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27-02)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예수님
마태복음 27장 11-26절
공평과 정의에 대한 예언자적 외침은 교회가 갖고 있어야 할 영적 자산입니다. 예언자적 영성은 해로운 상상력을 갖고 현실 안주와 타협을 거부합니다. 당시의 정치 권력은 사형 선고를 할 만한 협의를 예수님께서 발견하지 못했으나, 제국의 안정을 택했습니다.
- 빌라도의 손에 넘겨진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십니다. 빌라도의 첫 질문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입니다. 고소자들의 고발 내용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바라바와 예수님께서 유월절 특별 사면 대상의 후보에 오릅니다.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선동된 무리가 바라바를 선택했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 강력히 외칩니다. 무리의 거센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던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줍니다.
빌라도와 예수님(11-19)
비폭력 침묵이야말로 세상이 어두운 밤으로 덮였을 때 진실 규명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진실한 침묵은 빌라도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권력, 섬기는 리더십으로 제국의 이야기에 도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함과 모살로 가는 길에서 구차하게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11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11-19)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이 그 빛을 거부하는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요 1:9-11). 비록 초라하게 법정에 서 계시지만,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신 메시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고발 내용에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1) 빌라도에게 심문받는 예수님(11-14)
예수님께서 총독 빌라도 앞에 서 있습니다(11). ‘∼ 앞에 서다.’는 구약과 유대교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의 위치와 모습을 그려주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세상의 재판장으로 와서 재판하는 자리에 앉을 자가 재판을 받을 자 앞에 서 있습니다.
총독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말이 옳다’고 유대인의 왕인 것을 인정하십니다.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내용을 추가합니다(12).
산헤드린 공회, 곧 유 법정은 심문의 결과를 들고 로마 법정에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이는 빌라도를 압박하는 의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와 유대의 질서를 위협하는 인물로 재빨리 처리해야 할 것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고소를 듣고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참조 26:62). 묵묵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은 고난의 종을 연상하게 합니다(사 53:7). 로마법에서는 고소한 부분에 대해 침묵하는 자는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13-14). 예수님께서는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의 잔을 마실 것을 다짐했으므로 자신의 생명을 위해 투쟁하거나 변호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가야 할 운명의 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2)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풀어준 빌라도(15-19)
총독 빌라도는 식민지 백성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정치적 행위로 죄수를 풀어주려 합니다(15). 빌라도는 예수님 옆에 바라바라는 이름의 유명한 죄수를 데리고 옵니다. 바라바는 폭력으로 로마에 대항해서 싸운 혁명가로 보입니다(막 15:7; 눅 23:19). 바라바의 이름은 ‘예수 바라바’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두 예수, 진짜 메시아와 가짜 메시아를 평행으로 배치합니다.
빌라도는 군중을 향해 직접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빌라도의 질문은 편향적입니다. 그는 백성을 위해 혁명을 시도한 사람을 예수 바라바, 곧 ‘예수, 바라바’로 부르지만.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를 불리는 예수’로 칭합니다. 왜 빌라도는 이런 판단을 한 것입니까?
이는 빌라도가 유대 지도자들이 시기심 때문에, 즉 예수님을 정치적 이슈로 자신에게 넘긴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18). ‘시기’는 타인의 성공에 대한 분개를 의미합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역을 통치하는 권세를 가졌고 특히 명절에는 예루살렘 성전 옆에 있는 안토니오 성채에 거주하면서 유대 명절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예수님에 대한 군중의 기대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인기 때문에 빼앗길 수 있는 통치 권위와 존경 받는 자리를 침해받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이며, 그를 제거하면 빌라도는 정치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빌라도의 관심은 진리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정치적 안정입니다. 로마의 정의는 식민지의 백성 한 명에게, 그것도 큰 절기에 엄청나게 많은 무리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의 왕으로 기소된 자를 그냥 석방해 주는 것 역시 빌라도에게는 정치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는 처음부터 진리를 따르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빌라도가 판결하려던 순간에 빌라도의 아내는 꿈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의인이라고 말합니다(19).
