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마태복음(27-01)

 


예수님을 판 은 삼십을 돌려주고 자살한 가룟 유다

마태복음 27장 1-10절


종교인이라면 죽을 만한 사람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영혼의 의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잘 가르쳐 주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인 용서와 긍휼도 잘 알게 해주어야 하는 직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을 돌아볼 만큼 겸손하지도 않았고, 교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예수님의 심문이 끝나고 확정되자 새벽 미명인데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을 결박한 되 총독 과저로 이송해 넘겨줍니다. 예수님께서 넘겨진 후 사형 선고를 받자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을 찾습니다. 자신으 ㅣ잘못을 뉘우치며, 받은 은 삼십을 돌려줍니다. 그들이 받지 않자 성전을 향해 던지고 나가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제사장들은 그 돈으로 밭을 구입해 나그네의 묘지로 삼으며, 예레미야(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됩니다.

 

부패한 권력(1~2)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롬 13:1).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권세를 악한 일에 사용하는 지도자에게는 심판이 따릅니다(눅 1:52 참조). 부패하고 탐욕에 물든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력으로 하나님 아들을 심판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데 빠르게 움직입니다.

 

1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1-2)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밤새도록 심문했고, 날이 밝자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게 됩니다. 소집 목적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이미 짜놓은 각본에 따라 밤새도록 심문해서, 불과 하룻밤 사이에 예수님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결정하고는, 로마 법정에 기소할 죄목을 찾아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2). 그들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수 없었던 것은 로마 제국이 유대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사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 18:31).

권력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권력과 힘은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세우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도자는 자기 위에 있는 권세자를 항상 기억하며, 모두를 선하고 의롭게 이끌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의 죽음(3-10)

회개는 신앙의 첫 걸음이자 의인으로 칭함을 받는 최선책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생은 회복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회개와 후회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시선을 두는 것이고, 후회는 자신을 향해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가룟 유다는 잘못된 결단으로 그릇된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3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3-5)

 

본문의 핵심 용어는 유다가 종교지도자들에게서 받았다가 들려준 ‘은 삼십’(27:3,6,9), 곧 ‘핏값’입니다. ‘무죄한 피’ → ‘피의 값’ → ‘피의 밭’의 순서는 죄 없는 예수님의 목숨은 하찮은 값에 매겨졌지만, 비극적인 운명을 상징하는 피가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떤 미래적 가치를 지니는지를 보여 줍니다.

무죄한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책임 부분에 줍니다. 무죄한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책임 부분에서는 인간의 악에 의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섭리 차원에서는 구원 역사를 담은 성경의 성취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 예수님을 판 은 삼십을 돌려줌(3)

 

예수님께서 유죄 판결을 받고 빌라도에게 넘겨지자, 가룟 유다는 이러한 과정을 보면서 후회합니다.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3). 은 삽십은 직접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조건으로 거래를 해서 받은 액수입니다(26:14-16). 은 삼십과 관련 표현은 본 단락에 다섯 번 등장하는 어휘로서(3,5,6,7[이것으로],9; 스가랴 11:12-13),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마태가 사용하는 단순 과거형인 ‘돌려주었다’는 원래 돈이 나온 출처로 되돌려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돈은 원래의 출처로 돌아가게 되었으므로, 대제사장들이 일하던 당시의 성전은 무고한 자를 죽이는 데 필요한 돈을 저장한 곳이 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는 공간이 돼야 하지만, 대제사장들은 성소의 보고에서 무죄한 피의 값을 위해 은 삼십을 지불했고 그 돈이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돈을 지급한 대제사장들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하며, 무죄한 피의 값으로 얼룩진 성소에 심판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23:35). 또한,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미 책망하신 대로 성전은 더러운 이득을 챙기려고 모의하는 자들이 득실거리는 강도의 소굴이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21:13).

 

(2) 가룟 유다의 자살(4-5)

 

가룟 유다는 무죄한 자의 피를 넘김으로써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4).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유다의 책임이니 자신들이 더 이상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합니다. 유다는 돈을 던지고 나가서 목을 매달아 자살했습니다(행 1:16-20). 사도행전의 묘사와 조화를 시킨다면 유다는 목을 매었다가 땅에 떨어져 창자가 터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유다의 죽음을 최후 심판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택한 길이나 명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합니다. 유다의 행위(‘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는 앞에 나온 베드로의 행위(‘…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26:75)와 대조됩니다. 부활 이후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장면과도 대조됩니다. 이 장면 앞에 베드로의 배신 사건(26:69-75)이 나오는데, 베드로도 후회했으나,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 부활의 목격자와 증인이 됩니다.

 

뉘우침 혹은 후회는 회개를 위한 첫 단계입니다. 뉘우침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돌이키는 것을 뜻하는 회개는 죄를 짓기 이전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무죄한 피의 값(6-10)

죄의 대가든 생명의 값이든 궁극적으로 무언가를 남기게 됩니다. 당신은 무엇을 남기는 인생이 될 것입니까?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실수에 괴로워하는 가룟 유다에게 조금도 동정하지 않고 철저하게 외면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었습니다.

