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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9-01)

 


천국 백성의 결혼에 대한 자세

마태복음 19장 1-12절


 

‘결혼’이라는 제도는 사람이 만든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입니다. 반대로 이혼이라는 제도는 하나님께서는 만드신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제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혼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음행과 부정이 팽배하고,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무작정 이혼을 정죄할 수 없으나, 주님께서는 이혼이 올바른 최선의 선택인지 묻고 계십니다.

 

  • 마태복음 19:1-20:16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행하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과 이를 설명하는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자로서 가야 할 길을 가르칩니다. 결혼, 이혼 독신, 자녀, 돈이라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주제를 다룹니다. 본문은 3-12절에서 결혼과 이혼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길(1-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예수님을 바로 믿을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주 건강한 몸으로 스스로 예배에 참여하고, 건장한 정신으로 예배 시간 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드리는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고 모든 모임을 감사하게 여기면서 생활해야 합니다. 기회는 그렇게 많지 ㅇ낳기 때문입니다.

 

1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1-2)

 

본문은 예수님 일행은 갈릴리를 떠나서 유대 지역으로 들어가신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번에는 사마리아 지역을 직통하지 않고 유대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요단강 서쪽 길을 따라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이 길을 따라 내려오면 예루살렘에 도착한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울수록 반대하는 사람과 갈등이 더 심해질 것입니다. 사역의 출발점인 갈릴리는 부활하시기 전까지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걸고 있는 길은 이생에서 마지막 걸음입니다.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직접보고 믿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입니다. 북쪽 갈릴리 사역처럼 남쪽 유대 지역에서도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2; 참조 4:25; 8:1,18; 12:15; 13:2).

 

예수님께서는 골고다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중에도 자기 백성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변함없이 긍휼의 마음으로 치유하십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20:29 이후에도 예수님께서는 등장한 무리 중에서 두 소경을 치유하실 것입니다(30-34).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을 치유했지만, 예수님께 또 다른 음모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치유 사건은 나중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난 후, 제자들은 예수님을 ‘구주’와 ‘왕’으로 전할 때,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창조의 원리 속에 결혼(3-9)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지만 어설프게 알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에게 순종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성경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이단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설명하지만,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정당화하는지 모릅니다.

 

3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니 7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3-9)

 

예수님께서 나와서 겸손히 치유 받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시험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짜임을 들어내고 하는 시험이었습니다.

 

(1) 바리새인들의 함정(3)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지도록 아주 애매한 질문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께 이혼에 대해 묻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아내를 버리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물었습니다.

하필이면, 그들이 이혼 문제를 가지고 질문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이미 산상 설교에서 이혼에 대한 견해를 밝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과 같은 운명에 처하도록 질문을 던졌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헤롯왕의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 지역의 통치자였는데, 아내와 이혼하고 형제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재혼했습니다. 요한이 형제의 아내를 취한 문제를 지적한 것을 계기로 잡히고 참수형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예수님께 시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신명기 24:1를 염두해 두고 질문합니다.

 

(2) 예수님의 대답(4-6)

 

먼저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읽지 못했느냐?’라는 하십니다.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전문가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에게, 즉 바리새인들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시는 표현입니다(12:3,5; 21:16,42; 22:31).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1인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라는 말씀에 대해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세기를 인용하면서 결혼에 대한 첫 명령을 소개합니다. 먼저 창세기 1:1과 1:27을 사용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을 말씀을 통해 성경적인 결혼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연관해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라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세기 2:24) 말씀을 들어서 이혼을 반대하셨습니다.

나중에 신명기에 소개된 이혼은 인간의 ‘완악함 마음’에 불가피하게 이혼 규정을 만드신 것이지, 더 중요한 것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결혼)이 반영된 시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강조점은 ‘남자’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리고 여자’를 강조하고 의도함으로써 남자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여자의 존재를 부각시킨 것입니다. 결혼은 세상의 시작부터 한 남자와 여자의 연합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 사랑의 연합이 하나님의 형상의 한 부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창세기를 인용하신 것은 창세기가 신명기보다 더 권위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신명기 24:1은 인간이 죄인인 상태이기에, 신명기의 가르침을 하나도 손대지 않고 인정하면서, 하나님께서 원래 결혼에 대해 의도하신 것을 창세기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므로 신명기의 가르침도 다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본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의 핵심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연합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부는 나눌 수 없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육체를 이룬다는 표현에는 ‘부부’의 연합이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보다 더 우선적인 점을 암시합니다. 물론, 부모에 대한 효도는 제5계명이 엄격히 명령하므로 한 육체가 된 부부가 부모를 떠난다는 의미를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떠나는 목적은 부부의 연합을 위해서 다 이 연합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채 부모(아내 입장에서는 시부모)의 통제를 받게 되면, 이것은 왜곡된 질서가 되고 결혼의 목적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들은 부모를 공경하면서도(마태복음 15:36) 부부가 한 육체를 이룬다는 사실에 순종해야 합니다. 창세기 2:24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이 결혼입니다.