본 단락은 정치적 안정만 생각하며 진리의 판결을 외면하는 총독과 중간 중간에 군중을 설득하는 유대 지도자들과, 설득 당해 바라바의 석방과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요구하는 군중 사이에 고독하게 서 있는 메시아를 주목하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지만, 빌라도의 말과 빌라도 부인의 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의인인 사실이 드러납니다.
무지와 탐욕의 소리로 시끄러운 중에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가십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으며, 재판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빌라도의 정치적 실리주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진리는 고난을 수반하고 정치는 타협과 실리를 추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신원하시고 실리를 추구한 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십니다. 고난의 종의 침묵(이사야 53:7)은 실리주의를 추구하는 신자들의 길을 경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20-26)
모든 결정에는 자신의 책임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결정인 죄에 대해서도 대가를 반드시 받습니다. 영적으로 무지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데 앞장선 유대인들은 몰랐기 때문에 용서가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피에 대한 대가를 철저히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결정에도 말없이 순종하심으로 하나님 뜻을 온전히 이루십니다.
20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20-26)
빌라도가 아내의 말을 듣고 고민하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틈을 주지 않고, 바라바를 요구하도록 군중을 자극합니다(20). 총독은 두 사람 중에서 누구를 석방하기 원하는지 묻습니다. 군중의 선택은 바라바입니다.
빌라도는 다시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17)라고 하면서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묻습니다(22).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거짓 메시아로 판명된 자들의 운명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었기에 구원자를 기다렸던 군중은 구원자를 죽이라고 요구합니다.
빌라도가 군중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악을 행했는지 묻습니다(23). 왜냐하면, 십자가 처형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지 빌라도는 잘 알고 있고, 예수님께서 그런 처형을 받을 만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게 만든 주도적 역할을 하며, 빌라도는 재판의 주권을 갖고 있는 총독이면서도 수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처음부터 진리대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약했기에, 설득당한 군중의 외침(23)과 폭동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에(24) 겁을 먹고 진리를 외면하고 맙니다. 이제 군중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빨리 판결하지 않는 것 때문에 폭동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빌라도는 손을 씻음으로써(24) 자신은 재판 결과에 책임이 없다는 표시를 보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당하라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말하는데, 이는 대제사장들이 유다에게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말한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27:4). 빌라도의 말은 같은 말을 들은 유다가 나가서 자살한 것처럼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한 유대인들의 운명,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사건을 암시합니다.
20절의 ‘군중’은 25절에서 ‘모든 백성’으로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 중에서 병들고 약한 자들을 치유하셨으나(4:23) 이 백성은 예수님을 죽이라고 요구합니다. 모든 백성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자신들과 자녀들이 지겠다는 의미로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녀에게’ 돌리라고 외칩니다.
결국,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하도록 명령합니다(26). 세상을 심판할 재판장이 지금은 죄인들의 채찍에 맞고 사형장으로 보내집니다. 채찍질은 십자가 처형 전에 실행한 형벌이었습니다. 채찍은 여러 가닥의 가죽 끈으로 되어 있고, 끈에는 못이나 유리 조각이나 돌과 같이 날카로운 물질이 붙어 있어서 채찍질로도 뼈가 드러나고 죽기도 했습니다(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6.304).
예수님의 무죄가 드러날수록 그를 둘러싼 인간의 죄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거짓으로 백성을 선동합니다. 백성은 사랑과 회복의 나라를 가지고 온 예수님을 버립니다. 의인의 피를 흘린 것에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눈 먼 유대 지도자들의 길을 선택한 백성의 운명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반란을 로마가 제압하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구원자를 외면하고 심판의 길을 택한 예루살렘의 군중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든 존재합니다. 군중의 다수결이 진리는 아닙니다. 광장에 모인 군중의 욕망이 강할수록 그들은 쉽게 선동 당합니다. 선동당하는 자들은 선동하는 자들의 운명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은 성경 말씀이 지시하는 방향에 익숙해져야 선동당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진실의 편에 서야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무죄라는 것을 알고 놓아주려 했으나 끝까지 예수님의 편에 저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종교지도자와 군중의 손을 들어줍니다. 우리는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 중에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회피한다고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사람들이 아닌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 편에 서서 진실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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