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25-03)
최후 심판을 가르치신 예수님
마태복음 25장 31-46절
인간에게 계시된 하나님 정체의 절정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존재 방식과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정체를 드러내며, 그의 형상대로 창조되고 또한 새롭게 창조될 인간의 정체를 반영합니다. 소자가 되신 인자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고, 그것을 통해 심판이 진행될 것입니다.
- 세 가지 비유가 끝나자 이야기는 인자의 도래 이후에 있을 심판에 초점을 맞춥니다. 인자가 영광 천사와 함께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습니다. 모든 민족이 인자의 오른편과 왼편으로 구분되자 준엄한 심판이 시작됩니다.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에게는 칭찬과 상급이 베풀어지지만, 왼편에 있는 악인들에게는 책망과 영원한 형벌이 주어집니다. 그 기준은 이 땅에서 종말을 어떻게 준비했느냐에 근거합니다.
최후 심판의 장면(31-32a)
예수님의 왕권은 최후의 심판 때, 그 절정에 이를 것입니다. 양의 염소를 나누듯, 의인과 악인을 나누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자와 영원한 불에 들어갈 자를 나누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의 판단대로 시행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변화될 모습을 가르치십니다.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a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31-32a)
인자는 천사들과 함께 와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십니다. 천사들의 역할이 본 단락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그들은 사람들을 재판장 앞에 불러 모으고 염소로 지목받는 악인들에게 형벌을 집행하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31-32절을 하늘 법정의 장면으로 이해한다면, 모든 민족이 그의 영광의 보좌 앞에 모이는 것은 이 심판이 최종적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 우주적 심판임을 의미합니다(참조, 16:17; 19:28).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인자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재판장 앞에 서게 됩니다. 본 주해에서 반복해서 언급한 대로 ‘보좌 앞’의 ‘앞’은 하늘 회의(‘하늘 궁정’, ‘하나님의 회의’ 등으로 불림) 또는 하늘 법정(하늘 궁정의 기능 중에서 법적 기능을 강조하는 용어)을 묘사하는 전치사입니다. 천상의 존재들은 하나님 앞이나 옆에, 재판받을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단 7:10,14; 마 10:32,33; 11:26; 18:14; 참조 5:16; 6:1; 26:70; 27:11).
본문은 인자가 재림할 때 일어날 마지막 재판 장면으로 24:29-31의 확장판입니다. 재판을 주재하는 존재는 목자와 왕으로 표현되는데, 그는 인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오실 때(성육신) 회복의 나라인 하늘나라(복음)를 가지고 왔으며, 두 번째 오실 때는(파루시아) 역사를 마감하고 최종 평결을 선언할 것입니다. 지상에서 머리 둘 곳 없이 고난을 겪으며, 결국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재림의 모습은 지상의 모습과 전혀 다릅니다. 인생의 운명은 인자에 대한 태도로 결정되며, 인생의 운명을 판결하는 분도 인자입니다. 모든 민족이, 곧 모든 사람이 최후 심판을 받기 위해 인자 앞에 서게 됩니다. 의인들과 악인들 모두 심판대 앞에 섭니다. 이런 점에서 재판은 보편적입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32b-46)
예수님께서는 악을 행한 자만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자’에게도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지 않으십니다. 마땅히 사랑할 자만 사랑하는 이방인이나 이웃의 범주를 자의대로 정하여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하는 거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자기 백성으로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32b…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32b-46)
인자의 최후 심판은 분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1차적으로는 의인들과 악인들을 분리하고, 2차적으로는 각각 복과 벌을 받게 됩니다. 인자가 목자와 왕의 역할을 맡습니다. 인자는 양들을 오른쪽에 세우고 염소들을 왼쪽에 세웁니다.
