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마태복음(26-03)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26장 36-56절


자기 힘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최대 사명인 십자가에 죽으심을 감당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주도권조차 내려놓고 하나님의 최종적인 결정에 전적으로 맡기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 유월절 식사 후 겟세마네 동산으로 자리를 옮기십니다. 세 제자들을 따로 구별해 기도의 자리로 함께 나가십니다. 고난의 잔을 앞두고 심히 괴로워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제자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전혀 준비하지 못한 그때, ‘인자의 넘겨질 때’가 와버린 것입니다. 배신자 유다가 큰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의 공동체의 가장 깊숙한 공간까지 침투해 결국 예수님을 체포하기에 이릅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버려두고 모두 도망칩니다.

 

겟세마네의 기도(36-46)

믿음은 말로 장담하는 신앙이 아니라 기도의 무릎으로 순종하는 신앙만이 십자가를 지나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자기부정과 절대 의존의 기도 없이는 십자가의 순종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역 앞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있습니다.

 

36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37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8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9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40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1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2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3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4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5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6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36-46)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까지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마태복음(혹은 공관복음서)에서 겟세마네의 기도와 11:25-27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을 길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11:25-27의 기도가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와 대화를 반영한 것이었던 것처럼, 겟세마네의 기도 역시 고통 가운데 있는 아들의 절규를 통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함을 역설적으로 증언합니다.

 

(1) 겟세마네에 제자들과 함께 가신 예수님(36-38)

 

기도의 장면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따로 기도하러 가셨고, 슬퍼하고 고통하기 시작하셨습니다(37). 너무 슬퍼서 죽게 됐으니,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제자들에게 요청하십니다(38).

 

(2) 3번씩 기도하신 예수님(39-45)

 

본문에는 세 번의 기도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세 번의 반응이 나옵니다(36-41, 42-43, 44-46).

 

① 첫 번째 기도(36-41) : A 그는 갔다/기도했다(39) → B 당신이 원하는 대로(39) → C 그는 왔다/자는 것을 보았다(40) → 기도하라(41)

② 두 번째 기도(42-43) : A′ 그는 갔다/기도했다(42) → B' 당신의 뜻이 이뤄지게 하소서(42) → C' 그는 왔다/자는 것을 보았다(43)

③ 세 번째 기도(44-46) : A″ 그는 갔다/기도했다(44) → C″ 그는 왔다/그들은 자고 있었다(45) → D″ 아직도 자느냐?(45)

 

겟세마네 기도에서 보인 예수님의 모습, 곧 극도의 긴장감, 깊은 슬픔, 두려움은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낯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 자체를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받아들인 고통의 잔은 곧 진노의 잔으로서 구속사적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만 유일하게 주신 진노의 잔을 어느 사람에게도 주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인간도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 성도들은 구원처럼 큰 희생을 치르고 오는 것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둘째, 겟세마네의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본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편의 애가와 주의 기도처럼 이미 공식화된 말씀으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지만 순종을 택하십니다. 마태는 특히 아들의 순종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기도(‘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를 가르치셨고 공식이 된 그 기도를 겟세마네에서 직접 실천하는 순종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가르친 그대로 실천하셨고 실천하신 그대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만큼 주의 기도로 주어진 가르침, 곧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삶이 힘들다는 것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고통의 예수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라’(40)는 말씀은 제자의 길이 깨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겪은 슬픔과 고통을 견디지 못해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예고합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표출하신 감정은 제자도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슬픔과 고통은 의인들에게 없어야 하는 요소가 아니라 경건한 인생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구약에 나타난 고난 받는 의인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통당한 의인들처럼 겟세마네의 예수님께서는 탄식과 신뢰, 개인적 탄원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보여 주는데, 이런 조합은 의인들의 살아 있는 신앙을 입증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서 오는 탄식과 고통을 쏟아내지 않고 기계처럼 순종하는 인간을 만든 창조주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자들, 특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탄식과 애가를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탄식과 신뢰, 간청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분리되지 않으며 의롭게 살아가는 여정에서 언제나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슬픔, 고통, 두려움은 그가 죄의 종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가 없지만 참 인간이기에 당연히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유일하게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런 죽음이 가져다 주는 고통을 겪어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길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슬픔, 고통, 두려움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고난 받는 의인의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순종의 길을 가야 합니다.

넷째, 그리스도께서 느낀 감정은 신자들을 위한 위로가 됩니다. 주께서 감정을 그대로 토로하셨기에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역시 하나님 아버지께 나갈 때 감정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인생일지라도 수없이 다가오는 난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생길 때가 수없이 많습니다. 겟세마네의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통곡하고 감정을 토해내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통곡하셨으니 나도 통곡하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에서 하나님의 침묵이 곧 하나님의 고통을 대변합니다. 주의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대상을 아버지라고 가르치셨고 하늘 아버지의 돌보심을 반복해서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부르짖는 이 순간에 아버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버지의 반응은 왜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무반응을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침묵이 그의 부재를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겟세마네의 아들과 함께하시는 아버지는 단지 침묵하실 뿐입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고통을 더욱 강렬히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예수님께서는 무응답으로 여기지 않고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침묵이 곧 응답이며, 침묵 속에 아버지의 고통이 담겨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고통 없이 하나님의 종이 고난 받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통과 슬픔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 역시 고통과 고뇌 속에서 하나님께서 헛되이 위로의 아버지로 불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체포된 예수님과 도망하는 제자들(47-56)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다 알고서도 손해와 희생이 기다리는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기려면 하면 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지고, 버려지고, 낮아지는 것이 세상의 모략을 이기는 길일 때가 있습니다. 비폭력과 무저항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올바름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체포되는 장면에서 아무 저항 없이 무폭력을 볼 수 있습니다.

 

47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47-56)

 

가룟 유다는 누가 예수님인지 알리려고 입을 맞추고 군인들에게 예수님을 넘깁니다(47-50). 위기가 닥치자 제자 중 한 명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를 잘라버립니다(51). 예수님께서는 칼을 잡은 모든 사람은 칼로 망할 것이기 때문에 칼을 집어넣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들은 칼로 혁명운동을 하는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입니다(5:13-16). 칼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뤄지는 나라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5:43-48).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때문에, 칼로 고난의 길을 거부하는 시도를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청원해서 열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들을 보내주시도록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졌으나 그런 힘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53). 예수님께서는 역사의 마지막에는 실제로 천사들을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13:41; 24:29-31). 그러나 메시아로서 구원 역사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런 권한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권능과 특권을 행사하지 않고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을 담고 있는 구약 전체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입니다(54). 위급한 순간에 제자들은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본능적으로 도망합니다. 마가는 한 청년이 옷을 벗고 달아난 내용을 넣어서 당시의 공포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막 14:51-52). 제자들이 도망하는 것은 26:31에 예고된 내용이 성취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흩어진 양 떼를 회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배반과 군인들의 무력에 체포되신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아버지의 계획에 아들이 얼마나 철저히 순종하는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 때문에 자신의 권위와 권한을 사용하지 않고 도리어 수치를 당할 수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삶에 가까울 뿐 아니라 진정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칼을 사용하지 않는 방식은 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논리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선하듯이 그 뜻을 행하는 방식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을 결코 부인하지 않고 함께 죽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결국 주님을 부인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하고 맙니다. 그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도 피곤의 핑계로 기도에 게으르지는 않습니까? 정신을 차라고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도 제자들처럼 똑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