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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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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사랑을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533-48

 

언제 홈쇼핑 채널에서 필요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보는데, 그 호스트는 열을 내가면서 오늘만 이 최저 가격으로 준다.’고 하면서 다음에는 이런 기회가 절대로 없을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유명한 연예인도 곁에서 말을 거들면서 이 가격이 절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시는 그 가격에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물건을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물건을 구입하고 며칠 후, 또 그 제품을 방송하는데 구입한 가격보다 더 싸게 판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방송을 보는 순간, 그 동안 이미지 좋았던 연예인이 신뢰가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통해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가르치셨습니다. 이제는 나머지 세 주제인 맹세, 보복, 이웃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헛된 맹세를 금하여 맹세한 것은 철저히 지키라는 율법에 예수님께서는 어떤 맹세도 하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동해보복법에 대해서는 보복 자체를 금하십니다. 이웃과 원수를 사랑과 마음의 대상을 확실히 구분했던 사고에는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을 가하는 대상을 위해 기도하라 명령하십니다. 그것이 하늘나라의 삶입니다.

 

맹세에 대한 가르침(33-37)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고 생각할 때 맹세를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것을 보증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수단으로 해서 약속합니다.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어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맹세를 남용했고, 거짓 맹세를 자주하고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맹세에 대한 교훈을 하였습니다.

 

33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33-37)

율법을 성취하고 더 나은 의를 보여주는 네 번째 예는 맹세에 대한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맹세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계명을 들었습니다(19:12; 23:21-23; 30:2; 50:14). 서원과 맹세는 같은 개념이며(50:14), 1세기 당시 유대교에서 맹세는 서원 또는 서약과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1) 거짓 맹세를 금함(34-36)

예수님께서는 지킬 마음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권고하십니다(34). 이스라엘은 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았지만, 하늘이나 땅, 또는 예루살렘, 머리를 두고 맹세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실을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사용하지 않도록, 그 어떤 것을 두고도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당시에 잘못된 언어 습관에 대해 예수님께서 헛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맹세란 단어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맹세할 만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주로 재판하는 과정에서 증인이나 피고인에게 맹세를 하게 했습니다. 거짓 명세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나님께 하는 맹세에만 적용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하늘이나 땅 등을 걸고 맹세하고 난 후에는 이를 억여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맹세를 쉽게 하는가 하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맹세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은 맹세에 효력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를 따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효력이 없지만 성전 금고의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재단을 두고 맹세한 것은 효력이 없지만, 그 위에 있는 예물을 두고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참고, 23:16-22). 이런 맹세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신의 거짓을 정당화시키려는 악의 증거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나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땅은 하나님의 발판으로서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35). 예루살렘은 위대하신 왕, 하나님의 도시이므로 인간이 사용할 권한이 없습니다(48:2). 자신의 머리라고 해서 맹세에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므로, 인간은 자신의 머리를 걸고 무엇을 맹세할 정도로 능력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2) 정확한 의사표현(37)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므로 율법이 요구하는 맹세를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새 백성은 과거의 옛 언약 백성이 맹세의 수단으로 자신의 진실을 확보하려 했던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맹세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진실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나라의 새로운 백성들은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겸손하게 낮아져서 함부로 거짓 맹세를 남발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사는 성도임을 고백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말과 삶이 맹세에 대한 율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더 나은 의는 맹세하는 대상을 사용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오라는 말로 진실을 실천하면 구약의 율법을 성취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일과 미래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항상 자신의 행동이나 말에 책임지기가 힘듭니다. 그러므로 당신 역시 크고 작은 일에 쉽게 맹세하거나 장담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을 대할 때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종종 내 이름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자신을 지켜주신 못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는 위기를 모면하고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동기일지 모르지만, 당사자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맹세하지 않아도 될 만큼 항상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맹세보다 진실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항상 진실하게 말하고 행한다면 맹세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맹세를 한들 아무 소용없을 것입니다.

 

보복에 대한 가르침(38-42)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할 세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으면 그에 상응한 배상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의한 방법으로 행동했으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율법에도 그런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38-42)

다섯 번째 예는 보복(報復)’에 대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갚으라는 동해보복법(38; 21:24; 24:20; 19:21)과 대조해서 보복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38).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은 개인의 보복 행위를 금하도록 주어진 공식 규정으로서, 보복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법입니다. 이 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은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구약 율법에도 사람들이 잘못하거나 해를 끼쳤을 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법칙은 지금도 중동지방에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극단적으로 눈을 상처 입었을 때, 상대방에게 눈을 헤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타인에게 실수를 범한 사실에 대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할 것을 의미합니다. 절대로 개인적인 복수의 규모나 범위가 더 커지는 것을 막고 공정한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율법을 다시 해석하시면서, 심판해야 할 상황에도 자비를 베풀라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악을 대적하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면 외편 뺨까지,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도 그리고 억지로 가자고 하면 더 많이 가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이성적이나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육신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는 것을 요구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친히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고 불순종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들의 죄를 자신에게 돌려달고 기도하면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렇게 악한 죄인들을 위해 선으로 갚기 위해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가 바로 부활(復活)’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들이 죽을 때, 승리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악을 따라서 하는 삶과 선을 위한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6:23)

죄의 결과는 사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의 이익을 챙겨가면서, 절대로 손해를 않고자 산다면 삶 가운데 부활의 열매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야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핍박했던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원수에 대한 가르침(43-48)

악한 것을 정당히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악을 막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힘으로 막으면 어느 순간에 균형이 잃어지면 다시 무너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를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3-48)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세상에서 보여 준 인본주의적인 사랑이나 박애주의적인 사랑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사랑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만이 온전한 참 사람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계명을 들었습니다. 이웃 사랑에 대한 당시의 해석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원수들을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44). 기도는 진심으로 소망하는 표현이므로 결코 쉽게 행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구약에도 원수를 잘 대하라는 내용이 나오지만(23:4-5; 24:17; 25:21), 원수를 사랑하는것은 이런 구절보다는 훨씬 급진적이고 사실상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전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고받는 개념이 아니라, 돌려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주는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온전하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과 같이 자녀인 우리들도 온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나의 감정에 따라 복수하거나 앙갚음을 하려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자아 중심적인 삶 그리고 세상이 주는 유혹을 따르는 삶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위해 용서할 뿐 아니라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위해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12:30-31)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온전해지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분명히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께 의지해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 가아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심으로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셨던 대로 그런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적을 물리칠 힘과 능력이 있었지만,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시면, 자신의 가르침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력 있는 삶은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때 존경하고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존경 받고 영향력을 발휘해서 세상 사람들의 수준보다 훨씬 높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온전하신 것처럼 자녀들인 제자들도 온전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을 보고 우리도 이웃에게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자비를 베푸시는 것처럼 세상에 비친 제자들도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말고 모든 사람을 착한 행실로 성결하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온전함, 성숙함입니다. 날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으로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살아가는 성도들, 성숙한 성도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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