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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9-03)


긍휼히 여기시는 목자이신 예수님

마태복음 9장 27-38절


‘불쌍함’이란 단어는 따뜻하면서도 불편합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따뜻하지만, 그 수식어가 자신에게 달린다면 마음이 무거워질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주님을 향하여 이 단어를 꺼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함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지금까지 마태복음 내용을 정리해 보면, 5-7장은 가르침과 8-9장은 치유하심 두 가지를 표현했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 8-9장을 통해 열 가지 이야기 중 마지막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이 두 맹인의 치유와 귀신 들린 벙어리의 치유 사건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메시아임을 확신시켜 주는 사건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를 전할 추수할 일꾼의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맹인을 고치신 예수님(27-31)

말씀과 믿음의 순종이 만들어낸 역사는 여태 가보지 못한 새로운 신앙의 지평으로 인도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나와 자기 삶의 여러 조건들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못하는 자의 눈을 만져 믿음대로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병이나 고친 치유자로만 믿게 된다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설익은 영적 흥분과 열정은 오히려 사역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26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27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27-31)

본문은 두 맹인을 치료하시는 예수님의 초월적인 권세가 소개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에 이어 맹인이 보게 되는 기적이 등장합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본 사건은 마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할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맹인의 간청과 예수님의 반응(27-28)

예수님께서 갈릴리 회당장 집에서 떠나자 맹인 두 사람이 따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27)라고 부르짖습니다. 당시에 앞을 못 본다는 것은 일반적 장애를 넘어 종교적 신념이 반영된 질병, 곧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질병과 죄를 연관성 있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맹인들은 누군가의 잘못으로 장애를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맹인이나 눈에 질병이 있는 사람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위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맹인들이나 눈에 질병이 있는 사람은 질병과 관련 있는 사람이었고, 제사 제물을 오염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 행사장에서 금지당했던 것입니다.

한편 구약에서 맹인들을 위한 배려도 언급됩니다. 맹인들 앞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두지 말아야 하며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내용보다 훨씬 긍정적인 내용은 이사야 35장 5-6절에 등장합니다. 이사야는 맹인의 치유를 종말론적 회복을 보여주는 증거라 예언합니다. 두 맹인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종말론적 회복을 시작하고 계심을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맹인들은 자신들에게 종말론적인 선물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지도록 간구합니다. 맹인들의 외침에서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합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것은 공관복음에서 특히 마태복음에서 메시아를 부르는 칭호입니다.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정확히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하신 사역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서 구속하는 일입니다. 둘째, 그들은 예수님께서 치료해달라고 구한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주심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원하시는 것은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1:21) 메시야로서 예수의 치유 사역의 본질은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다윗의 아들’이라고 외친 맹인들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떠나 집에 들어갈 때까지 따라갑니다. 상당한 거리를 뒤따르며 예수님의 머무는 숙소까지 따라올 만큼 절박했습니다. 맹인들의 외침에도 예수님께서는 모른 척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맹인들의 외침에도 집에까지 들어가셨겠습니까? 정상적인 수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따라가면서 그 맹인들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 맹인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무리가 없는 집안에서 예수님께서 맹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기 전에 원하는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믿음 여부를 물으신 것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단순히 기적의 가능성을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로 너희들에게 역사할 수 있겠느냐?’라고, 그들의 믿음을 확신시키신 것입니다.

맹인들은 주저 없이 단호하게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에 이미 그 믿음이 배어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맹인을 보게 하신다고 하신 메시아의 약속을 성취하신 메시아이심을 증거 하는 역사입니다. 두 맹인들이 믿는 것은 예수님을 눈을 뜨게 해주 치료자로서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메시아로 믿는 것입니다.

 

(2) 치유와 경고(29-31)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보여주시는 치유의 행위도 다양합니다.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29)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권능을 일어나게 하는 통로입니다. 마태복음에서 핵심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로서 신뢰의 의미입니다. 신뢰의 모범은 이미 이방인 백부장(8:5-13)과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이 보여주었습니다(9:1-13).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도 가능하겠지만(8:8), 직접 만지심으로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메시아의 오심을 환영하는 자가 그의 긍휼을 맛봅니다. 결국, 그들의 믿음대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눈이 밝아진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엄하게 경계하시면서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경계하신 것은 기적적인 사건들로 구원을 일으킬 만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전시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해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치유에 사건만 보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병이나 고친 마술사 정도로밖에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맹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에 대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31)

 

벙어리를 고치시는 예수님(32-34)

예수님의 동력은 긍휼입니다. 하늘 보좌로부터 낮은 땅으로, 길고 긴 역사 속에서 정확한 카이로스에 도시와 마을로 가서 한 영혼을 찾아내십니다. 목자 잃은 양들이 광야의 절벽에서 죽어가며 살려달라는 간절한 신음소리를 들으십니다. 그가 들으시고 찾아오셔서 고치십니다.

 

32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32-34)

세 번째 부분을 마무리 짓는 마지막 기적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번에는 귀신이 들려 말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집에서 밖으로 나가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사람들은 하늘나라 복음의 혜택을 경험하도록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을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 머문 집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치유를 원하는 무리가 줄지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말 못하는 것은 귀신 때문이었습니다. 두 맹인에게 하셨던 치유 행위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의 치유는 하나님의 통치가 종말에 실현되는 증거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가 예수님에게 오자마자 귀신이 쫓겨나고 언어를 회복했다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구체적인 치유 과정은 소개되지 않으나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쫓겨났다는 사실은 분명히 합니다. 말 못하는 사람이 듣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이 기적 역시 앞의 맹인이 보게 된 것과 함께 메시아 시대에 나타날 현상들이라는 점입니다.

이사야 35:5-6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과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 그리고 말 못하는 자의 혀가 노래할 것이 함께 등장합니다. 마태는 지금 이사야 본문을 염두에 두고 기적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해 주자, 이 기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놀라며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이러한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라 탄성을 지릅니다. 마태는 무리가 놀라는 모습을 8-9장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전체 기적에 대한 반응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무리의 긍정적인 반응과 달리 그곳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내놓습니다. 그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34)라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기적이 일어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위로 감동 받는 무리에게 경고할 목적으로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부정적으로 반응한 이들에 대한 평가는 11장과 13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신 것이 귀신의 왕의 힘을 의지한 결과라고 궁색한 평가를 내린 것입니다. 나중에 이 주제에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심화된 논쟁을 벌일 것입니다(12:22-29). 그때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낸 힘이 “하나님의 성령에 힘 입은 것”이라고 강변하십니다(12:28). 이처럼 눈앞에서 메시아를 보고도 보지 못하며, 놀라운 기적에 노래하지 못하는 그들이야말로 맹인이요 말 못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에 가서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는 사건은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은 주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으며, 치유 사건보다는 사탄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에 본문은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선교해야 할 이유(35-38)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만이 인간의 수고를 통해 ‘인간의 추수’가 아니라, 추수의 주권은 하나님께 돌리는 ‘하나님의 추수’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에 동참하느냐는 양적인 부분이 아니라 구원 받을 사람들만 구원하는 질적인 부분에 일꾼을 찾으십니다.

 

35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35-38)

본 단락은 8-9장의 기적 이야기 묶음의 전체적 결론이면서 새롭게 등장할 사역 이야기의 주체적 서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일, 즉 메시아를 함께 전파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 파송 관련 가르침 단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1) 사역의 요약(35)

마태는 5-9장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도시(9:1;10:11;11:1,20)와 마을을 두루 찾아다니며 ‘그들의 회당’(12:9; 13:54)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모든 질병과 모든 약한 고통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은 세 가지였습니다. 먼저 천국에 대한 것들을 가르치시고, 다음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을 전파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는 역사를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천국에 대해 바르게 배우고, 제대로 순종하면,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약한 부분에 바르게 고쳐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심지어 육체의 질병까지도 고쳐질 것입니다. 마태는 산상수훈 이래 8-9장까지 예수님께서는 기적적인 사역 10가지를 선별적으로 소개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사역이 있었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압축해서 진술합니다. 지금까지 사역들에 최종적인 결론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했습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2) 세상에 속한 영혼들(36-37)

예수님께서는 다음 사역을 위해 진행해 나가십니다. 그것은 목자 없는 영과 같이 고생하고 있는 기진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36). 여전히 세상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유대인들을 바라본 예수님의 시선이 매우 선명하게 소개됩니다. 마치 목자를 잃어버린 채 위험한 들판을 유리하다 기진맥진한 상태의 양과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의 꼴을 먹이며 평안의 길로 인도하는 목자가 되십니다.

마태가 유리하는 무리의 상태를 기록했습니다. ‘고생하다’는 ‘고통을 주다’, ‘압제하다’, ‘낙담하게 하다’의 의미입니다. 또한 ‘기진하다’로 ‘바닥에 버려진다’, ‘무력하게 주저앉다’의 뜻으로 절망적으로 풀이 죽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내용은 목자가 없어서 고통을 겪는 장면을 묘사한 구약의 몇 본문을 암시합니다(민 27:17; 왕상 22:17; 대하 18:16; 겔 34:5; 슥 10:2). 예수님을 목자로 비유하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 내용에서 등장했고(2:6), 마태복음 전체에서 몇 차례 사용됩니다(10:6,16; 14:14; 15:24, 32; 18:12; 25:32). 목자 없는 양 떼의 모습은 지도자가 없어 고통당하는 백성의 모습을 의미합니다(겔 34:6,12; 렘 50:6).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떠안겼습니다(마 23:4). 예수님께 있는 목자의 마음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고친 동기일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가 됩니다. 불쌍한 무리를 보신 예수님의 반응은 추수하는 일꾼들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이 많지만 일꾼이 적기 때문에(37),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라고 가르치십니다(38). 추수하는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38). 제자들은 추수에 참여하는 일꾼들이며, 추수에 참여하는 일꾼들이며, 추수할 다른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서 몇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종말론적 회복, 혹은 모으는 일이 현재 예수님의 권위를 통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다윗과 바벨론을 강조한 예수님의 계보에서 이미 예고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바벨론의 포로 상태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에게 오셔서 회복하는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둘째,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메시아의 마음과 권위로 회복할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면서 큰 추수가 일어날 것을 내다보십니다. 앞으로 하늘나라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꾼이 많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 제자들의 임무는 예수님처럼 이스라엘 고통스러운 문제를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처럼 목자 일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직무를 유기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일꾼들이 필요하며 이들은 예수님처럼 목자의 긍휼을 지녀야 합니다. 37-38절의 명령을 36절과 연결하면 추수는 목자가 긍휼의 마음으로 양 떼를 모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론적인 심판은 제자들이 아니라 천사들의 몫입니다. 천사는 역사의 종말에 의인에게서 악인을 분리해 심판을 집행하겠지만, 제자들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참여하는 역할을 맡은 자들입니다. 넷째, 일꾼은 보내는 분이면서 수확을 가져오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일꾼들은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일꾼으로 부르셨기에 주인이 아니며 곡식을 모으는 목적도 일꾼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추수의 일꾼들을 통해서 회복하신 공동체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에서 심지어 종교 생활에서 지치고 쓰러진 사람들을 회복하며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하는 일꾼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성품은 지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초창기 예수님의 많은 치유 사건 중에서 마지막 교훈입니다. 맹인과 벙어리를 고치신 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장차 오실 메시아의 표증이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를 널리 전파해야 합니다. 오늘도 그러한 일꾼들을 찾으십니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할 일꾼을 찾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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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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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마태복음 914-26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새로운 지도자 한 사람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 이전과 그 이후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한 나라가 무너지고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 것이고, 그 새로운 나라가 제시하는 새로운 법과 문화 그리고 가치가 제시된 것입니다. 이제는 이전 방식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전에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앞서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잔치를 벌인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금식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자신이 가져온 하늘나라의 생명을 누리며 기뻐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옛 시대와 새 시대를 옷과 포도주로 비유하십니다. 새 시대를 옛 시대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대조는 이어지는 죽음과 생명의 이야기에서 심화됩니다.

