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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8-03)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나타낼 용서

마태복음 18장 21-35절


 

용서를 한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용서는 했지만, 생각하면서 피해받은 것을 생각이 나서 힘들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나갑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신 은혜가 가득할 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용서는 자신을 살리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입니다. 오늘도 크나큰 은혜로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나가길 원합니다.

 

  • 본문은 1-20절에 연결됩니다.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작은 자를 회복하는 교회가 될 것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이름으로 권면해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하늘의 응답과 임마누엘을 확신하는 가운데 치리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까지도 마음으로는 용서하며 대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제한이 없는 용서(21-22)

바르게 용서할 수 있으려면 자신이 받은 용서를 똑똑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이 용서받은 극악한 죄를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건 없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계산할 수도 없는 이 용서의 은혜 때문에 우리에게도 관습과 상식을 초월한 용서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갈망하면서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 수 있게 하신 용서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21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1-22)

 

본문은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형제를 향한 용서의 횟수에 대한 질문(21)과 예수님의 대답(22)입니다. 18:1-14과 21-35절은 각각 제자들과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하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2-4절과 22절에 나오며, 이어지는 비유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1절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22절을 답으로 제시하셨고, 23-35절은 동일한 의미의 답을 비유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베드로는 죄지은 사람을 몇 번 용서해야 하는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묻습니다(21). 베드로는 15절에 나온 죄지은 형제와 관련해서 질문했을 수 있습니다. ‘일곱 번’은 인간에게는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이며(참조, 잠언 24:16),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관대함을 보여줍니다. 어떤 점에서는 인간에게 있어서 일곱 번의 용서마저도 무제한적인 용서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흔 일곱의 일곱 번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이 표현은 77회 혹은 490회(70×7)를 의미합니다. 사실상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랍비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좀 더 관대하게 일곱 번까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한계조차 정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용서하되 한없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평가할 때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해야 합니다. 부주의한 말로 비방하거나 세상처럼 경쟁하거나 유혹함으로써, 혹은 용서를 거절하거나 차별하거나 헌신을 강요함으로써 지체를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23-35)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웃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게 됩니다. 용서는 단번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완전히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죄인을 있는 그대는 수용하는 일뿐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그분의 주권에 맡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3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23-35)

 

예수님께서는 22절의 대답을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23절의 ‘그러므로’는 ‘용서가 무제한적이기 때문에’와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비유는 무제한적으로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만 달란트 빚진 자가 결산하기 위해 왕 앞에 왔습니다. 만 달란트는 약 20만 년의 입금에 해당하므로 종은 현실적으로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습니다. 종은 재정 관리를 잘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갚을 수 없었기에 주인은 아내와 자녀와 모든 소유를 함께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25).

