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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8-03)

 


흑암의 권세를 물리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823-34


기독교 내에서 봉사하면 대단히 믿음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봉사한다 할지라도 믿음 없이 봉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사회단체에서 봉사하는 것처럼 자신의 명예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역하는 목적에는 영혼을 구원하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워싸는 무리를 피해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기 위해 먼저 배에 오르시고, 제자들도 뒤따릅니다. 제자들은 향해 도중 큰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습에 믿음이 적다 꾸짖으시며 풍랑을 잠잠케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 들린 두 사람을 고치실 때, 다시 한번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목격합니다. 하지만 그 지방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떠나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광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23-27)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지만, 말씀을 거역하여 무너졌습니다. 무너진 세상은 이제 창조주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창조되어 세상의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이, 질서와 채움과 빛으로 변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인정하고 그 분을 믿고 그 분과 연합될 때만 우리에게도 새로운 창조가 가능한 일입니다.

 

23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23-2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임하게 하셨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이 세상 나라와의 영적인 전쟁을 가져 옵니다. 지금도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백성답게 살자고 하면, 반드시 이 세상 나라의 저항을 가져옵니다.

 

(1) 위기를 마주한 제자들(23-25)

혼돈과 죽음의 세력은 제자들을 두렵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서 평안을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꾸짖듯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광풍을 잠잠하게 하신 사건은 8-9장에서 유일하게 자연에 대해 행하신 기적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타고 동쪽을 향해 가던 중에 큰 광풍이 갑자기 몰아쳐 배를 뒤덮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갑자기 광풍이 몰아치는 것으로 유명한 호수입니다. 예수님과 일행이 탄 배는 침몰 직전입니다. 하지만 배가 뒤집힐 상황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자고 계십니다.

 

(2) 위기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26-27)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죽게 됐으니 구원해 달라고 외칩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순회하며 사역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피곤한 몸으로 배 위에서 자고 계십니다제자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은 잠을 자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대조적인데, 마태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을 믿고 평안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까(3:35; 4:8)?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약에서 잠은 깊은 신뢰와 관련이 있는 점을 고려할 때(11:18-19; 3:35; 3:24-26), 마태가 예수님의 평온과 제자들의 근심을 대조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27절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이 고백한 말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떠올립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자고 계신 것은 땅에서 머리 둘 곳 없이 사시는 그의 고난을 묘사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가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권위를 갖고 계신 분임을 암시합니다. 누구도 예수님을 위협할 정도로 그분의 권위 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평안히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두렵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므로, 가장 강한 자로서 편안하게 주무신 것입니다시편 121편은 하나님께서 주무시지 않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정반대로 시편 44:23-24은 주무시는 하나님을 깨우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비슷한 내용은 시편 7:7; 35:23; 59:5-6에도 등장합니다. 특히 시편 44:23-24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하는 말과 매우 유사합니다. 따라서 본 사건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이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평안했던 예수님이 아니라 바다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신적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정체를 강조합니다. 물론 제자들의 호소가 시편의 내용을 떠올린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믿고 깨운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도 이 순간에는 그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는 어려움에 빠진 자녀가 대단한 재력가인 아버지의 실제 능력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처지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여서 왜 자식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는지 원망하는 투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온 바다가 진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겁에 질리게 된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책망을 받습니다.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서 자연을 통제하는 분임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의 두려움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다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갖고 계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정제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 믿음이 작은 상태이며, 믿음이 작을 때 두려움이 엄습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겁에 질린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어나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꾸짖으시는 분입니다(18:15; 104:7; 106:9, 50:2; 1:4). 특히 구약과 유대교에서 바다는 혼돈의 세력이 나오는 출처로 인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다를 제압하는 주가 되십니다(89:8-11; 107:23-30; 참조 시 69:13, 30-36; 124; 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자연을 통제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을 제압하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목격한 제자들은 놀라서 그가 누구이기에 심지어 바람과 바다도 그에게 복종하는지 묻습니다. 제자들은 폭풍과 같은 인생의 위기에서 예수님의 보호를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인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제자 공동체를 보호하신 것처럼, 시대의 끝까지 시대를 초월해서 교회에 긍휼을 베푸는 것으로 함께 하십니다.

죄로 무너진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 창조되어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이 질서와 채움과 빛으로 변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자신의 삶에 선장으로 모시고 살면 거칠고 험난한 인생 항해에서도 편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을 치유(28-34)

귀신은 질서를 망가뜨리고 혼돈을 일으킵니다. 복음을 방해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상인 인격을 철저하게 파괴시켰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귀신에 붙들려 무덤 사이에서 사는 두 사람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귀신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권능 앞에 서게 됩니다.

 

28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28-34)

예수님께서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세력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귀신 들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자시가 악의 세력과 싸워 그들을 정복했다는 사실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1) 누구도 가지 않는 곳에 가심(28a)

예수님께서는 제자 일행과 함께 갈릴리 호수 동쪽에 위치한 데가볼리의 가다라 지방에 도착합니다. 이 도시는 유대인이라면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향해 감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귀신 들린 두 사람이었습니다. 두 명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숫자의 개념입니다.

