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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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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을 쌓은 방법을 가르친 예수님

마태복음 616-34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칭찬과 상급을 받아버리면, 그들은 이미 상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6:2,6).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고 싶을 때 그 충동을 하나님 앞에 절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믿는 성도들이 하늘나라 시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과 구별되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매우 실제적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늘나라의 시민들의 삶을 소개합니다. 본 단란은 제자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추가적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재물과 염려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땅에 쌓으며 재물을 좇다 결국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삽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재물이 아닌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께 전적으로 삶을 의탁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돌봄 아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삽니다. 그러므로 전혀 염려할 게 없습니다.

 

금식에 대한 가르침(16-18)

하나님께 자시의 간절한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금식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제와 기도와 더불어 금식은 경건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금식입니다. 금식은 육체적 욕구를 끊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6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16-18)

금식은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경건생활에 아주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또 종교적 경건성을 대변해 주는 신앙적인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의 위선에 대해서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경건함을 드러내기 위해 금식할 때 일부러 초췌한 모습으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금식도 앞서 말한 구제와 기도와 같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금식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하고 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금식도 신앙과 경건을 자랑하는 수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원래 구약에서는 금식할 때 베옷을 입고 티끌을 쓰고 자신을 단장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며 회개한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기름을 바르라고 하십니다. 결국 슬퍼하며 자신을 은근히 자랑하느니 차라리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식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혐오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금식은 곡기를 끊고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식음을 전폐한 채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금식마저 사람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하며 행동하는 것이 외식적인 행동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의 시신을 더 의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자세(19-24)

성도가 외식하는 이유는 하나님만 섬기려는 마음이 다른 것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으려는 모습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구제, 기도, 금식의 세 가지 외식(6:1-18)이 사람들을 의식함으로 인해 마음이 분산된 상태를 보여 준다면 본문은 물질로 인해 마음이 분산된 것을 보여 줍니다.

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19-24)

사람들은 재물이 쌓아지면 그것을 땅에 쌓아두기 위해 부동산, 주식이나 투자가치가 있는 것들에 투자합니다. 그러나 땅에 쌓아둔 보물은 결코 안전하지도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화, , 종이라는 다른 소재를 사용해서 재자가 가져야 할 재물에 대한 태도에 초점을 맞춥니다.

(1) 하늘에 쌓는 보문(19-21)

먼저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도록 가르치십니다(19-21).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자신을 위해 보물을 쌓는 행위를 중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집 안에나 집 마당을 파서 보물을 숨기곤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다양한 방법으로 보관하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없어질 수 있습니다.

은 일종의 벌레로 땅의 것을 파괴하는 존재를 상징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특별히 옷감은 귀중한 보물 중 하나였으므로 좀은 이런 보물을 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록(銅綠)’먹어 치움’, ‘폭식함등을 뜻하므로 막 먹어 치우는 벌레를 가리킵니다. 이런 벌레는 귀중품이 들어 있는 목재 보관함을 뜯어 먹었을 것입니다. 보관함이 망가지면 보물도 손상됩니다. 또한 보물을 도둑이 훔친다는 그림은 모아둔 보물이 안전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보물을 쌓아야 하는 하늘만이 안전한 곳이며(20), 보물을 쌓아 두는 장소는 마음의 방향을 드러냅니다(21).

(2) 밝은 영안을 가져야 함(22-23)

제자들은 성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22-23). 몸의 등불은 눈이며, 눈이 건강하면 온몸이 밝아집니다(22). 그런데 생리적으로 보면 밝은 눈이 사람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하지만, 예수님은 빛이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몸을 밝게 만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윤리적인 목적을 위해 눈의 개념을 사용하십니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밖을 보는 눈이 밝으면 그 사람 자체가 윤리적으로 선하게 됩니다. 흔히 성하다로 번역되는 하플루스(πλούς)는 건강한 눈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한 방향의’, ‘단순한등의 뜻으로서 단일성(또는 일체성) 혹은 온전함을 의미하며, 관대하고 후하게 베푸는 것을 뜻합니다. 한쪽을 보는 것은 두 마음을 품는 것과 반대의 개념으로(야고보서 4:8)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뜻하며(신명기 6:45), 하나님만을 향하는 눈의 사람은 타인을 위해 너그럽게 베풉니다. 다시 말해서,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 곧 긍휼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건강한 눈과 달리 눈이 악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입니다(23). ‘나쁜혹은 악한으로 번역되는 포네로스나쁘다또는 악하다의 뜻으로 마태복음에서는 윤리적으로 나쁘거나 악한 상태를 가리킵니다(5:11,37,39,45; 6:13). 악한 눈은 탐심으로 남의 소유를 쳐다보는 눈, 남을 저주하고 시기하는 눈이라는 개념에서 온 것입니다. 악한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필요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타인에게 후히 베풀지 못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탐심으로 가득 찬 사람은 자신의 필요만 생각하기 때문에 베푸는 것에 인색할 수밖에 없으며, 하늘에 보물을 쌓지 못합니다. 결국 어둠이 이런 눈을 통해 들어와 온몸이 어두워져 세상을 밝히지 못합니다. 반면 관대하게 베푸는 사람의 밝은 몸은 세상을 밝히고(4:1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3) 겸하여 섬길 수 없음(24)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24). 왜냐하면 이 사람을 사랑하고 저 사람을 미워하거나 이 사람에게 헌신하고 저 사람을 무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왕권에 대적하는 물질주의를 경고하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사람이 부자 청년처럼 재물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재물은 같이 섬길 수 없습니다.

19-24절을 한 묶음으로 읽으면, ‘한 방향의또는 단순한눈을 가진 사람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사람이며,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필요를 채우시는 긍휼의 성품을 갖고 계시지만 맘몬은 철저히 계산적입니다. 냉정하고 냉혹한 자본의 원리를 들어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의존해서 살아가는 동정의 사람은 세상을 따뜻하게 회복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 맘몬의 종은 속물처럼 행동하고 사회적 정의보다는 맘몬을 자랑하는 것으로 즐거워합니다. 돈이 안전을 보장한다고 여기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불신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사랑과 헌신(신명기 6:4-5)을 돈에게 쏟을 때 돈처럼 냉혹하게 변해서 사람들을 물질로 대합니다. 무엇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심판으로 우상숭배에 반응하십니다. 악의 눈, 곧 탐심과 인색함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섬기는 보물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며, 인생은 어둠으로 채워질 것이며, 염려로 세월을 보내는 날을 맞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긍휼로 자녀를 돌보시는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며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추구하는 것입니다. 맘몬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를 경배하는 것이 자신(또는 교회)이 사는 길이며 이웃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재물()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 재물이 우리의 주인이 되거나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재물을 사랑하지 말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않기에 생활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재물이 우선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물질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신다고 믿고 하나님 나라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아갈 때,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삶의 우선순위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돈은 우리가 정말 믿는 대상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가장 실제적인 잣대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필요를 따라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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