 

바리새인들과의 금식 논쟁(14-17)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율법이나 유대교의 종교 체제로 역동적인 새 시대를 담을 수 없었습니다. 전통만을 고수했다가 정신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만을 고집하면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가로막는 형식뿐인 신앙이 됩니다.

 

1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14-17)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시대를 가져왔습니다. 금식은 유익하지만, 지금은 금식의 시대가 아니라 신랑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실 희락의 시대입니다. 선지자들이 고대하는 그날이 왔기 때문입니다.

 

(1) 요한 제자들의 금식에 관한 질문(14-15)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자산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지 묻습니다(14). 예수님께서는 금식 자체를 반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 때문에 금식해야 하는지 가르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하늘나라 사역을 결혼으로 비유하면서 신랑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금식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혼은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요 잔치이므로(19:6; 5:1; 61:10;62:5; 7:34;16:9;25:10;33:11; 2:1), 예수님의 하늘나라 운동을 결혼에 비유한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참조 22:1-14;25:1-13).

구약에서 혼인 잔치의 신랑은 하나님이지 메시아가 아니지만(5:1; 54:5-6; 62:4-5; 16:6-8; 2:19),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의 혼인 잔치임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은 결혼식 잔치에 초대받은 친구들이나 손님들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은 금식하기보다 축하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지금 잔치로 펼쳐지고 있으며, 하나님 아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지금 마련하시는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에는 금식하게 됩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표현은 이사야 53:8의 이미지와 연결되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십니다. 잔치에서 손님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신랑이 제거됩니다.

 

(2) 옛것과 새것(16-17)

15절은 인생이나 생활의 중심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 이미지에 이어서 16-17절에서 자신이 수행하는 사역의 특성을 언급하십니다. 새 옷 조각은 세탁하지 않아 느슨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헌 옷에 붙인 다음 세탁을 하게 되면 헌 옷이 새 옷감의 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해 찢어지고 맙니다. 새 옷 조각을 붙이는 바람에 옷은 입을 수 없게 됩니다. 이전보다 상황이 악화된 것입니다. 특히 당시의 서민들에게 옷감은 귀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옷감을 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헌 옷은 새 옷감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생 베 조각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늘나라의 복음입니다. 헌 옷은 금식과 제사와 같은 옛 시대의 관습입니다.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터집니다(17). 그러면 포도주도 허비하고 부대도 버려야 합니다. 헌 포도주 부대는 새 포도주를 제어하거나 담아낼 수 없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옷 조각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통해 확장하는 하늘나라의 복음입니다. 옛 부대는 유대교의 전통적인 틀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혹은 토라의 의와 같은 행동 방식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당시의 유대교는 담을 수 없습니다. 둘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가 지금 임했기에, 이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 수행했던 금식을 지금은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개인의 경건 생활의 하나로 금식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신랑이 고난을 받아 땅에서 사라지는 것은 잔치의 의미가 퇴색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잔치를 즐기는 자들을 위해 신랑이 희생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8:17의 의미처럼 하늘나라의 복음은 메시아의 고난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잔치의 즐거움을 누리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제자들은 하늘나라의 감격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을 공유합니다예수님께서는 이어지는 두 비유(16-17)에서 금식으로 특징되는 유대교가 기쁨과 환희로 팽창하는 힘을 가진 예수님의 사역을 담을 수 없음을 의도하십니다. 포도주와 부대 둘 다 보존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토라 혹은 율법을 버리거나 폐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기대하시는 것을 해석해서 이런 해석에 근거한 순종을 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늘나라의 가치에 합당한 삶 속에 하늘나라의 복음이 담길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 적용해 보면, 새 포도주 부대는 새 포도주에 맞춘 구조, 즉 예수님의 사역에 중심을 둔 공동체의 삶을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원칙과 삶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제사가 아니라 긍휼을 베풀고, 유대교의 정결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환대하는 마음을 배우는 길이 새 옷감과 새 포도주에 적합합니다. 우리 시대에 감격의 복음을 담을 만큼 교회의 언어와 문화가 과연 새 부대 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율법주의, 권위주의, 근본주의 등이 교회 구성원의 인식을 장악하고 있다면 부대는 터지고 말 것입니다.

 

살리시고 고치시는 예수님(18-26)

새로운 시대는 율법에서 은혜로 변하여 역사가 일어납니다. 율법적으로 보면 죽은 사람을 만지는 것과 피를 흘리고 있는 여인을 만지지는 부정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초월하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1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18-26)

본 단락은 두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마가복음에서는 죽은 소녀 이야기 속에 혈루증 여인의 치유 사건이 샌드위치처럼 포함되어 있으므로(5:21-43), 한 묶음으로 읽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두 이야기는 혈루증 여인과 한 관리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1) 한 관리의 믿음이 있는 간구(18)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한 관리가 와서 무릎을 꿇고 방금 죽은 자기 딸을 살려 달라고 도움을 간청합니다. 관리의 부탁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랐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도움을 호소하는 사람의 간구에 즉시 응답하시는 분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그 관리를 따라가셨습니다.

 

(2) 혈루증 여인의 믿음(19-22)

예수님의 일행이 이동하는 중에 혈루증 앓는 여인이 몰래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환자는 피를 12년 동안 흘러 늘 생명의 위험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15:25-30). 제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격리된다는 점에서 이 여자는 8장에 나병환자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마태는 열두 해를 문장의 앞에 배치함으로써 여인의 고통스러운 상태를 강조합니다. 여자는 수치스러운 문제인데도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께 왔고(1:21),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믿음의 행위로 보시고 그녀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 여인에게 안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그 여인을 이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믿음이 구원하였다고 격려하셨고, 즉시로 여자는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종교적으로 격리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육체와 정신적인 부분까지 함께 치유하셨습니다.

 

(3) 관리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23-26)

예수님께서는 12년 된 혈루증 여인을 치유해주시고, 한 관리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이미 관리의 딸은 죽어 장례식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집안에는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피리 부는 자들과 소란스럽게 곡하는 무리를 보셨습니다. 당시에는 장례식에서 피리를 불고 곡하는 사람을 두는 것은 일반적인 풍습이었습니다(참고. 48:36; 5:38;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3.9.5). 이 사람들이 피리를 불고 큰 소리로 곡하고 있는 장면은 소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집에 도착해서 집 안에서 장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나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소녀를 보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았을 때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신 모습은 도움이 간절한 사람을 위해 예수님께서 얼마만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도와주는지 보여줍니다본문은 의도적으로 보다 소녀의 손을 잡아주는 예수님의 동작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의 손은 그의 능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손길은 약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보호해주겠다는 의지, 환대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손 외에 구원의 방편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처럼 손을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험한 인생을 견딜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살려내신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존재 목적은 예수님처럼 약하고 아픈 사람의 손을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약하고 힘든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사용해서 힘없이 주저앉은 사람이 일어서게 돕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딸을 살려달라고 소녀의 아버지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함께 가서 죽은 소녀를 살리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소녀를 위해 애곡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이를 깨우듯이 소녀를 일으켰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창조주이심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생명을 불어넣어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자신의 어떠한 사항이 소망 없고 희망 없어 보입니까? 예수님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갈 때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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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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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

마태복음 91-13


예수님께서는 아는 지식이 세상에서 가장 기쁘고 복된 지식입니다. 영어, 수학을 아는 지식도 우리에게 행복과 유익을 주지만, 주님을 아는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더 깊이 알아가고, 더 정확히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를 용서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죄인인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치료하고 구원하려 오신 의사이십니다.

 

가다라 지방에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온 예수님의 일행에게 한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믿음으로 보고 병자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이것을 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생각했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임자임을 나타내십니다. 곧이어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에 방문해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십니다. 바리새인이 이를 보고 에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1-8)

 

예수님의 죄사함과 치유의 기적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들의 믿음과 반응보다는 결국 죄사함의 권능이 주님께 있는 것을 알고 깨닫고 믿는 것이 더 중요한 사건입니다. 다만 두렵고 떨림으로 주께서 이루시고 선포하신 그 은혜 앞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나아가는 것이 가장 합당한 반응입니다. 오늘도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치유하고 회복하고 고치시는 주님의 권능을 기대하며 주님께 영광이 되길 원합니다.

