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15-01)
외식하는 자들을 향해 책망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15장 1-20절
진정 자신이 누구인 줄 알 때,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하나님과도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이 이곳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기 전에 자신부터 속여야 합니다. 외식하는 자이나 위선자들은 자신을 먼저 속인 자들입니다. 자신도 확신하고 거짓으로 살아갑니다.
- 예수님을 조사하러 온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이 유대인의 정결법 전통을 들고 나와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행위로 논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며 참된 정결이 무엇인지 가르치십니다. 종교 엘리트들의 태도는 이어서 묘사되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 및 이해와 대조됩니다.
바리새인들의 전통에 대한 비판(1-9)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권위 있고 참된 토대는 없습니다. 말씀의 참 뜻을 반영하고 구현하려는 모든 신학적, 신앙적 전통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허하고 열린 마음으로 성령님의 새로운 조명을 기대하지 않으면, 특정 시대와 인물의 제한된 신학적 입장이 무궁무진한 성경의 진리를 왜소한 교리로 전락시킬 수 있습니다.
1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1-9)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조사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빵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음으로써 장로들의 전통을 범했다고 따집니다(2). 장로들의 전통은 유대교에서 바리새 운동을 이끈 원로들의 가르침을 의미하며, 이 전통은 과거부터 유대인들을 거쳐 내려왔습니다. 구약은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가기 전에 씻도록 규정하고 있지만(출 30:19;40:13; 레 15:11; 22:1-6), 원래 일상생활을 위한 규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 이방 문화에 강하게 노출되면서 유대인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제의적 정결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부정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정결 의식을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빵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제의적 부정이 만지는 음식에 옮겨져 음식이 부정하게 되며, 부정하게 된 음식은 다시 그 사람을 부정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3)라고, ‘너희’와 ‘하나님’을, ‘전통’과 ‘계명’을 대조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전통에 충실했는데, 그런 행동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로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예로, 부모님 공경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과 ‘장로들의 전통’을 비교하여 지적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이 부모님에게 드려져야 할 것을 하나님께 이미 드려진 것이라고 부모님에게 말하기만 하면, 부모님을 공격하지 않아도(부모가 받아야 할 것을 드리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5절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은 ‘코르반’을 번역한 헬라어 용어입니다(마가복음 7:12). ‘코르반’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법적인 맹세의 기능을 했습니다. 바리새 전통을 사용한 유대인들은 어떤 재산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자기 이외의 사람들이 이것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마가복음을 참조해서 예를 들어 보면(막 7:12), 어떤 남자가 자신의 재산을 코르반이라고 맹세하면, 부모는 아들의 재산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아들이 부모가 죽은 이후 코르반을 자신을 위해 사용할 경우에, 아들은 전통을 악용해서 부모를 섬기지 않는 근거를 삼은 것이 됩니다. 그러면 전통을 지키기 위해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기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 드림’에 대한 장로들의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합니다(참조. 갈 3:1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조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전통은 부모에게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태도를 정당화함으로써, 실제적으로는 제5계명을 어기게 만든 셈입니다. 이같이 바리새인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로들의 전통에 의존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위선자들로 규정하십니다(7). 그리고 이사야 29장 13절을 인용해서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7-9)라고 그들의 행위를 비판하십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13장 14-15절에서 이사야 6장 9절을 인용해서 ‘선지자적 심판’이라는 주제를 강조하셨는데, 같은 목적으로 이사야의 본문을 여기서도 사용하십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15:1)로 비판의 대상으로 좁히십니다. 이사야 29장의 문맥에서도 선지자적 비판은 제사장들, 선지자들, 선견자들(28:7; 29:10), ‘예루살렘에 있는 이 백성을 다스리는 너희 오만한 자들’(28:14; 참조, 29:20-21)을 향했습니다. 위선은 마음과 입술의 불일치로 나타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말하지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8), 하나님의 뜻을 가르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행위라는 것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한 위선이었습니다(9).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가르치거나 행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거나 가르치지 않는 사람들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만든 전통 자체가 아니라 성경의 의도에서 벗어난 전통을 만들어 이용하는 태도를 비판하십니다.
듣고 깨달으라(10-11)
말씀 안에 산다고 종교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실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습관대로 살아가다 보면, 자신이 하고 있는 그릇된 일들을 정당화하기 쉽습니다.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만, 점점 자신을 속이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신념으로 굳혀지고 자신들은 가장 훌륭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보이지 않는 우상’입니다.
10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0-11)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불러 듣고 깨닫도록 명령하십니다(10-1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부정한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생각하고 제자들 비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면의 정결함을 중요하게 다루십니다. 유대인들의 정결 예법 때문에 제자들이 더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완악한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부정하므로, 그들의 정통에 따른 정결 제의를 지킨다고 해서 정결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외적인 규례를 만들어서 지키면서 만족해하는 태도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13과 12:7에서 호세아 6:6을 인용하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운명(12-20)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들과 만물을 바르게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12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1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4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15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6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7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18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12-20)
제자들은 그 동안 전통으로 지켜왔던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조용히 물었던 것입니다. 의 대화 장면입니다.
(1)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지적(12-14)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정체와 운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뽑힌다고 말씀하십니다(사 5:1-7). 가족 언어인 ‘나의 하늘 아버지’를 사용하심으로써(5:16,45,48,6:9; 7:21; 10:32), 하나님께서는 장로들의 전통으로 백성을 속박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신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뿐 아니라 이들을 따르는 백성을 동일하게 맹인으로 이해하십니다(14).
(2) 말씀에 대한 해설(15-20)
베드로는 예수님께 비유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미를 묻는 베드로에게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으냐고 책망합니다. 그리고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18).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강조하십니다(참조 5:8). 마음은 사람의 핵심 부분으로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을 결정하게 만듭니다. 마음이 정결하지 못하면 모든 약한 것이 마음에서 나와(패로는 악한 것이 입으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만듭니다.
본문은 종교 행위의 근거 혹은 전통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그들이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하나님보다 더 의존하는 대상이므로 우상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우상을 섬기는 일이 일어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가시적으로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지 않는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전통을 더 의존했으므로 전통을 우상으로 모신 것입니다. 정결 예식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하는 대상이 되는 순간(15:3,6; 막 7:74), 전통은 우상이 됩니다.
교회나 교단의 헌법, 규칙, 관습 등은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만듭니다. 그러나 건전한 법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의지하는 대상으로 자리를 차지한다면, 전통을 향한 열정은 우상을 향한 예배가 됩니다. 교회에서 자신(들)의 뜻을 정당화하려고 신성불가침의 근거로 전통을 내세우는 순간 우상에게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통이라는 우상은 가장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무리에게, 역사와 전통을 수호하고 보수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선생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예배로 위장한 채 하나님 노릇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는 전통을 논하기 이전에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실천하는 길을 먼저 나서야 합니다. 특히 교회는 하늘의 아버지께서 심으신 나무입니다(13).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는 교회의 가족공동체는 마음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마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순종과 경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의식 준수나 입에 발린 경배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며 이웃 사랑으로 뒷받침되는 순종과 경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소원을 빌미로 부모 공경의 책임을 회피하는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 찬송과 경배는 어떻습니까? 혹시 예배 한 순서로만, 입술의 고백으로만 끝나지 않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사랑을 핑계로 이웃 사랑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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