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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2-03)


성령을 모독하는 자에 대한 심판

마태복음 12장 22-30절


 

전쟁할 때, 교전국 사이에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 그곳만은 싸우지 않기로 협정한 지역을 ‘중립지역(中立地域)’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탄의 영적인 전투에는 중립지역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탄에게 속하든지 하나님께 속하든지 해야만 합니다. 항상 사탄은 타락한 영적존재이므로 자신을 인간에게 접촉하여 그 사람을 타락시켜서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힘으로 쫓아냈다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힘입어 귀신을 쫓은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고, 성령 모독 죄는 사함을 얻지 못하며, 사람은 심판 날에 자기 말로 의롭다 함과 정죄함을 받는다고 반박 하십니다.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심(22-24)

믿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많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부족해서 또 받은 은혜가 모자라서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모르면서 자신을 믿고, 하나님을 올라서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22그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 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 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22-24)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간 동안 수많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 들려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남자를 치유하십니다(22). 귀신 들린 자는 눈이 멀고 말을 하지 못합니다(참조. 9:27-31). ‘말을 못하는’은 9:33에 나온 용어로서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는 한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치유하십니다. 문맥의 흐름을 보면, 한 손 마른 자의 치유가 있었고(9-14), 마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종으로 밝혔고(15-21), 예수님께서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인생인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하십니다(22). 예수님께서는 종으로서 맹인을 치유할 것이라는 이사야 42:7의 역할을 성취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앞 장면과 마찬가지로 22절의 치유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종으로 행하신 사건입니다. 무리는 놀라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아들’은 치유에 이어서 나온 메시아 칭호입니다(9:27). 무엇보다도,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아들이며, 당시 유대인들이 치유자로 믿었던 솔로몬(-다윗의 아들)보다 더 큰 자입니다. 이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다음 질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약속된 다윗의 아들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신 것입니까? 아니면 악령의 능력으로 축귀를 행한 사람, 사탄과 한 패거리입니까? 귀신을 쫓아내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을 살려주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이고 다윗의 아들입니다. 복음서에서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와서 사탄의 나라를 궤멸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축사(逐邪) 사건은 다른 치유와 마찬가지로 성경에 약속된 다윗의 아들이 드디어 와서 하늘나라를 실천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치유하는 다윗의 아들로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목적 중 하나는 그를 통해 이 땅에 실현되는 나라가 회복의 나라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한쪽 손 마른 자를 치유한 사건처럼 귀신 들린 자가 회복된 사건 역시 다윗의 아들은 회복을 실현하는 종으로 왔음을 입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지금도 회복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십니다. 교회는 회복의 일에 쓰임 받아야 하며, 회복을 경험하지 못하고 확장하는 도구가 되지 못하는 교회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의 바알세블 논쟁(25-29)

귀신 들려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 살았으나 즉은 것이나 다름없이 빛과 소리 없이 살아왔던 혼돈의 인생이 빛 되신 예수님. 말씀이신 예수님을 만나서 빛과 소리를 찾았습니다.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찾았고, 샬롬과 쉼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5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25-29)

본 단락은 22-23절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비난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으로 구성됩니다. 17-21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은 종이며 평화와 긍휼과 겸손으로 정의를 실현한 종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정체성과 정반대의 평가를 내립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령이 아니라 사탄의 힘을 사용하고, 예수님의 사역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사탄의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이로써 이들의 평가는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축사 사역이 귀신들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으로 한 것이라고 비난합니다(24).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알고 서로 분쟁하는 나라나 도시나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25). 사탄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사탄의 힘으로 쫓아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26). 26절에서 바알세불이 사탄으로 바뀝니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는 장면은 마치 사탄의 세력 안에서 벌어지는 내전과 같습니다. 사탄은 악의 세력을 통치하는데 통치자가 자기 나라에서 군대를 쫓아낸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자신의 축사가 바알세불의 힘으로 된 것이라면 ‘너희의 아들들’이 행한 축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되물으십니다(27). ‘너희의 아들들’은 유대인들 또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킵니다. 유대 문헌에는 유대인들이 귀신들을 쫓아낸 기록이 나옵니다. 이들의 행위는 하늘나라가 온 증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임함은 예수님을 통한 축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를 통해서 통지하시는 나라이므로, 다윗의 아들인 예수님을 통한 회복의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이 쫓겨난 사건은 하늘나라가 온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28).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은 성령의 힘으로(눅 11:20에는 ‘하나님의 손가락’) 일어났으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종에게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라는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18; 사 42:1-4; 61:1).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성령의 능력으로 여호와의 종이 회복의 나라를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참조, 사 44:3; 59:21). 여기서 ‘왔다’는 과거형으로 ‘임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행하신 축사 사역을 통해 실제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의 전체 문맥을 고려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셨고(4:17; 10:7), 예수님의 축사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예, 4:24, 10:8).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메시아적 사역을 하고 있는 그 시대와 영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임함을 보고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적대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강한 자인 사탄이 더 강한 자인 예수님에 의해 결박당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9). 사탄을 결박해야 사탄의 집에서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구원하는 힐을 시작하신 것은 사탄이 결박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의 치유 사건들(12:10-13, 15)과 마찬가지로 축사도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증거입니다. 구원 역사의 측면에서 사탄이 결정적으로 결박되는 시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시는 때이지만, 예수님의 활동으로 사실상 사탄은 결박당하기 시작합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처럼 예수님께서 땅에서 행하신 일(귀신 축출)을 통해서 하늘에 있는 뜻(사탄이 묶이는 것)이 성취됩니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특히 성령(=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예, 사 52:7)를 가지고 온 것은 이사야 61:1-3에서 주의 영이 주의 종에게 임해 희년을 실현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30)

신앙의 중립지대, 완충지대,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서 걸쳐 있을 곳은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반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넘겨주신 것은 우리를 얻으려고 자신의 전부를 주신 사건입니다.

30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하지 않는 자마다 흩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30; 개역개정은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마다 흩어진다’를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로 번역함).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탄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모으신 자들이고 함께하지 않는 자들은 흩어진 자들입니다. ‘흩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승리자가 정복당한 군대를 흩어버리듯이 원수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흩어버린 사건이 구약에 여러 번 묘사됩니다. 특히 마태복음은 앞의 내용에서 예수님을 여호와의 종으로 이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예수님께서 치유하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흩어진 백성(양 떼)을 모으러 오신 것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종의 사명을 떠올리게 하며(사 49:5, 24-25), 이는 양 떼를 모으러 온 종의 사역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회복 혹은 구원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종으로서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러 오셨지만(사 49:5,24-25), 예수님에게 모이지 않으면 종을 통한 회복의 기회를 놓치고 용서 받을 기회를 잃는 비극에 처합니다(마 12:31).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대적하는 편에 서기 때문에 모이는 양 떼가 아니라 흩어지는 양 떼에 속합니다. 29절과 연결해 보면, 예수님은 양떼를 모으려고 사탄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탄의 집을 공격해서 양 떼를 살려내는(=모으는) 예수 편에 서야 하며, 예수께 반응하는 일에 있어서 중간 지대는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영적 전투에서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반대하는 자이며, 자신과 함께 모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라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과 같으며, 예수님의 통치를 받지 않을 때 우리는 결국 귀신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오늘 예수님 편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반대편에 서 있습니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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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2-02)


생명을 주시고 정의를 행하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12장 14-21절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만왕의 왕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보란 듯이 이방나라 특히 로마 제국을 꺾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높이 존경받는 백성들로 세울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종의 모습을 한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종인 당신은 오늘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박하지 못했던 바리새인들은 회당을 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고쳐주십니다. 마태는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사역을 고난 받는 종에 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42:1-4)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위험에 빠진 하나님의 종(14-16)

예수님의 말씀은 탁월했고,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귀신, 바람, 파도 그리고 각종 질병이 떠났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바로 그 메시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혁명가처럼 요란스럽게 떠들지 않았습니다. 황소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14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5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14-16)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에 대해 더 이상 논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이 사건을 목격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모의하기 시작합니다. 이 사실은 여러 가지로 충격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을 죽일 음모(14)

왜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합당한 질문을 던지고 치유의 권세를 보여 그들의 말문을 닫게 말들어버리신 것은 바리새인들이 유지해 온 권위 체계에 대한 도전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 해석에 기초해서 매고 푸는 권세를 행사했으므로, 율법의 해석 또는 율법의 의미를 가르치는 일은 그들에게 독점적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참조 16:18-19). 안식일 사건을 계기로 권위에 위협을 느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다른 이슈로 죽일 모의를 짜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안식일 사건은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죽여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든 계기가 됐습니다.

(2) 병 고치심과 경고(15-16)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아시고 물러나십니다(15; 예 4:12; 14:13; 15:21; 16:5). 물러나신 것은 피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더 많은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15절의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회당이 아닌 곳이지만 요일이 바뀐 암시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더 많은 사람들을 치유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인 긍휼을 실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치유하고 나서 자신을 드러내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16).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위를 선전하기 위해서 치유하지 않으셨습니다. 19절과 연결해 보면 예수님께서 침묵을 요구하신 것은, 주의 종의 겸손을 의미하고 승리주의와 반대되는 예수님의 성품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불필요한 소동을 피하고, 사람들의 잘못된 요구와 소망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병 고치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메시아를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이 잘못된 동기에 의해서 따르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이방 사람들을 위해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아직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민족들의 소망인 하나님의 종(17-21)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보라’고 외치십니다. 모든 종교적 위선과 죄악에 대한 심판이 이방에까지 알려질 것입니다.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셨던 예수님, 하나님께서 택한 종의 이름을 이방인들이 바라볼 것입니다. 숨겨졌던 것을 환히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모략입니다.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17-21)

마태는 안식일에 일어난 두 사건과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사건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기 위함이라고 선언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기초로 그를 여호와의 종으로 묘사하며,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사야 42:1-4에 기록된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이 모형론적으로 성취됐음을 강조합니다.