 

(2)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자(28b)

귀신 들린 사람들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사람들을 몹시 폭력적이고 위험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해칠 수 있었습니다. 그 옆으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마을에서 쫓겨나서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무덤은 우리나라처럼 평토장(平土葬)이 아니라 바위나 언덕에 동굴의 모습으로 사람이 충분히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3) 악한 귀신의 최후에 심판을 귀신들(29-30)

귀신 들린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따지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29)라고 귀신은 예수님의 신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온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우리가 당신과 무슨 관계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서로의 관심이 다른데 왜 이곳을 찾아왔느냐는 의미입니다.

어둠의 권세 잡은 사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온전히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온전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은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님께서 때가 이르기 전에 왜 오셨는지 묻습니다. ‘는 귀신들이 형벌의 장소로 보내지는 시기로, 악인들과 함께 악한 천사들이 심판을 받는 최후 심판의 때를 의미합니다. 심판의 결과로 귀신들은 지옥의 형벌을 받습니다(25:31-46). 귀신은 자신들의 운명과 자신들의 마지막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그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다라는 의미는 법정에서 육체적으로 고통을 준다또는 고문하다는 의미로, 극심한 고통을 묘사하는 동사입니다. 본문에서는 종말론적인 심판을 의미합니다. 귀신들은 자신들이 고통당할 때, 즉 최후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았는데 굳지, 왜 예수님께서 벌써 자신들에게 왔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지 않자 귀신들은 자신들을 심판하러 온 것을 직감하고 멀리 있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려고 쳐다보았습니다. 당시 로마가 집권하고 있는 헬레니즘 문화는 돼지를 부와 쾌락 신의 축복의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데가볼리 지역은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협력하면서 자치와 통상, 면제의 특권을 부여받았고, 친 로마 성격으로 도시 동맹체 성경을 유지하며 로마식 제사를 통해 돼지를 잡아 드렸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지역을 배척했습니다주전 63년에 안티파스가 유대를 침공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고, 돼지를 성전 재단에 바쳤습니다. 로마 제국 입장에서 유대인들을 모독하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이러한 종교 행위를 통해 헬레니즘 문화권의 영향력을 증험하는 행동일 뿐입니다. 데가볼리 지역은 돼지를 잡아 제사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곳에서 돼지를 사육하고 2000마리 가까운 돼지를 사육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큰 구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돼지를 이렇게 많이 사육하고 있었던 것은 단순하게 경제논리가 아니라 로마 황제를 숭상하는 행위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인식에는 로마 황제는 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신의 아들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지를 만드시고 세상의 주권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을 자신의 것이라고 오해하고 헬레니즘 문명이라는 미명 아래 점점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징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운명을 알아챈 귀신들은 돼지 떼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의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결국 돼지 떼는 물에서 몰사 합니다(32). 돼지들은 악하고 폭력적인 귀신들을 견디지 못해서 바다를 향해 달려가 죽습니다.

 

(4) 탐욕스러운 자들에게 거절당하심(33-34)

이 많은 돼지를 치던 자들의 보고하기 위해 시내에 들어갔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려고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달려왔습니다(33). 그리고 그들은 광경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지방에서 떠나 달라고 요구합니다(34).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의식이 무엇입니까? 경제적인 이유로 예수님을 떠날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돈이 자신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다시 찾아올 수 없는 복음의 유일한 기회를 내쳐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치유보다 돼지를 더 중히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도시를 집으로 삼은 귀신들을 쫓아내심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가장 큰 위험을 제거하셨으나, 주민들은 예수님의 행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서 본 동네로 가버립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하늘나라의 도래와 관련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귀신들이 들어온 돼지들이 죽은 장면은 귀신들의 운명도 지상에서 사라질 것을 암시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무저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지만, 귀신들이 돼지 떼와 함께 물속에 던져진 것은 귀신들이 최후 심판 전까지 물아래 심연 또는 무저갱에 갇혔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 8:26-3931절에서 귀신들이 무저갱에 던져 넣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귀신들이 심연에 갇히는 그림은 하늘나라가 예수님의 권위로 강력하게 임했음을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늘나라의 공격을 받아 사탄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통해서 사회에서 쓸모없는 인생을 위해 헌신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된 사람을 만나려고 바다 폭풍을 뚫고 이곳에 오셨고, 회복하고 다시 돌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오셔서 긍휼을 가르치기 위해 현장 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부정한 곳에서 부정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은 치유할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 사회에서 효용 가치가 높은 것을 희생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안 해서 낭비로 여깁니다. 그러나 제자는 죽어가는 사람을 회복하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낭비처럼 보일지라도 사람을 회복하는 일이라면 하늘나라의 사역입니다.

 


믿음이 작을 때 환경에 흔들리게 됩니다. 갈릴리 바다에 큰 물결이 일어나 배가 잠기게 되자 어부 출신 제자들조차 죽음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깨우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작은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창조주 만유의 주로 고백하고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면서도, 때로는 환경 때문에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의 배에 누가 타고 있는지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배에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큰 풍랑이 일지라도 그 배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우리 인생을 다스리고 주 대신 그 주님께 믿음의 눈을 들어 바라보며 폭풍 가운데도 평안을 누리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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