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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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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

마태복음 91-13


예수님께서는 아는 지식이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복된 지식입니다. 영어, 수학을 아는 지식도 우리에게 행복과 유익을 주지만, 주님을 아는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더 깊이 알아가고, 더 정확히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를 용서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죄인인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치료하고 구원하려 오신 의사이십니다.

 

가다라 지방에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온 예수님의 일행에게 한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믿음으로 보고 병자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이것을 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생각했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임자임을 나타내십니다. 곧이어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에 방문해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십니다. 바리새인이 이를 보고 에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1-8)

 

예수님의 죄사함과 치유의 기적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들의 믿음과 반응보다는 결국 죄사함의 권능이 주님께 있는 것을 알고 깨닫고 믿는 것이 더 중요한 사건입니다. 다만 두렵고 떨림으로 주께서 이루시고 선포하신 그 은혜 앞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나아가는 것이 가장 합당한 반응입니다. 오늘도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치유하고 회복하고 고치시는 주님의 권능을 기대하며 주님께 영광이 되길 원합니다.

 

1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1-8)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 가다라의 귀신들린 두 사람을 해방시킨 기적을 행하신 후,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습니다(8:23). 이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1) 중풍병자 치유와 죄사함(1-2)

가버나움에 돌아오자, 어떤 사람들이 침상에 누인 중풍병 환자를 데려왔습니다. 성장한 갈릴리 고향에서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중풍에 걸린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2;1-12, 5:17-26).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집에 계실 때, 지붕을 뚫고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께 보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환자가 믿었다는 설명은 없지만, 그에게 이미 믿음이 있었고 사람들의 도움으로 함께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심하라’(2)는 위험과 역경의 상황에도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하는 의미입니다한편, 유대인들은 죄와 병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병은 죄에서 온다고 여겼던 것처럼, 중풍병자는 자신의 병이 죄로 인해 생긴 것처럼, 중풍병자는 자신의 병이 죄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26:14-16; 28:21-22; 대하 21:15,18-19; 4:7; 5:14; 9:2; 고전 11:30; 5:15-16). 따라서 죄 용서로 중풍병이 치유된다는 논리는 유대 청중에게 낯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받는다라는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고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은 예수님의 선포로 죄가 용서받고 있다는 사실, 곧 그의 신적 권위를 강조합니다. 비슷한 수동태 용법이 929절에서 맹인들의 치유가 그들의 믿음대로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선언에도 사용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의 말을 통해서, 즉 자신의 신적 권위로 죄가 사해졌다고 선언하며, 이 선언은 즉각 실행되고 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라는 것은 구약과 유대교의 근본 신앙입니다(7; 34:6-7; 103:3;103:4; 43:25; 7:18).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대행할 수 있었습니다(34:6-7; 103:3; 43:25; 7:18). 대제사장의 권위로 용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간기 유대교에서 메시아가 죄를 용서할 것이라는 기대를 기록한 문헌은 없습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위를 갖고 계심을 의도적으로 선언하십니다특히 예수님께서는 다니엘 7:13-14의 인자로서 신적인 권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6).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행사하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는 권한을 침해하였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정죄합니다.

 

(2) 서기관들과 예수님의 논쟁(3-6a)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이런 생각을 아시고 어찌하여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실제로 마비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중풍병자가 아니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마비되어 예수님께서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예수님께 나오지도 못합니다.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과 중풍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는 말 중에서 어느 쪽 말을 하는 것이 더 쉬운지 묻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죄 용서를 실행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죄 용서를 받았다라고 말로 하는 것은 더 쉽습니다. 병이 나았다고 말했을 때는 치유가 나타나야 하는데, 죄 용서 선언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더 어려운 말을 사실로 증명함으로써 죄 용서를 선언한 것이 빈말이 아니라 죄 용서가 실행되게 만드는 선포임을 밝히 십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신적 권위를 분명하게 밝히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권능(6b-8)

중풍병자가 일어나 집으로 가는 모습을 통해,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위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예수님의 죄 용서는 땅에서, 인자로서 행사하는 권위로 일어난 일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땅에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인자로서 죄를 용서하십니다이 경우에 인자는 나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다니엘 7:13-14인자 같은 이를 가리킵니다. 중풍병자가 해결 받아야 할 문제는 마비 증상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육체의 질병이 아니라 죄 문제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의 죄 용서와 치유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통해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이 종교 권력자들에 의해 신성모독으로 정죄를 받았는데도, 죄 사하는 권세가 사람에게주어진 것을 두고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제자 공동체, 즉 교회는 죄를 용서하는 공동체입니다(5:21-26; 6:12, 14-15; 18:15-35). 교회는 예수님의 죄 용서와 치유를 대행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 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대단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죄를 용서할 권세까지도 가지고 계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를 보고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한 죄 용서함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정리하십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죄 사함을 받았어야 합니다.