(1) 하나님께서 택한 종(17-18)

마태가 구약의 긴 구절을 인용한 목적은 단지 예수님께서 물러나신 이유나 침묵하라고 요구하신 이유를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안식일 치유 사건을 계기로 그리스도의 전체 모습을 묘사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종 기독론’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한 종의 역할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에서 ‘심판’으로 번역한 ‘그리스시’는 ‘정의’에 가깝습니다. 억압받고 무거운 짐에 눌린 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정의의 실현입니다. 또한 본문의 심판은 무질서 또는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것이기에, 이 용어는 잘못된 질서를 바르게 회복하는 것, 곧 불의의 현 시대에 정의를 실현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열방을 향한 복음이므로(예, 1:1: 2:1-12; 3:9; 4:15-16; 8:5-13; 28:18-20), 회복을 가져온 메시아를 이방 나라들이 고대하게 됩니다(참조, 이사야 51:4): ‘내가 내 공의(미쉬파트)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그리고 성령의 임함은 선택 받은 종이 메시아적 사역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목적일 뿐만 아니라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회복하는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2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치유(축사 포함)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회복의 일을 행하시고(8-9장의 기적) 12장에서 안식일에 대해 해석하시고 한쪽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을 통해 심판 곧 정의가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성령의 부어짐과 관련된 예수님의 증언은 안식일의 치유와 16절의 치유와 같은 활동을 두고 사탄의 일이라고 비난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2) 겸손의 종(19-21)

19-20절은 예수님께서 종으로 보이신 낮아짐과 겸손을 묘사합니다. 싸우지 않고 외치지 않는 모습은 평화의 활동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싸우지 않으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전혀 논쟁도 하지 않고 싸움도 벌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규례와 관련해서 논쟁을 벌였으나 그것은 다른 생명을 회복하고 변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거리에서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16절의 명령처럼 자신을 숨기는 속성, 곧 겸손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아짐과 겸손으로 정의를 선포하십니다(11:29). 그리고 정의로 승리할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이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처럼 주변부의 사람들, 한쪽 손 마른 사람과 같이 바리새인들의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대하고 회복하시는 메시아입니다(11:28-30). 20절을 ‘그는 정의로 승리할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부러뜨리지 않으며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회복, 곧 정의의 실현이 승리할 때까지 회복의 일을 하십니다. 종의 정의, 곧 평화와 긍휼과 겸손을 통한 활동은 결국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민족주의적인 열망이나 제국주의적인 폭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사역을 수행함으로써 정의의 승리를 실현한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의 회복 사역은 모든 민족이 갈망하는 것입니다(21).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이 이방 민족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마태는 이런 유대인들의 생각을 넘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열방의 소망이 될 것을 알립니다. 맛소라 본문의 이사야 42:4에 있는 ‘토라’를 70인역은 ‘이름’(όνομα)으로 번역합니다. 그 이름은 이사야 42장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회복의 나라를 가져오는 종입니다. 이 종은 임마누엘로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입니다(1:21,23).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는 일은 이제 이사야가 예언한 종을 통해서 일어납니다(참조 8:11-12; 21:43; 24:14; 28:19), 열방을 초대하는 선교는 하늘나라의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제자들을 통해 이어질 것입니다(24:14; 28:19-20).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아들/종입니다. 그는 무질서의 세상을 질서로 회복하는 일을 실현하기 위해 순종하는 종입니다. 아들은 종으로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합니다. 이미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나왔던 그의 정체가 고난을 통해서 회복하는 활동으로 입증됩니다. 회복의 관점에서, 바리새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쪽 손 마른 자를 회복하시는 것은 안식일에 양을 구출하는 것이며(12:11-12), 이 행위는 종의 역할을 성취하는 것입니다(12:18-21=이사야 42:14, 참조 이사야 49:5). 회복하는 종의 사역은 한쪽 손 마른 자뿐만 아니라 12:22에서 맹인을 치유하는 사건으로 입증될 것입니다(이사야 42:7; 참조. 이사야 29:18; 35:5,6; 42:16,18,19; 43:8). 결국 아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순종을 통해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종의 역할을 수행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아들/종이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은 평화와 긍휼과 겸손입니다. 종의 낮아짐을 통해서 사람들은 회복되며, 이 회복은 열방의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가져오시는 질서의 회복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열방으로 향하므로, 열방이 예수님을 통한 회복을 기대합니다.

본문의 기독론은 교회론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와 긍휼과 겸손으로 승리하셨는데, 교회는 어떻게 승리할 것입니까? 하늘나라는 무력과 오만으로 오지 않았고 그런 식으로 확장하는 나라가 아닌데, 교회는 어떻게 내부와 외부를 향해 하늘나라를 구현할 것입니까? 예수님의 공동체는 오직 하나의 방식으로만 승리하도록 지시 받습니다. 아들이면서 종으로 낮아진 예수님의 삶, 세상에서 무가치 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종의 삶, 바로 이것이 교회가 승리를 위해 실천해야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메시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가 승리할 때까지 인생들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불도 끄지 않고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스스로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주께 나아오는 자는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믿음 하나로 수년째 싸우는 이들이 있습니다. 진실을 감추려는 계략을 간파하고 그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모략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자신을 나타내려는 욕망을 보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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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2-01)

 


안식일에 주인이신 예수님

마태복음 12장 1-13절


한 성도의 남편이 ‘술 먹지 말라는 말만 안 하면 교회 나갈게요.’라고 말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교회가 어떤 곳인지 짐작이 갑니다. 그에 생각하는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이라기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곳’으로 이해되고 있는 곳입니다. 제자는 금지 명령을 잘 지키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계속적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한 공격이 이어집니다. 본문은 안식일과 관련된 충동을 묘사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하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는 자가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그날을 성취하는 자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안식일에 관한 첫 논쟁(1-8)(∴마가복음 2:23-28; 누가복음 6:1-5)

자신의 성경 지식이 옳을지, 믿고 있는 믿음이 바른 것이 종종 조명해 봐야 합니다. 무조건적으로 고집 부리면서 자신만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성경적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 신앙과 행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격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잘못됐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남을 죽이되, 그 안식일의 성취자를 죽이려고 합니다.

1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1-8)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계속적으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안식일에 대한 문제입니다. 안식일은 10계명에 네 번째 계명입니다.

(1) 안식일 문제 제기(1-2)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과 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응입니다.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그 자체로 율법을 반한 행위는 아이였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추수행위가 된다면 율법에 반하는 것이 됩니다. 안식일에 대한 계명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핵심적인 계명입니다. 안식일에 계명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안식에 나라입니다. ‘안식’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이 창조주로서 경배를 받으실 때 찾아옵니다. 사람이 또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이 더불어 함께 살아갈 때 안식이 찾아옵니다. 안식을 누리는 조건을 성경은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안식’은 ‘생명’과 동의어입니다. 안식법은 할례와 음식법으로 가장 확실하게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면 안식일을 준수하는 민족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2) 예수님의 답변(3-5)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와 안식일에 밀밭을 통과하실 때, 그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본 바리새파 사람들은 보았습니다. 이것을 비판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당시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안식일에 일한 것은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심각한 위법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읽지 못했느냐?’로 시작하면서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 제자들의 행위에는 문제가 없다고 논증하십니다. 첫째, 예수님은 다윗이 예루살렘 남쪽에 있던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을 방문한 사건을 근거로 제시하십니다(삼상 21:1-7). 다윗은 하나님의 집, 곧 성막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고 안식일에 마련된 진설병을 허락도 없이 먹었습니다(레 24:5-9). 왜 이 사건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됩니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다윗은 율법의 권위 있는 해석자로서 인간의 간절한 필요를 위해서는 진설병이라고 해도 목숨을 위해 먹을 수 있다고 해석했고(참조, 행 13:22), 다윗의 아들이면서 다윗보다 더 큰 예수님은 다윗의 행위를 다윗의 해석 원리로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다윗의 해석 원리를 보면, 생명을 위협하는 배고픔은 안식일의 요구보다 앞설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고 온 하늘나라의 특징과 어떤 종류의 하나님의 아들인지 드러내기 위해 다윗을 메시아의 원형으로 사용합니다. 메시아의 원현인 다윗(삼상 7:11-16; 시 110:1)이 생명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앞으로 다가올 메시아의 모습을 알리는 전조와 같습니다. 다윗의 행위는 불법이 아니라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이(탐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언약 관계의 갱신을 보여주는 표시입니다(사 32:6;49:10; 65:13; 참조 58:6-7,10). 둘째,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안식일 규례를 어겼으나 그것은 불법이 아니었습니다(5; 민 28:9). 문제는 과연 제자들이 제사장들과 같은 지위에서 그러한 제사 행위를 했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6절에서 성전과의 관계를 통해서 제자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십니다. 안식일에 성전에서 행하는 일이 허락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었기 때문인 것처럼, 제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밀을 잘라 먹는 것이 허락된다는 논리입니다. 안식일의 규례가 성전의 규례를 능가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안식일의 규례가 성전보다 더 큰 이를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시고 예수님의 ‘긍휼’은 성전의 제사보다 더 크므로, 제자들은 긍휼의 원리에 따라서 평가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호세아 6:6을 인용해서 바리새인들이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기 때문에 제자들을 정죄한 것이 라고 질책하십니다(7). 긍휼이 제사의 본질이고 긍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면 제자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긍휼은 사람을 향해 동정심을 발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배고픔이 의미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희생시키면서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 긍휼을 배워야 합니다.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호세아 6:6에 근거해서 궁핍한 사람들이 안식일에 음식을 즉시 만들어 먹은 행위는 죄가 아님을 가르치십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채우려고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변호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인자, 곧 자신을 안식일의 주로 선언하십니다. 안식일은 창조에 근거하고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규례이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결코 안식일에 대해서 권위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마치 자신이 창조의 질서 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안식일의 주이신 예수님은 일을 금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당시의 안식일 규례보다 긍휼의 행위가 더 우선된다는 사실을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로서 안식일이 제정된 의도를 정확히 그리고 가장 권위 있는 목소리로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실 수 있는 권위를 갖고 계십니다. 안식일이나 안식일 규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교정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실 뿐 아니라 안식일의 주로서 제자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십니다. 배고픈 제자들은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기 원하는 대상이며, 안식일에 그들이 배고픔을 채운 것은 긍휼을 베풀기 원하시는 뜻이 안식일에 성취된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기 위해 오신 분이며, 긍휼이 안식일의 규례와 성전의 제사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져오신 하나라의 특징은 제사가 아니라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여러 사안에 대해 답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특정 교파나 교리를 준수하기 위해서 규칙을 세부적으로 세웁니다. 그러나 세칙을 아무리 견고하게 만들어도 인간에 대한 긍휼을 품지 못하면 그런 법은 사람을 정죄하는 데 사용될 뿐입니다. 때로는 건전한 법칙이라고 믿는 것이 성경을 오해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으로 사람을 옥죄는 율법주의적 태도로는 사람이 회복될 수 없습니다. 긍휼이 식은 사람의 날카로운 눈과 논리적인 말은 무서운 칼날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과 교회는 끊임없이 성경을 겸손한 태도로 읽어서 예수님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예수님처럼 긍휼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며 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안식일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고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안식일에 관한 둘째 논쟁(9-13)(∴마가복음 3:1-6; 누가복음 6:6-11)

다른 모든 율법처럼 안식일도 고통스런 인간의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그 고통의 원인인 죄와 욕심에서 인간을 구원하여, 보시기에 참 좋았던 창조의 질서대로 진정한 쉼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손 마른 자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9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9-13)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떠나 그들의 회당으로 가십니다(참조 11:1).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자 고발하려는 사람들이 손 바른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은 안식일을 어기는 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한쪽 손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허락되는지 묻습니다(10).