 

6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 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6-10)

 

대제사장들은 가룟 유다가 던진 은 삼십을 받고는 ‘피의 값’이라고 부릅니다. 은 삼십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대가였습니다.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판 것은 스가랴 11:13의 암시로 26:15에서 이미 언급되었고, 9절에 다시 나옵니다.

대제사장들은 이 돈을 성전의 보고에 두는 것은 율법의 규정에 맞지 않다고 보았습니다(12.2:14:4; 참조. 신명기 23:18: 역대상 22:8-9). 그런데 스가랴 11:13에는 ‘토기장이’이지만, 마태는 ‘보고’를 사용합니다. 토기장이는 토기를 만드는 사람 또는 성전에서 귀금속 헌물을 처리한 기술자를 뜻했기 때문에, 마태는 스가랴서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진 것을 성전의 보고에 던진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이 나그네들을 위해 산 땅은 ‘피의 밭’으로 불립니다(행 1:19). 이곳은 마태복음이 기록되기 전, 가룟 유다가 자살하기 이전에 이미 피의 밭으로 불렸습니다. 9-10절에서 마태는 대제사장들이 무죄한 피의 값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구입한(27:6-8) 사건을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9절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열 개의 성취 공식 중 마지막입니다(1:22; 2:15,17,23; 4:14; 8:17; 12:17; 13:35; 21:4).

마태는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의 값과 이 피의 값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스가랴 11:13을 예레미야 18, 32장과 함께 사용합니다. 유다의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은 스가랴 11:13과 가깝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 11:13). 그런데 마태는 스가랴 11:13을 인용하지만, 구원 역사의 의미를 예레미야서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때문에 ‘예레미야를 통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선물의 상자는 스가랴서인데 그 내용은 예레미야서인 것과 같습니다.

스가랴 11:13과 연결되는 예레미야 본문은 18-19, 32장입니다. 토기장이의 옹기와 밭을 구입하는 이야기는 각각 예레미야 18장과 32장에 나옵니다. 18장을 보면,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하는데,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만든 토기를 깨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듭니다(렘 18:4). 이는 하나님께서 한때 보살폈으나 악에서 돌이키지 않는 백성과 도성을 파멸시킬 자유를 갖고 계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어서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서 그것을 깨뜨립니다(렘 19:1,10). 이는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예고하기 위함입니다. 이 예언을 전하도록 예레미야가 보냄을 받은 장소는 힌놈의 골짜기입니다(렘 19:2). 한편, 32:6-15은 밭을 사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2:6-15에서 선지자가 밭을 구입한 시기는 바벨론 군대에게 예루살렘이 포위된 때였습니다. 바벨론의 땅이 되고 백성은 포로로 끌려갈 것인데도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근처의 밭을 산 행위(예레미야 32:8-14)는 언젠가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될 희망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게헨나)에서 아들들과 딸들을 우상 몰렉에게 제물로 바칠 정도로(예레미야 32:35) 가증하게 행동해서 심판을 받았으나,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회복해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전합니다(렘 32:37-44).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가 말한 이스라엘의 목자-왕으로 오셨지만, 백성은 은 삼십이라는 하찮은 가치로 예수님의 값을 매겼습니다. 값싸게 치러진 예수님의 값은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무죄한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악에 의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섭리 차원에서는 구원 역사를 담은 성경의 성취를 뜻합니다. 마태복음 27:9-10에서 예레미야 32장을 사용한 것은 무죄한 자의 피로 구입한 피의 밭은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회복될 것이라는 미래의 희망을 암시합니다(참조, 23:39, 27:52-53). 이 밭은 나그네들을 위한 용도였으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민족을 위한 것임을 암시합니다(28:19-20). 핏값으로 무덤을 산 사건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직후에 성전의 휘장이 열리고 무덤이 열려 잠자던 성도들의 몸이 일어나는 기적과도 관련됩니다. 인자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 즉 몸값으로 지불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20:28) 죄인들이 그 대가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핏값을 값싸고 하찮게 매깁니다. 그러나 그의 피는 어떤 사람이라도 회복시키는 값어치를 지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핏값을 싸게 여기거나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을 회복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세상의 소망, 가정의 소망, 나의 소망은 예수님의 보혈뿐입니다.


 

참된 회개는 후회를 포함하지만, 후회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했고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예수님께 큰 잘못을 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며 회개함으로써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회복되었지만, 유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목매어 죽음으로써 영원한 저주의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후회할 만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일단 돌이킬 수 없다면, 그로 인해 더 이상 후회할 만한 일들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를 가장 괴롭게 수치스럽게 만든 일은 무엇입니까? 더 큰 후회를 만들지 말고 큰 회복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돌아가길 바랍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