 

1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1-8)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 가다라의 귀신들린 두 사람을 해방시킨 기적을 행하신 후,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습니다(8:23). 이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1) 중풍병자 치유와 죄사함(1-2)

가버나움에 돌아오자, 어떤 사람들이 침상에 누인 중풍병 환자를 데려왔습니다. 성장한 갈릴리 고향에서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중풍에 걸린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2;1-12, 5:17-26).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집에 계실 때, 지붕을 뚫고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께 보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환자가 믿었다는 설명은 없지만, 그에게 이미 믿음이 있었고 사람들의 도움으로 함께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심하라’(2)는 위험과 역경의 상황에도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하는 의미입니다한편, 유대인들은 죄와 병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병은 죄에서 온다고 여겼던 것처럼, 중풍병자는 자신의 병이 죄로 인해 생긴 것처럼, 중풍병자는 자신의 병이 죄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26:14-16; 28:21-22; 대하 21:15,18-19; 4:7; 5:14; 9:2; 고전 11:30; 5:15-16). 따라서 죄 용서로 중풍병이 치유된다는 논리는 유대 청중에게 낯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받는다라는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고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은 예수님의 선포로 죄가 용서받고 있다는 사실, 곧 그의 신적 권위를 강조합니다. 비슷한 수동태 용법이 929절에서 맹인들의 치유가 그들의 믿음대로 되라고 하신 예수님의 선언에도 사용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자신의 말을 통해서, 즉 자신의 신적 권위로 죄가 사해졌다고 선언하며, 이 선언은 즉각 실행되고 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라는 것은 구약과 유대교의 근본 신앙입니다(7; 34:6-7; 103:3;103:4; 43:25; 7:18).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대행할 수 있었습니다(34:6-7; 103:3; 43:25; 7:18). 대제사장의 권위로 용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간기 유대교에서 메시아가 죄를 용서할 것이라는 기대를 기록한 문헌은 없습니다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권위를 갖고 계심을 의도적으로 선언하십니다특히 예수님께서는 다니엘 7:13-14의 인자로서 신적인 권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6).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행사하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는 권한을 침해하였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정죄합니다.

 

(2) 서기관들과 예수님의 논쟁(3-6a)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이런 생각을 아시고 어찌하여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실제로 마비증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중풍병자가 아니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마비되어 예수님께서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예수님께 나오지도 못합니다.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과 중풍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는 말 중에서 어느 쪽 말을 하는 것이 더 쉬운지 묻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죄 용서를 실행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죄 용서를 받았다라고 말로 하는 것은 더 쉽습니다. 병이 나았다고 말했을 때는 치유가 나타나야 하는데, 죄 용서 선언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더 어려운 말을 사실로 증명함으로써 죄 용서를 선언한 것이 빈말이 아니라 죄 용서가 실행되게 만드는 선포임을 밝히 십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신적 권위를 분명하게 밝히시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권능(6b-8)

중풍병자가 일어나 집으로 가는 모습을 통해,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위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예수님의 죄 용서는 땅에서, 인자로서 행사하는 권위로 일어난 일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고, 땅에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인자로서 죄를 용서하십니다이 경우에 인자는 나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다니엘 7:13-14인자 같은 이를 가리킵니다. 중풍병자가 해결 받아야 할 문제는 마비 증상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육체의 질병이 아니라 죄 문제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의 죄 용서와 치유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통해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이 종교 권력자들에 의해 신성모독으로 정죄를 받았는데도, 죄 사하는 권세가 사람에게주어진 것을 두고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입니다. 제자 공동체, 즉 교회는 죄를 용서하는 공동체입니다(5:21-26; 6:12, 14-15; 18:15-35). 교회는 예수님의 죄 용서와 치유를 대행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 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대단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죄를 용서할 권세까지도 가지고 계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를 보고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한 죄 용서함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정리하십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죄 사함을 받았어야 합니다.

 

세리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9-13)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어떤 종교적, 제의적 행위들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길 원하십니다. 그런 가운데 사랑이 담긴 예배와 삶이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실 반한 예배요 예배자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부르신 장면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십니다.

 

9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9-13)

세리와 죄인은 사회적 소외 계층으로, 특히 세리는 매국노나 배신자로 여겨지는 직업이었습니다. 높은 벽 뒤에 숨어 자발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굳이 물을 열고 들어가 함께 앉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문이 없는 벽은 없습니다. 소외된 이에게 찾아가시는 주님은 곁을 내주시고 소명을 주십니다.

 

(1) 마태를 부르심(9-10)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세례 마태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소식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더러운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었습니다. 마태 또한 자신을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동네를 지나가고 있을 때 예수님을 주목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나를 좇으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했던 것입니다.

부르심에 순종한 마태는 예수님과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자신의 삶에 모신 것입니다. 자기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께서는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자신의 삶에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영혼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세리 마태는 자신과 같은 죄인에게 찾아오시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마태도 변화의 삶으로 자신의 물질을 털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유하실 때, 구원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던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에 감격하고 있다면 삶의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구원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2)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논쟁(11-13)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할 수 있느냐에 비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예수님께서는 호세아 66절을 인용해서 자신의 사명을 밝히십니다. 의사가 환저를 외면하지 않고 치료자가 더러운 병을 회피하지 않는 것처럼 이들과 같은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의()가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에 다른 사람들의 잔치가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아니 정죄의 사건으로 보였습니다. 눈앞에 의심에 안개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을 순수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왜곡된 눈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없고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로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치유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결법의 전문가들에게 제사법을 주신 하나님의 동기가 긍휼에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목적으로 호세아 66절을 인용하십니다. 마태복음은 70인역에서 히브리어 헤세드를 번역한 헬라어 엘리오스를 사용합니다. 치유와 긍휼은 호세아 6장의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호세아 61절에서는 하나님을 치유하는 의사로 나타내는데, 66절에 더 넓은 문맥을 고려하면 하나님께서는 치유하시고 길을 헤매는 그의 백성을 위해 긍휼을 보여주시길 원하십니다. 호세아서에서 헤세드는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헌신이면서 이웃을 향한 긍휼의 행위입니다. 헬라어 엘로우스는 이웃을 향한 긍휼의 가조점을 두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70인역 호세아 66절을 인용해서 긍휼의 마음으로 세리들과 죄인들을 대하는 태도를 정당화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배우라고 책망하십니다. 긍휼의 마음이나 실천 없이 제의적인 규례에 집중하는 것은 성경과 하나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잘못된 해석이 잘못된 삶을 열매로 났습니다. ‘내가 왔다라는 예수님의 사명을 가리키는 진술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은 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종하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향한 변찮은 사랑과 신실하심을 보여 주셨고, 몸값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것으로 사람들의 향한 긍휼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향한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서 여러 종교 행위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메시아와 죄인들이 함께하는 잔치의 장면은 교회의 진정한 기쁨이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고통과 수치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복음을 경험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믿음을 들여다보십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사함과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것은, 그들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구원의 은혜는 오직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병이 죄 때문은 아니지만, 이 중풍병자의 병은 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먼저 선포하시고 그 후에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향해 일어나 내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내 죄사함을 받았다라는 말만큼이나 황당한 명령입니다. 그분이하신 말씀이 다 진실이고 그분의 말씀은 곧 사건이고 역사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그 말에 반응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풍병자는 일어나 돌아갑니다. 그 친구들과 중풍병자의 믿음이 그를 기적으로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서기관의 불신은 그 안에서 아무런 역사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분을 믿고 따르기로 결단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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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8-03)

 


흑암의 권세를 물리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823-34


기독교 내에서 봉사하면 대단히 믿음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봉사한다 할지라도 믿음 없이 봉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사회단체에서 봉사하는 것처럼 자신의 명예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역하는 목적에는 영혼을 구원하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워싸는 무리를 피해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기 위해 먼저 배에 오르시고, 제자들도 뒤따릅니다. 제자들은 향해 도중 큰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습에 믿음이 적다 꾸짖으시며 풍랑을 잠잠케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 들린 두 사람을 고치실 때, 다시 한번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목격합니다. 하지만 그 지방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떠나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광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23-27)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지만, 말씀을 거역하여 무너졌습니다. 무너진 세상은 이제 창조주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창조되어 세상의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이, 질서와 채움과 빛으로 변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인정하고 그 분을 믿고 그 분과 연합될 때만 우리에게도 새로운 창조가 가능한 일입니다.

 

23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23-2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임하게 하셨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이 세상 나라와의 영적인 전쟁을 가져 옵니다. 지금도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백성답게 살자고 하면, 반드시 이 세상 나라의 저항을 가져옵니다.

 

(1) 위기를 마주한 제자들(23-25)

혼돈과 죽음의 세력은 제자들을 두렵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서 평안을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꾸짖듯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광풍을 잠잠하게 하신 사건은 8-9장에서 유일하게 자연에 대해 행하신 기적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타고 동쪽을 향해 가던 중에 큰 광풍이 갑자기 몰아쳐 배를 뒤덮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갑자기 광풍이 몰아치는 것으로 유명한 호수입니다. 예수님과 일행이 탄 배는 침몰 직전입니다. 하지만 배가 뒤집힐 상황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자고 계십니다.

 

(2) 위기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26-27)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죽게 됐으니 구원해 달라고 외칩니다. 머리 둘 곳 없이 순회하며 사역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피곤한 몸으로 배 위에서 자고 계십니다제자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은 잠을 자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대조적인데, 마태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을 믿고 평안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까(3:35; 4:8)?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약에서 잠은 깊은 신뢰와 관련이 있는 점을 고려할 때(11:18-19; 3:35; 3:24-26), 마태가 예수님의 평온과 제자들의 근심을 대조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27절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이 고백한 말은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떠올립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자고 계신 것은 땅에서 머리 둘 곳 없이 사시는 그의 고난을 묘사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가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권위를 갖고 계신 분임을 암시합니다. 누구도 예수님을 위협할 정도로 그분의 권위 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평안히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두렵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므로, 가장 강한 자로서 편안하게 주무신 것입니다시편 121편은 하나님께서 주무시지 않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정반대로 시편 44:23-24은 주무시는 하나님을 깨우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비슷한 내용은 시편 7:7; 35:23; 59:5-6에도 등장합니다. 특히 시편 44:23-24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하는 말과 매우 유사합니다. 따라서 본 사건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이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평안했던 예수님이 아니라 바다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신적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정체를 강조합니다. 물론 제자들의 호소가 시편의 내용을 떠올린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믿고 깨운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도 이 순간에는 그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는 어려움에 빠진 자녀가 대단한 재력가인 아버지의 실제 능력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처지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여서 왜 자식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는지 원망하는 투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온 바다가 진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겁에 질리게 된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책망을 받습니다.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서 자연을 통제하는 분임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의 두려움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다를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갖고 계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정제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 믿음이 작은 상태이며, 믿음이 작을 때 두려움이 엄습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겁에 질린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어나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꾸짖으시는 분입니다(18:15; 104:7; 106:9, 50:2; 1:4). 특히 구약과 유대교에서 바다는 혼돈의 세력이 나오는 출처로 인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다를 제압하는 주가 되십니다(89:8-11; 107:23-30; 참조 시 69:13, 30-36; 124; 1).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자연을 통제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을 제압하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목격한 제자들은 놀라서 그가 누구이기에 심지어 바람과 바다도 그에게 복종하는지 묻습니다. 제자들은 폭풍과 같은 인생의 위기에서 예수님의 보호를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과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인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제자 공동체를 보호하신 것처럼, 시대의 끝까지 시대를 초월해서 교회에 긍휼을 베푸는 것으로 함께 하십니다.