바리새인들은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상태가 아니라면 이 환저를 치료하는 행위는 안식일의 법에 맞지 않는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들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사건처럼 예수님께서 이 환자도 안식일에 치유하실 것을 예상하고 함정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을 경우를 예로 드십니다. 자신의 양이 구덩이에 빠진 것을 보고도 지나칠 주인은 없습니다(11). ‘않겠느냐?’는 이런 경우에 모든 사람이 양을 글어낸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용법입니다. 특히 가난한 농부에게 단 한 마리의 양만 있었다면 당연히 살려낼 것입니다(참조 사무엘하 12:3).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양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이므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일은 선을 행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12). 안식일에 양을 살려내는 것이 선이라면, 안식일에 생명을 회복하는 일은 당연히 선합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환자에게 손을 뻗도록 명령하는 것으로 치유하십니다(13).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이 쉼을 누리는 복된 날, 억압이 아니라 지친 영혼을 해방하는 날이고 즐거움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긍휼을 베풀어 안식일의 원래 목적과 의미를 성취하시고 유대인들이 왜곡한 안식일을 창조하신 목적이며, 생명을 살리는 일은 언제나 긴급한 일이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날이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곧바로 고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복음의 혜택을 누리는 날에 안식일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안식일은 한 손의 장애로 안식을 누리지 못한 인생이 치유받기에 가장 적합한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므로, 안식일보다 크신 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려고 안식일의 주인을 고발합니다. ‘하지 말이야 할 일’에 사로잡혀 ‘해도 되는 일’의 여백도, ‘해야 하는 일’의 사명도 잃었습니다. 이 모순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우리 손을 주 앞에 내밀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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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1-03)


세례 요한이 선포한 새 시대

마태복음 11장 20-30절


결혼식이나 대사가 있을 때, 잔치에 초대하는 청첩장이나 초대장을 보냅니다. 그 초대장대로 가면 잔치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당연히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천국의 초대장입니다. 이 초대장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거절하는 사람은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베푼 일에 대해서 적절히 반응하지 않는 마을들과 가버나움을 정죄하시고 자신의 사역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사람들의 의외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과 이에 대한 운명, 제자들의 반응과 이에 대한 운명을 대조적으로 설명합니다. 권능을 경험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도시를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어린이와 같은 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며, 사람들을 안식으로 초대하십니다.

 

회개하지 않은 영혼들(20-24)

진정한 ‘안식(安息)’은 주님과 만남에서 시작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삶에 지친 인생에게 진정한 안식을 선물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 내게로 오라’고 명하십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쉼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20-24)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가장 많은 행했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꾸짖기 시작하셨습니다. 기적을 베푸신 갈릴리 도시들-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능의 행위에 대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능력의 행위에 대해 예수님께 기대하신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요구한 것으로, 하늘나라가 임할 때 사람들이 보여야 하는 반응입니다(3:2; 4:17). 만일 이방 도시인 두로와 시돈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다면, 그들은 요나의 메시지에 반응했던 니느웨 사람들처럼,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은 문제는 소돔이 멸망한 이유보다 더 심각하여 가버나움의 불길한 운명이 예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하늘나라 사역의 본부로 삼았고(마 4:13; 9:1), 많은 기적을 이곳에서 행하셨습니다(8:5-17; 9:1-34). 이는 이방의 갈릴리에 빛이 비친 것으로 예언의 성취를 의미했습니다(4:14-16; 9:1-2). 가버나움은 음부에 보내질 것입니다(23). 은유적으로 우주에서 가장 낮은 곳인 음부는 교만한 대상의 운명을 묘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운명을 위해 사용한 본문은 이사야 14:13-15입니다. 이 본문은 바벨론 왕(느부갓네살)의 운명으로 설명하는데, 구약 본문 역시 하늘과 음부를 수직적으로 배치해서 하늘에까지 올라가려고 할 만큼 교만한 바벨론이 음부(스올)에 떨어지게 될 운명을 강조합니다. 바벨론 왕은 하늘을 상징하는 높은 산에 오르려고 멸망했으나 깊은 구덩이로 떨어집니다. 가버나움은 바벨론 왕의 운명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을 사용하십니다(24). 유대인들은 소돔 땅을 가장 악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경고를 목적으로 소돔을 자주 활용했습니다. 유다서에서 소돔 사람들과 타락한 천사들은 창조 질서를 거스른 죄를 지은 것으로 불 심판을 받은 것으로 묘사됩니다(참조. 23). 메시아를 만난 특권을 가진 가버나움의 죄는 소돔의 죄보다 더 큽니다. 가버나움(과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기적과 복음을 경험한 특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교만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아는 데 실패했고, 높은 교만의 정반대 개념인 낮은 음부가 운명이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도래했기 때문에, 이 나라를 가지고 온 메시아에게 반응하지 않는 자들의 운명은 음부에 있는 자들과 같게 될 것입니다. 특권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기대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가버나움은 메시아를 드러내고 하늘나라의 도래를 알리기 위해 가장 많은 기적을 경험하고 복음을 듣는 특권을 얻었으나, 회개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버나움은 하늘나라의 현존을 경험한 특권을 누렸지만,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몰락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운명과 초대(25-30)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친 사람들에게 쉼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며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자고 하십니다. 참된 쉼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주님께 맡겨야 쉼이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 배우고 도움을 받아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이 주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5-30)

예수님께서는 악하기를 소문난 세 도시 두로와 시돈 그리고 소돔과 비교하면서, 이 도시들이 당한 심판보다 더 크고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의 운명과 달리 제자들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25). 하나님께서 계시를 슬기롭고 똑똑한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십니다. 이는 아버지와의 친밀한 신뢰 관계를 의미하고 하나님과의 예수님만의 독특하고 유일한 관계를 내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뜻하는 이 모든 것을 아들을 통해 제자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이 어떤 것이든 잘 파악하고, 어린아이들은 어려운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과 같이 자신들의 지식이나 선입견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깨닫게 하십니다(예/18:14). 예수님께서는 소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깨닫게 된 것을 아버지의 기쁜 뜻으로 이해하십니다(26). 마태는 ‘보좌 앞의 회의’, 즉 ‘코람데오’를 묘사하려고 ‘당신 앞’을 사용합니다. ‘앞’은 하늘 법정(또는 회의)의 공간적 장면을 암시한다면, 본문에서 가리키는 ‘아버지 앞의 뜻’은 하늘 법정(회의)에서 선포된, 예정된 하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정된 목적 또는 뜻을 전달하는 것은(마 11:26) 예수님의 선재성을 의미합니다. 아들은 하늘에 숨겨진 ‘모든 지식’을 선언할 수 있는 모든 권세를 받았습니다(참조, 단 7:13-14). 아들은 하늘(법정 또는 회의)에 선재한 아들이요, 하늘의 하나님 옆에 앉아 있던 신적 지혜이기에, 하늘의 뜻을 전하는 예수님의 권위는 절대적이기 때문에,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를 알 수 없습니다. 제자 공동체는 어린아이들로서 이 지식을 알기에 구원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친밀하고 유일한 관계를 언급하고 나서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28). ‘내게로 오라’는 지혜를 향한 초대이며, 초대의 결과는 29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두 마리의 짐승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목에 설치하는 도구로 은유적으로는 순종, 섬김 등을 뜻합니다. 토라의 멍에(시락서 51:26)라는 표현을 고려하면, 예수님의 멍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돕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왜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까? 첫째, 예수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친절한 성품이 아니라 겸손한 태도를 가리킵니다(5:5).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도 온유로 표현됩니다(21:5). 이 단어는 ‘낮아진’ 예수님의 삶을 가리킵니다. 낮아진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수치의 정점인 십자가에 달리는 길을 가십니다. ‘낮아진’(개역개정 ‘온유한’)은 이어서 나오는 ‘겸손한’과 같은 의미입니다. 구약의 몇 본문에는 ‘온유한’과 ‘겸손한’이 함께 등장합니다(이사야 26:6; 스바냐 3:12). ‘겸손한’은 낮춘다는 의미입니다. 18:4의 ‘낮춘다’는 수치를 겪는다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짐은 그가 겪은 수치를 의미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멍에는 좋고 그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쉬운’은 주인의 배려를 의미하는 ‘좋은’, ‘적합한 등의 뜻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제자의 인생에 가장 적합한 것이고 긍휼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짐은 실제로는 가볍지 않기 때문에(16:24), ‘가볍다’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의 삶은 낮아지고 희생하신 예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짐은 쉽게 느껴집니다. 또한 예수님의 멍에(가르침)는 회복을 목적으로 주시는 것이기에 가볍습니다. 그의 쉼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진리를 깨닫고 행함으로써 얻는 만족이며, 종말론적으로는 영원한 나라에서 안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히 4:3). 특히 희생하시는 예수님과의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얻게 되는 안식은 12:1-14에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육신하셔서 우리 개별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낮아지고(온유하고) 낮아져서(겸손해서) 십자가에서 온갖 수치를 당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인생에서 지치고 해답이 보이지 않아 좌절할 때 유일하게 안식할 곳은 예수님의 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초청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이끄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요즘 자신의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입니까? 무겁게 그리고 무섭게 짓누르며 안심과 쉼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짐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안식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우리의 모든 짐뿐 아니라 자신을 주님께 맡기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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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1-02)


