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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9-03)


긍휼히 여기시는 목자이신 예수님

마태복음 9장 27-38절


‘불쌍함’이란 단어는 따뜻하면서도 불편합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따뜻하지만, 그 수식어가 자신에게 달린다면 마음이 무거워질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이 단어를 꺼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함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지금까지 마태복음 내용을 정리해 보면, 5-7장은 가르침과 8-9장은 치유하심 두 가지를 표현했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8-9장을 통해 열 가지 이야기 중 마지막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이 두 맹인의 치유와 귀신 들린 벙어리의 치유 사건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메시아임을 확신시켜 주는 사건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를 전할 추수할 일꾼의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맹인을 고치신 예수님(27-31)

말씀과 믿음의 순종이 만들어낸 역사는 여태 가보지 못한 새로운 신앙의 지평으로 인도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나와 자기 삶의 여러 조건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못하는 자의 눈을 만져 믿음대로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병이나 고친 치유자로만 믿게 된다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설익은 영적 흥분과 열정은 오히려 사역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26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27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27-31)

본문은 두 맹인을 치료하시는 예수님의 초월적인 권세가 소개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에 이어 맹인이 보게 되는 기적이 등장합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본 사건은 마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할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맹인의 간청과 예수님의 반응(27-28)

예수님께서 갈릴리 회당장 집에서 떠나자 맹인 두 사람이 따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27)라고 부르짖습니다. 당시에 앞을 못 본다는 것은 일반적 장애를 넘어 종교적 신념이 반영된 질병, 곧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질병과 죄를 연관성 있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맹인들은 누군가의 잘못으로 장애를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맹인이나 눈에 질병이 있는 사람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위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맹인들이나 눈에 질병이 있는 사람은 질병과 관련 있는 사람이었고, 제사 제물을 오염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 행사장에서 금지당했던 것입니다.

한편 구약에서 맹인들을 위한 배려도 언급됩니다. 맹인들 앞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두지 말아야 하며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내용보다 훨씬 긍정적인 내용은 이사야 35장 5-6절에 등장합니다. 이사야는 맹인의 치유를 종말론적 회복을 보여주는 증거라 예언합니다. 두 맹인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종말론적 회복을 시작하고 계심을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맹인들은 자신들에게 종말론적인 선물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지도록 간구합니다. 맹인들의 외침에서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합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것은 공관복음에서 특히 마태복음에서 메시아를 부르는 칭호입니다.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정확히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하신 사역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서 구속하는 일입니다. 둘째, 그들은 예수님께서 치료해달라고 구한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주심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원하시는 것은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1:21) 메시야로서 예수의 치유 사역의 본질은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다윗의 아들’이라고 외친 맹인들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떠나 집에 들어갈 때까지 따라갑니다. 상당한 거리를 뒤따르며 예수님의 머무는 숙소까지 따라올 만큼 절박했습니다. 맹인들의 외침에도 예수님께서는 모른 척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들의 외침에도 집에까지 들어가셨겠습니까? 정상적인 수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따라가면서 그 맹인들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 맹인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무리가 없는 집안에서 예수님께서 맹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기 전에 원하는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믿음 여부를 물으신 것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히 기적의 가능성을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로 너희들에게 역사할 수 있겠느냐?’라고, 그들의 믿음을 확신시키신 것입니다.

맹인들은 주저 없이 단호하게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에 이미 그 믿음이 배어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맹인을 보게 하신다고 하신 메시아의 약속을 성취하신 메시아이심을 증거 하는 역사입니다. 두 맹인들이 믿는 것은 예수님을 눈을 뜨게 해주 치료자로서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메시아로 믿는 것입니다.

 

(2) 치유와 경고(29-31)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보여주시는 치유의 행위도 다양합니다.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29)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권능을 일어나게 하는 통로입니다. 마태복음에서 핵심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로서 신뢰의 의미입니다. 신뢰의 모범은 이미 이방인 백부장(8:5-13)과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이 보여주었습니다(9:1-13).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도 가능하겠지만(8:8), 직접 만지심으로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메시아의 오심을 환영하는 자가 그의 긍휼을 맛봅니다. 결국, 그들의 믿음대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눈이 밝아진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엄하게 경계하시면서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경계하신 것은 기적적인 사건들로 구원을 일으킬 만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전시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해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치유에 사건만 보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병이나 고친 마술사 정도로밖에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맹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에 대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31)

 

벙어리를 고치시는 예수님(32-34)

예수님의 동력은 긍휼입니다. 하늘 보좌로부터 낮은 땅으로, 길고 긴 역사 속에서 정확한 카이로스에 도시와 마을로 가서 한 영혼을 찾아내십니다. 목자 잃은 양들이 광야의 절벽에서 죽어가며 살려달라는 간절한 신음소리를 들으십니다. 그가 들으시고 찾아오셔서 고치십니다.

 

32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32-34)

세 번째 부분을 마무리 짓는 마지막 기적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번에는 귀신이 들려 말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집에서 밖으로 나가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사람들은 하늘나라 복음의 혜택을 경험하도록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을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 머문 집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치유를 원하는 무리가 줄지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말 못하는 것은 귀신 때문이었습니다. 두 맹인에게 하셨던 치유 행위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의 치유는 하나님의 통치가 종말에 실현되는 증거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가 예수님에게 오자마자 귀신이 쫓겨나고 언어를 회복했다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구체적인 치유 과정은 소개되지 않으나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쫓겨났다는 사실은 분명히 합니다. 말 못하는 사람이 듣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이 기적 역시 앞의 맹인이 보게 된 것과 함께 메시아 시대에 나타날 현상들이라는 점입니다.