죄로 무너진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새 창조되어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이 질서와 채움과 빛으로 변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자신의 삶에 선장으로 모시고 살면 거칠고 험난한 인생 항해에서도 편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들을 치유(28-34)

귀신은 질서를 망가뜨리고 혼돈을 일으킵니다. 복음을 방해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상인 인격을 철저하게 파괴시켰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귀신에 붙들려 무덤 사이에서 사는 두 사람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귀신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권능 앞에 서게 됩니다.

 

28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28-34)

예수님께서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세력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귀신 들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자시가 악의 세력과 싸워 그들을 정복했다는 사실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1) 누구도 가지 않는 곳에 가심(28a)

예수님께서는 제자 일행과 함께 갈릴리 호수 동쪽에 위치한 데가볼리의 가다라 지방에 도착합니다. 이 도시는 유대인이라면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향해 감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귀신 들린 두 사람이었습니다. 두 명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숫자의 개념입니다.

 

(2)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자(28b)

귀신 들린 사람들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들의 상태는 사람들을 몹시 폭력적이고 위험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해칠 수 있었습니다. 그 옆으로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마을에서 쫓겨나서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무덤은 우리나라처럼 평토장(平土葬)이 아니라 바위나 언덕에 동굴의 모습으로 사람이 충분히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3) 악한 귀신의 최후에 심판을 귀신들(29-30)

귀신 들린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따지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29)라고 귀신은 예수님의 신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온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우리가 당신과 무슨 관계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서로의 관심이 다른데 왜 이곳을 찾아왔느냐는 의미입니다.

어둠의 권세 잡은 사단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온전히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온전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은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님께서 때가 이르기 전에 왜 오셨는지 묻습니다. ‘는 귀신들이 형벌의 장소로 보내지는 시기로, 악인들과 함께 악한 천사들이 심판을 받는 최후 심판의 때를 의미합니다. 심판의 결과로 귀신들은 지옥의 형벌을 받습니다(25:31-46). 귀신은 자신들의 운명과 자신들의 마지막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그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다라는 의미는 법정에서 육체적으로 고통을 준다또는 고문하다는 의미로, 극심한 고통을 묘사하는 동사입니다. 본문에서는 종말론적인 심판을 의미합니다. 귀신들은 자신들이 고통당할 때, 즉 최후 심판의 때가 있습니다. 아직 그 때가 오지 않았는데 굳지, 왜 예수님께서 벌써 자신들에게 왔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지 않자 귀신들은 자신들을 심판하러 온 것을 직감하고 멀리 있는 돼지 떼에게 들어가려고 쳐다보았습니다. 당시 로마가 집권하고 있는 헬레니즘 문화는 돼지를 부와 쾌락 신의 축복의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데가볼리 지역은 주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게 협력하면서 자치와 통상, 면제의 특권을 부여받았고, 친 로마 성격으로 도시 동맹체 성경을 유지하며 로마식 제사를 통해 돼지를 잡아 드렸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지역을 배척했습니다주전 63년에 안티파스가 유대를 침공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고, 돼지를 성전 재단에 바쳤습니다. 로마 제국 입장에서 유대인들을 모독하기 위한 행위가 아닙니다. 이러한 종교 행위를 통해 헬레니즘 문화권의 영향력을 증험하는 행동일 뿐입니다. 데가볼리 지역은 돼지를 잡아 제사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곳에서 돼지를 사육하고 2000마리 가까운 돼지를 사육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큰 구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돼지를 이렇게 많이 사육하고 있었던 것은 단순하게 경제논리가 아니라 로마 황제를 숭상하는 행위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인식에는 로마 황제는 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신의 아들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지를 만드시고 세상의 주권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을 자신의 것이라고 오해하고 헬레니즘 문명이라는 미명 아래 점점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징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운명을 알아챈 귀신들은 돼지 떼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의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결국 돼지 떼는 물에서 몰사 합니다(32). 돼지들은 악하고 폭력적인 귀신들을 견디지 못해서 바다를 향해 달려가 죽습니다.

 

(4) 탐욕스러운 자들에게 거절당하심(33-34)

이 많은 돼지를 치던 자들의 보고하기 위해 시내에 들어갔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려고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달려왔습니다(33). 그리고 그들은 광경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지방에서 떠나 달라고 요구합니다(34).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의식이 무엇입니까? 경제적인 이유로 예수님을 떠날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돈이 자신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다시 찾아올 수 없는 복음의 유일한 기회를 내쳐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치유보다 돼지를 더 중히 여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도시를 집으로 삼은 귀신들을 쫓아내심으로써 현재와 미래의 가장 큰 위험을 제거하셨으나, 주민들은 예수님의 행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서 본 동네로 가버립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하늘나라의 도래와 관련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귀신들이 들어온 돼지들이 죽은 장면은 귀신들의 운명도 지상에서 사라질 것을 암시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무저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지만, 귀신들이 돼지 떼와 함께 물속에 던져진 것은 귀신들이 최후 심판 전까지 물아래 심연 또는 무저갱에 갇혔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 8:26-3931절에서 귀신들이 무저갱에 던져 넣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귀신들이 심연에 갇히는 그림은 하늘나라가 예수님의 권위로 강력하게 임했음을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하늘나라의 공격을 받아 사탄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통해서 사회에서 쓸모없는 인생을 위해 헌신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된 사람을 만나려고 바다 폭풍을 뚫고 이곳에 오셨고, 회복하고 다시 돌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오셔서 긍휼을 가르치기 위해 현장 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부정한 곳에서 부정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은 치유할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 사회에서 효용 가치가 높은 것을 희생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안 해서 낭비로 여깁니다. 그러나 제자는 죽어가는 사람을 회복하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사람의 목숨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낭비처럼 보일지라도 사람을 회복하는 일이라면 하늘나라의 사역입니다.

 


믿음이 작을 때 환경에 흔들리게 됩니다. 갈릴리 바다에 큰 물결이 일어나 배가 잠기게 되자 어부 출신 제자들조차 죽음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깨우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작은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창조주 만유의 주로 고백하고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면서도, 때로는 환경 때문에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의 배에 누가 타고 있는지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배에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큰 풍랑이 일지라도 그 배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우리 인생을 다스리고 주 대신 그 주님께 믿음의 눈을 들어 바라보며 폭풍 가운데도 평안을 누리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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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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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주인공 예수님

마태복음 814-22


 

옛날에는 제자가 선생님의 집에서 상당 기간 먹고 살면서 배우는 도제(徒弟)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진정한 제자는 선생님과 항상 살면서 선생님의 모든 것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예수님과 항상 함께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과 모든 것을 함께 하고 누리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8-9장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증거로 열 가지 기적을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서 열병에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십니다. 그날 밤 귀신 들린 자들과 각종 병든 자들이 몰려들었고,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으시고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무리를 강 건너편으로 보내실 때,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자처합니다. 또 한 제자는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따르겠다고 합니다. 이 두 반응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참 제자도를 가르쳐주십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14-15)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순간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연구는 죽음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14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 들더라(14-15)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와 이방인 백부장에 이어서(1-13), 이번에는 유대 사회에서 소외의 대상인 여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치유 받은 이들의 공통점은 배척당하는 이들, 소외된 이들로서 당시에 일반적인 생각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회복하여 천국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 가셔서 열병을 앓고 있는 장모를 보셨습니다. 열병은 갈릴리 호숫가에 위치한 저지대에서 흔히 발행한 말라리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버나움은 곡식, 어업, 무역 등으로 여건이 좋은 지역이었으나 말라리아의 위험이 늘 상존했습니다. 만일 장모의 열병이 말라리아였다면, 당시 의술로는 고치기 힘든 병으로 목숨이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환자에게 손을 대는 방식으로 고치십니다. 구체적인 치유 장면이 생략되어 있지만, 예수님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과 긍휼을 더욱 잘 보여줍니다. 그분의 긍휼과 능력의 손이 닿는 곳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이 치유 기적에 대한 반응으로 예수님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마가는 그들을섬겼다고 기록하는 반면에, 마태는 섬김의 대상을 예수님으로 좁히고 있습니다.

섬기다는 신약에서 교회에서의 섬김을 표현할 때, 집사를 가리킬 때 사용된 용어입니다(딤전 3:10,13).

마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손을 잡는 장면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할 때 반복해서 손을 잡으시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육신의 병은 마음의 병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저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음 아픔에 예수님의 시선은 그를 향하고 긍휼의 손을 그에게 대십니다.

치유에 대한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으로부터 일어나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4:39) 베드로의 장모는 일어나서 즉시 예수님과 그 일행을 섬겼습니다. 본문에서 보여주는 참된 믿음은 만왕의 왕으로서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치유에 대한 반응으로 예수님을 섬깁니다. 하늘나라의 일꾼이 섬겨야 할 대상은 예수님이며, 섬김의 동기는 예수님의 치유, 혹은 구원임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먼저 베푸신 치유에 감사해서 예수를 섬기는 공동체이며, 교회의 직분 역시 예수님을 수종 드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수단과 목적을 뒤바꾸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대신에 그 사회를 오염시키고 악취를 풍기는 존재가 됩니다.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수님(16-17)

 

예수님께서는 관객이 아니라 선수로, 관람객이 아니라 제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합당한 헌신과 결단이 뒤따르지 않을 때, 주님의 은혜는 값싼 은혜로 전략하고 맙니다. 주님의 고귀한 은혜에 합당한 섬김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제 마태는 예수님의 전반적인 사역에 대해 요약한 것을 소개합니다.