새 시대의 도래를 선포한 세례 요한

마태복음 11장 11-19절


천국이 이 땅에 임하였지만, 모두 그 나라의 백성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눈앞에 천국을 두고도 놓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참된 생명의 길이 있음에도 굳이 사망의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천국 백성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요한의 정체를 말씀하십니다.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 그가 온 것이 구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직설적으로 묘사하십니다. 그의 시대적 위치와 역할이 도드라집니다. 세례 요한은 ‘그 엘리야’이고 예수님께서는 ‘오실 그 메시아’입니다. 이렇게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역사적 무대에서 운명적으로 묶여 있습니다. 이 세대는 그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의 정체(11-15)

천국 백성은 비판보다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비판하고 흠잡기에 골몰하느라, 구원의 주를 눈앞에 두고도 놓쳤습니다. 세례 요한의 금식을 귀신 들림으로, 교제하는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합니다. 구원은 진리에 반응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2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11-15)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는 표현인 ‘아멘(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로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은 여자들이 낳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이 말은 요한의 인물됨이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드러내는 역할에 있어서 크다는 뜻입니다.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요한의 정체를 언급하십니다. 요한은 말라기 3:1을 성취하는 역할을 맡아 백성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그들을 앞서 갑니다. 이 사역은 요한을 옛 시대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로 만듭니다(눅 7:28).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위대합니다. 옛 시대와 새 시대 사이의 차이는 매우 커서 새 시대에서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큽니다. 요한은 약속 혹은 기대의 시대와 성취의 새 시대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합니다. 그는 옛 시대의 마지막 인물이면서 새 시대를 시작하는 메시아의 선구자입니다.  구원사의 관점에서 이제 하늘나라가 11:5의 설명처럼 강력하게 도래했고 5:3-10의 가르침처럼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의 복을 누리는 시대가 왔기 때문에 이 나라에 들어와서 구원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요한보다 더 큽니다.

12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폭력을 가하는 자들이 그것을 강제로 뺏고 있다.’ 첫째, 하늘나라는 요한 이래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고난은 하늘나라가 온 표시입니다. 요한의 때에 하늘나라는 임해 있으나 폭력적인 저항을 만납니다. 폭력은 헤롯 안티파스와 유대인들이 요한을 반대해서 보인 모습입니다요한이 폭력에 목숨을 잃은 것은 요한의 시대에 이미 하늘나라가 임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이 폭력을 경험할 뿐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폭력적인 자들이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늘나라를 공격하는 일은 요한의 때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오늘날 교회 시대에도 일어납니다. 둘째,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언한 요한이 고난을 받은 사건은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언하고, 그 나라를 가져온 메시아의 고난을 예고합니다. 셋째, 본 단락이 요한의 정체에 대한 내용임을 고려할 때, 요한의 고난선지자의 신분을 증명합니다. 마지막 선지자이면서 엘리야의 역할을 수행한 요한은 역시 선배들의 고난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신분입니다.

요한은 모든 선지자들과 율법, 곧 구약이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13절에서 언급한 선지자들이 전한 예언을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마지막 선지자인 요한은 바로 다시 올 엘리야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34). 요한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확인해주는 표시입니다. 요한의 정체를 선지자와 엘리야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요한이 가리키는 대상인 예수님의 정체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 받는 요한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돌아온 엘리야인 요한은 새 시대의 도래를 선언했지만, 옛 시대의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고난을 겪습니다. 고난’, ‘선지자’, ‘엘리야’, ‘하늘나라의 선포는 서로 연결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늘나라를 선포한 것과 고난을 겪는 것을 통해서 그의 정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한편, 요한이 돌아온 엘리야라면 이스라엘이 보여야 하는 반은 회개인데, 그들은 요한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요한을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된 엘리야로 알았다면, 이 엘리야가 올 때 보여야 할 회개로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폭력으로 갇히자 실망한 사람들의 시야가 흐려져서 요한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결국 예수님에 대한 오해로 이어집니다. 마태의 독자들 역시 ‘고난’ 때문에 하늘나라를 이해하는 시야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고난이 하늘나라의 핵심적인 요소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은 선지자이기 때문에 폭력에 의한 고난을 경험합니다. 요한의 고통은 그가 선지자임을 증명합니다. 무엇보다도 12절은 하늘나라의 특징이 고난임을 알립니다.

 

예수님과 요한의 정체(16-19)

천국 백성은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하며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영광으로는 천국 백성의 영광을 묘사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행복으로는 천국 백성의 행복을 표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천국 백성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16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6-19)

 

이 시대는 요한과 예수님을 모두 거절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심술을 부르면서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시장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을 부르는 아이들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16). 마태복음에서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이 세대는 예수님과 요한을 반대한 자들입니다(12:39-42; 16:4; 17:17; 23:36; 24:34). 요한이 하늘나라를 선포했으므로 이들이 요한을 거부한 것은 하늘나라를 거부했다는 뜻입니다. 이 세대는 시장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에 비유됩니다. 시장은 공공장소를 가리킵니다. 한쪽 아이들은 다른 쪽 친구들이 춤을 추도록 피리를 연주하고, 울도록 애곡했습니다(17). 전자는 결혼 놀이를, 후자는 장례식 놀이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친구들에게 춤과 애통을 요구하는 쪽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17-19절에서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어느 쪽 아이들에 해당합니까? 첫째, 견해는 요한과 예수님을 놀이를 요청하는 쪽, 이 세대를 놀이에 반응하지 않는 아이들로 보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고 애곡한 아이들은 예수님과 요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리를 연주해도(구원의 즐거움을 상징함) 반응하지 않고, 요한이 애곡을 해도(요한의 수도적인 삶을 상징함) 이 세대는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둘째 견해는 피리를 연주하고 애곡하는 아이들을 이 세대로 반응하지 않는 아이들을 요한과 예수님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둘째 견해가 적절합니다. 첫째, ‘이 세대’는 ‘부르는 아이들’로서 자신들의 놀이에 참여하지 않는 것에 불평합니다. 당시의 세대는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요한과 예수님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둘째, 아이들 요구한 순서는 ‘피리-춤’과 ‘애곡-울음’이었는데 만일 아이들이 요한과 예수님을 가리킨다면 순서가 요한과 예수님께서 활동한 순서와 정반대합니다. 춤과 울음을 요구한 이 세대는 춤을 추기보다 금욕적인 삶을 산 요한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울기보다 구원의 잔치와 같은 분위기로 반응하는 예수님(9:14-17)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이와 같이 악한 세대는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한과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사람들의 불만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행위로 옳은 것으로 평가 받습니다(19). 문자적으로 지혜가 ‘그녀의 행위들에 의해’ 의롭게 된다고 했을 때(눅 7:35에는 ‘행위’ 대신 자녀들로 나옴), 이 지혜의 행위는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 계획에 따른 행위 혹은 요한과 예수님의 가르침의 결과를 의미할 수 있고, 성육신의 지혜(잠 8:32-33)인 예수님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만일 둘째 견해를 따라 그리스도의 행위를 지혜의 행위로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구약에 나온 지혜입니다. 마태는 19절에서 지혜를 언급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25-30절에서 지하에 반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을 설명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왔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반응하지 않았지만, 지혜인 예수님의 행위는 그를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입증합니다. 예수님께 반응한다는 것,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희망에 예수님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응하는 것이 우선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초청에 응답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했고,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이 땅에 임하게 하려고 수고하셨습니다. 문제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 이 세대였습니다. 이 세대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며 세례를 베풀 때는 미친 사람 취급을 했고,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할 때는 타락한 세속주의자 취급을 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 치지 않는 모습과 같습니다. 결혼식 때 기뻐해 주지 않고, 장례식 때 슬퍼해 주지 않는 사람들처럼, 이 세대도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응답하지 않는 세대를 향하여 주님께서는 여전히 피리를 불고 계십니다. 믿음 있는 자를 찾기 위해 지금도 애절하게 피리를 불고 계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천국을 소개하고 그것에 들어오도록 초청하십니다. 기쁨으로 천국을 받아들릴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 태도를 분명히 하라고 응답을 촉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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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1-01)


메시아를 향해 질문하는 세례 요한

마태복음 11장 1-10절


신뢰하던 사람을 신뢰할 수 없을 때나 믿었던 사람을 의심하게 될 때, 우리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의심에서 믿음으로 돌이키는 첫째 단계는 자신의 곤경을 주 예수께 직접 가져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자세가 옳은 것인지 질문하는 것은 전혀 죄가 아닙니다.

 

이제 11-12장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증거 했던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사역에 대해 직접적으로 보질 못했습니다. 보내 예수님께 오실 메시아가 맞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듣고 본 그대로 전하라고 하신 후에 세례 요한 사역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사역에 대한 요약(1)

제자는 스승을 따르고 그의 가르침을 배우는 자이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스승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면서 그 스승을 닮아가는 이들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훈련하여 추수를 위해 보내시면서 천국 복음을 어떻게 증거하고 전할 것인지, 그리고 수반되는 어려움과 핍박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준비합니다.

 

1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1)

 

본 절은 예수님께서 10장의 제자 파송 강화를 마무리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불러 권능을 주시며, 천국 사역에서 마주할 다양한 현실들을 생생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을 위한 가르침을 마치고 또다시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 여러 동네로 떠나가십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제자 파송과 사역 내용이 소개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6:12-13)와 누가복음(9:6)는 짧게나마 그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보고합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분리되어 홀로 갈릴리 마을들에 가서 사역하신 것으로 두 번째 강화를 매듭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연약한 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또한 그 제자들도 예수님과 사역을 동일하게 진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사역이 마무리 되어 갈 때, 새로운 이야기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이제 새로운 무대(11-12장)를 준비하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세례 요한의 두 가지 질문(2-6)

전쟁터에 나가서 죽었다고 통지가 왔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면, 대부분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들 ○○이 맞냐?’라고 여러 차례 묻고 확인하고 또 확인할 것입니다. 본문에도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사역을 듣고서, 다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메시아에 대해 질문하고 있습니다.

