 실현하기 위해 목자는 땅에 내려와 무가치해 보이는 한 마리 양을 찾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14)

공동체는 용서와 권면을 통해 잘못된 형제들에 단 한 명라도 돌아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일에는 신중하면서도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형제의 잘못에 눈감아서는 안 되며 또한 무책임하게 폭로해서도 안 됩니다. 잘못된 사람도 존중 받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권고하고, 두세 증인과 함께 강력히 설득하고 그마저도 안 되면 공동체 전체의 권위를 빌어 설득하는 절차를 제시해야만 합니다.

 

14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점에서 목자는 제자들의 모본입니다. 18:1-10의 설명에서 살펴본 격과 같이, 누가 하늘나라에서 큰지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4절이고, 10-14절은 간접적인 대답입니다. 누가 하늘나라에서 큰 자입니까? 하늘나라에는 제자들이 기대하는 그런 큰 바는 없지만, 분명히 큰 자는 있습니다. 양을 찾는 목자가 바로 하늘나라에서 큰 자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 자인 목자는 양을 찾기 위해 헌신하며, 그 좌정에서 고난의 종처럼 낮아집니다. 예수님은 이런 목자의 모습으로 제자들을 회복하셨고,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고난 받는 목자의 길을 따름으로써 하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목자의 모습은 어린아이처럼 낮추는 자가 하늘나라에서 큰 자라는 4절의 의미와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따라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낮은 위치로 내려가기도 하며, 하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닥쳐오는 수치를 겪기도 합니다. 작은 자 한 명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수치를 겪을지라도 목자-종의 낮아지는 과정이 양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타인의 회복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큰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낮아지는 삶이 있기에 교회와 세상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훈육(15-20)

하나님께서는 용사와 징계의 권위를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죄지은 한 형제를 대하려면 같은 관심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정죄할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것이 잘못한 지체를 대하는 공동체의 전제 조건입니다.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5-20)

 

1-14절은 자연스럽게 15절로 이어집니다. 길을 헤매는 양과 같은 사람이 자신의 회복을 시도하는 사람의 노력을 무시할 때,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일 형제에게서 피해를 입으면 맨 먼저 그 사람과 일대일로 만나 책망해야 합니다(15). ‘책망하다’로 번역되는 ‘엘렝코(ελεγχω)’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용어는 지혜 문헌의 영향을 반영하는데, 아버지나 하나님께서 개선의 목적으로 교정하거나 훈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참조 잠언 9:7이하;3:11; 히브리서 12:5; 요한계시록 3:19; 디모데전서 5:20; 디모데후서 4:2; 디도서 2;15; 유다서 1:15). 이 단어는 그 사람이 행한 것이 잘못된 행위, 곧 죄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고 회개하도록 설득하거나 가르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는 사적으로 일어날 수 있고(마태복음 18:15; 에베소서 5:11), 목회서신의 경우처럼 공동체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습니다(디모데전서 5:20; 디모데후서 4:2; 디도서 1:9;13; 2:15). 그러므로 책망하는 것은 죄를 노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잡는 것에 목표를 돈 행위입니다(참조, 레위기 19:17; 잠언 3:12;욥기 5:17). 이 용어의 용례는 길을 헤매는 양을 회복시키는 목자의 그럼을 담은 18:10-14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죄를 범한 형제를 개별적으로 찾아가는 것은 상대방을 보호하는 차원의 행동입니다. 만일 상대방이 책망을 들으면 형제와의 화해가 이뤄집니다. 화해를 먼저 시도하려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때로는 수치를 감당해야 하는 정도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겸손과 수치를 감수하면서도 형제를 회복시키려고 나서는 도를 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에 해당합니다.

 

사적인 대화에서 실패하면 증인들이 필요합니다. 만일 두세 사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가 나서야 하고, 교회의 훈계마저 무시하면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취급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지역 교회를 가리킵니다. 누군가를 이방인과 세리로 대우하라는 것은 그 사람과 더 이상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사회에서 생활하면서 만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교회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형제로 생각하지 말고 교회에서 출교시켜야 합니다. 이런 명령은 교회의 합의에 따라서 결정한 것이므로 교회의 공식 입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땅에서 매고 풀 때마다 하늘에서 매이고 물리는 것을 약속하십니다(18). 매고 푸는 의미에 대해서는 16:18-19에서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법적이고 행정적인 개념을 내포하며, 이 행위를 하는 사람의 권위가 강조됩니다. 15-17절의 내용과 연결해 보면, 세 단계에 걸쳐 주어진 훈계와 회복의 절차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을 교회가 정계했을 때, 교회는 이 결정이 하늘에서 인정받을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교회의 권위는 하늘과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땅의 총회이고 하늘에는 하늘의 총회가 있는데, 두 총회는 서로 연결됩니다. 교회는 비록 약하고 형제의 문제 때문에 휘청거릴 수 있지만, 교회의 뿌리가 하늘에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교회의 결정에 하늘이 응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형제의 문제와 관련된 내용에서 출발해서 교회의 정체성과 특권으로 확장하여 교육하십니다(19). 두 사람이 땅에서 기도한 것을 합의하면 하늘에 계씬 아버지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교회의 결정은 반드시 기도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징계를 결정하든 영접을 결정하든, 모든 행위는 기도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즉, 교회의 결정은 하나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두 사람’은 무엇을 합의하거나 합의하지 않을 때 참여하는 최소한의 단위입니다. 공고의 목적을 무시한 채 진행하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기도는 응답받지 못합니다. 둘이나 셋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20). 하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모이기 때문에 공동체가 합의하고 기도한 내용에 응답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마태복음의 핵심 주제인 ‘임마누엘’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형제를 징계하는 매우 어려운 순간에서도 임마누엘을 의심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 임마누엘에 대한 확신을 굳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긍휼의 공동체이면서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는 공동체이므로 죄의 문제를 엄격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을 때 교회가 후유증을 겪을 수도 있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결정은 하늘에서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권징을 한 후에 담대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두세 사람을 언급하심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십니다. 이 교훈은 교회 구성원의 합의를 강조하고 특정인의 독단적인 주장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성은 임마누엘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교회는 개인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모였음을 늘 인식해야 하며, 공동체로 모여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갈 때 교회의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많다 보면 사람을 귀히 여기는 마음을 잃기 쉽습니다. 돈에 집착하면 물질의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게 되고, 도덕에 매이면 정죄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는 한 영혼을 귀하게 보는 공동체입니다. 작고 가난하고 모났을지라도 그 영혼을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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