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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7-02)

 

참 제자의 자격을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7장 13-29절


선택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도착지는 달라집니다. 마치 어떤 씨앗을 심느냐에 따라서 추수할 열매가 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같은 건축 자제로 집을 건축할지라도 어디에 지었느냐에 따라 그 집을 오래토록 유지할 수 있고,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긴 원한다면, 삶이 달라야 합니다. 산상보훈에서는 성도들이 세상의 삶의 법칙과 달라야 함을 강조합니다.

 

본문은 산상보훈의 결론부입니다. 공통적인 결론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마무리하시면서 세 가지 경고하십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를,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비유로 참된 구원의 길과 멸망의 길을 대조하며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마무리 지으시며 참 제자가 누구인지 선명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두 종류의 길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14)

‘더 나은 의’를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걷는 것처럼, 이 세상이 그 가치를 모르고 거절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 길만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더 나은 의’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13-14)

예수님께서는 하신 이 산상보훈의 말씀은 불신자들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찾아온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믿는다고 찾아왔지만, 너희들이 가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전하신 산상보훈의 결론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먼저, 길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사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가라!’라는 말씀에 이어서, 좁은 문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두 문장이 나옵니다(13-14). 넓은 문을 통해 광활한 길로 가면 끝은 파멸이기 때문이고(13), 좁은 문을 통해 험한 길로 가면 그 끝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비단길이 아니라 순례자의 길에 들어선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 길이 쉽고 편하고 대접을 받는 길이라면 모든 사람이 그 길로 나올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험한 길이 나오는데, 제자들이 겪는 어려움이나 환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늘나라에 현재적 날까지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는데, 그 문은 좁습니다. 제자들이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에서 좁은 문과 험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미 좁고 험한 곳에 들어가 순례의 길을 가는 사람은 끝까지 같은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하며, 자신들의 규모가 작은 것으로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들어가는 사람들의 숫자를 보기보다 길의 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이 너무 힘들어서 억지로 갈 수밖에 없는 삶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여 그 나라의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므로 그 힘으로 고난도 견디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나무 :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라(15-23)

하나님 백성의 삶은 예수님께서 제시한 ‘더 나은 의’의 내용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됩니다. 남을 속이기 전에 먼저 외적인 결과로 인해 자신을 속일 수 있습니다. 주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의’이고 다른 것은 다 ‘불법’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나무의 열매를 통해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16-23)

두 번째 비유는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에 관련해서 나무의 열매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15)고 경고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정체를 분별하도록 경고하고 그들의 운명을 예고합니다. 첫째, 제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해야 합니다(15-20). ‘너희에게 오는 자마다’는 거짓 선지자들이 외부에서 공동체 내부로 오는 것을 묘사합니다. 양 무리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상기시키며, 본문에서는 교회 혹은 새 언약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늑대들은 교회 안에 와 있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의 역할을 수행하므로 기독교 지도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굶주린 늑대와 같은 이들이 양의 옷으로 위장하기 때문에 이들의 정체를 분별하기 어렸습니다. 양으로 변장한 것은 해를 끼치지 않는 양의 특징을 이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양은 늑대와 같은 맹수의 먹잇감이지 포식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늑대가 양으로 위장해 양 무리 가운데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말하자면 거 짓 선지자들은 교회를 잡아먹으려고 순수한 모습으로 위장해서 교회를 포식의 대상으로 삼고 활보합니다. 늑대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해서 선포하고 가르칠 것이지만, 실제로는 교회를 이득의 수단으로 삼는 포식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삶의 문제를 ‘열매’라는 소재로 강조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 실체가 반드시 열매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16, 20).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의 법칙 이듯 영적인 세계에서도 법칙입니다. ‘나쁜’(17)은 ‘썩은’의 뜻입니다. 좋은 나무는 선한 선지자를 썩은 나무는 거짓 선지자를 뜻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따른 삶의 방식이 열매가 좋은지 나쁜지를 식별하게 해주는 잣대입니다. 19절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의 운명을 다룹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집니다. 지옥 불에 던져질 운명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5:22,29,30; 10:28; 18:9; 23:15,33).