 

2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2-6)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첫 만남은 요단강이었습니다. 그 후 요한의 투옥 사실이 갑자기 소개됩니다(4:12). 투옥 사유는 요한이 헤롯 왕가의 스캔들을 꼬집어 헤롯의 눈엣가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요한은 서사 무대에서 점점 사라지고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후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 나와 금식에 대한 문제를 질문합니다(9:14).

본문에서는 감옥에 투옥되어 있던 세례 요한의 공식적인 반응을 소개합니다. 그는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펼친 그간의 사역을 들었습니다.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에는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는 그 메시아임이 사역을 통해 확증되었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 일은 가르침, 복음 전파, 그리고 병고침을 통해 천국을 가져오는 일입니다. 요한이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들이었습니다.

 

(1) 요한의 질문들(2-3)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요한이 생각하고 기대한 메시아 사역은 그가 했던 ‘주의 길을 예배하는 회개와 세례 사역’에 나타나 있습니다. 즉 그는 메시아가 와서 손에 키를 들고 타작해 알곡은 들이고 쭉정이는 영원한 불에 태우는 구원과 심판의 사역을 하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3:12). 하지만 감옥에서 들은 예수님의 사역은 그 기대와 사뭇 달랐습니다. 요한은 임박한 종말과 메시아의 심판의 사역에 무게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두 번째 질문으로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덧붙입니다. 요한은 자기가 확신한 메시아 사역을 간절히 기대하는 심정에서 이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마태는 지금 요한의 질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다시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대답(4-6)

예수님께서는 직답 대신 현답(賢答)을 주십니다. 우선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지금까지 ‘듣고 보는 것’을 그대로 전하라고 하십니다. 순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듣고)과 곧이어 등장했던 예수님의 사역(보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앞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금식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을 볼 때, 그들은 예수님과 오랫동안 동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지금까지 본 것을 여섯 가지 일들로 말씀해주십니다. 전부 이사야의 예언을 반영합니다(순서대로 사 29:18; 35:6; 25:4; 29:18; 26:19; 61:1). 세례 요한도 등장할 때, 마태복음 3:3에서 이사야 40:3의 예언을 인용한 바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련의 일들이 전부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아의 사역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더욱 확신을 심어주시려고 자신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되다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세례 요한의 실족을 염려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현장의 제자들에게 둘려주시는 말씀이고, 궁극적으로 마태복음을 읽는 모든 성도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 실족하는 사람들은 드물 것입니다. 하지만 장차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는 이 말씀이 더욱 실감나게 들릴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대답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참수로 순교를 당했을 것입니다(14:1-12).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7-10)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를 보려고 광야로 나갔으면서도 그가 선포한 메시아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관심사에 사로잡혀 말씀 앞에 나아갈 때 그 말씀이 가리키는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7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7-10)

 

요한의 의심과 솔직한 질문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의 신앙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뒤에 모인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 말씀하십니다.

 

(1) 광야의 세례 요한(7-9)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자리를 떠난 후,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향해 요한과 관련해 말씀을 좀 더 이어가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향해 ‘너희는 무엇을 보기 위해 광야에 나갔더냐?’라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 질문은 세 번 반복되는 수사적 질문입니다(7,8,9). 질문을 받은 무리 중에는 요한이 광야의 소리로 사역할 당시 회개의 세례와 죄 사함을 받기 위해 갔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과 온 유대 사람들이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3:5). 그때 그 감정을 다시 들춰내듯 질문하십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광야로 몰려갔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질문에 또 다른 질문으로 답변하는 수사적 형식으로 무리의 마음을 꿰뚫으십니다. 질문의 답은 모두 ‘아니다’로 유도됩니다. 먼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나갔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서 ‘갈대’가 누구 또는 무엇을 지칭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대개 ‘요한’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 이미지의 정반대가 요한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우유부단함을 상징합니다. 요한은 왕실 권력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죄를 지적했습니다. 그의 삶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정결한 삶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무리가 광야로 나가 바로 그 요한을 본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과 답변에 나오는 은유는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은 왕궁에 있다고 하시며 대상을 구체화해주십니다. 향락과 권력에 심취한 채 화려한 삶을 영위하는 자들은 광야가 아닌 왕실에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헤롯 안티파스가 있습니다. 광야의 요한은 그와 정반대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3:4)이었던 금욕적 삶을 살았습니다. 무리가 광야에서 마주했던 인물은 광야의 걸인과 같은 초췌한 몰골의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질문과 함께 말씀하시는 비유는 ‘선지자’입니다. 무리에게 선지자를 보러 간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이번에는 긍정적인 대답 ‘맞습니다’를 기대합니다. 모두가 요한을 선지자로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압제와 부패한 성전 유대교로부터 당하는 착취는 서민 유대인 정서에 해방을 가져올 메시아를 향한 열망을 부풀게 했습니다. 개중에 ‘혹 세례 요한이 메시아는 아닐까’라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뒤섞인 기대와 열망이 그들을 광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가리켜 ‘너희가 기대한 선지자보다 훨씬 나은 선지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선지자보다 낫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의미를 분명히 하려고 말라기 3:1을 인용하십니다. 말라기 본문은 하나님의 1인칭 시점으로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 할’ 것으로 소개하는 반면, 예수님의 인용은 같은 1인칭 시점이지만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고 소개됩니다. 메시아인 자신을 강조하시고 또 요한이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그’ 선지자임을 강조하십니다. 그의 사명은 유일하며 특별합니다. 그래서 다른 선지자보다 훨씬 빼어납니다. 오랜 역사적 침묵을 깨고 등장한 선지자, 오랜 역사적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 빛, 오랜 역사적 부패를 씻기 위해 하늘에서 온 정결한 소리로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그 선지자입니다. 요한은 천국의 도래를 가장 먼저 알았던, 세상 권력과 화려함에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메시지의 발화자였습니다. 그가 바로 빈들에서 외치는 광야의 소리입니다. 비록 불의한 권력에 의해 옥에 갇혀 있지만, 그의 사명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입니다. 요한은 역사적 대변곡점에 우뚝 서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일에 모든 생애를 불태운 선지자입니다.

 

(2) 선지자 중 최고 선지자(10)

요한이 예수님께서 ‘오실 그 메시아’(3)인지 묻고,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메시아 앞에 올 바로 ‘그 선지자’라고 답을 주신 셈입니다. 즉, 요한이 ‘그 선지자’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실 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을 소망으로 변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러 오신 구약 성경의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하였습니다.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메시아를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줄 이로 생각했고, 세례 요한 역시 마태복음 3장 11-12절에 그리스도를 불과 성령으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심판의 세례를 베푸는 자로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회를 변혁하거나 심판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거나 병자를 고치는 이를 주로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 대한 이런 의문은 당연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한 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이사야 35장 5-6절을 인용해서 성실하게 대답하여 주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누구든지 자신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말씀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그 권위에 도전하다가 심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심판을 받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찬 안식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믿는 모든 자가 하나님 나라에 평안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정서적 사회적 경제적 영적인 모든 절망을 치유하시고 소망으로 바꾸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런 사항 속에서도 주님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오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 안에서 하늘나라의 소망을 발견하시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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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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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로서 진실한 자세

마태복음 10장 34-42절


당신은 복음의 가치를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소중한 분입니까? 소중한 것의 가치를 모르고,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소중한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자는 소중한 것의 가치를 알고, 마음을 다해 소중히 여길 줄 압니다. 이 시간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임하고 그 나라의 왕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온 목적을 알려주시면서 이에 합당하게 행동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것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새로운 가족 관계로 정체를 규정하시면서 그 밖의 모든 관계를 상대화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합당하게 행동한 것에 대한 종말론적 결과가 언급됩니다.

 

평화보다 소중한 복음(34-39)

평화만큼 소중한 게 없고, 화목한 가정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평화는 소중하지만, 진정한 평화를 얻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 안에 진정한 평화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4-39)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결과를 알려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정확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을 언급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에 대해 ‘나는 ~하려고 왔다’라는 문장을 세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1) 검을 주시려 온 예수님(35-36)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땅의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십니다(34). 이 구절은 앞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사명을 맡기셨고, 평화의 사람들이 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도래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시대가 온 것이므로 평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가 완성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아직’에 기간에는 여전히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 사이에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은 이 땅의 가치관과 충돌을 일으키고 제자들은 고난을 받겠지만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제자들은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5절은 34절의 내용을 구체화하며 검의 이미지를 가정해 적용합니다. 검의 이미지는 38-39절에 있는 핍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오심으로 인해 가족 내 분리가 일어날 것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방식은 당연히 가족과 사회가 생각한 평화의 길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주는 고통을 가슴아프게 느낄 수밖에 없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의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가족만큼은 사명을 수행하는 자신을 이해하고 축복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족의 반대는 하늘나라와 땅의 나라 사이에서 충돌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제자들은 가족의 원수가 되지만, 예수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입니다.

 

(2) 제자들의 우선권(37-39)

예수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 예수님보다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기서도 예수님께서는 우선권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합당한’을 반복하여 강조하시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통과 수치를 상징했으므로 제자로 사는 길은 위험하고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상태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찾는 자는 멸망할 것이며 자기의 목숨을 멸하는 자는 목숨을 찾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 때문에’ 또는 ‘나를 위하여’를 사용해서 제자가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을 언급하십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본문에서도 고난의 이유가 예수님 때문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은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는 이 신비를 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덕에 명성을 얻으려 하거나 공동체에서 유익을 얻으려는 태도는 제자의 길이 아닙니다. 사람의 운명은 땅에서의 삶을 끝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종말론적 삶이 있습니다. 땅에서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최후 심판 이후의 목숨을 얻고 예수님을 첫째 목적에 두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찾는 사람은 비판받을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가 얻을 상(40-42)

제자들의 말과 삶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삶이고,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현현이기 때문에,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선지자나 의인이나 소자의 모습으로 복음을 전할 때 그 말씀을 믿고 제자들을 환대하면, 하나님께서는 냉수 한 그릇의 호의라도 잊지 않고 가차주실 것입니다.