이사야 35:5-6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과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 그리고 말 못하는 자의 혀가 노래할 것이 함께 등장합니다. 마태는 지금 이사야 본문을 염두에 두고 기적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해 주자, 이 기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놀라며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이러한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라 탄성을 지릅니다. 마태는 무리가 놀라는 모습을 8-9장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전체 기적에 대한 반응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무리의 긍정적인 반응과 달리 그곳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내놓습니다. 그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34)라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위로 감동 받는 무리에게 경고할 목적으로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부정적으로 반응한 이들에 대한 평가는 11장과 13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신 것이 귀신의 왕의 힘을 의지한 결과라고 궁색한 평가를 내린 것입니다. 나중에 이 주제에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심화된 논쟁을 벌일 것입니다(12:22-29). 그때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낸 힘이 “하나님의 성령에 힘 입은 것”이라고 강변하십니다(12:28). 이처럼 눈앞에서 메시아를 보고도 보지 못하며, 놀라운 기적에 노래하지 못하는 그들이야말로 맹인이요 말 못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에 가서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는 사건은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주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으며, 치유 사건보다는 사탄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에 본문은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선교해야 할 이유(35-38)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만이 인간의 수고를 통해 ‘인간의 추수’가 아니라, 추수의 주권은 하나님께 돌리는 ‘하나님의 추수’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에 동참하느냐는 양적인 부분이 아니라 구원 받을 사람들만 구원하는 질적인 부분에 일꾼을 찾으십니다.

 

35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35-38)

본 단락은 8-9장의 기적 이야기 묶음의 전체적 결론이면서 새롭게 등장할 사역 이야기의 주체적 서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일, 즉 메시아를 함께 전파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 파송 관련 가르침 단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1) 사역의 요약(35)

마태는 5-9장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도시(9:1;10:11;11:1,20)와 마을을 두루 찾아다니며 ‘그들의 회당’(12:9; 13:54)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모든 질병과 모든 약한 고통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은 세 가지였습니다. 먼저 천국에 대한 것들을 가르치시고, 다음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을 전파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는 역사를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천국에 대해 바르게 배우고, 제대로 순종하면,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약한 부분에 바르게 고쳐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심지어 육체의 질병까지도 고쳐질 것입니다. 마태는 산상수훈 이래 8-9장까지 예수님께서는 기적적인 사역 10가지를 선별적으로 소개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사역이 있었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압축해서 진술합니다. 지금까지 사역들에 최종적인 결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했습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2) 세상에 속한 영혼들(36-37)

예수님께서는 다음 사역을 위해 진행해 나가십니다. 그것은 목자 없는 영과 같이 고생하고 있는 기진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36). 여전히 세상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유대인들을 바라본 예수님의 시선이 매우 선명하게 소개됩니다. 마치 목자를 잃어버린 채 위험한 들판을 유리하다 기진맥진한 상태의 양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의 꼴을 먹이며 평안의 길로 인도하는 목자가 되십니다.

마태가 유리하는 무리의 상태를 기록했습니다. ‘고생하다’는 ‘고통을 주다’, ‘압제하다’, ‘낙담하게 하다’의 의미입니다. 또한 ‘기진하다’로 ‘바닥에 버려진다’, ‘무력하게 주저앉다’의 뜻으로 절망적으로 풀이 죽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내용은 목자가 없어서 고통을 겪는 장면을 묘사한 구약의 몇 본문을 암시합니다(민 27:17; 왕상 22:17; 대하 18:16; 겔 34:5; 슥 10:2). 예수님을 목자로 비유하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 내용에서 등장했고(2:6), 마태복음 전체에서 몇 차례 사용됩니다(10:6,16; 14:14; 15:24, 32; 18:12; 25:32). 목자 없는 양 떼의 모습은 지도자가 없어 고통당하는 백성의 모습을 의미합니다(겔 34:6,12; 렘 50:6).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떠안겼습니다(마 23:4). 예수님께 있는 목자의 마음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고친 동기일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가 됩니다. 불쌍한 무리를 보신 예수님의 반응은 추수하는 일꾼들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이 많지만 일꾼이 적기 때문에(37),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라고 가르치십니다(38). 추수하는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38). 제자들은 추수에 참여하는 일꾼들이며, 추수에 참여하는 일꾼들이며, 추수할 다른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서 몇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종말론적 회복, 혹은 모으는 일이 현재 예수님의 권위를 통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다윗과 바벨론을 강조한 예수님의 계보에서 이미 예고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바벨론의 포로 상태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에게 오셔서 회복하는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둘째,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메시아의 마음과 권위로 회복할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면서 큰 추수가 일어날 것을 내다보십니다. 앞으로 하늘나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꾼이 많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 제자들의 임무는 예수님처럼 이스라엘 고통스러운 문제를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처럼 목자 일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직무를 유기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일꾼들이 필요하며 이들은 예수님처럼 목자의 긍휼을 지녀야 합니다. 37-38절의 명령을 36절과 연결하면 추수는 목자가 긍휼의 마음으로 양 떼를 모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심판은 제자들이 아니라 천사들의 몫입니다. 천사는 역사의 종말에 의인에게서 악인을 분리해 심판을 집행하겠지만, 제자들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참여하는 역할을 맡은 자들입니다. 넷째, 일꾼은 보내는 분이면서 수확을 가져오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일꾼들은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일꾼으로 부르셨기에 주인이 아니며 곡식을 모으는 목적도 일꾼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추수의 일꾼들을 통해서 회복하신 공동체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에서 심지어 종교 생활에서 지치고 쓰러진 사람들을 회복하며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하는 일꾼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성품은 지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초창기 예수님의 많은 치유 사건 중에서 마지막 교훈입니다. 맹인과 벙어리를 고치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장차 오실 메시아의 표증이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를 널리 전파해야 합니다. 오늘도 그러한 일꾼들을 찾으십니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할 일꾼을 찾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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