 

16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16-17)

본문은 1-15절의 치유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나타난 치유와 축사 사역에 대한 전체를 요약하는 진술입니다.

저녁이 되자,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이 귀신 들린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 그리고 약한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치유하는 방법은 말씀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이는 앞에서 백부장이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종이 나을 수 있다고 말한 것과 연결됩니다.

마태는 치유에 대해 요약 후에 이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되어진 것이 성취되기 위함이니’(4:14;12:17)라는 성취 공식(1:22;2:15,17,23;13:14,35; 21:4;27:9)을 사용해서 이 치유가 이사야 534절의 성취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치유는 81-15절의 세 가지 치유뿐만 아니라 16절에 나타난 모든 치유 행위를 포함합니다. 이사야 534절은 네 번째 종의 노래인 52:13-53:12에서 고난의 종을 묘사하는 본문에 속합니다(첫 번째부터 세 번째 종의 노래; 42:1-4;49:1-6; 50:4-9).

마태는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고난의 종에게 부여된 사역을 성취하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의 치유 지식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강조했는데, 이제 정반대로 약한 것을 취하고 질병을 짊어지는 고난의 종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이나 열병과 같은 병을 대신 앓은 것이 아닌데도 고난의 종이라는 개념이 817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질병의 속성은 고통에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환자들의 고통에 참여하시고 고통을 지고 가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129-13절에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는데, 이후 바리새인들이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밉니다(12:14-16). 이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그의 고난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고난 없이 치유를 논할 수 없습니다. 치유의 사건들을 통해서 이사야 예언대로 예수님을 통해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종으로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한 자들을 치유하기 위해 권위를 사용하십니다. 치유는 이사야 53장의 종과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신 질병을 떠맡기 위해 오신 메시아입니다.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을 통해 자신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임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따르는 법(18-22)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축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오해하여 인간적인 구원자로 기대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떠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며, 그분을 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은 없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18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18-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갈 것을 명령하십니다. 갈릴리 바다의 건너편은 오른쪽에 위치한 시리아 지역이며, 여기에는 데가볼리도 포함됩니다. 마태는 참된 믿음을 설명하신 후에, 잘못된 믿음의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서기관에 대한 평가(18-20)

첫 번째 잘못된 믿음의 종류는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서기관에게 적극적으로 잘했다고 칭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치러야 하는 대가, 혹은 비용에 대한 내용입니다. 한 서기관(누가복음 9:57에는 어떤 사람으로 표현됨)이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든지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토라의 전문가인 서기관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큰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표현은 여우나 새는 고정된 장소에서 쉬거나 자는 반면, 예수님께서는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회하는 여정 가운데서 치유하는 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편안한 집에 거주하지 못하셨습니다(참조, 4:18-22,23). 순회하거나 집을 떠나 이동해야 하는 예수님의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예고된 것이었습니다(2:13-14; 12:14-15; 14:12-13; 15:12-14,21; 16:1-5). 무엇보다, 머리 둘 곳 없는 삶은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특히 인자’(20)는 다니엘 713-14절에 근거한 칭호로서 다니엘 7장의 인자는 하늘의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존재로서 이 땅에 섬기기 위해(20:28)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므로, 그는 머리 둘 곳이 없는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본문의 서기관도 인자인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므로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신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인자(7:13-14)와 땅에서 고난의 길을 가는 인자의 삶은 매우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인자의 삶을 본받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어떤 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순회하는 예수님을 따라 순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식의 삶에서는 자신의 소유를 유지할 수 없으며, 사회적 관점에서는 주변인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서기관의 의를 넘어서야 했습니다.

그 서기관은 예수님을 통해 유익을 얻으려는 욕심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길이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라 집도 없이 다니는 고난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세상을 따르겠다는 제자에 대한 평가(21-22)

두 번째 잘못된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다른 제자 한 명이 예수님께 와서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21).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중요한 덕목이었으므로(20:12; 15:3-6) 이 사람의 요구는 합당합니다.

매장은 유대 세계에서 최고의 덕목 중 하나였습니다(50:5-6; 토빗서 4:3; 6:14), 제자가 말하는 장례는 첫 번째 장례가 아니라, 1차 매장 이후 남은 뼈를 모아서 가족 묘(동굴)에 있는 조상들의 뼈와 합치는 두 번째 매장입니다. 이 풍습은 이미 1세기 전에 많은 문화권에서 행해졌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의 뼈를 모으는 것은 자식의 의무였습니다.

이 제자는 임종을 지켜보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매장을 끝내고 아버지의 장례 절차를 마무리 한 다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아버지를 끝까지 보살피고 나서 따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번째 매장의 날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만 따르는 것을 연기해달라는 부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들이 자신들의 죽은 자들을 매장하게 하라고 대답하십니다. 당연히 죽은 뼈들이 알아서 뼈를 정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예수님의 표현은 문자적 의미가 아닙니다. 죽은 자들은 무덤에 있는 죽은 자들 내지 조상들의 뼈를 의미합니다. 가족묘에 있는 다른 뼈들로 아버지의 뼈를 다시 매장하도록 두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어떤 경건 행위보다 중요했던 매장보다 더 긴급한 것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해서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더 본질적이고 긴급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헌신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가장 귀하고 우선적인 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려면 떠나야 합니다. 지금 편리하고 익숙한 곳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전을 지탱해주던 모든 조건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자신이 우선순위로 삼았던 것에서 떠나야 합니다. 심지어 사회적 통념에서 떠나야 했고 기득권을 버려야 했습니다. 따름의 순종은 그렇기에 안주하는 이들에게 평면적이고 급진적이고 심지어 체제 정복적인 일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보기에 낯설고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만이 죽음을 기념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서 영생을 바라보는 삶을 잊지 않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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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8-01)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예수님

마태복음 81-13


 

아무리 강력한 태풍이라고 할지라도 태풍 중심부에서 반경 10Km 이내에는 바람이 강하지 않습니다. 이 지역을 태풍의 눈이라고 합니다. 그 태풍의 눈은 주변은 강력하게 바람이 불지만 기상 현상이 매우 평온하다고 합니다. 아무리 강한 고난이라도 그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계시면,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적이 소개됩니다(7-9). 이 열 가지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본문에서는 나병환자와 이방인 백부장 하인을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산상보훈에서 전하셨던 예수님께서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1-4)

 

우리의 상처를 하나님께서 어루만지실 때,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상처와 치부를 숨기지 않고 주님 앞에 드러내는 용기가 치유를 가져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몸을 친히 만져 주시면서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1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1-4)

예수님께서 권세 있는 말씀으로 산상보훈을 가르치시고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놀란 많은 무리가 그분을 쫓았습니다. 예수님 권세의 실제는 병을 고치시고 축사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는 대목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마태복음은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인생이 회복되는 장면을 맨 앞에 배치해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목적과 결과를 선명하게 드러내십니다.

(1)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1)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말씀을 마치시고 산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때에 한 나병환자가 산에서 내려오시는 주님 앞에 나와서 엎드렸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마을에서 추방되어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끊고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은 살인죄로 간주하여 돌로 쳐 죽였습니다. 레위기 13-14장 규정에 따라 나병환자들은 부정한 자들로 규정되었으므로 공동체 속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질병의 상태가 사라지면 제사장에게 검사를 받고 적합한 예물과 정결 예식을 거쳐서 정결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야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정결한 공동체나 개인에게 접근할 수 없고 사람을 만나면 접촉이 불가능하도록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음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는 내어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손을 뻗으면 다는 위치까지 온 것은 율법을 어긴 행위입니다. 여기서 나병환자가 보여준 믿음은 어떤 조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권위를 믿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예수님(2-3)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권위를 확신했지만,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2)라고 치유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믿지 않았다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참된 믿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의 요구에 의해서 받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데로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나병은 깨끗하게 되는 것으로 3번 반복해서 묘사됩니다. 그는 자신의 병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부정한 상태인 것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뻗어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으로 치유하기를 원한다는 뜻을 표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의 감염이 되지 않도록 도리어 거룩함을 전염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3)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즉시 오랜 저주에서 해방을 맛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만이 나병을 치유할 수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 자신이 치유할 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가 치유됨으로 제사장에게 가서 나은 몸을 보여주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증거로 드리라고 지시합니다.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된 후, 정결한 공동체에 들어가기까지는 8일이 소요됩니다. 레위기 14장에서 피부병에서 회복된 사람은 제사장에게 정결한 비둘기 두 마리를 들고 갑니다. 그 중 한마리를 잡아 피를 신선한 물과 혼합한 다음이 피를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사용해서 병에서 깨끗하게 된 사람에게 뿌립니다. 또 다른 새는 산채로 날려 보냈는데, 이는 사회와 사람을 괴롭힌 문제를 가져가게 하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통해서 더 나은 의와 그것을 행하는 의미를 말씀하신 후에, 나병환자가 치유 받는 사건을 배치함으로써 하늘나라의 의가 긍휼을 베푸는 것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늘나라는 회복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을 통해서 일그러진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 하늘나라의 복음입니다.

깨끗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나병환자의 비참한 모습은 나병과 죄의 관련성을 떠올립니다. 사람의 모습을 일그러지게 만드는 죄에서 반드시 해방되어야 하며 구원을 받는 길은 예수님의 긍휼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덧붙여 땅에서 가장 부정한 자인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가졌던 신뢰와 확신은 마태복음에서 잃은 자들로 하여금 어떤 여건 속에서도 예수님의 권위에 의지해 나오도록 격려합니다. 부정한 나병환자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왔고, 예수님께서는 그와 거리를 좁히십니다.

새 시대에는 하나님과 부정한 자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고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오는 자는 정결한 백성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침묵을 경고하신 예수님(4)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 치유받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이 명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혹은 민족주의적 해방자로 인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의 사역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옴과 함께 원치 않는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위험성을 알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에게 율법이 규정해놓은 예물을 드리라고 나병환자에를 지도하는 예수님의 모습(14:10이하)은 그가 레위기 14장이 정해놓은 정결 규례를 따르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방인 하인을 고쳐 주신 예수님(5-13)

믿음이란 예수님의 권위와 그 권위에서 나오는 능력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늘나라를 상속 받는 조건입니다. 그 나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갈 백성의 자격을 알 수 있습니다.