 

40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0-42)

 

지금까지의 말씀을 통해 세상의 차가운 거절과 그것에 직면할 제자들이 치러야 할 제자도에 초점이 있었다면, 마지막 부분은 제자들이 경험할 긍정적인 반응으로 마무리 됩니다.

 

(1)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4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4절과 같이 40절도 예수님과 파송을 받은 제자들 또는 선지자들의 일체성 내지 동질성을 보여줍니다.

40절에서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의 현존과 임재’라는 개념이 나타납니다. 제자들을 환영함으로써 그들이 선포하고 보여주는 하늘나라의 도래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임마누엘’을 맛보게 됩니다. 파송 받은 자들이 머물러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평화가 주어집니다.

 

(2) 영접한 자에게 줄 상급(41-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얻을 것입니다.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얻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선지자와 의인을 짝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선지자와 의인은 비슷한 기능을 갖고 있는 직분입니다. 의인은 완벽을 추구하는 제자들을 일컫는 표현이며 그들의 의는 마지막 날에 들어날 것입니다. 선지자는 선포하는 사람이며 10장에서 선포되는 반복되는 소재입니다. 제자들은 과거 선지자들과 같은 사명을 맡은 위치에 있으며 선지자와 의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들입니다. 제자들을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은 그들을 선지자의 지위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의 상은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하는 결과로 하나님께 받게 될 보상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제자들을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로 그렇게 하신 것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시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를 가진 신분이었지만, 실제 현실은 소자로서 냉수 한잔이 절실한 신세가 됩니다. 유대교에서 소자들은 사회적으로 연약한 상태의 사람들 그리고 미성숙한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어린아이나 소자는 사회적 개념으로 낮은 지위에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시에 사회적 관점에서 작은 자들, 낮은 자들이었습니다. 42절의 ‘소자들’은 예수님의 파송을 받아 순회하며 전도하는 제자들 또는 선교자들을 포함합니다.

40-42절은 제자들의 신분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의미를 전달합니다. 첫째, 보냄받은 자에게 보낸 자의 권위가 주어집니다. 보냄받은 자를 영접하면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보냄 받은 자들을 위해 작은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하나님의 포상을 받게 됩니다. 둘째, 그만큼 그리스도의 존재 혹은 삶 자체가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0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는 강화에는 제자들이 사명을 수행한 내용이 없습니다. 즉 어떻게 전도했는지 보고 내용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은 제자들의 존재 자체가 전도 혹은 선교의 핵심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땅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 되므로 성도의 일거수일투족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마음, 특히 긍휼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아서 따라 행하는 제자들을 통해서 전파됩니다.

셋째, 권위를 부여받은 제자들의 모습은 소자와 같습니다. 선지자, 의인과 같은 직위를 가졌으나 사람들의 눈에는 소자로 보입니다. 예수님 당시 초기 교회에서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제자들은 냉수 한잔이 절실할 정도로 낮은 삶을 살았습니다. 역설적으로 작아진 제자는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통로입니다. 본문을 확대한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소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가져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 모습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길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제자들을 소자가 아니라 큰 자로 세우셨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이 많든 적든 상관없이 낮아진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드러납니다.

넷째, 제자는 환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줄 뿐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 배후에 또는 그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냉수 한잔을 받은 제자는 냉수 한잔을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제자는 긍휼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스쳐 지나가는 소자를 향해 긍휼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제자를 영접한 사람은 자제의 보상을 받게 되며, 제자 역시 소자를 환대라는 마음으로 대할 때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하게 됩니다. 긍휼이 순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자신을 부인할 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은 욕망과 죄의 본질로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사랑을 못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진 희생과 섬김의 길을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더욱 잘 따르기 위해서 버리고 내려놓아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도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걷기 위해 자신의 삶 가운데 자기 부인이 필요한 부분은 무엇인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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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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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세상을 살아갈 자세

마태복음 10장 24-33절


세상에는 많은 법칙과 규칙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전쟁터에서 장군을 사병들이 자기 몸보다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장군은 그 군대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법칙과는 반대로 실천하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호 받기보다 제자들을 위해서 먼저 어려움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희생의 법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핍박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24-25절은 본 단락의 서론으로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설정하고, 26-31절은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32-33절은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종말의 결산을 묘사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24-25)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제자들도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영광의 길이든 고난의 길이든 상관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스승보다 더 잘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스승을 닮고자 하는 마음은 품어야 합니다. 매 순간 제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4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24-25)

 

예수님께서는 22-23절에서 파송을 받은 제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도망 다니는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예고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이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 미움을 받는 이유와 근거를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핍박을 대해야 할 것인지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와 스승’ 그리고 ‘종과 상전’을 대조하는 격언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스승보다 높지 않고, 제자가 스승만 하다면 금상첨화라는 취지로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익숙한 스승 랍비와 제자 문하생의 관계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종과 상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이해하기도 했으니 이 두 비유는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대부분 촌부인 열두 명을 제자로 부르셨고, 일꾼으로 파송하십니다. 제자가 스승보다, 또 종이 주인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와 종은 스승과 주인을 적극적으로 따르며 그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 목적은 스승처럼 되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제자는 스승의 모든 것을 닮기를 애써야 합니다. 가르침은 물론이거니와 성품과 삶의 방식까지 닮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스승은 그 목적을 가지고 제자를 선택합니다.  열두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스승이자 주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운명을 따르는 제자이며, 예수님께서 이루시려는 하늘나라의 일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닮아 하늘나라 사역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나타난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자신의 권능을 주심도 그런 차원에서입니다그 다음에 등장하는 집 주인과 그 집 사람들의 비유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특별히 집주인을 ‘바알세불’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바알세불로 비유하신 것이 아니라, 앞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여 언급했던 표현입니다(9:34).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하고 폄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바알세불’이라 배척당하며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스승이자 주인인 예수님께서 그렇게 당하셨다면, 그를 따르는 제자와 종 역시 당연히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현재 문맥이 제자들을 향한 세상의 박해를 다루고 있기 떄문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박해자들이 받는 고난을 제자들 역시 받을 것을 강조하십니다(요 12:20). ‘집주인’인 예수님꼐서 박해당하니 그 ‘집에 속한 사람들’이야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집주인’과 ‘집사람들’의 설명을 덧붙인 것은 언어유희를 의도하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알세불’이 히브리어로 ‘제불(집)’과 베엘(주인)의 합성어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사탄을 가리키는 바알세불로 불렀기 때문에, 제자들도 더 낫게 불릴 것이라고 기대할 여지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강조하시는 점은 예수(보내시는 분)와 제자들(보냄 받는 자들)의 관계와 권위입니다. 특히 마태는 ‘-처럼 되다’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제자들의 소망이 예수님처럼 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제자는 스승과 존재론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스승처럼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그분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길에는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겪으신 어려움이 올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닮아가는 삶, 이런 과정에서 예수님과 깊은 사귐을 갖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복됩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진 예수님이 바알세불(귀신의 왕)이라는 조롱을 받았다면, 그 권능을 거저 받은 제자들 역시 그런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당한 비난이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실패로 여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했으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26-31)

예수님께서는 제한적으로 은밀하게 복음을 증거 하셨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드러나고 알려질 것입니다. 자기 목숨보다 순종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자기 명예보다 그리스도의 명예를 더 존중하며 땅보다 하늘에 재물을 쌓고 소망을 두는 사람을 예수님도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사랑한 자’로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26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26-31)

 

파송 받은 제자들이 가혹하고 적대 적인 대접과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하신 예수님께서는, 26-31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보살핌을 언급하심으로써 위험에 빠질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본 단락에는 세 번에 걸쳐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이 나옵니다(10:26,28,31). 각각의 명령에 이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제시됩니ㅂ.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에(10:26-27), 미래에 육체와 영혼을 모두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28), 하나님께서는 현재 주권적으로 보살피시기 때문에(20:29-31) 제자들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컨대, 제자들은 세 가지로 논증되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1) 드러내시는 능력, 2) 심판하시는 능력, 3) 돌보시는 능력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시므로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26-27).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그들’은 핍박하는 자들입니다ㅂ. 사람들은 진리를 억압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들을 핍박할 것이지만,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비밀리에 들은 내용을 모두에게 선포하라고 명령하십니다(27). 27절은 숨겨진 것이 드러난다는 맥락에서 앞절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하늘나라의 비밀은 하늘에 숨겨진 비밀이었고, 이제 예수님을 통해 계시 됐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은밀하게 시작됐으므로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하늘에 감춰졌으나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 드러난 예수님의 오심과 하늘나라 복음을 공개적으로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1:21-23; 4:17; 10:7-8). 제자들의 존재 목적은 하늘나라의 비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시작하신 하늘나라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은밀히 말씀하신 것을 제자들은 전파해야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은밀하게 오고간 대화, 그 속에 감춰진 예수의 말씀은 복음서 기복과 전파를 통해서 알려지게 됐습니다. 공적인 선포는 공에다 대고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며 28:20의 명령처럼 모든 민족을 향해 전파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인간의 능력 차이가 있으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28). 제자들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몸을 죽이지만 영혼을 죽일 능력이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몸을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참조, 눅 12:45), 오직 하나님만이 몸과 영혼 모두를 멸하실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돌보시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29-3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제자들을 특별하게 돌봐주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설명하실 때,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전개하는 방식을 따라서 참새를 예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참새 한마리는 1/32데나리온(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의 값이 칩니다. 매우 싼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새의 이야기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땅에서 벌어지는 일에 현재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너희 아버지’(5:16,45-46)는 제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특징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가족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친밀하게 돌보는 아버지이십니다. 제자들의 운명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있으며, 하나님의 손과 돌보심, 곧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ㅂ. 또한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제자들의 머리카락 수를 다 알고 계십니다(30). 머리카락의 수를 세는 일은 어떤 사람의 머리에 집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참새 한 마리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에 비해서 머리카락 한 가닥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당사자 자신도 감지하지 못하게 일어나므로, 하나님은 제자들이 느낄 수 없는 부분까지도 알고 계시며, 그만큼 친밀하게 돌보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30절의 핵심은 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앎,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제자들이 핍박을 받고 죽음에 이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잘 알고 계시고 불쌍히 여기며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인생의 불행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 가운데 일어난 일이므로, 그 순간도 하나님이 보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신뢰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행위에 대한 종말의 결과(32-33)