 

세리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9-13)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어떤 종교적, 제의적 행위들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길 원하십니다. 그런 가운데 사랑이 담긴 예배와 삶이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실 반한 예배요 예배자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부르신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십니다.

 

9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3)

세리와 죄인은 사회적 소외 계층으로, 특히 세리는 매국노나 배신자로 여겨지는 직업이었습니다. 높은 벽 뒤에 숨어 자발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굳이 물을 열고 들어가 함께 앉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문이 없는 벽은 없습니다. 소외된 이에게 찾아가시는 주님은 곁을 내주시고 소명을 주십니다.

 

(1) 마태를 부르심(9-10)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세례 마태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소식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더러운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었습니다. 마태 또한 자신을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동네를 지나가고 있을 때 예수님을 주목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좇으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했던 것입니다.

부르심에 순종한 마태는 예수님과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자신의 삶에 모신 것입니다. 자기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께서는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자신의 삶에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영혼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세리 마태는 자신과 같은 죄인에게 찾아오시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마태도 변화의 삶으로 자신의 물질을 털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유하실 때, 구원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던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에 감격하고 있다면 삶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구원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2)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논쟁(11-13)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할 수 있느냐에 비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예수님께서는 호세아 66절을 인용해서 자신의 사명을 밝히십니다. 의사가 환저를 외면하지 않고 치료자가 더러운 병을 회피하지 않는 것처럼 이들과 같은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의()가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에 다른 사람들의 잔치가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아니 정죄의 사건으로 보였습니다. 눈앞에 의심에 안개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을 순수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곡된 눈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없고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로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치유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결법의 전문가들에게 제사법을 주신 하나님의 동기가 긍휼에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목적으로 호세아 66절을 인용하십니다. 마태복음은 70인역에서 히브리어 헤세드를 번역한 헬라어 엘리오스를 사용합니다. 치유와 긍휼은 호세아 6장의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호세아 61절에서는 하나님을 치유하는 의사로 나타내는데, 66절에 더 넓은 문맥을 고려하면 하나님께서는 치유하시고 길을 헤매는 그의 백성을 위해 긍휼을 보여주시길 원하십니다. 호세아서에서 헤세드는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헌신이면서 이웃을 향한 긍휼의 행위입니다. 헬라어 엘로우스는 이웃을 향한 긍휼의 가조점을 두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70인역 호세아 66절을 인용해서 긍휼의 마음으로 세리들과 죄인들을 대하는 태도를 정당화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배우라고 책망하십니다. 긍휼의 마음이나 실천 없이 제의적인 규례에 집중하는 것은 성경과 하나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잘못된 해석이 잘못된 삶을 열매로 났습니다. ‘내가 왔다라는 예수님의 사명을 가리키는 진술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은 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하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향한 변찮은 사랑과 신실하심을 보여 주셨고, 몸값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것으로 사람들의 향한 긍휼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향한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서 여러 종교 행위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메시아와 죄인들이 함께하는 잔치의 장면은 교회의 진정한 기쁨이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고통과 수치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복음을 경험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믿음을 들여다보십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사함과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것은, 그들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구원의 은혜는 오직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병이 죄 때문은 아니지만, 이 중풍병자의 병은 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먼저 선포하시고 그 후에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향해 일어나 내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내 죄사함을 받았다라는 말만큼이나 황당한 명령입니다. 그분이하신 말씀이 다 진실이고 그분의 말씀은 곧 사건이고 역사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그 말에 반응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풍병자는 일어나 돌아갑니다. 그 친구들과 중풍병자의 믿음이 그를 기적으로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서기관의 불신은 그 안에서 아무런 역사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분을 믿고 따르기로 결단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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