5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5-13)

하늘나라는 유대인들만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에는 백부장과 같은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본문은 이제 또 다른 믿음의 사람인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간 사건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고, 자신의 문제도 아닌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호소하고 나왔습니다.

(1) 한 백부장과 만난 예수님(5-7)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자 한 백부장이 다가와 간청합니다. 100명의 보병 군사를 이끌었던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로마인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자기 종의 치료를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예수님의 치유하는 권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차례에 걸쳐 그의 믿음을 언급하십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라고 응답하십니다. 백부장을 만나 주시고 소원을 이루어 주시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능력입니다.

(2) 백부장의 반응과 칭찬(8-10)

예수님께서 직접 방문하여 치유하시겠다고 반응하시자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오지 말고, 말씀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말씀만 하셔도 종이 나을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백부장은 권위 있는 예수님을 맞이할 자격이 없으니 말씀만 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의 말인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9)라는 백부장의 말에서 증명됩니다. 그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절대적으로 믿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이면 충분하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지 않고 말씀만 하셔도 종의 병이 낫게 될 이유를 자신의 직업 경험을 통해 설명합니다. 권위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치유의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말을 듣고 매우 놀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이 정도의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3) 종의 치유하신 예수님(11-13)

본문에서는 이방인의 믿음과 그 나라의 아들들에게 있는 불신을 대조하면서 누가 하늘나라의 상속자들인지를 밝힙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식탁에 앉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식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글허게 기대하는 것이며 그들은 메시아의 잔치에 참여해서 먹고 즐길 것이라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이방인들이 아니라 흩어진 디아스포라를 모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11절에서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라고 하신 말씀에, 그곳에 올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으신 종말론적 새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조상들과 함께 메시아의 만찬 자리에 앉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동서로부터 와서 잔치에 참여할 것이지만, 본 나라 유대인의 자손들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계기로 구속사를 설명하십니다. 믿음은 이방인을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만들고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장벽을 무너뜨립니다.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것이 아니며 백부장과 같이 오직 예수님의 권위를 믿는 자들이 하늘나라 잔치인 메시아 잔치에서 이스라엘 조상들과 함께 연회를 즐길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백부장 정도의 수준에 믿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권위에 직접으로 같은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예수님께 있음을 확신하는 데까지 나아갈 때 참믿음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환자는 자신을 대신해서 간청한 주인의 믿음 때문에 치유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치유를 경험한 백부장과 같은 사람들이 마태복음에서 이어진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의 권위는 말씀하신 분에게서 나옵니다. 이방인 백부장은 자신의 권세에 비추어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종을 고쳐 주려고 하시자 백부장은 말씀만으로 자신의 종을 고쳐 주시길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비록 직접 오시지 않아도 절대적인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계시기에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질병이든 귀신이든 그 어떤 악한 세력도 즉시 떠날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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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7-02)

 

참 제자의 자격을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7장 13-29절


선택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도착지는 달라집니다. 마치 어떤 씨앗을 심느냐에 따라서 추수할 열매가 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같은 건축 자제로 집을 건축할지라도 어디에 지었느냐에 따라 그 집을 오래토록 유지할 수 있고,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좋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긴 원한다면, 삶이 달라야 합니다. 산상보훈에서는 성도들이 세상의 삶의 법칙과 달라야 함을 강조합니다.

 

본문은 산상보훈의 결론부입니다. 공통적인 결론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마무리하시면서 세 가지 경고하십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를,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비유로 참된 구원의 길과 멸망의 길을 대조하며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마무리 지으시며 참 제자가 누구인지 선명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두 종류의 길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14)

‘더 나은 의’를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걷는 것처럼, 이 세상이 그 가치를 모르고 거절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 길만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더 나은 의’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1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13-14)

예수님께서는 하신 이 산상보훈의 말씀은 불신자들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찾아온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믿는다고 찾아왔지만, 너희들이 가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전하신 산상보훈의 결론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먼저, 길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사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가라!’라는 말씀에 이어서, 좁은 문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두 문장이 나옵니다(13-14). 넓은 문을 통해 광활한 길로 가면 끝은 파멸이기 때문이고(13), 좁은 문을 통해 험한 길로 가면 그 끝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비단길이 아니라 순례자의 길에 들어선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 길이 쉽고 편하고 대접을 받는 길이라면 모든 사람이 그 길로 나올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험한 길이 나오는데, 제자들이 겪는 어려움이나 환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하늘나라에 현재적 날까지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는데, 그 문은 좁습니다. 제자들이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에서 좁은 문과 험한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미 좁고 험한 곳에 들어가 순례의 길을 가는 사람은 끝까지 같은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하며, 자신들의 규모가 작은 것으로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들어가는 사람들의 숫자를 보기보다 길의 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이 너무 힘들어서 억지로 갈 수밖에 없는 삶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여 그 나라의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므로 그 힘으로 고난도 견디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나무 :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라(15-23)

하나님 백성의 삶은 예수님께서 제시한 ‘더 나은 의’의 내용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됩니다. 남을 속이기 전에 먼저 외적인 결과로 인해 자신을 속일 수 있습니다. 주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의’이고 다른 것은 다 ‘불법’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나무의 열매를 통해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16-23)

두 번째 비유는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에 관련해서 나무의 열매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15)고 경고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정체를 분별하도록 경고하고 그들의 운명을 예고합니다. 첫째, 제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해야 합니다(15-20). ‘너희에게 오는 자마다’는 거짓 선지자들이 외부에서 공동체 내부로 오는 것을 묘사합니다. 양 무리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상기시키며, 본문에서는 교회 혹은 새 언약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늑대들은 교회 안에 와 있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의 역할을 수행하므로 기독교 지도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굶주린 늑대와 같은 이들이 양의 옷으로 위장하기 때문에 이들의 정체를 분별하기 어렸습니다. 양으로 변장한 것은 해를 끼치지 않는 양의 특징을 이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양은 늑대와 같은 맹수의 먹잇감이지 포식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늑대가 양으로 위장해 양 무리 가운데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말하자면 거 짓 선지자들은 교회를 잡아먹으려고 순수한 모습으로 위장해서 교회를 포식의 대상으로 삼고 활보합니다. 늑대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해서 선포하고 가르칠 것이지만, 실제로는 교회를 이득의 수단으로 삼는 포식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삶의 문제를 ‘열매’라는 소재로 강조하십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 실체가 반드시 열매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16, 20).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의 법칙 이듯 영적인 세계에서도 법칙입니다. ‘나쁜’(17)은 ‘썩은’의 뜻입니다. 좋은 나무는 선한 선지자를 썩은 나무는 거짓 선지자를 뜻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따른 삶의 방식이 열매가 좋은지 나쁜지를 식별하게 해주는 잣대입니다. 19절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의 운명을 다룹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집니다. 지옥 불에 던져질 운명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5:22,29,30; 10:28; 18:9; 23:15,33).

따라서 제자들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보고 분별해야 합니다. 공동체는 지도자들의 삶을 유심히 살피되, 그들의 위선에 속지 말고 그들의 삶이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성스러운 얼굴과 말에 속지 말라! 둘째 거짓 선지자들은 최후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21-23).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주여, 주여’라고 부른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경고하십니다(21). ‘주’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가장 흔히 부르는 칭호입니다. ‘주’를 두 번 반복하는 것은 그 마음의 친밀함과 진지함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삶이 수반되지 않는 신앙 고백은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날에는 충격적인 장면이 연출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22). 실패한 사람들은 최후 심판 때 하늘법정에서 선지자의 언어를 사용하고(10:41), 귀신을 내쫓은 일(10:8), ‘당신의 이름으로’ 곧 재판장(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능력들을 행한 것을 열거합니다. 이는 특히 기독교 지도자들이 어느 시대든지 자랑하는 언어입니다. 이들은 ‘진정성’과 ‘진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각 행위를 주장할 때마다 붙이면서(10:22; 18:5,20; 19:29; 24:9) 자신들이 형벌이 아니라 하늘의 상을 받아야 한다고 항변합니다. 재판장이 자신들을 잘 알고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재판장은 그들을 모른다고 말하며 불법을 행한 자들로 규정합니다(23).

교회는 예수님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거짓 선지자들의 운명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지 여부는 세 가지 기적 혹은 능력과 같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덧붙여서, 바로 앞의 내용(13-14)과 연결해 거짓 선지자들의 정체를 생각해보면, 이들은 험한 길로 가지 않고 넓고 광활한 길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 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건강하지 못한 모습으로 세상에 지탄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그렇다고 기독교를 부정하거나 신앙을 떠나는 일은 더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이미 모두 다 온전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설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종류의 집 :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24-27)

탄탄한 기초가 건물 안정의 전체가 되듯이, 순종이 하나님의 백성 됨의 기초합니다. 믿음처럼 보이는 것들은 시련이 닥치면 그 진상이 드러납니다. ‘순종의 실천’만이 시련이나 유혹을 통한 시간의 시험 속에서도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처소로 나와 우리 공동체를 세워줄 것입니다.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24-27)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실 뿐 아니라 들은 말씀대로 행하길 원하십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에 비유하며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대조적인 예로 평행을 이루는 구조로서 두 가지 상이한 운명을 묘사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집을 튼튼한 반석 위에 지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24). 반면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홍수가 나면 지혜로운 인생과 어리석은 인생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홍수 또는 폭풍이 몰아치는 것은 구약에서 삶의 어려움이나(시편 8:7-8; 에스겔 38:22). 이 모습은 가을 우기에 말랐던 골짜기를 통해 물이 심하게 불어 밀려오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목우가 쏟아져도 무너지지 않는 집과 같습니다(참조, 잠언 10:25; 시사야 28:16).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고 그 뜻에 따라 행하지도 않는(에스겔 33:32) 사람은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26). 이런 사람이 어리석은 것은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닥치면 모래 위에 쌓은 집처럼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심판 장면은 최후 심판의 때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산상보훈은 마지막은 경고에 대한 강조로서 독자들이 종말의 운명을 두려움으로 되새기면서 인생의 기초를 무엇에 두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첫 번째 강화를 마침(28-29)

진정한 열매의 기준은 하나님을 ‘주여!’라고 부른 것도, 성공적인 종교 활동도, 사람들에게 끼친 좋은 영향력도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이 자신을 위대한 제자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순종의 실천’만이 시련이나 유혹을 통한 시험과 고난에서도 끄떡없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28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28-29)

드디어 산상수훈이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마태복음에 나온 다섯 개 담화 중 하나가 마무리됩니다. 모든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라는 표현으로 마칩니다(7:28; 11:1; 13:53; 19:1; 26:1).

