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마태복음(08-02)

마태복음(08-02).pdf
0.09MB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 예수님

마태복음 814-22


 

옛날에는 제자가 선생님의 집에서 상당 기간 먹고 살면서 배우는 도제(徒弟)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제자는 선생님과 항상 살면서 선생님의 모든 것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예수님과 항상 함께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과 모든 것을 함께 하고 누리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8-9장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증거로 열 가지 기적을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서 열병에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십니다. 그날 밤 귀신 들린 자들과 각종 병든 자들이 몰려들었고,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으시고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무리를 강 건너편으로 보내실 때,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자처합니다. 또 한 제자는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따르겠다고 합니다. 이 두 반응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참 제자도를 가르쳐주십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14-15)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순간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연구는 죽음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14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 들더라(14-15)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와 이방인 백부장에 이어서(1-13), 이번에는 유대 사회에서 소외의 대상인 여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치유 받은 이들의 공통점은 배척당하는 이들, 소외된 이들로서 당시에 일반적인 생각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회복하여 천국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 가셔서 열병을 앓고 있는 장모를 보셨습니다. 열병은 갈릴리 호숫가에 위치한 저지대에서 흔히 발행한 말라리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버나움은 곡식, 어업, 무역 등으로 여건이 좋은 지역이었으나 말라리아의 위험이 늘 상존했습니다. 만일 장모의 열병이 말라리아였다면, 당시 의술로는 고치기 힘든 병으로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환자에게 손을 대는 방식으로 고치십니다. 구체적인 치유 장면이 생략되어 있지만, 예수님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과 긍휼을 더욱 잘 보여줍니다. 그분의 긍휼과 능력의 손이 닿는 곳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이 치유 기적에 대한 반응으로 예수님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마가는 그들을섬겼다고 기록하는 반면에, 마태는 섬김의 대상을 예수님으로 좁히고 있습니다.

섬기다는 신약에서 교회에서의 섬김을 표현할 때, 집사를 가리킬 때 사용된 용어입니다(딤전 3:10,13).

마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손을 잡는 장면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할 때 반복해서 손을 잡으시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육신의 병은 마음의 병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저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음 아픔에 예수님의 시선은 그를 향하고 긍휼의 손을 그에게 대십니다.

치유에 대한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으로부터 일어나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4:39)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나서 즉시 예수님과 그 일행을 섬겼습니다. 본문에서 보여주는 참된 믿음은 만왕의 왕으로서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치유에 대한 반응으로 예수님을 섬깁니다. 하늘나라의 일꾼이 섬겨야 할 대상은 예수님이며, 섬김의 동기는 예수님의 치유, 혹은 구원임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먼저 베푸신 치유에 감사해서 예수를 섬기는 공동체이며, 교회의 직분 역시 예수님을 수종 드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수단과 목적을 뒤바꾸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대신에 그 사회를 오염시키고 악취를 풍기는 존재가 됩니다.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수님(16-17)

 

예수님께서는 관객이 아니라 선수로, 관람객이 아니라 제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합당한 헌신과 결단이 뒤따르지 않을 때, 주님의 은혜는 값싼 은혜로 전략하고 맙니다. 주님의 고귀한 은혜에 합당한 섬김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제 마태는 예수님의 전반적인 사역에 대해 요약한 것을 소개합니다.

 

16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16-17)

본문은 1-15절의 치유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나타난 치유와 축사 사역에 대한 전체를 요약하는 진술입니다.

저녁이 되자,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이 귀신 들린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 그리고 약한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치유하는 방법은 말씀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이는 앞에서 백부장이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종이 나을 수 있다고 말한 것과 연결됩니다.

마태는 치유에 대해 요약 후에 이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되어진 것이 성취되기 위함이니’(4:14;12:17)라는 성취 공식(1:22;2:15,17,23;13:14,35; 21:4;27:9)을 사용해서 이 치유가 이사야 534절의 성취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치유는 81-15절의 세 가지 치유뿐만 아니라 16절에 나타난 모든 치유 행위를 포함합니다. 이사야 534절은 네 번째 종의 노래인 52:13-53:12에서 고난의 종을 묘사하는 본문에 속합니다(첫 번째부터 세 번째 종의 노래; 42:1-4;49:1-6; 50:4-9).