한 육체가 되었다는 표현은 성적인 결합이 핵심 요소인 것을 나타냅니다(참조. 고린도전서 6:16). 둘을 한 육체로 묶은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성적인 하나 됨을 도외시하면서 정신적이거나 은유적 의미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 명령에 대한 오해입니다. 결혼은 거룩한 것이며 인간이 주도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불륜은 연합을 깨는 행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육체가 된 이상 분리되는 것은 육체를 죽이는 행위입니다. 둘이 한 육체가 될 것이라는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결혼의 하나 됨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혼과 재혼은 일어납니다. 따라서 둘이 하나 된 육체가 나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보다는 나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는 마음이 완악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하늘나라의 백성이며 땅의 소금과 빛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말씀을 결혼과 이혼을 이해하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며, 한 육체로 묶어주신 주권에 복종하여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3) 바리새인들의 반론(7)

 

예수님께서 창세기에 근거해서 결혼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를 가르치시자 바리새인들은 다시 신명기 본문으로 질문합니다(신 24:14), 예수의 해석에 반대한 바리새인들은 한 육체를 강조한 예수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혼이 불가하다면 왜 모세가 이혼 증서를 써서 아내를 보내라고 명령했는지 묻습니다(신명기 24:1).

 

(4) 예수님의 반론(8-9)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신명기 24:1을 이혼할 수 있는 근거로 삼았고, 이 본문에 기초해서 이혼 증서를 써주고 있었습니다(마태복음 5:31). 이들은 모세를 문장 앞부분에 둠으로 예수와 모세를 대조하여 모세가 하라고 명령한 것을 자신들이 행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이혼을 '명령'했다고 표현했으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한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8).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너희의 완악함’ 때문이지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4절에 이어서 ‘처음부터’를 반복하면서 인간의 마음이 완악해지기 전에는 이혼이 허락되지 않았음을 강조하십니다. 이혼은 명령이 아니라 인간을 배려한 하나님의 허락일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늘나라의 새 시대가 왔고 새 시대의 제자들은 소금과 빛으로서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 포함되지 않으므로(에스겔 36:26) 창조 때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의도하신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음행 외의 이유로 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간음행위입니다(9; 5:31-32). 만일 아내가 음행하지 않았는데도 남편이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재혼하는 것도 간음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결혼을 통해 두 사람이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하나님이 만드신 신성한 제도입니다. 결혼과 이혼에 대해 어떤 생각과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소설이나 드라마가 아닌 성경에서 결혼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독신을 허용하는 경우(10-12)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비혼이나 독신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으면 거룩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소명을 주셨을 때 건강한 독신 생활도 가능합니다. 그러니 사회적인 관습에 기대어 비혼이나 독신을 편협한 시선으로 보기를 그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독신을 선택한 이들을 공동체가 격려하고 대안 가죽이 되어주야 합니다.

 

10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찐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11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찌니라 12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찌어다(10-12)

 

이혼에 대한 예수의 엄격한 잣대는 제자들의 오해로 이어집니다. 제자들은 이혼이 그 정도로 어렵다면,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와 같다면, 결혼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말합니다(10). 예수님께서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것은 주어진 사람들에게 해당한다고 말씀하십니다(11). 결혼은 규범이고 독신은 받을 만한 사람에게 주어진 예외적인 은사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혼보다 더 큰 가치인 하늘나라를 위해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12절의 고자가 결혼하지 않는 독신을 가리 키는지, 배우자의 죽음 이후 재혼을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지 학자들의 입장이 갈립니다. 전자는 하늘나라의 높은 가치를 위해 결혼을 하지 않는 경우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처럼 하늘나라를 위해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활동한 경우도 포함합니다(참조, 고린도전서 7:32-34). 후자는 배우자의 사망 이후에 재혼하지 않는 것은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본문은 둘 다를 의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하늘나라를 위한 고자는 은유적으로 제자의 삶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한 고자의 삶은 여러 가지 점에서 제약을 받고 어려운 길이므로 제자도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사람이나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최고의 가치는 결혼이 아니라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의 가치를 위해 결혼이라는 중요한 것을 희생할 사람이 있을 것이지만, 이 은사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개인이나 단체가 결혼이든 독신이든 강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결혼이 하나님의 축복이듯이 독신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거룩한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소명을 주셨을 때 건강한 독신 생활도 가능합니다. 그러니 사회적인 관습에 기대에 독신을 편협한 시선으로 보기를 그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독신을 선택한 이들을 공동체가 격려하고 대안 가족이 되어 줍니다.


결혼이든 독신이든, 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위해 결혼이나 이혼, 혹은 독신을 선택한다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형태든 자기 백성이 소명에 따른 충만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결론적으로 죄가 그 연합을 깨뜨렸지만, 이제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 그 연합을 다시 회복하시는 시대가 왔으니 제자에게 이혼은 더욱더 허용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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