흥미로운 것은 산상수훈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더해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매우 놀랍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가르치는 권세가 서기관들이 가르친 내용과 전혀 다른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서기관들은 공인된 율법 교사들로서 그들의 가르치는 권위는 이전의 율법 해석이 전수한 전통에 근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확신 있게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전통에서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는 이어지는 8-9장에서 기적 행위를 통해 강조되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를 제자들에게 부여하시고(10:1), 부활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얻어 제자들을 파송하실 것입니다(28:18).

무리는 예수님의 가르치는 권세에 놀라지만 아직 정체를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산상설교를 대하는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가르쳐 주신 뜻인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삶, 팔복의 삶, 빛과 소금의 삶, 더 나은 의를 추구하는 삶은 모든 가르침에 알맞은 길을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삶은 불편하고 좁은 문이며 십자가의 길입니다. 어려운 길이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많은 사람은 오늘도 넓은 문과 쉬운 길을 찾아가지만, 그 결과는 멸망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길은 좁고 험하지만, 구원과 생명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의 반응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지혜로운 자는 말씀을 행하고, 어리석은 자는 말씀을 행하지 않습니다. 순종이 곧 지혜이고 안전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삶의 풍파에도 안전하지만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삶의 풍파를 만나면 그 신앙이 무너져 버립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종할 때 그 가르침은 우리 삶의 기초가 되고 그 가르침 위에 든든하고 무너지지 않는 인생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말씀을 듣지만, 순종은 하지 않은 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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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7-01)

 

공동체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7장 1-12절


가족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가정은 행복의 동산이 되기도 하고 불행의 터전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 공동체도 예외는 아닙니다. 서로 쥐어짜 내려고 하는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섬김과 환대 속에 따뜻한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도 있습니다. 행복한 공동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 ‘더 나은 삶’에 대해 계속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두 가지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일반 생활에서 이웃에 대한 상호 태도를 가르치시고, 다음으로 상호성의 원리에 따라서 형제와 자매에 대한 태도를 가르치고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을 강조합니다. 결론적인 황금률을 가르칩니다.


비판에 대한 가르침(1-6)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란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은 생각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실수를 나무란다는 의미입니다. 남을 정죄하려고 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용서하고 판단한 대로 용서도 받고 정죄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남도 판단해야 합니다. 나만의 선입견과 제한된 지식으로 누군가를 정죄할 때 누군가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판단을 받고 있습니다.

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1-6)

예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천국 백성들이 ‘더 나은 의’을 위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인간관계는 상호성(相互性)의 원리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호성이란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한 그대로 대우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1) 비판에 대한 가르침(1-2)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완전을 추구하면서도 형제와 자매의 허물과 실수를 해결할 지혜를 제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관계에서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상호성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그 사람을 성급하게 평가하고 임의로 재판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심판받지 않으려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심판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면 최후 심판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말하자면 심판하는 것은 최후 심판 때에 모든 것을 보고 아시는 하나님께서 하실 권한에 속한 것이므로(6:4,6,8,18,32; 참조. 13:36-43, 47-50) 하나님의 심판 또는 비난을 피하려면 타인을 비판(비난)하지 말라, 하나님의 역할을 흉내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종말론적인 상황에서 제한하지 않는다면, 형제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하나님에 의해서든, 사람들에 의해서든) 최후 심판 이전에라도 이 세상에서 비판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만일 비판하게 되면 비판받게 될 것입니다. 평가하는 기준에 따라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2). 여기서 ‘기준’ 혹은 ‘헤아림(μέτρον)’은 시장에서 곡물을 측정하는 도구로서 ‘평가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평가하는 기준이 그날에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사용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말한 ‘비판’은 ‘분별’이나 ‘판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분별이나 판단까지 의미한다면, 교회 공동체 안에 잘못한 자들을 판단해서 권징하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비판’은 관계 안에서 자신을 더 낫게 보이려고 상대방의 흠을 찾아내려는 사사로운 분석과 평가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2) 자신을 먼저 돌아본 백성(3-5)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5절의 비유는 1-2절의 교훈은 지원하고 우리가 심판하는 것 대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판단하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문제를 지적하십니다(3).

‘들보’는 건축물의 기둥이나 서까래와 같은 나무입니다. 반면 ‘티’는 작은 나무 작대기입니다. 눈에 통나무가 들어 있으면 당연히 사물을 볼 수 없습니다. 허물이 통나무처럼 커서 눈을 가리고 있는데도 형제의 행위를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자신을 들어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있는 ‘들보’는 무시하고, 상대방에 있는 ‘티’는 크게 부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판이야말로 외식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주신 성도됨의 거룩함과 고귀함을 포기하는 행동입니다.

특히 3,4절에서 반복되는 형제는 하늘 아버지를 모시는 새 언약 공동체, 하늘나라의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을 가리킵니다. 이중 잣대로 형제와 자매를 비난하고 재판해버리는 행위는 공동체에 엄청난 충격을 가할 수 있으며,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1-2절과 연결해보면, 그 형제와 자매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3-4절은 심판하는 자신을 깊이 성찰할 것을 강조합니다. 자신의 더 큰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이웃의 작은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며, 자기기만이 바로 위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5절에서 ‘위선자’라고 꾸짖으십니다. 장애물이 들어 있는 눈으로 타인의 문제를 크게 보고, 자신의 자랑거리를 크게 보면, 스스로 속게 되기 때문에 위선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5절에서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관점이 과연 옳은가 하는 점입니다. 먼저 나의 눈을 깨끗하게 만들고 나서 형제의 눈을 보았는데 티가 있다면 티를 제거해줘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형제를 심판하고 비난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하고 환대하는 나라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이웃의 문제를 다루는 사람은 먼저 자기 눈에 있는 통나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본문은 진실하지 못한 비판자의 모순을 지적하는 비유이므로 형제의 잘못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하늘의 아버지로 모신 형제들과 자매들이기 때문에, 자신을 먼저 점검하고 나서 긍휼의 마음으로 형제를 위해 교정을 시도해야 합니다. 모두 한 가족으로서 하늘나라의 완성을 향해 순례의 길을 걸어가므로, 그것도 험한 길을 가게 되므로, 서로에 대해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태도를 고치도록 하는데도 불구하고 공격할 태세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개처럼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거룩한 것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한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의 제사와 같습니다. 상대방의 지적이 기분 나쁘게 들려도 하나님의 판단으로 겸손히 받아들이는 삶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집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평가를 거부하는 사람은 그런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조언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 모르고 적대적으로 대응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3) 가치 판단(6)

이런 점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6)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분별력에 대한 교훈입니다. ‘더 나은 의’를 행하는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 공동체를 향한 하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러나 완성의 나라가 오기까지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제자들은(7:13-14) 완전을 지향하지만(5:20), 현재는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형제들과 자매들에 의해 행동을 교정받으면서 서로 성장해가는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참된 성도라면 자신을 들어내기 위해 형제와 자매의 부족한 부분을 들추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남보다 자신을 낮게 여겨 쉽게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본성을 거슬러 예수님의 명령대로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 물론 본성을 거슬러야 하는 일이기에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7-11)

구하기 전에 전제해야 할 것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응답하실 하나님의 선하심과 부요하심 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고 더 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고 진실하고 간절하게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11)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열정적인 기도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고집스러움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1) 구하고 찾는 기도(7-8)

예수님께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기도하라는 명령이며,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8절은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2)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9-11)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마다 얻고 찾고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응답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빵을 구하는 아들에게 돌을 생선을 구하는 아들에게 뱀을 줄 아버지가 없다는 일반적인 상식을 비유로 전하십니다(9-10).

아버지는 자녀를 위해 좋은 것을 구분해서 줍니다. 땅의 아버지에게는 많은 한계가 있지만, 이런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주려고 합니다. 한계가 없는 하늘 아버지께서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11). 그런데 하늘 아버지는 제자들이 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주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 기도하는 제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누가복음 11:13).

제자들은 높은 수준의 윤리적 요구받지만,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진리는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기도의 핵심과 정의는 하늘 아버지와 자녀의 대화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땅에 있는 자녀 간의 대화입니다. 대화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기도를 격려하시는 데서 나타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반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며,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결론-황금률(12)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삶이 ‘더 나은 의’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웃과 자신의 경계를 지우고 지체를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요구입니다. 자기 부정과 이타적인 사랑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입니다.

12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12)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로 불리는 교훈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는 12절 앞 단락의 결론임을 알립니다. 7:12을 근접 문맥인 1-11절의 결론으로 보면 비판하든지, 분별(평가)하든지, 항상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 싶은 원칙(황금률)에 기초하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써 이미 5:17에 ‘율법이나 선지자’로 언급됐으므로(또한 11:13, 22:40),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는 황금률이 구약이 요구하는 본질을 성취하는 행위와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황금률(12)과 7-11절을 연결해보면, 하나님께서는 긍휼의 아버지로서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때문에 제자들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이웃에게는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황금률(7:12)은 하늘나라의 의(5:17-7:12)를 실천하는 목표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제자들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하는 태도, 즉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마음으로 이웃을 대함으로써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제자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가치 판단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지혜롭게 판단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 하는 데까지 가서는 안 됩니다. 정죄하는 일은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용서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한다면 같은 기준으로 자신도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잘못된 일은 용납하지 말해야 하지만, 잘못한 지체에 대해서는 긍휼과 자비로움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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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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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순위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6장 25-34절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삶의 질을 물질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하나님과 지위에 겨룰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 성도들에게 돈과 물질 사용은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잣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대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물질을 다루어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본 단락은 제자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추가적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재물과 염려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땅에 쌓으며 재물을 좇다 결국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삽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재물이 아닌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께 전적으로 삶을 의탁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돌봄 아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삽니다. 그러므로 전혀 염려할 게 없습니다.