일반적으로 오른쪽이 선호되는 방향이었기에(예. 20:21) 양들은 오른쪽에 세워집니다. 예를 들어, 유대 묵시 문헌인 아브라함의 유언 12:12에서 보좌의 오른쪽에 있는 천사는 좋은 행위를, 왼쪽에 있는 천사는 죄를 기록합니다. 왼쪽은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곳입니다. 인자가 왕으로서 앉아서 재판하는 장면은 다니엘 7장과 시편 110:1의 결합입니다(34).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은 최후 심판 이후에 영원한 나라,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35-36절은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복을 받는 이유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긍휼입니다(5:7).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특권을 받고 다가오는 아버지의 나라를 상속받을 사람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긍휼의 행위로 입증해야 합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긍휼의 삶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확인받았습니다. 그런데 의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왕이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있었던 것과 그런 왕을 도왔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37-39). 왕은 의인들에게 그들이 ‘내 형제들의 작은 자들(소자들) 중 한 명’에게 행한 것이 곧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1차적으로는 ‘내 형제들’(12:48-49; 28:10), ‘작은 자들’(10:42; 18:6,10,14), ‘소자’(25:40)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라는 용어를 제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십니다(12:48-50; 28:10: 참조 요 20:17; 롬 8:29; 히 2:11-12).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므로 본문의 형제들은 제자들을 가리키며(12:49-50),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형제들로 부르십니다(28:10; 참조 고린도전서 6:2). 따라서 소자들은 일반적인, 사회적 의미 궁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 메신저들로서 재림이 오기까지 온 세상에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1세기나 초기 교회의 상황에서는 더욱 명확한 현실이었습니다. 땅에서 이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이지만, 하늘 법정에서는 높아질 것이며, 하늘나라를 상속하는 보상을 받습니다. 소자를 섬긴 것은 결국 종말의 왕을 섬긴 것입니다.
41-45절은 34-40절과 반대의 상황입니다. 복을 받는 의인들이 긍휼과 동정의 삶을 살았다면 악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영예를 위한 길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는 것이며, 그의 명령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악인들은 의인들이 한 말과 반대로 자신들은 주를 섬겼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지식과 신앙을 삶으로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왼쪽에 있는 자들이 형벌의 장소로 쫓겨나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왕은 악인들이 소자 한 사람에게 행하지 않은 것이 자신에게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작은 자는 사회에서 낮은 사람이므로 누구나 무시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10:4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첫째가 되려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18:5)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낮고 작은 자를 존중하고 환대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이 됩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첫째, 최후 심판에서 변론의 기회는 없습니다. 재판장 앞에서 변론해서 무죄를 선언 받거나 죄를 감면받을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없을 것입니다. 재판장 앞에 서는 순간에 그 운명은 이미 결정된 상태입니다. 지상에서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로 운명은 결정됩니다. 지상의 생애를 마친 후에 그 운명이 바뀔 가망은 없습니다.
둘째, 우리는 여기서 임마누엘의 주제를 볼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개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에 제한되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나와 함께하실 뿐 아니라 형제들과도 함께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인생이라고 인정하기 힘들 만큼 곤란한 사람에게도 임마누엘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그들과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함부로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셋째, 마태는 네 개의 강화를 모두 심판 장면으로 마치며(7:21-27; 13:37-43, 47-50; 18:23-35), 마지막 강화도 심판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왜 심판 장면으로 모든 강화가 끝나는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인자가 재판장이고 복을 준다는 점에서 본문은 교회에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오른쪽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서 크게 충격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이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다는 사실은 교회에 긴장감을 일으킵니다.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적 용어를 사용하며(‘주’, ‘섬기다’) 자신들의 입으로 주를 섬겼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들처럼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과 긍휼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최후 심판의 때에 큰 분리가 일어날 것입니다. 게다가 강화는 왼쪽 사람들의 말과 운명으로 끝남으로써 긴장감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모호한 상태로 끝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자들을 돌본 것으로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자들을 돌본 자들을 위해 창세부터 나라를 준비하였고, 마귀와 그 사람들을 위해서 영원한 부를 준비하셨습니다. 따라서 심판의 날은 작은 자들을 돌본 자들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이지만, 심판의 날은 작은 자들을 돌보지 않는 자들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날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면 그날에 있을 영생과 영벌의 심판도 믿어야 됩니다. 우리는 그 심판의 날에 어느 쪽에 있습니까? 믿음의 삶에 작고 연약한 지체를 돌봄으로 구원받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주의 백성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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