따라서 제자들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보고 분별해야 합니다. 공동체는 지도자들의 삶을 유심히 살피되, 그들의 위선에 속지 말고 그들의 삶이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성스러운 얼굴과 말에 속지 말라! 둘째 거짓 선지자들은 최후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21-23).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주여, 주여’라고 부른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경고하십니다(21). ‘주’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가장 흔히 부르는 칭호입니다. ‘주’를 두 번 반복하는 것은 그 마음의 친밀함과 진지함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삶이 수반되지 않는 신앙 고백은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날에는 충격적인 장면이 연출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22). 실패한 사람들은 최후 심판 때 하늘법정에서 선지자의 언어를 사용하고(10:41), 귀신을 내쫓은 일(10:8), ‘당신의 이름으로’ 곧 재판장(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능력들을 행한 것을 열거합니다. 이는 특히 기독교 지도자들이 어느 시대든지 자랑하는 언어입니다. 이들은 ‘진정성’과 ‘진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각 행위를 주장할 때마다 붙이면서(10:22; 18:5,20; 19:29; 24:9) 자신들이 형벌이 아니라 하늘의 상을 받아야 한다고 항변합니다. 재판장이 자신들을 잘 알고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재판장은 그들을 모른다고 말하며 불법을 행한 자들로 규정합니다(23).

교회는 예수님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거짓 선지자들의 운명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여부는 세 가지 기적 혹은 능력과 같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덧붙여서, 바로 앞의 내용(13-14)과 연결해 거짓 선지자들의 정체를 생각해보면, 이들은 험한 길로 가지 않고 넓고 광활한 길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건강하지 못한 모습으로 세상에 지탄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그렇다고 기독교를 부정하거나 신앙을 떠나는 일은 더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이미 모두 다 온전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설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종류의 집 :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24-27)

탄탄한 기초가 건물 안정의 전체가 되듯이, 순종이 하나님의 백성 됨의 기초합니다. 믿음처럼 보이는 것들은 시련이 닥치면 그 진상이 드러납니다. ‘순종의 실천’만이 시련이나 유혹을 통한 시간의 시험 속에서도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처소로 나와 우리 공동체를 세워줄 것입니다.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24-27)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실 뿐 아니라 들은 말씀대로 행하길 원하십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에 비유하며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대조적인 예로 평행을 이루는 구조로서 두 가지 상이한 운명을 묘사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집을 튼튼한 반석 위에 지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24). 반면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홍수가 나면 지혜로운 인생과 어리석은 인생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홍수 또는 폭풍이 몰아치는 것은 구약에서 삶의 어려움이나(시편 8:7-8; 에스겔 38:22). 이 모습은 가을 우기에 말랐던 골짜기를 통해 물이 심하게 불어 밀려오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목우가 쏟아져도 무너지지 않는 집과 같습니다(참조, 잠언 10:25; 시사야 28:16).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고 그 뜻에 따라 행하지도 않는(에스겔 33:32) 사람은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26). 이런 사람이 어리석은 것은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닥치면 모래 위에 쌓은 집처럼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심판 장면은 최후 심판의 때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산상보훈은 마지막은 경고에 대한 강조로서 독자들이 종말의 운명을 두려움으로 되새기면서 인생의 기초를 무엇에 두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첫 번째 강화를 마침(28-29)

진정한 열매의 기준은 하나님을 ‘주여!’라고 부른 것도, 성공적인 종교 활동도, 사람들에게 끼친 좋은 영향력도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이 자신을 위대한 제자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순종의 실천’만이 시련이나 유혹을 통한 시험과 고난에서도 끄떡없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28-29)

드디어 산상수훈이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마태복음에 나온 다섯 개 담화 중 하나가 마무리됩니다. 모든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라는 표현으로 마칩니다(7:28; 11:1; 13:53; 19:1; 26:1).

흥미로운 것은 산상수훈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더해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매우 놀랍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가르치는 권세가 서기관들이 가르친 내용과 전혀 다른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서기관들은 공인된 율법 교사들로서 그들의 가르치는 권위는 이전의 율법 해석이 전수한 전통에 근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확신 있게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전통에서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는 이어지는 8-9장에서 기적 행위를 통해 강조되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제자들에게 부여하시고(10:1), 부활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얻어 제자들을 파송하실 것입니다(28:18).

무리는 예수님의 가르치는 권세에 놀라지만 아직 정체를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산상설교를 대하는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가르쳐 주신 뜻인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삶, 팔복의 삶, 빛과 소금의 삶, 더 나은 의를 추구하는 삶은 모든 가르침에 알맞은 길을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삶은 불편하고 좁은 문이며 십자가의 길입니다. 어려운 길이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많은 사람은 오늘도 넓은 문과 쉬운 길을 찾아가지만, 그 결과는 멸망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길은 좁고 험하지만, 구원과 생명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의 반응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지혜로운 자는 말씀을 행하고, 어리석은 자는 말씀을 행하지 않습니다. 순종이 곧 지혜이고 안전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삶의 풍파에도 안전하지만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삶의 풍파를 만나면 그 신앙이 무너져 버립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종할 때 그 가르침은 우리 삶의 기초가 되고 그 가르침 위에 든든하고 무너지지 않는 인생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말씀을 듣지만, 순종은 하지 않은 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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