 

재물에 대한 가르침(25-30)

아이들이 염려하지 않는 것은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는 자녀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사는 사는 문제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삶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25-32)

의식주는 인간의 기본적인 필수조건입니다.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안정적이고 행복한 생활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조차도 하늘 아버지에 맞기고 염려하지 말 것을 강조하십니다. 제자들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25).

생명이, 몸을 보호하는 옷보다 몸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하늘의 새와 들의 풀을 보면서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26-30).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 새들도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는데 하물며 열심히 수고해서 일하는 제자들,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있는 제자들을 돌보지 않으시겠는가! 공중에 나는 새를 기르시고 들의 풀과 꽃을 아름답게 입히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물며 사랑하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들꽃보다 중요하고, 솔로몬보다 소중하므로, 아버지께서 자녀를 지극히 소중하게 여기시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를 위해 행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이며, ‘믿음이 작은 자’는 아버지께서 자녀의 생존과 필요를 위해 제공하실 것을 신뢰하지 못해서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기본적으로 신뢰심이 있으나 이 신뢰심이 더 커져야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염려는 영적 문제와 직결됩니다. 염려의 배후에는 불신이 있습니다. 염려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기적이 예비된 일로 보는 믿음의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믿음의 기도로, 감사함으로 구하시길 바랍니다(빌 4:6-7).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과 제공을 믿는 제자는 먹고 입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31-32).

하늘 아버지는 자녀들의 모든 필요를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와서 믿음의 간구하길 원하십니다. 자녀들이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나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먼저 구해야 할 것들(33-34)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하늘 아버지입니다. 따라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 어떤 것보다 더 먼저 구해야할 것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2-33)

하늘의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요한지 알고 계십니다(6:8). 그러므로 제자들은 염려 대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먼저’는 순서에서의 우선됨을 의미하는 ‘무엇보다도’, ‘특별히’의 뜻입니다. ‘먼저 … 구하라’는 나머지 일은 관심을 덜 가져야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아버지의 나라와 그의 의를 우선순위로(참조, 23:26) 여기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구해야 하는 하늘나라와 의가 무엇인지는 산상설교 전체에서 제시되었습니다. 제자는 자녀를 돌보시는 하늘 아버지의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늘나라와 의’는 하나님의 선물 또는 은혜입니다. 하늘나라가 선물이며 은혜라면, 뒤에 나오는 하늘 아버지의 의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염려하지 않고 하늘 아버지의 나라와 의에 우선권을 두었을 때 이 모든 것,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고 해서 건강과 행복과 번영을 보장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 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찾아오는 고통도 있습니다(5:10-12; 10:16-39; 24:9-13). 그러나 괴로움과 고통 때문에 염려하기보다 오늘의 삶을 돌봐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손에 내일을 맡겨야 합니다(34). 제자들이 믿어야 하는 하나님께서는 동정심과 긍휼로 돌보시는 아버지이시며 내일을 주관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근거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하늘 아버지가 제자들이 오늘과 내일의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원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늘과 내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내일이 오늘이 되면 동일한 천부께서 제자들을 자녀로 돌보시기에, 내일 벌어질 괴로움을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괴로움 자체를 없애주실 수도 있고 괴로움을 견디는 힘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자녀가 원하는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제자들이 원하는 대로는 아닐지 라도 괴로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의 필요를 아시 기에, 괴로움을 안고 있는 제자들을 돌보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들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도우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생활에 대한 염려와 불안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가는 말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에 우선순위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할 때 그에 필요한 모든 능력과 자원들을 허락하십니다. 우리는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이루어갈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것을 구하기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주의 제자들 하나님 자녀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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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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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을 쌓은 방법을 가르친 예수님

마태복음 616-34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칭찬과 상급을 받아버리면, 그들은 이미 상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6:2,6).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고 싶을 때 그 충동을 하나님 앞에 절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 믿는 성도들이 하늘나라 시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과 구별되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매우 실제적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늘나라의 시민들의 삶을 소개합니다. 본 단란은 제자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추가적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재물과 염려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둘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땅에 쌓으며 재물을 좇다 결국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삽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재물이 아닌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분께 전적으로 삶을 의탁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돌봄 아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삽니다. 그러므로 전혀 염려할 게 없습니다.

 

금식에 대한 가르침(16-18)

하나님께 자시의 간절한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금식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제와 기도와 더불어 금식은 경건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금식입니다. 금식은 육체적 욕구를 끊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6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16-18)

금식은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경건생활에 아주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또 종교적 경건성을 대변해 주는 신앙적인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의 위선에 대해서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경건함을 드러내기 위해 금식할 때 일부러 초췌한 모습으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금식도 앞서 말한 구제와 기도와 같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금식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하고 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금식도 신앙과 경건을 자랑하는 수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원래 구약에서는 금식할 때 베옷을 입고 티끌을 쓰고 자신을 단장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며 회개한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기름을 바르라고 하십니다. 결국 슬퍼하며 자신을 은근히 자랑하느니 차라리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식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혐오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금식은 곡기를 끊고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식음을 전폐한 채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금식마저 사람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하며 행동하는 것이 외식적인 행동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의 시신을 더 의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자세(19-24)

성도가 외식하는 이유는 하나님만 섬기려는 마음이 다른 것으로 분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으려는 모습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구제, 기도, 금식의 세 가지 외식(6:1-18)이 사람들을 의식함으로 인해 마음이 분산된 상태를 보여 준다면 본문은 물질로 인해 마음이 분산된 것을 보여 줍니다.

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19-24)

사람들은 재물이 쌓아지면 그것을 땅에 쌓아두기 위해 부동산, 주식이나 투자가치가 있는 것들에 투자합니다. 그러나 땅에 쌓아둔 보물은 결코 안전하지도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화, , 종이라는 다른 소재를 사용해서 재자가 가져야 할 재물에 대한 태도에 초점을 맞춥니다.

(1) 하늘에 쌓는 보문(19-21)

먼저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도록 가르치십니다(19-21).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자신을 위해 보물을 쌓는 행위를 중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집 안에나 집 마당을 파서 보물을 숨기곤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다양한 방법으로 보관하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없어질 수 있습니다.

은 일종의 벌레로 땅의 것을 파괴하는 존재를 상징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특별히 옷감은 귀중한 보물 중 하나였으므로 좀은 이런 보물을 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동록(銅綠)’먹어 치움’, ‘폭식함등을 뜻하므로 막 먹어 치우는 벌레를 가리킵니다. 이런 벌레는 귀중품이 들어 있는 목재 보관함을 뜯어 먹었을 것입니다. 보관함이 망가지면 보물도 손상됩니다. 또한 보물을 도둑이 훔친다는 그림은 모아둔 보물이 안전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보물을 쌓아야 하는 하늘만이 안전한 곳이며(20), 보물을 쌓아 두는 장소는 마음의 방향을 드러냅니다(21).

(2) 밝은 영안을 가져야 함(22-23)

제자들은 성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22-23). 몸의 등불은 눈이며, 눈이 건강하면 온몸이 밝아집니다(22). 그런데 생리적으로 보면 밝은 눈이 사람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하지만, 예수님은 빛이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몸을 밝게 만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윤리적인 목적을 위해 눈의 개념을 사용하십니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밖을 보는 눈이 밝으면 그 사람 자체가 윤리적으로 선하게 됩니다. 흔히 성하다로 번역되는 하플루스(πλούς)는 건강한 눈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한 방향의’, ‘단순한등의 뜻으로서 단일성(또는 일체성) 혹은 온전함을 의미하며, 관대하고 후하게 베푸는 것을 뜻합니다. 한쪽을 보는 것은 두 마음을 품는 것과 반대의 개념으로(야고보서 4:8)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뜻하며(신명기 6:45), 하나님만을 향하는 눈의 사람은 타인을 위해 너그럽게 베풉니다. 다시 말해서,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 곧 긍휼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건강한 눈과 달리 눈이 악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입니다(23). ‘나쁜혹은 악한으로 번역되는 포네로스나쁘다또는 악하다의 뜻으로 마태복음에서는 윤리적으로 나쁘거나 악한 상태를 가리킵니다(5:11,37,39,45; 6:13). 악한 눈은 탐심으로 남의 소유를 쳐다보는 눈, 남을 저주하고 시기하는 눈이라는 개념에서 온 것입니다. 악한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필요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타인에게 후히 베풀지 못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탐심으로 가득 찬 사람은 자신의 필요만 생각하기 때문에 베푸는 것에 인색할 수밖에 없으며, 하늘에 보물을 쌓지 못합니다. 결국 어둠이 이런 눈을 통해 들어와 온몸이 어두워져 세상을 밝히지 못합니다. 반면 관대하게 베푸는 사람의 밝은 몸은 세상을 밝히고(4:1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3) 겸하여 섬길 수 없음(24)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24). 왜냐하면 이 사람을 사랑하고 저 사람을 미워하거나 이 사람에게 헌신하고 저 사람을 무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왕권에 대적하는 물질주의를 경고하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사람이 부자 청년처럼 재물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재물은 같이 섬길 수 없습니다.

19-24절을 한 묶음으로 읽으면, ‘한 방향의또는 단순한눈을 가진 사람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사람이며,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필요를 채우시는 긍휼의 성품을 갖고 계시지만 맘몬은 철저히 계산적입니다. 냉정하고 냉혹한 자본의 원리를 들어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의존해서 살아가는 동정의 사람은 세상을 따뜻하게 회복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 맘몬의 종은 속물처럼 행동하고 사회적 정의보다는 맘몬을 자랑하는 것으로 즐거워합니다. 돈이 안전을 보장한다고 여기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불신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사랑과 헌신(신명기 6:4-5)을 돈에게 쏟을 때 돈처럼 냉혹하게 변해서 사람들을 물질로 대합니다. 무엇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심판으로 우상숭배에 반응하십니다. 악의 눈, 곧 탐심과 인색함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섬기는 보물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며, 인생은 어둠으로 채워질 것이며, 염려로 세월을 보내는 날을 맞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긍휼로 자녀를 돌보시는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며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추구하는 것입니다. 맘몬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를 경배하는 것이 자신(또는 교회)이 사는 길이며 이웃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재물()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 재물이 우리의 주인이 되거나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재물을 사랑하지 말고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않기에 생활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재물이 우선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물질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신다고 믿고 하나님 나라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아갈 때,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삶의 우선순위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돈은 우리가 정말 믿는 대상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가장 실제적인 잣대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필요를 따라 삶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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