세상 두려움을 이기려면 하나님을 향한 참된 두려움을 품어야 합니다.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요,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입니다. 진짜 두려움이 들어올 때, 거짓 두려움은 힘을 잃습니다. 모든 두려움이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32-33)

 

본문은 하늘 법정의 장면과 땅의 장면을 대조합니다. 하늘 의회 또는 하늘궁정이 종말에는 최후 심판을 집행하는 법정의 기능을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 법정을 암시하는 표현은 법정 용어와 전치사 ‘앞’입니다. 이 전치사는 하늘 법정에서 재판관과 하늘의회 구성원들 사이의 위치를 알려 주는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참조, 25:32, 다니엘 7:13). 다시 말해서, ‘앞’은 ‘하나님 앞에서’를 뜻하는 코람데오 정신을 떠올립니다. ‘지인하다’와 ‘부인하다’는 법정 용어들이며, 전치사 ‘앞’과 함께 결합돼 하늘(법정)과 지상(법정)을 대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향한 내용으로 확대하기 위해서, ‘누구든지를 사용하십니다. 32-33절에는 경고의 분위기가 담겨 있습니다. 32-3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땅에서의 행위와 하늘 법정에서의 반응을 대조하며 종말론적인 시각으로, 현재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도록 가르치십니다. 모든 인간은 이 땅에서 행한 것에 대해서 하늘 법정에서 결산을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느냐에 따라 이 땅에서의 경외심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시고 귀히 여기십니다. 그분은 크고 두려운 분이지만, 동시에 세밀하고 부드러운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크고 중요한 문제들 뿐 아니라 자꾸 사소한 일에도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혹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가 되기로 결단하기는 쉬워도, 끝까지 제자의 삶을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매 순간 자신이 주님의 제자임을 기억하고, 참 두려움으로 거짓 두려움을 이기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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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0-02)

 


복음 전하는 제자들의 자세

마태복음 10장 16-23절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보내시는 분입니다. 구원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사명으로 우리를 보내십니다. 구원의 초청으로 주의 자녀가 된다면, 사명의 순종으로 통해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걸어가는 길은 지혜롭고 순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간교한 사람이 됩니다. 순결하지만 지혜롭지 못하면 고지식하고 무지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지혜롭고 순결한 삶을 살아갑니까?

 

예수님께서는 파송된 제자들에게 필요한 행동지침을 말씀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공급해준 능력으로 천국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환영받지 못할 뿐 아니라 핍박도 받을 것임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외면하겠지만 성령님이 도우시니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의 박해를 마주할 제자들(16-18)

하늘나라의 복음 전파 과정에서 사탄의 방해는 필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그들에게 당부로 시작됩니다. 제자의 길은 스승처럼 두려운 고난의 길입니다. 위협하는 이리도 있고, 가로막는 걸림돌도 있습니다. 끌려가기도 하고 고초를 당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 않으려고 거절합니다. 하지만, 신실한 제자라면 아무리 어려워도 그 길을 가야 합니다.

 

16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16-18)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권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만날 어려움을 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숨기지도 않으셨습니다.

 

(1) 위험한 세상(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는 것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마치 양들을 늑대 우리 속으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그곳은 사지(死地)와 같은 곳입니다. 그들이 폭력을 경험하게 될 것을 예고하기 위함입니다. 늑대와 양은 먹고 먹히는 구조입니다. 구약과 유대 전통에서 늑대와 양이 함께 등장하는 모습은 민족들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림을 전도자들이 만나게 될 외부의 위협을 알리기 위해서 사용하십니다. 파송 받는 제자들은 양처럼 핍박에 맞설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겉은 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바리새인들을 염두해 두고 하셨겠지만, 적대적인 세상에서 살면서 복음을 증언하고 사는 모든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교회 밖을 향해 사명을 수행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늑대’는 교회밖에 위협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사명을 감당할 만큼 권능도 같이 주셨지만, 사명은 쉬운 길을 아니란 것입니다. 복음이 강하기 때문에 평안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환영한 길은 아닙니다.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왜 목자가 양들을 이리에게로 보내겠습니까? 참 목자라면 이리에게 가지 못하도록 양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강한 대상에게 보낸다는 것입니다. 놀랍지만,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일을 행하시는 것은 계속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제자들에게 조언을 주십니다.

위협에 직면하게 될 제자들은 두 가지를 가지라고 권고합니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혜’와 ‘순결’입니다. 세상에 속한 악한 사람들에 비하면 성도들은 순진합니다. 너무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악한 꾀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혜를 가지란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순진한 것이 아니라 악을 이길 수 있는 지혜를 가진 것입니다. 악한 꾀에 빠지지 않으려 하다보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악해져 갈 수 있습니다. 심령에 거룩함과 순결성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양극단을 설명했던 것입니다.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뱀처럼 지혜로워야 하지만, 또한 비둘기처럼 순결한 사람들이 되길 바란 것입니다. 제자들이 더러워서도 안 되고 미련해서 안 됩니다. 세상을 향하여 지혜로워하지만 순결한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로서 걸어가는 길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권세를 잡은 사탄이 자신의 나라를 위협하는 제자들을 내버려 두지 않고 핍박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한 가지 권능이나 달란트가 있다고 일상적인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종종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가지고 세상을 모두 구할 것 같이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작은 지혜를 가지고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것처럼 교만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의 상대는 만만치 않습니다.

 

(2) 유대인과 이방인의 반응(17-18)

제자들이 아무리 뱀처럼 지혜롭게 행동한다고 해도 핍박을 당하는 현실에 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17절에서 유대인들의 핍박을, 18절에서 이방인들의 핍박을 예상하십니다. ‘공회’(산헤드리아)는 여러 지역의 공회일 것입니다. 그들의 회당은 유대인들의 회당이므로 본 단락의 핍박은 유대인들에 의해 받는 핍박을 가리킵니다. 핍박을 받는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22). 당시 사형에 해당하는 것과 같은 매우 심각한 범죄는 로마 법정에서 다뤄졌기에, 제자들은 심각한 죄인들로 이방 법정에 세워질 것입니다.

여기서 총독들과 임금들은 로마 제국에 속한 통치자들로서,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뿐 아니라 이후에 제자들의 운명을 알리는 내용일 수 있습니다(참조. 총독-사도행전 13:6-12; 18:12-17; 23:23-25:12; 왕들 12:1-4; 25:13-26:32). 앞 단락(5-15)에서 제자들은 이스라엘로 보내졌으나, 본 단락에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결과로 이방 지도자들과 왕들 앞에 서게 된다고 말합니다.

 

모든 상황을 주도하시는 하나님(19-22)

복음이 가정의 평화를 불러와야 하는데, 때로 아픔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제자는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기도 하고, 억울함을 겪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중도에 포기합니다. 참된 제자만이 이 길을 끝까지 고수합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났던 길은 무시무시한 길이 놓여 있습니다.

 

19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7-22)

 

제자들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기 위해 법정에 세워집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서서 위협을 느낄 때, 어떻게 자신을 변호할 것인지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19). 하나님께서 할 말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갑자기 성령님이 언급됩니다(20). 성령님께서는 위기와 어려운 때 제자들을 도와주십니다. 성령님께서 도와주신다는 점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운명을 따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데,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함께 언급됩니다.  가족도 제자들의 선교 사명을 막을 것입니다(21). 가족에게서도 미움을 받을 것인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22).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10:32-33) 사람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내 이름 때문에’는 제자들은 그들과 예수님과의 연대성 때문에 핍박을 받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상 세상이 미워하는 대상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참조, 24:9-10). 그런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지혜롭게 복음을 전하더라도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는 것과 같은 여러 형태의 반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시련은 회복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생하며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시험의 순간이 될 정도로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 제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성부께서 성령을 보내 종들의 여정에 함께하시고 위기에 처한 그들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가족 간의 비극이 일어날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더라도, 예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셔서 신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핍박이 언제나 따라다니던 초대 교회에서는 평안함이 낯선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핍박이 낯선 것이 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앞서 핍박을 받으신 예수님과 인격적 사귐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전하고 그의 뜻을 실현하려고 노력할수록 여러 모양의 어려움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선한 삶으로 복음을 전할 때, 또는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려고 애쓸 때 어려움을 겪기 마련입니다. 이런 과정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입과 동행을 경험하는 복된 기회입니다. 또한 핍박이 없는 나라에서 사는 신자들은 여전히 핍박 가운데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 특히 선교지의 선교사들과 신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의 핍박을 끝까지 견딤(23)

제자의 길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그 길이 영광과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있지만 영원하지 않습니다. 번민과 아픔이 있지만 영원하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승리의 길이요, 영광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영광스러운 부활로 귀결되었듯이 말입니다.