주인의 말에 종은 엎드려 절하며 참아 주시면, 즉 시간을 더 주면 갚겠다고 다짐합니다(26). 그 정도 규모의 손실을 끼친 것도 그렇고, 갚을 시간을 달라고 허세를 부리는 것도 그렇고, 그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독자들 중에 아무도 이 사람의 말을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본문의 주인도 당연히 갚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왕은 종의 빚을 탕감해 줍니다(27). 이유는 ‘긍휼’입니다. 긍휼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의 필요를 보면서 느끼는 예수의 성품을 뜻합니다(9:36; 14:14; 15:32; 20:34). 흥미롭게도 빚을 ‘탕감하다’의 표현으로 ‘용서하다’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빚’과 ‘죄’는 여러 면에서 비슷합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갑자기 반전됩니다. 종이 탕감을 받고 나서 주인의 집을 나갔을 때, 동료 종들 중의 한 명을 찾았습니다. ‘동료 종’은 둘 다 동일한 신분임을 뜻합니다. ‘찾았다’의 의미는 탕감 받은 종이 의도적으로 빚진 동료를 찾아 나선 것을 의미합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종은 갚겠으니 기다려달라고 간청합니다(30). 그러나 탕감 받은 종은 동료 종을 끌고 가서 빚진 것을 갚을 때까지 옥에 던져 넣었습니다. 빚 때문에 투옥시키는 일은 구약과 랍비 문헌에서 금지된 행위였습니다. 종의 마음은 ‘그러나 그가 원치 않았다’는 표현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30). 23절과 30절에 의도를 반영하는 ‘원하다’라는 동사가 동일하게 사용된 것은 주인이 종의 천문학적 규모에 달하는 빚을 탕감하기를 원했던 모습과 대조하기 위함입니다. 빚을 탕감할 수 있는 의지는 긍휼에서 나오는 것인데, 종에게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본 동료 종들은 큰 충격을 받아 주인에게 모든 일을 보고합니다(31). 주인은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이 행한 이야기를 듣고는 종을 불러서 ‘사악한 종’(참조. 25:26)이라고 정죄합니다(32).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은 사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지만, 그렇게 행하지 않는 사람은 긍휼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5:7). 주인은 자신이 종을 불쌍히 여긴 것처럼 그 종도 동료를 불쌍히 여겨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합니다(33). 주인은 분노하며 모든 빚을 갚을 때까지 고통을 주는 자들에게 종을 넘겨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34). 만 달란트의 빚을 모두 갚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도 옥에 갇힌 상태에서 돈을 벌 기회는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그들에게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비유를 해설하십니다(35). 비유에서 왕은 하늘 아버지를, 동료 종들은 형제들을 가리킵니다. ‘마음’은 그 사람의 본질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는 용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나와야 하고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것은 진심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참조 12:34; 15:18,19). ‘마음으로부터’는 쉐마를 떠올리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신명기 6:5; 마태복음 22:37).

 

비유는 몇 가지 의미를 전달합니다. 특히 공동체 강화(18장)는 일차적으로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이 비유 역시 교회 공동체를 점검하고 실천해야 함 규범으로 주어졌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갚을 수 없을 정도의 죄를 예수님의 긍휼로 용서 받은 존재들입니다 이 비유는 용서하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는 1:21에서부터 죄를 용서받는 구원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주신 은혜라고 전제한 바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처럼, 이 나라의 특징인 용서도 하나님에 의해 먼저 주어집니다.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예수님의 긍휼로 주어졌다. 긍휼은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의 특징입니다. 비유는 하나님의 용서를 참으로 경험한 여부가 용서하는 행위로 입증된다는 관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경험한 참 제자라면, 형제의 작은 허물에 대해 비유의 종과 같이 행동할 수 없다. 따라서 형벌에 처해진 종은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신에게 채무가 있는 자에게 용서하지 못하는 행동을 함으로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용서하셨으나 그 용서를 믿고 감사한지 여부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태도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를 탕감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이 용서할 것을 전제로 주어집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행동으로 은혜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십니다. 돌아서자마자 작은 긍휼히 필요한 자에게 큰 심판을 내리는 사람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용서하라고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한없는 긍휼을 경험한 사람은 작은 긍휼함이라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받은 교회는 용서하는 것으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긍휼의 마음으로 형제와 자매를 용서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긍휼을 받은 자들로 구성된 나라며, 긍휼이 확대되는 나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용서입니다. 교회에서는 이것이 가능해야 하고 교인을 통해서는 이것이 가능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용서가 인간의 이성으로는 어렵기에, 예수님께서는 순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용서는 아버지의 완전하심처럼 완전을 지향하라는 명령입니다(5:21-48).

따라서 긍휼이 없고 긍휼이 용서로 입증되지 않는 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못지않게 교회에서 명예 훼손과 관련한 소송이 많고, 일곱 번이 아니라 한 번의 관용도 베풀지 못해 사람들을 정죄하고 쫓아내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바른 교리는 생명과 같지만, 세상은 교회의 교리가 아니라 삶을 통해서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봅니다.


 

주님의 나라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세상 논법으로 담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정의의 나라이지만 정의를 넘어선 용서와 희생과 사랑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 용서와 사랑을 시작하셨고, 아들께서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제자 공동체도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저희 온 공동체가 배워서 한 뜻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주위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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