마태는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고난의 종에게 부여된 사역을 성취하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의 치유 지식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강조했는데, 이제 정반대로 약한 것을 취하고 질병을 짊어지는 고난의 종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이나 열병과 같은 병을 대신 앓은 것이 아닌데도 고난의 종이라는 개념이 817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질병의 속성은 고통에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환자들의 고통에 참여하시고 고통을 지고 가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129-13절에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는데, 이후 바리새인들이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밉니다(12:14-16). 이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그의 고난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고난 없이 치유를 논할 수 없습니다. 치유의 사건들을 통해서 이사야 예언대로 예수님을 통해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종으로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한 자들을 치유하기 위해 권위를 사용하십니다. 치유는 이사야 53장의 종과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신 질병을 떠맡기 위해 오신 메시아입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통해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따르는 법(18-22)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축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하여 인간적인 구원자로 기대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며, 그분을 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은 없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18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18-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갈릴리 바다의 건너편은 오른쪽에 위치한 시리아 지역이며, 여기에는 데가볼리도 포함됩니다. 마태는 참된 믿음을 설명하신 후에, 잘못된 믿음의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서기관에 대한 평가(18-20)

첫 번째 잘못된 믿음의 종류는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서기관에게 적극적으로 잘했다고 칭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치러야 하는 대가, 혹은 비용에 대한 내용입니다. 한 서기관(누가복음 9:57에는 어떤 사람으로 표현됨)이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든지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토라의 전문가인 서기관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큰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표현은 여우나 새는 고정된 장소에서 쉬거나 자는 반면, 예수님께서는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회하는 여정 가운데서 치유하는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편안한 집에 거주하지 못하셨습니다(참조, 4:18-22,23). 순회하거나 집을 떠나 이동해야 하는 예수님의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예고된 것이었습니다(2:13-14; 12:14-15; 14:12-13; 15:12-14,21; 16:1-5). 무엇보다, 머리 둘 곳 없는 삶은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특히 인자’(20)는 다니엘 713-14절에 근거한 칭호로서 다니엘 7장의 인자는 하늘의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존재로서 이 땅에 섬기기 위해(20:28)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므로, 그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본문의 서기관도 인자인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므로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신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인자(7:13-14)와 땅에서 고난의 길을 가는 인자의 삶은 매우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인자의 삶을 본받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어떤 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순회하는 예수님을 따라 순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식의 삶에서는 자신의 소유를 유지할 수 없으며, 사회적 관점에서는 주변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서기관의 의를 넘어서야 했습니다.

그 서기관은 예수님을 통해 유익을 얻으려는 욕심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길이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라 집도 없이 다니는 고난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세상을 따르겠다는 제자에 대한 평가(21-22)

두 번째 잘못된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다른 제자 한 명이 예수님께 와서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21).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중요한 덕목이었으므로(20:12; 15:3-6) 이 사람의 요구는 합당합니다.

매장은 유대 세계에서 최고의 덕목 중 하나였습니다(50:5-6; 토빗서 4:3; 6:14), 제자가 말하는 장례는 첫 번째 장례가 아니라, 1차 매장 이후 남은 뼈를 모아서 가족 묘(동굴)에 있는 조상들의 뼈와 합치는 두 번째 매장입니다. 이 풍습은 이미 1세기 전에 많은 문화권에서 행해졌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의 뼈를 모으는 것은 자식의 의무였습니다.

이 제자는 임종을 지켜보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매장을 끝내고 아버지의 장례 절차를 마무리 한 다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아버지를 끝까지 보살피고 나서 따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번째 매장의 날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만 따르는 것을 연기해달라는 부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들이 자신들의 죽은 자들을 매장하게 하라고 대답하십니다. 당연히 죽은 뼈들이 알아서 뼈를 정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예수님의 표현은 문자적 의미가 아닙니다. 죽은 자들은 무덤에 있는 죽은 자들 내지 조상들의 뼈를 의미합니다. 가족묘에 있는 다른 뼈들로 아버지의 뼈를 다시 매장하도록 두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어떤 경건 행위보다 중요했던 매장보다 더 긴급한 것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해서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더 본질적이고 긴급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헌신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가장 귀하고 우선적인 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려면 떠나야 합니다. 지금 편리하고 익숙한 곳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전을 지탱해주던 모든 조건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자신이 우선순위로 삼았던 것에서 떠나야 합니다. 심지어 사회적 통념에서 떠나야 했고 기득권을 버려야 했습니다. 따름의 순종은 그렇기에 안주하는 이들에게 평면적이고 급진적이고 심지어 체제 정복적인 일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보기에 낯설고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만이 죽음을 기념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 영생을 바라보는 삶을 잊지 않길 원합니다.

 

구독과 공감 ♡ 는
본인이 성경을 연구하는데 매우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