 

23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23)

 

본절은 인자가 오는 때입니다. 따라서 22절과 23절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메시아의 사역은 동네에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이제 제자들이 이 일을 맡게 됩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핍박을 받아 이 동네 저 동네로 피할 것입니다. 선교는 핍박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핍박 때문에 ‘증언’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핍박을 피해서 이스라엘의 도시들을 다니지만, 제자들이 겪는 핍박과 선교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와서 미움을 견디는 제자들을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피난처로 삼기 전에 인자가 오십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는 팔레스타인 밖의 영역을 포함하지 않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스라엘에서 피해 다니는 것을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이 핍박받는 것으로 확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 혹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인자가 오기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피난처를 찾지 못하고 그곳을 떠날 것입니다. 1세기의 제자들과 이후의 교회는 인자가 오기까지 이스라엘의 선교를 완성하지 못하겠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선교는 계속해서 수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에서 신자이고, 예수님을 따르고 배운다는 점에서 제자이므로, 성도가 곧 제자입니다. 제자가 더 높은 단계의 성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로 부름 받는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제자로 부름 받는다는 사실 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라면 복음 파송을 받은 이들로서 예수님께서 경험한 시련을 공유하는 길을 가며, 제자들은 ‘종’이신 예수님의 길을 가는 ‘종들’입니다. 이처럼 주의 종들(=신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주의 종이신 예수님을 깊이 배울 수 있습니다. 인자의 오심, 즉 재림이 반드시 있기 때문에, 신자는 두렵고 떨림으로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제자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두려운 고난의 길을 걸으셨고, 번민과 아픔도 감내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가는 길에도 성령님께서 함꼐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두려운 상황에서 마땅히 말할 것을 주십니다. 근심과 걱정, 염려와 불안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않고 자신의 힘으로 위기를 넘기려고 할 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해결할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위기까지도 기회로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승리하셨듯이, 주의 제자인 우리도 승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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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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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를 임명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01-15


종종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부분으로 사용답기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부분에서 사용되면 사용됐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한 번은 하나님께서 이런 부분에 사용하시면 좋을 것인데.’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임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전하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도록 제자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사도로 임명하신 후, 자신의 권능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송하시며, 전도자의 자세와 필요한 것, 그리고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1-4)

진정한 제자는 예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을 온전히 따르는 것입니다. 거짓 제자는 예수님을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면서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든지, 원치 않는 길로 가라고 할지라도 순종하는 진실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1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1-4)

9:37-38에서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긴박한 상황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본 단락에서는 제자들을 일꾼으로 추수할 곳에 보내시는 장면입니다.

 

(1)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심(1)

예수님의 제자를 열두 제자로 특정하신 것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열둘을 세우신 것은 분명한 의도하신 바입니다. 하늘나라 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한 것입니다(19:28). 지금껏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하늘나라 사역의 목격자로서 동행했습니다. 이제는 본인들이 직접 그 사역의 당사자들로 보냄을 받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 전에 그들을 세우시고, 자신이 보여주었던 귀신을 쫓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십니다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4:23;9:35;8:16) 권능을 부여하십니다(1). 예수님의 사역을 특정했던 가르치심은 등장하지 않습니다(4:23; 9:35). 예수님께서 주신 신적 권능으로 제자들은 그들 안에 있는 하늘나라의 실체를 경험합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어둠의 세력, 사탄의 권세를 제압하며 죄 된 현실 속에 뒤틀린 육체와 영혼을 치유합니다. 제자들을 통한 권능의 사역은 곧 권능의 주체이신 예수님의 사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권능은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2) 열두 제자의 이름(2-4)

본 절에서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공개합니다. 한참 후에 일어날 가룟 유다의 배교까지 포함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사도’(2)는 파송하는 주체인 예수님의 권위를 강조하고, 예수님의 임명을 받은 것이므로 제자들의 권위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맨 먼저 등장하는 네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일찍이 부르신 다섯 명 중에 초반 네 명입니다(4:18-22). 열두 제자의 명단에서 가장 먼저 시몬 베드로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때 함께 부름 받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뒤를 잇습니다. ‘첫째를 뜻하는 프로토스는 베드로의 으뜸인, 특별한 위치를 의미합니다. 그는 12 제자들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16:16-19). 베드로의 이름이 맨 앞에, 유다가 맨 뒤에 기록된 것은 의도적입니다. 시몬은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첫 번째로 선호하던 이름이었기에, 식별을 위해 반석을 뜻하는 페트로스게바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그리고 제자 목록에서 가룟 유다를 맨 끝에 둡니다. 유다가 제자들의 서열에서 열두째였다는 뜻이 아니라, 가장 불명예스러운 제자임을 의미합니다. 네 복음서의 목록은 공통적으로 베드로, 빌립, 야고보를 각 그룹의 맨 앞에 배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미 보여주신 사역을 제자들에게 명령하심으로써, 제자의 사명은 예수님을 닮는 것임을 가르치십니다(1). 예수님께서는 8-9장의 핵심 주제인 권위를 긍휼을 베풀기 위해 사용하셨기 때문에 긍휼의 사역을 하도록 제자들을 부르시고 권위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목자 없는 양처럼 낙담하고 지쳐 주저앉은 사람들과(9:36) 질병과 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쓰러진 사람들(10:2,8)을 회복하는 일에 부름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파송 받을 때 사도’, 즉 보낸 자의 권위를 주신 것처럼, 예수께서 교회와 지도자들에게 치유하고 회복하는 사명과 권위를 위임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께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부르심의 우선권은 예수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할 권위를 부여받은 자들일 뿐, 그들에게 내재된 권위로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이 아닙니다마지막으로, 사도인 제자들의 정체성은 그들을 보내신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됩니다. 제자들의 주된 과제는 그들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1절의 명령을 수행하는 삶이 예수님을 배우는 삶입니다.

 

열두 사도의 파송과 사명(5-15)

보냄을 받은 자사도라고 합니다. 사도의 권위는 보내신 이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보내신 이의 주권을 선포하기 위해 보내신 곳으로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의지할 것 없습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은 그만큼 책임지신다는 약속입니다.

 

5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9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5-15)

본문은 갓 부름 받은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선교 전반에 대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느 마을로 가든지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그 집에 머물라고 명하십니다. 무례해서는 안 되지만 당당함을 잃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어느 성이든지 영접하지 않으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떠나라고 명하십니다. 주께서 그 완악한 마을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1) 사역 범위(5-6)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주시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가장 먼저 명령하신 내용은 전도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대상자를 제한하고 특정하는 것이 놀랍니다먼저, 지역적으로는 갈릴리에 제한되는 모습입니다.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도 가지 말도록 하십니다(5). 분명히 이 범위는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삶의 경계일 것입니다그리고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은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6). 마태복음에서 이스라엘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8:7;15:24,26), 여기서는 긍정적으로 묘사됩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은 5절의 이방인들과 사마리아인들과 대조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먼저 하나님의 백성을 대상으로 삼는 것일 뿐, 이스라엘 외의 이방인들을 선교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질서의 회복을 고대하는 이방인들을 향합니다(12:17-21; 42:14). 제자들은 현 단계에서 이스라엘을 선교 대상으로 삼지만, 마태복음의 끝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십니다(28:19). 따라서 본문은 구원사의 시각에서 이해돼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유대인들인 제자들이 사도로 세움을 받자마자 이방인들에게 갈 마음을 품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구원사의 관점에서 이방의 빛인 이스라엘(49:4-7)의 회복 창조 세계, 즉 열방의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첫째 지침은 소망 없이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부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을 들고 파송되는 사람들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사명은 회복입니다. 회복의 대상은 구원사의 흐름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이며, 다음에는 열방이 될 것입니다.

 

(2) 사역 내용(7-8)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이양 받은 제자들이 가서 전파해야 할 일은 확실했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고 각종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스승 예수님처럼 하늘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선포합니다(3:2; 4:17).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8-9장에서 보여주었던 동일한 능력을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대목입니다. 제자들이 수행해야 할 일은 병자를 고치는 것, 죽은 자를 살리는 것,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는 것,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는 예수님께서 8-9장에서 행하신 기적에 해당하며(8:2-4, 14-17, 28-34; 9:18-26), 9:35-36과 연결해보면 제자들의 임무는 목자의 동정심에서 나온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를 살리는 일(부활이 아니라 소생)은 구약에서 엘리야(왕상 17:17-24)와 엘리사(4:32-37) 외에는 하지 못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7-8a절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대가를 받지 말아야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주어진 치유 능력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거저 받은 선물이기 때문에, 이 능력을 행해서 사적인 이득을 취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관심사가 아니라 그들을 보내신 예수,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관심사를 반영해야 합니다.

 

(3) 사역할 방식(9-10)

예수님께서는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제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전도여행의 채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전대, 배낭, 샌들, 자팡이와 같이 순회하는 선교 사역에서 꼭 필요한 것으로 간주 되는 것들을 지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일꾼은 보내신 자가 모든 것을 책임지기 때문입니다(9:38).

사람들로부터 보상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에 기대어 살아갈 때, 제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신뢰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참조, 고전 9:11-12; 살전 2:9; 4:10-17). 제자들은 하나님을 믿도록 가르치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돌보심을 믿고 살아가는 모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제자를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4) 사명에 반응과 결과(11-15)

제자들은 성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합당한 자를 찾아 그곳을 사역의 거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즉 하늘나라 복음의 메시지를 환영하는 사람들의 가정에 머물러야 합니다(11). 제자들은 호의적으로 대하는 가정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복음을 영접한 가정에 가야 하는데, 이것은 가정들을 비교하여 더 잘 대해주는 곳에 묵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합당한 자의 집에 들어가서 평화를 빌어야 합니다(12). 평화를 비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시작된 하늘나라 복음(52:7)의 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미래는 평화의 시대이며(8:23-97; 11:5-10; 66:25; 9:9-10; 3:23-24), 하늘나라의 평화는 갱신과 회복을 위해 부름 받은 제자들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만일 그 사람의 집이 합당하면 제자들이 빈 평안이 반응한 그들에게 선물로 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에게 돌아옵니다. 13절 내용은 이사야 55:11과 유사합니다(참조, 31:2; 45:23).

14-15절은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제자들이 보여야 할 자세입니다. 제자들은 복음에는 항상 영접과 거절이라는 두 가지 반응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제자들은 배척하는 사람들이 생긴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배척하면 제자들이 평안을 빌 가능성 자체가 허락되지 않기에 그때는 발의 먼저를 털어버리라고 명령하십니다. 환대 거부는 개인의 수치를 넘어 마을의 수치를 안겨준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11:5-13).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는 것은 역시 당찬 거절 행위입니다제자들이 전한 평화는 사라지지 않고 자신들에게 그대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반대와 배척은 제자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파송을 받는 인생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코 그것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복음은 언제나 수용과 거절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수용은 샬롬이고 거절은 심판입니다.

 


 

가치관이 무너지고 어디에 진리인지 몰라 기대야 할지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제자의 삶을 보고 복음이 진리라는 사실을 가늠하게 합니다. 제자의 삶과 태도가 복음으로 세상에 향기를 드러낼 때, 주의 복음이 더욱 힘 있게 세상으로 뻗어나갈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많은 일꾼을 찾으시고 제자를 부르십니다. 복음을 복음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하도록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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